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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비평/풍토는 풍경이 아니다/논증 IV/제8장

학술판 · 풍토는 풍경이 아니다 · 제8장 · 13 / 34

풍경에서 풍토로

논증 IV · 풍토는 시선과 거리의 체계다

〈흔들리는 수평선〉과 체화된 시선

변시지, 〈흔들리는 수평선〉, 2005
도판 10. 변시지, 〈흔들리는 수평선〉, 2005. 작품 100 · FŪDO 007 작품 보기 →

1흔들리는 수평선이라는 문제

변시지가 2005년에 그린 〈흔들리는 수평선〉에는 절벽 위의 노인, 말 한 마리, 먼바다의 배 한 척이 있다.1 노인은 지팡이를 짚었고, 말은 그 곁에 서 있다. 바다와 하늘은 한 가지 누런색의 긴 붓질로 이어진다. 그런데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제목이다.

수평선은 이름부터 '수평', 곧 반듯하게 누운 선을 뜻한다. 그러나 이 그림의 제목은 그 선이 흔들린다고 말한다.

무엇이 흔들리는가. 논증 IV의 첫 장인 이 장은 이 물음에서 출발해, 논증 IV와 V의 바탕이 되는 '풍토'라는 개념을 정리한다.

2풍경의 시점과 풍토의 관계성

선원근법이 화면의 수평선을 관람자의 눈높이에 연결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르네상스 이후의 원근법은 하나의 고정된 시점을 통해 세계를 시각적으로 조직하는 장치였고, 그 시점은 보는 주체와 보이는 세계 사이의 거리를 전제한다.

서론에서 말했듯, 와쓰지 데쓰로는 『풍토』에서 이러한 주체-객체 분할만으로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고 보았다.2 추위는 먼저 '저기 있는 대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몸을 움츠리게 하는 경험으로 도래한다. 풍토는 외부 자연의 목록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자기 밖으로 열려 있는 방식, 곧 공간적·사회적·역사적 관계의 구조다.

아우구스탱 베르크가 fūdo를 climate보다 milieu로 옮기는 편이 적절하다고 본 이유도 여기에 있다.3 milieu는 자연환경과 인간 주체가 서로를 구성한다는 관계성을 강조한다. 이 책에서 '풍토'는 바로 이 상호구성적 의미에 가깝게 사용한다.

메를로퐁티의 지각 현상학은 이 논의를 시각의 문제로 옮기는 데 도움을 준다. 몸은 세계를 밖에서 관찰하는 투명한 장치가 아니라, 세계 속에서 위치를 갖고 움직이며 보는 주체다. 세잔을 다룬 그의 논의에서 지각은 완성된 세계를 복사하는 행위가 아니라 세계가 지각 속에서 형성되는 과정으로 다루어진다.

이 관점에서 〈흔들리는 수평선〉의 '흔들림'을 단순한 자연현상의 묘사로 환원할 필요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고정된 시점이 느슨해지고, 바람 속에 놓인 몸의 불안정한 위치가 화면의 선과 붓질에 반영되는 방식이다.

풍경이 '바라본 세계'라면, 풍토는 '살아진 세계'다. 전자는 장면을 조직하는 시점의 문제이고, 후자는 몸과 장소가 서로를 형성하는 관계의 문제다.

이 구분은 절대적이지 않다. 풍경도 살아진 경험을 품고, 풍토도 시각적으로 구성된다. 다만 이 책은 변시지의 제주 회화를 설명할 때 '무엇이 보이는가'만큼 '어떤 조건 속에서 보게 되었는가'를 묻기 위해 두 개념을 전략적으로 구별한다.

따라서 '풍토는 풍경이 아니다'라는 명제는 풍경을 부정하는 선언이 아니다. 풍경을 형성하는 지각의 조건, 몸의 습관, 생활의 시간까지 분석의 범위를 확장하자는 제안이다.

이 확장은 환경결정론과도 다르다. 제주가 화가의 선과 색을 자동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오랜 훈련을 거친 몸이 제주라는 조건에 대응하면서 기존의 조형 언어를 다시 조직했다.

〈흔들리는 수평선〉은 그 재조직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수평선은 고정된 좌표라기보다 몸과 세계 사이의 관계가 흔들리는 자리로 변한다.

3형식의 변화: 선, 색, 눈높이

몸에 들어온 풍토는 그림의 형식을 바꾼다. 여기서 형식은 선과 색, 그리고 구도처럼 화면을 이루는 짜임을 가리킨다.

첫째, 선이다. 제주 시기의 여러 작품에서 선은 곧게 뻗기보다 휘고 기운다. 소나무는 휘고, 사람의 몸은 낮아진다. 검은 선은 사물의 테두리를 그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화면 여러 곳에서 같은 방향으로 힘이 쏠리게 만든다. 그래서 이 선은 테두리이면서 바람을 견디는 사물의 자세처럼 보인다. 몸에 들어온 풍토가 선이 되었다고 읽을 수 있다. 이 선은 제10장에서 따로 다룬다.

둘째, 색이다. 제주 시기의 여러 그림은 마른 풀잎색으로 모인다. 가을 들판의 마른 풀을 떠올리게 하는 누런색이다. 하늘과 땅과 바다가 한 가지 색 안에 놓인다. 이 색은 지역을 소개하는 표지로 쓰이지 않는다. 서로 다른 사물들을 같은 바람과 햇볕 아래 함께 놓는 색이다. 지역의 특징을 내세우는 색과 삶의 조건인 '풍토'의 차이가 여기서 드러난다. 이 구별은 제10장과 이론적 중간결론에서 이어진다.

셋째, 눈높이다. 수평선이 눈높이라면, 흔들리는 수평선은 흔들리는 눈높이다. 제목이 말하는 '흔들리는 수평선'은 한자리에 고정된 눈높이를 의심하게 한다. 관람자도 편안한 관찰자의 자리에만 머물기 어렵다. 화면에는 자로 그은 듯한 수평선이 없다. 바다와 하늘은 한 색의 긴 붓질로 이어지고, 붓질의 결이 바뀌는 자리가 수평선의 몫을 한다. 그 자리는 곧지 않다.

4단일 시점과 신체의 시선

세잔은 흔히 근대 미술의 문을 연 화가로 꼽힌다. 그의 그림에서 탁자나 그릇은 조금씩 비뚤어 보인다. 메를로퐁티는 그것을 단순한 실수로 보지 않았다.4 앞 절에서 말했듯 그에게 세계는 다 만들어진 채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고 느끼는 동안 형성된다. 그는 세잔이 바로 그 과정을 붙잡으려 했다고 읽었다.

세잔 이후 근대 미술의 한 흐름은 '세상이 어떻게 생겼나'보다 '몸을 가진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보나'를 묻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수평선도 이 물음과 함께 놓을 수 있다.

변시지는 일본에서 원근법을 제대로 배운 화가였다. 그가 배운 것을 버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제주의 삶 속에서 그 규칙을 조금씩 느슨하게 풀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단일 시점에서 벗어난 화면은 서양 근대만의 물음이 아니다. 동아시아의 산수화도 본래 하나의 시점에 묶이지 않았다. 11세기 중국 송나라의 화가 곽희는 산을 보는 방식을 고원, 심원, 평원 셋으로 나누었다.5 올려다보고, 깊숙이 바라보고, 같은 높이에서 멀리 보는 방식이다. 그러니 변시지의 그림을 '서양 원근법에서 벗어난 것'으로만 설명할 필요는 없다.

5풍토와 모더니즘

풍토는 '무엇을 그리느냐'보다 '어떻게 보게 되느냐'를 바꾼다. 이 책이 따라가려는 것은 풍토를 그리는 일이 아니라, 풍토 속에서 달라진 눈과 몸이 그림의 형식을 바꾸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회화사 안에 놓으려면 모더니즘이라는 말이 필요하다. 모더니즘은 19세기 후반 이후 나타난 여러 미술의 흐름을 가리킨다. 이 흐름들은 기존의 재현 방식과 회화의 규칙을 새롭게 묻기 시작했다. 무엇을 그리느냐만큼 어떻게 그리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변시지도 그 물음을 이어 갔다. 그는 제주로 가면서 전통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다. 이미 배운 근대 회화의 방법을 제주라는 삶의 조건 속에서 다시 짰다. 원근은 느슨해지고, 색은 줄고, 선은 거칠어지고, 빈 곳은 넓어졌다.

그는 1975년 서울에서 제주로 옮겨 정착했고, 2013년까지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다. 제주에 온 지 열세 해 되던 1988년, 그는 자기 책 『예술과 풍토』의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제주는 이제 나에게 있어 예술적 공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미적 근거이자 방법이 된 셈이다."6 그에게 제주는 바라보는 경치이기 전에, 보고 그리는 방식을 정한 조건이었다. 그의 화면에 자로 그은 수평선이 없는 것도 이 조건과 함께 읽을 수 있다.

이 장은 '풍토는 풍경이 아니다'라는 명제를 지각과 형식의 문제로 정리했다. 풍토가 형식이 되는 데에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는 점은 제4장 사례 B에서 보았다. 다음 장은 먼바다의 배 한 척을 따라, 섬에서 산 눈이 거리를 어떻게 조직하는지 살핀다.

수평선은 흔들리지 않는다. 바람 속에 선 사람에게만 흔들린다.

주와 출처

  1. ↑ 〈흔들리는 수평선〉(2005). 화면은 byunshiji.org 작품 100의 도판(FŪDO 007)으로 확인.
  2. ↑ 와쓰지 데쓰로(和辻哲郎), 『풍토 — 인간학적 고찰(風土―人間學的考察)』(岩波書店, 1935).
  3. ↑ Augustin Berque, "Milieu et logique du lieu chez Watsuji," Revue Philosophique de Louvain 92, no. 4 (1994): 495–507.
  4. ↑ 모리스 메를로퐁티, 「세잔의 의심(Le doute de Cézanne)」(1945), 『의미와 무의미』에 수록.
  5. ↑ 곽희(郭熙), 『임천고치(林泉高致)』 「산수훈(山水訓)」.
  6. ↑ 변시지, 『예술과 풍토』(열화당, 1988), 「책 머리에」(1988년 봄, 제주 화실에서). 같은 문장을 제4장에서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