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풍토 · 제13장 · 18 / 24
고갱, 소속 없는 배치
제4부 · 문법
하나
여자 둘이 앉아 있다.
땅에 앉아 있다.
몸이 크다.
팔과 다리가 굵다.
옷은 붉거나 흰 천이다.
배경을 보자.
납작하다.
나무가 있는데 나무처럼 서 있지 않다.
무늬처럼 놓여 있다.
땅이 분홍이다.
실제 땅은 분홍이 아니다.
풀은 붉은 기가 돈다.
깊이가 없다.
앞의 인물과 뒤의 나무가 같은 평면에 있다.
굵은 윤곽선이 형태를 둘러싸고 있다.
색면과 색면 사이에 검거나 파란 선이 있다.
앞 장의 피카소 화면과 닮았다.
윤곽선과 평면.
그런데 다른 점이 있다.
피카소는 형태를 쪼갰다.
여기서는 쪼개지 않았다.
형태가 온전하다.
그냥 납작하다.
인물의 자세를 보자.
한 사람이 정면을 본다.
우리를 본다.
눈이 크고 표정이 없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
다른 한 사람은 옆을 본다.
두 사람 다 가만히 있다.
움직이지 않는다.
시간이 멈춘 것 같다.
둘
폴 고갱은 1848년에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 몇 해를 페루에서 보냈다.
어머니 쪽 친척이 있었다.
프랑스로 돌아와 자랐다.
젊어서 배를 탔다.
상선과 해군에 있었다.
그다음에 파리에서 증권 일을 했다.
돈을 벌었고 결혼했고 아이가 여럿이었다.
취미로 그림을 사고 그렸다.
서른 몇 살에 그 일을 그만두었다.
그림만 하기로 했다.
경제가 나빠져 일자리가 흔들린 것도 이유였다.
가족과 멀어졌다.
브르타뉴로 갔다.
프랑스 서쪽의 시골이다.
퐁타방이라는 마을에 화가들이 모여 있었다.
거기서 그의 방식이 만들어졌다.
이것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납작한 색면, 굵은 윤곽선, 실제와 다른 색.
이 문법이 브르타뉴에서 나왔다.
타히티에 가기 전이다.
한동안 아를에서 고흐와 함께 지냈다.
두 달쯤이었다.
잘 끝나지 않았다.
1891년에 타히티로 갔다.
마흔셋이었다.
두 해쯤 있다가 프랑스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잘 되지 않았다.
1895년에 다시 떠났다.
이번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더 먼 섬으로 옮겼다.
1903년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셋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그는 그 땅에 있었다.
그런데 그 땅이 그의 문법을 낳지 않았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
이 책은 풍토가 형식을 낳는다고 말한다.
고갱은 십 년 넘게 남태평양에 살았다.
그곳에서 죽었다.
머문 시간으로 보면 충분하다.
그런데 그의 문법은 그곳에서 나오지 않았다.
브르타뉴에서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납작한 색면과 굵은 윤곽선.
그것을 가지고 갔다.
타히티는 그 문법에 새 소재를 주었다.
문법을 준 것이 아니다.
이 구별이 이 장의 핵심이다.
소재와 문법은 갈라진다.
야자수를 그리면 소재가 남국이다.
그런데 야자수를 어떻게 놓는가는 다른 문제다.
서장에서 우리는 지역색과 형식을 갈랐다.
지역색은 소재의 문제라고 했다.
고갱은 그 구별이 필요한 이유를 보여 준다.
그는 소재를 바꿨고 문법을 바꾸지 않았다.
왜 바꾸지 않았는가.
견디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장의 두 번째 논지다.
그는 그 땅을 찾아갔다.
찾아가는 사람에게는 선택이 있다.
가고 싶어 갔고, 돌아오고 싶어 돌아왔고, 다시 가고 싶어 다시 갔다.
두 번 왔다 갔다 했다.
견딤에는 선택이 없다.
바람이 부는 곳에 사는 사람은 바람을 고르지 않는다.
고를 수 없는 것이 몸을 바꾼다.
고를 수 있는 것은 몸을 바꾸지 않는다.
여기서 조심할 자리가 있다.
그가 그린 타히티는 실제 타히티가 아니었다.
그가 간 때 그곳은 이미 오래 식민지였다.
교회가 있었고 관청이 있었고 병이 퍼져 있었다.
그가 찾던 손대지 않은 낙원은 없었다.
그는 없는 것을 그렸다.
혹은 있었으면 하는 것을 그렸다.
그러니 그의 화면은 그 땅의 그림이 아니라 그가 바라던 것의 그림이다.
이것은 이 책이 판정할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논의가 계속되는 자리다.
다만 구조는 적어 둘 수 있다.
바라본 것과 겪은 것은 다르다.
바라본 땅은 아름답게 나오고 겪은 땅은 마르게 나온다.
여기서 세 가지가 따라온다.
첫째, 소재와 문법은 분리된다.
소재는 옮길 수 있다.
문법은 옮기기 어렵다.
그런데 반대도 성립한다.
문법을 가지고 가서 새 소재에 씌울 수 있다.
그러면 그 땅의 그림처럼 보이지만 그 땅의 그림이 아니다.
둘째, 체류는 견딤이 아니다.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선택의 유무가 견딤을 정한다.
십 년을 살아도 언제든 떠날 수 있으면 견딘 것이 아니다.
셋째, 소속 없이도 위대한 형식이 나온다.
이것을 분명히 말해야 한다.
그의 문법은 진정한 성취다.
납작한 색면과 굵은 윤곽선은 이후 회화를 바꿨다.
앞 장의 피카소도 그것을 보았다.
그가 없었으면 다음 세대의 그림이 달랐을 것이다.
풍토 없이도 큰 형식이 나온다.
2부의 추사가 같은 자리에 있었다.
다만 방식이 다르다.
추사는 풍토를 차단해서 갔다.
고갱은 풍토를 옮겨 다니면서 갔다.
한쪽은 안으로 닫고 다른 쪽은 밖으로 열었다.
두 길 다 이 책의 명제 바깥에서 성립한다.
바깥이 있다는 것을 아는 편이 정직하다.
넷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이 대면이 이 책에서 가장 날카롭다.
두 사람 다 섬으로 갔다.
두 사람 다 중년에 갔다.
고갱은 마흔셋에 타히티로 갔다.
변시지는 마흔아홉에 제주로 갔다.
두 사람 다 그전에 다른 곳에서 화가였다.
그런데 결과가 정반대다.
첫째, 남의 섬과 자기 섬이다.
고갱은 남의 섬에 갔다.
그곳에 그의 조상이 없다.
그곳 말을 다 알지 못했다.
변시지는 자기 섬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에 떠났다가 마흔네 해 만에 돌아왔다.
돌아온 것이지 간 것이 아니다.
둘째, 찾으러 간 것과 받아들이러 간 것이다.
고갱은 낙원을 찾으러 갔다.
없는 것을 찾으러 간 것이다.
찾는 사람은 실망한다.
찾던 것이 없으면 다시 떠난다.
그래서 그는 더 먼 섬으로 옮겼다.
변시지는 찾으러 간 것이 아니다.
돌아갈 곳이 거기였다.
받아들이는 사람은 실망하지 않는다.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기대가 없으면 있는 것이 보인다.
셋째, 색이 반대다.
고갱의 타히티는 밝다.
분홍과 붉음과 초록이 세다.
변시지의 제주는 낮다.
마른 풀잎색이다.
같은 섬인데 왜 이렇게 다른가.
하나는 바라던 섬이고 하나는 사는 섬이다.
바라던 섬은 색이 화려하다.
가 보지 못한 곳은 언제나 화려하다.
사는 섬은 색이 낮다.
매일 보는 것은 화려할 수 없다.
이것이 이 장의 가장 중요한 대비다.
넷째, 인물의 방향이 반대다.
고갱의 인물은 우리를 본다.
정면으로 앉아 눈을 크게 뜨고 있다.
보여지기 위해 놓인 자리다.
누가 보는가.
그 그림을 살 파리의 사람들이다.
변시지의 노인은 등을 보인다.
혹은 고개를 숙인다.
보여지지 않는다.
보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은 자리다.
보여주는 인물과 등 돌린 인물.
그 차이가 두 화가의 자리를 말한다.
한 사람은 그 섬에서 그림을 보내야 했다.
다른 사람은 보낼 곳이 없었다.
다섯째, 끝이 다르다.
고갱은 돌아가려 했다가 돌아가지 못했다.
먼 섬에서 세상을 떠났다.
변시지는 돌아왔고 남았다.
같은 섬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쪽은 못 돌아간 것이고 다른 쪽은 돌아온 것이다.
이제 위계를 두지 않고 말해야 한다.
고갱이 그 땅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그의 잘못만은 아니다.
속하는 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태어난 곳이 아니면 속하기 어렵다.
그리고 속하지 않은 자리에서도 그림은 나온다.
다만 다른 그림이 나온다.
바라본 그림이 나온다.
바라본 그림에도 진실이 있다.
찾지 못한 사람의 진실이다.
그것도 사람의 일이다.
다섯
여자 둘이 앉아 있다.
땅이 분홍이고 나무가 무늬처럼 서 있다.
한 사람이 우리를 본다.
그 눈은 무엇을 묻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림을 그린 사람은 그 섬에서 죽었다.
돌아가려 했으나 돌아가지 못했다.
먼 섬의 화면에는 노인이 등을 보이고 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은 그 섬에서 죽었다.
돌아와서 남았다.
두 사람 다 섬에서 끝났다.
한 사람은 못 돌아가서 남았고 다른 사람은 돌아와서 남았다.
무엇을 어디에 놓는가.
놓는 손이 그 땅에 속해 있는지가 문법을 정한다.
네 번째 문은 이렇게 닫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