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풍토 · 제4부 · 15 / 24
문법
들어가며
네 번째 문이다.
이 문이 가장 어렵다.
앞의 셋은 눈에 보였다.
색은 보인다.
선도 보인다.
여백도 비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법은 보이지 않는다.
문법은 사물이 아니라 관계다.
무엇을 어디에 놓는가.
무엇을 크게 하고 무엇을 작게 하는가.
어느 것을 앞에 두고 어느 것을 뒤에 두는가.
이런 것들은 화면에 있으면서 보이지 않는다.
말의 문법과 같다.
우리는 말을 하면서 문법을 생각하지 않는다.
어순을 따로 정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나온다.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익힌 것이다.
그래서 문법은 가장 깊이 있는 자리다.
색은 바꿀 수 있다.
물감을 바꾸면 된다.
선도 바꿀 수 있다.
붓을 바꾸면 된다.
문법은 바꾸기 어렵다.
몸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부의 물음은 이것이다.
무엇을 어디에 놓는가.
그리고 그 놓는 방식이 어디에서 왔는가.
이 문 앞에 세 사람이 선다.
피카소는 문법을 부수고 다시 짰다.
레비탄은 지평선의 높이 하나로 뜻을 정했다.
고갱은 배치가 정확했으나 소속이 없었다.
그래서 고갱이 이 부의 반대 증인이다.
문법이 그 땅에서 나오지 않은 경우다.
앞의 부들에서 반대 증인은 명제의 한 자리를 흔들었다.
뭉크는 색이 안에서 나온다고 했다.
추사는 풍토를 차단해도 형식이 나온다고 했다.
카푸어는 여백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고갱은 다른 것을 말한다.
그 땅에 살아도 그 땅의 문법이 나오지 않을 수 있다.
가장 아픈 반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