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풍토 · 제3부 · 10 / 24
여백
들어가며
세 번째 문이다.
여백은 그리지 않은 자리다.
그런데 그리지 않은 것과 비워 둔 것은 다르다.
그리지 못한 자리는 미완이다.
비워 둔 자리는 형식이다.
어떻게 구별하는가.
나머지를 본다.
그린 부분이 정확하면 비운 것이다.
그린 부분이 흐리면 못 그린 것이다.
여백은 그 옆의 것이 증명한다.
이 부의 물음은 이것이다.
빈 곳은 무엇의 자리인가.
빈 곳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물음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빈 곳은 대개 무엇이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의 자리이거나 이미 떠난 것의 자리다.
혹은 있는데 보이지 않는 것의 자리다.
이 부에는 네 사람이 선다.
다른 부보다 하나 많다.
여백은 종류가 많기 때문이다.
색은 한 가지 방식으로 온다.
눈에 들어온다.
여백은 여러 방식으로 생긴다.
비워 둔 여백.
팔대산인이다.
붓을 대지 않아서 생긴 자리다.
채워진 여백.
프레드 윌리엄스다.
땅으로 다 채웠는데 비어 보이는 자리다.
지워진 여백.
터너다.
그렸다가 녹아 없어진 자리다.
만들어진 여백.
카푸어다.
설계해서 만든 자리다.
앞의 셋은 조건에서 나왔다.
종이와 땅과 공기가 그렇게 만들었다.
마지막 하나는 조건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카푸어가 이 부의 반대 증인이다.
여백은 풍토 없이도 만들 수 있다.
그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야 앞의 셋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