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풍토 · 제12장 · 17 / 24
레비탄, 지평선의 높이
제4부 · 문법
하나
가로로 넓은 화면이다.
아래쪽에 길이 있다.
넓은 흙길이다.
바퀴 자리가 두 줄로 나 있다.
그 옆으로 좁은 길이 또 하나 붙어 있다.
사람이 걸어서 만든 길이다.
길은 화면 왼쪽 아래에서 시작해 오른쪽 위로 멀어진다.
멀어지면서 좁아진다.
그리고 지평선에서 사라진다.
지평선이 낮다.
화면의 아래 삼분의 일쯤에 있다.
그 위는 다 하늘이다.
하늘이 화면의 대부분이다.
구름이 있다.
무겁다.
회색과 흰색이 섞여 있다.
비가 올 것 같기도 하고 방금 그친 것 같기도 하다.
들판은 마르고 누렇다.
풀이 낮다.
멀리 아주 작게 무엇이 있다.
교회의 지붕 같기도 하고 나무 같기도 하다.
사람이 없다.
길이 있는데 걷는 사람이 없다.
이 화면에서 가장 이상한 것이 그것이다.
길은 사람이 걸어서 생긴다.
걷지 않으면 길이 없어진다.
그러니 이 길에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 없을 뿐이다.
둘
이사크 레비탄은 1860년에 태어났다.
지금의 리투아니아 땅이다.
당시 러시아 제국의 서쪽이었다.
유대인 집안이었다.
가난했다.
모스크바로 옮겨 갔다.
열 몇 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그다음에 아버지도 떠났다.
혼자 남았다.
회화학교에 다녔다.
수업료를 낼 수 없어 면제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먹을 것과 잘 곳이 없던 때가 있었다.
학교 안에서 몰래 잔 적도 있다고 전해진다.
그림에는 재주가 있었다.
풍경을 그렸다.
러시아의 들과 강과 숲을 그렸다.
작가 체호프와 친구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작업을 알았다.
1892년에 그는 모스크바에서 쫓겨났다.
유대인을 도시에서 내보내는 조치가 있었다.
이름이 알려진 화가였는데도 그랬다.
시골에 머물다 나중에 돌아왔다.
그 무렵에 그는 한 길을 그렸다.
시베리아로 가는 길이었다.
유배되는 사람들이 걸어서 간 길이다.
그 그림에 사람을 그리지 않았다.
길만 그렸다.
1900년에 세상을 떠났다.
마흔이었다.
심장이 좋지 않았다.
짧게 살았고 많이 그렸다.
셋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넓고 평평한 땅에서는 지평선의 높이가 문법이 된다.
러시아의 많은 곳은 평평하다.
산이 없다.
시야를 막는 것이 없다.
그러면 화면에서 정할 것이 하나로 줄어든다.
지평선을 어디에 둘 것인가.
이것 하나가 그림의 뜻을 정한다.
지평선을 높이면 땅이 넓어진다.
땅의 일이 중심이 된다.
걷고 일하고 사는 일이다.
지평선을 낮추면 하늘이 넓어진다.
하늘의 일이 중심이 된다.
날씨와 시간과 지나감이다.
그는 대개 낮췄다.
하늘을 크게 두었다.
여기서 8장의 윌리엄스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윌리엄스도 넓은 땅의 화가였다.
그런데 그는 지평선을 없앴다.
같은 넓은 땅에서 한 사람은 지평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은 지웠다.
왜 다른가.
하늘이 다르기 때문이다.
호주 내륙의 하늘은 대개 밝고 한결같다.
구름이 적고 색이 변하지 않는다.
말이 없는 하늘이다.
말이 없으면 그릴 것이 없다.
그러니 지운다.
러시아의 하늘은 변한다.
구름이 두껍게 몰려오고 계절이 크게 바뀐다.
겨울이 길고 봄이 갑자기 온다.
하늘에서 일이 일어난다.
일이 일어나는 곳은 크게 그린다.
하늘이 말을 하는 땅과 하늘이 말이 없는 땅.
같은 넓이가 다른 문법을 낳는다.
여기서 세 가지가 따라온다.
첫째, 지평선의 높이가 뜻이 된다.
이것은 아주 작은 결정이다.
선 하나를 위로 올릴지 아래로 내릴지의 문제다.
그런데 그 결정이 그림의 전부를 정한다.
문법이 그런 것이다.
작고 눈에 안 보이는데 전체를 정한다.
둘째, 길이 시간이 된다.
길은 공간이면서 시간이다.
저 끝까지 가려면 며칠이 걸린다.
그러니 길을 그리면 며칠을 그린 것이 된다.
그리고 그 길이 유배의 길이면 시간의 뜻이 달라진다.
돌아오지 못하는 시간이 된다.
셋째, 사람 없이 사람을 말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가장 강한 방법이다.
길에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보인다.
없는 것으로 있는 것을 말한 것이다.
3부에서 우리는 여백을 보았다.
여기서는 여백이 아니라 부재다.
빈 자리가 아니라 없는 사람이다.
그리려면 그릴 수 있었다.
그리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리면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고, 그리지 않으면 걸어간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된다.
넷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먼저 닮은 것을 본다.
두 사람 다 한 줄의 선을 화면의 주인으로 삼았다.
레비탄은 지평선이고 변시지는 수평선이다.
두 화면 다 그 선 하나가 위아래를 나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그 선을 낮게 두는 일이 많다.
하늘을 크게 둔다.
두 번째 닮음이 있다.
두 사람 다 유배를 다루었다.
레비탄은 유배자들이 걸어간 길을 그렸다.
그리고 그 자신이 도시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
남의 유배를 그리면서 자기 자리를 그린 것일 수 있다.
변시지의 뿌리 문장은 이렇다.
삶은 유배요, 예술은 축복이다.
제도의 유배가 아니라 삶의 조건으로서의 유배다.
두 사람 다 쫓겨난 자리에서 그렸다.
세 번째 닮음이 있다.
두 사람 다 마른 색을 썼다.
러시아의 마른 들과 제주의 마른 풀.
누런 기가 도는 낮은 색이다.
이제 차이를 보자.
가장 큰 차이는 그 선의 성질이다.
레비탄의 지평선은 땅의 끝이다.
땅이 계속 이어지다가 눈에 안 보이는 자리다.
그 자리까지 걸어갈 수 있다.
걸어가면 그 자리에 또 다른 지평선이 있다.
변시지의 수평선은 바다의 끝이다.
걸어갈 수 없다.
배를 타야 하고, 배를 타도 그 선에 닿지 않는다.
대륙의 끝과 섬의 끝이 이렇게 다르다.
대륙의 지평선은 약속이다.
저쪽에 무엇이 있고 갈 수 있다.
가는 데 며칠이 걸리더라도 갈 수 있다.
섬의 수평선은 벽이다.
저쪽에 무엇이 있는데 갈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가 겹친다.
제주에는 이어도 이야기가 있다.
바다 어딘가에 있다는 섬이다.
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화백은 그 섬에 관한 글을 손으로 남겼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구술사, 2004–2005, 23–26쪽)
그러니 그 수평선은 벽이면서 약속이다.
갈 수 없는데 저쪽에 무엇이 있다고 믿는다.
이 겹침이 섬의 조건이다.
대륙의 유배는 걸어가는 것이고 섬의 유배는 머무는 것이다.
두 번째 차이가 있다.
레비탄은 사람을 지웠다.
길만 남기고 사람을 뺐다.
변시지는 사람을 세웠다.
빈 들에 노인 하나를 두었다.
방법이 반대다.
한쪽은 없애서 말하고 다른 쪽은 남겨서 말한다.
없애면 모두의 이야기가 되고 남기면 한 사람의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결과가 비슷해진다.
레비탄의 빈 길에서 우리는 걸어간 사람들을 본다.
변시지의 노인에게서 우리는 남은 사람들을 본다.
한 사람을 그렸는데 여럿이 보인다.
얼굴이 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 차이가 있다.
두 사람이 가진 시간의 길이가 달랐다.
레비탄은 마흔에 세상을 떠났다.
변시지는 여든일곱까지 살았다.
제주에서만 서른여덟 해를 그렸다.
짧은 시간에 이룬 것과 긴 시간에 이룬 것은 성질이 다르다.
짧으면 밀도가 생기고 길면 층이 생긴다.
레비탄의 화면은 한 번에 온다.
변시지의 화면은 여러 번 와야 온다.
여기에 우열은 없다.
주어진 시간이 달랐다.
다섯
길이 멀어지다가 사라진다.
걷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걸어간 사람들이 보인다.
먼 섬의 화면에는 수평선이 있다.
그 위에 조각배가 하나 떠 있다.
타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한쪽에는 길이 있고 사람이 없다.
다른 쪽에는 배가 있고 사람이 없다.두 화면 다 떠난 사람의 자리다.
한 줄의 선이 그것을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