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풍토는 형식을 낳는다/제3부 · 여백

화가와 풍토 · 제10장 · 14 / 24

카푸어, 만들어진 비움

제3부 · 여백

하나

벽에 원이 하나 있다.

붉다.

아주 붉다.
지금까지 본 어떤 붉음보다 붉다.

타마요의 붉음에는 흙이 섞여 있었다.
뭉크의 붉음은 흘러 있었다.

이 붉음은 섞이지 않았다.

순수하다.

가까이 가면 표면이 가루다.

칠한 것이 아니라 뿌린 것이다.
안료 가루가 그대로 얹혀 있다.

만지면 묻을 것이다.

원의 가운데가 이상하다.

더 어둡다.

깊이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림자인지 구멍인지 알 수 없다.

한 걸음 옆으로 가 본다.

옆에서 보아도 같다.
그림자라면 각도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달라지지 않는다.

구멍이다.

벽을 파고 그 안을 어둡게 만든 것이다.

깊이를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다른 방에는 바닥에 검은 원이 있다.

카펫처럼 보인다.
납작해 보인다.

실제로는 바닥을 파낸 구멍이다.

납작해 보이도록 만든 구멍이다.

이런 작업을 사람들은 종종 그림자로 착각한다.

착각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져 있다.

여기서 이 장이 시작된다.

이 비움은 정확하다.

둘

애니시 카푸어는 1954년에 인도에서 태어났다.

뭄바이였다.

아버지는 인도 사람이고 어머니는 이라크에서 온 유대인 집안이었다.

1973년에 런던으로 갔다.

스무 살 무렵이다.

그곳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그곳에 남았다.

지금도 런던에서 일한다.

초기에 그는 안료 가루로 작업했다.

작은 형태들을 만들고 그 위에 색 가루를 뿌렸다.
바닥에도 뿌렸다.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

아주 진한 색이었다.

인도에는 색 가루를 쓰는 오랜 습속이 있다.

의례에 쓰고 이마에 찍고 뿌린다.

그의 색이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다음에 그는 비움으로 갔다.

돌을 깎아 구멍을 냈다.
벽을 파고 바닥을 팠다.

안쪽을 아주 어둡게 만들어 깊이를 지웠다.

거울도 썼다.

오목한 거울, 볼록한 거울.

거대한 거울 조각을 도시의 광장에 세운 것도 있다.

사람들이 그 앞에서 자기를 본다.

한동안 그는 아주 검은 재료를 두고 이야기의 중심에 섰다.

빛을 거의 다 먹는 검은 물질이었다.
그가 미술 분야에서 그것을 쓸 권리를 독점했다.

다른 작가들이 문제를 제기했다.

색을 한 사람이 독점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이 논쟁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이 책은 판정하지 않는다.

다만 기록해 둔다.

그의 작업에서 색과 비움은 만들어지는 것이고, 만들어지는 것은 소유될 수 있다.

셋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그의 비움은 설계된 것이다.

앞의 세 사람을 돌아보자.

팔대산인의 여백은 종이였다.
붓을 대지 않으면 생기는 자리다.

윌리엄스의 여백은 땅이었다.
같은 것이 넓게 이어지면 생기는 자리다.

터너의 여백은 공기였다.
습기가 형태를 녹이면 생기는 자리다.

세 여백 다 조건에서 나왔다.

화가가 무엇을 하기 전에 이미 그 땅에 있던 것이다.

카푸어의 비움은 그렇지 않다.

계산되었다.

각도를 재고 깊이를 정하고 반사율을 맞춘다.

정확히 그만큼 어두워야 깊이가 사라진다.
조금 밝으면 구멍으로 보이고 조금 어두우면 얼룩으로 보인다.

그 사이의 좁은 자리를 찾아 맞춘다.

이것은 공학에 가깝다.

그리고 어느 땅의 비움도 아니다.

런던의 비움이 아니고 뭄바이의 비움도 아니다.

어디에 놓아도 같다.

이것이 이 부의 반증이다.

여백은 풍토 없이도 만들 수 있다.

여기서 두 가지가 따라온다.

첫째, 재료와 형식이 갈라진다.

그의 안료는 인도의 것에 닿아 있다.

그런데 그는 인도에 살지 않는다.

재료는 한 땅에서 오고 형식은 다른 데서 온다.

이 분리가 그의 자리다.

뒤에 볼 고갱과 닮았지만 다르다.

고갱은 남의 땅에 가서 그 땅을 그린다.

카푸어는 자기 땅의 재료를 가지고 남의 땅에서 산다.

방향이 반대다.

둘째, 비움이 지각의 문제가 된다.

풍토의 여백은 어디인지를 말한다.

이 여백은 종이다.
이 여백은 안개다.
이 여백은 바람이다.

카푸어의 비움은 그런 것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림자인가 구멍인가.
평면인가 깊이인가.

눈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지각의 문제다.

그러니 그의 작업은 이 책의 틀 바깥에 있다.

바깥에 있는 것을 안으로 끌어들이지 않는 편이 정직하다.

다만 하나는 말할 수 있다.

뿌리 없음도 조건이 된다.

앞 부에서 추사를 보았다.

풍토를 차단한 자리에서 형식이 나왔다.

카푸어의 경우는 다른 종류다.

두 땅에 걸쳐 있고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조건이다.

그리고 그 조건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비움이 나왔다.

조건이 없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그런 것이다.

넷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이 대면은 앞의 것들과 성격이 다르다.

닮은 것을 찾기 어렵다.

한 사람은 조각을 만들고 다른 사람은 그림을 그렸다.
한 사람은 정밀하고 다른 사람은 손으로 그었다.

그러니 차이부터 보자.

만들어진 비움과 남겨진 여백이다.

카푸어의 비움은 완벽하다.

빈틈이 없다.
계산이 맞아 있다.

변시지의 여백은 어설프다.

붓이 지나간 자리가 남아 있고 색이 고르지 않다.

완벽한 비움 앞에서 사람은 무엇을 보는가.

자기를 본다.

거울이면 얼굴이 보이고 구멍이면 자기 눈이 틀렸다는 것을 안다.

어느 쪽이든 자기에게 돌아온다.

어설픈 여백 앞에서 사람은 무엇을 보는가.

바람을 본다.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저쪽을 본다.

한쪽은 안으로 돌리고 다른 쪽은 밖으로 보낸다.

두 번째 차이가 있다.

카푸어의 작업은 어디에 놓아도 된다.

런던에 놓아도 되고 시카고에 놓아도 되고 서울에 놓아도 된다.

장소가 작품에 들어가 있지 않다.

그래서 어디서나 읽힌다.

변시지의 화면은 제주를 데리고 다닌다.

서울에 걸려도 제주고 도쿄에 걸려도 제주다.

장소가 작품 안에 들어가 있다.

그래서 그 장소를 알면 더 읽힌다.

여기서 1부의 뭉크를 다시 떠올려도 좋다.

「절규」는 어느 땅의 이야기도 아니어서 어느 땅에서나 읽혔다.

같은 구조다.

장소 없는 예술은 넓게 가고 장소 있는 예술은 깊게 간다.

넓게 가는 것과 깊게 가는 것 중 무엇이 나은지는 물을 필요가 없다.

둘 다 있어야 한다.

세 번째 차이가 있다.

카푸어의 비움은 사람을 안에 들이지 않는다.

들여다볼 수는 있다.
들어갈 수는 없다.

들어가면 그것은 이미 비움이 아니다.

변시지의 여백에는 사람이 이미 들어가 있다.

노인이 그 안에 서 있다.

바람이 부는 그 자리에 사람이 있다.

빈 곳에 사람이 없는 화면과 빈 곳에 사람이 있는 화면.

이 차이가 이 부에서 가장 큰 차이다.

여백에 사람이 없으면 여백이 주인이 된다.
여백에 사람이 있으면 사람이 주인이 된다.

카푸어의 비움은 그 자체로 작품이다.

변시지의 여백은 노인을 서 있게 하기 위한 자리다.

목적이 다르다.

다섯

붉은 원 가운데가 어둡다.

깊이를 알 수 없다.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 정확하게 있다.

먼 섬의 화면에는 빈 들이 있다.

들여다보면 바람이 있다.
그리고 노인이 서 있다.

아무것도 없지 않다.

두 비움은 서로 다른 것이다.

만든 비움과 남긴 여백.

빈 곳은 무엇의 자리인가.

이 부에서 네 가지 답이 나왔다.

없어진 것의 자리.
같은 것이 되풀이된 자리.
지워진 것의 자리.
만들어진 자리.

세 번째 문은 이렇게 닫힌다.

빈 곳에도 종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