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Ⅵ 시간과 기억

Ⅵ 시간과 기억 · 72 / 100

작가노트의 시간

쓰고, 읽고, 다시 고친 시간

The Time of the Artist’s Notes

자화상 / Self-Portrait · 1944. 어두운 배경 앞의 젊은 얼굴을 그린 자화상. / A painted self-portrait of a young face against a dark background.
〈자화상〉 · 1944FŪDO 038

붓 옆에 놓인 문장

화가의 노트를 펼치면 그림의 해답부터 찾게 된다. 이 색은 무엇을 뜻하는가. 왜 이 선을 남겼는가. 그러나 노트에는 답을 얻기 전의 말도 있다. 다른 사람의 글을 옮겨 적은 자리, 뜻을 풀어본 문장, 다시 생각할 문제. 화가가 알고 있던 것뿐 아니라 알려고 했던 것이 남는다.

제공된 육필원고 판독본의 「형태론」에는 일본어 본문에 붉은 한글 풀이가 덧붙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앵그르의 그림과 형태에 관한 문장을 다른 언어로 다시 붙잡는 자리다. 한 면은 단일한 목소리로 쓰인 선언문보다, 읽고 옮기고 되묻는 여러 시간이 겹친 자리로 보인다.

이때 펜은 붓의 해설자가 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펜 앞에서 화가는 독자가 된다. 이미 배운 것을 다시 읽는 사람이 된다. 그림의 고유함을 지킨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남의 문장 앞에 오래 머물며 자신에게 필요한 물음을 찾는 일도 그 안에 있다.

한 권에 모인 서로 다른 시간

아르코예술기록원 서지는 『예술과 풍토: 선·색채·형태에 관한 작가 노트』를 변시지의 1988년 열화당 발행 단행본으로 기록한다. 출판연도는 책이 묶여 나온 시간을 알려준다. 그 안의 모든 문장이 같은 해에 처음 쓰였다는 뜻은 아니다.

구술에서 변시지는 그 책의 바탕을 강의를 위해 적어둔 노트와 이전의 글, 다시 쓴 내용으로 설명한다. 여러 미학 책을 읽으며 화가에게 필요한 대목을 추렸다고도 말한다. 한 권은 어느 날 완성된 사상의 증명서라기보다, 여러 자리에서 필요했던 문장들이 다시 만난 결과였다.

영어 제목에서 풍토는 Fūdo로 남긴다. 여기서 쓰는 뜻은 날씨만이 아니라, 빛과 땅과 생활의 방식 속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조건이다. 이 풀이가 책 전체의 내용을 대신하지는 않는다. 제목과 서지, 구술과 본문의 판본을 각각 확인하며 그 말의 범위를 읽어가야 한다.

적은 손과 말한 사람

어떤 문장이 화가의 손으로 적혀 있다고 해서 그 생각의 최초 저자까지 화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형태론」 판독본은 앵그르에 관한 설명과 앵그르의 말로 소개된 부분, 그 옆의 한글 풀이를 함께 전한다. 이 층위를 구별해야 읽는 화가와 말하는 화가를 모두 만날 수 있다.

이 구별은 노트의 가치를 낮추지 않는다. 무엇을 골라 적었는가도 중요하다. 남의 많은 말 가운데 한 줄을 남긴 행위에는 관심의 방향이 있다. 다만 선택했다는 사실과 전적으로 동의했다는 판단도 같지 않다. 옮겨 적은 문장은 때로 더 생각해볼 문장일 수 있다.

본문과 여백의 풀이가 서로 다른 때에 쓰였을 가능성은 열어두되, 잉크색만으로 정확한 날짜를 정하지 않는다. 스캔 파일명의 날짜 역시 곧 집필일은 아니다. 기록의 시간이 불분명한 곳에 후대의 연대를 넣는 대신, 그 불분명함 자체를 다음 독자가 확인할 수 있게 남긴다.

문장은 그림 앞에서 다시 시험된다

노트가 있으므로 그림을 한 뜻으로 고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색에 관한 한 문장이 있다고 해도 모든 작품의 색이 그 문장을 똑같이 실행하지는 않는다. 글을 읽고 그림으로 돌아가면 맞아드는 부분과 남는 부분이 함께 생긴다. 바로 그 어긋남이 새로운 질문을 만든다.

「미술비평」 판독본에는 제작 과정의 비교와 판단, 수정과 가필이 자기비평의 계기가 된다는 논의가 있다. 비평은 완성된 그림 밖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만드는 중에도 이미 보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다. 화가는 손을 움직이면서 동시에 그 손이 남긴 것을 가늠한다.

이 대목을 모든 작품의 제작법을 설명하는 법칙으로 바꿀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질문의 도구로 삼을 수 있다. 이 선은 무엇을 더 분명하게 하는가. 덧칠은 무엇을 잃게 하는가. 노트가 그림을 대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 앞의 판단을 더 조심스럽게 만든다.

두 전통을 하나의 문장에 가두지 않다

동서양의 만남을 말할 때에도 어느 쪽이 무엇을 뜻하는지 먼저 물어야 한다. 이론서의 분류, 수업에서 쓰던 설명, 화가가 실제로 본 그림은 같은 자료가 아니다. 일본어 문장을 한글로 풀어 적은 면은 두 문명이 한 번에 합쳐진 증거보다, 언어 사이를 건너간 구체적인 읽기의 흔적이다.

구술에서 변시지는 풍토를 생각하던 일을 제주 정착 이후에만 묶지 않는다. 일본에 있을 때부터 한국에서 살아갈 생활과 풍습을 생각했다고 회고한다. 이것을 정밀한 집필 연표로 삼을 수는 없지만, 생각이 한 번의 귀향 순간에 모두 탄생했다는 서사를 다시 보게 한다.

하나의 독창적인 화풍에는 여러 경로가 들어올 수 있다. 읽은 책과 본 그림, 가르치며 고친 설명, 생활 속에서 새로 느낀 것이 한꺼번에 같은 방향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그 경로들을 지우고 순수한 출발점 하나만 남기면, 오히려 화가가 자신의 언어를 만든 일이 작아진다.

가르치기 위해 읽는 시간

변시지는 미학의 모든 체계를 설명하려 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화가에게 직접 필요한 것은 미가 무엇인지, 예술이 무엇인지 묻는 대목이었다고 회고한다. 필요한 몇 줄을 찾는다는 말에는 독서의 양보다 독서의 목적이 드러난다. 그는 그림 곁에 놓을 수 있는 문장을 찾았다.

강의용 문장은 누군가에게 건네기 위해 쓰인다. 혼자 이해했다고 생각한 말도 남에게 설명하려면 다시 고쳐야 한다. 한 낱말이 너무 크면 예를 찾아야 하고, 익숙한 구분이 작품에 맞지 않으면 물음을 바꾸어야 한다. 가르치는 자리에는 생각을 쉽게 닫지 못하게 하는 다른 사람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노트의 시간은 개인의 내부에만 쌓이지 않는다. 학생에게 건넬 설명과 다시 돌아오는 물음이 그 안에 들어간다. 실제 수업의 대화를 새로 지어 넣지 않아도, 강의를 위해 적었다는 구술은 충분한 방향을 준다. 한 사람이 쓴 면에도 타인에게 이르는 자리가 있다.

명언보다 먼저 앞뒤의 말을

짧은 말은 오래 남는다. 그러나 짧게 만든 말이 모두 화가가 실제로 한 말은 아니다. 설명문을 한 줄로 압축한 뒤 따옴표를 붙이면, 해석이 육성의 자리를 차지한다. 좋은 뜻의 문장이라도 누가 썼는지 흐려지면 다음 독자는 그 위에 잘못된 연구를 세울 수 있다.

구술에는 질문과 머뭇거림, 연도를 고쳐 말하는 순간이 함께 남아 있다. 이를 모두 덜어내면 읽기는 매끄러워지지만 기억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원문과 읽기 쉬운 편집문을 구별해 두면 둘을 함께 지킬 수 있다. 소박한 말의 힘은 그 말을 더 단호하게 꾸미는 데서 생기지 않는다.

영어로 옮길 때에도 같은 거리를 지킨다. 그럴 수 있다는 말은 그렇다는 말이 되지 않아야 한다. 누군가의 생각을 적어둔 문장은 화가 자신의 격언으로 바뀌지 않아야 한다. 번역은 목소리를 크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다른 독자도 그 목소리의 크기를 가늠하게 하는 일이다.

자화상 옆에 펼친 노트

변시지는 자화상도 남겼다. 제공 도록에 1944년 작품으로 수록된 얼굴을 보면서 노트를 읽으면, 글이 그림 대신 만든 유일한 자화상이라는 말은 필요 없어지게 된다. 얼굴로 자신을 그린 일과 문장으로 생각을 더듬은 일이 함께 있다. 서로 다른 두 자료가 한 사람을 넓혀 보여준다.

노트는 완성된 자아를 봉인한 상자가 아니다. 다른 저자의 말이 들어오고, 자신의 말이 수정되고, 후대의 판독이 다시 더해지는 자리다. 그것을 잘 보존한다는 것은 한 목소리로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느 말이 어느 자리에서 왔는지 되짚을 길을 남기는 일이다.

판독본의 한 면에 일본어 문장이 있다. 그 옆에 한글 풀이가 붙어 있다. 다음 줄을 읽기 전에, 두 문장 사이에 잠시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