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 WORKS · FŪDO · LANGU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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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 비평

화가와 풍토

— 세계 회화의 다시 읽기
ARTSHIJI 재단 · 변시지 탄생 100주년 · 1926–2026

바람의 뼈를 그린 화가, 변시지권두 소개

삶은 유배요, 예술은 축복이다.

변시지는 1926년 제주 서귀포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에 가족과 함께 바다를 건너 일본 오사카로 갔다.

소년 시절 그는 씨름을 하다 다리를 크게 다쳤다. 오래 누워 있어야 했던 그의 곁에는 종이와 연필이 있었다.

그림은 그렇게 찾아왔다. 소리 없이, 아픈 자리로 왔다.

지팡이 하나.
붓 하나.
그는 평생 이 둘을 놓지 않았다.

오사카미술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일본의 사실주의 화단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47년 니텐에 입선하고, 이듬해 광풍회전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젊은 화가 변시지는 보이는 것을 정확하게 그리는 법을 익혔고, 사물과 인간을 끝까지 바라보는 성실함을 자신의 회화적 토대로 삼았다.

1957년 귀국한 그는 서울에서 비원과 부용정을 그렸다. 잎 하나, 기와 한 장까지 놓치지 않는 정밀한 그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정원이라 해도 그것은 그가 태어난 풍토가 아니었다. 고요한 화면의 안쪽에서, 오래 잊고 있던 제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75년, 쉰 살의 변시지는 제주로 돌아왔다. 여섯 살에 떠난 섬으로 돌아오는 데 마흔네 해가 걸렸다.

사람들은 제주행을 유배처럼 여겼지만, 그에게 제주는 귀환의 자리였다. 강렬한 햇빛은 흰 모래와 풀과 집의 고유한 색을 지웠다. 모든 것은 햇볕에 바래고, 바람에 마르고, 마침내 하나의 색으로 남았다.

그것이 변시지의 마른 풀잎색이다.

마른 풀잎색은 단순한 황색이나 향토적인 색채가 아니다. 그 안에는 제주 햇빛의 강도와 바람의 시간, 떠난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과 견디며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이 들어 있다. 그것은 한 섬의 색이면서, 한 인간이 오랜 유배 끝에 발견한 존재의 색이다.

변시지는 폭풍을 그렸다. 바다가 뒤집히고, 나무가 눕고, 초가가 낮아졌다. 그의 폭풍은 자연현상만을 묘사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대의 억압과 개인의 상처,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맞서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의지였다. 그는 고통을 설명하거나 고발하는 대신, 그것을 선과 색으로 바꾸었다.

그림 속 사람들은 대부분 몸을 굽히고 있다. 말을 끄는 사람, 밭을 가는 사람, 지팡이를 짚고 바람 속에 선 노인. 그들의 등은 휘어 있고 고개는 숙여져 있다.

그러나 숙인 몸은 패배한 몸이 아니다.
그것은 폭풍을 견디는 자세이며,
먼저 떠난 사람들을 기억하는 자세이다.

1945년 그가 그린 고개 숙인 여인의 곡선은 말년의 제주 노인에게까지 이어졌다. 변시지는 평생 한 인간의 몸을 그린 것이 아니라, 시대와 풍토를 견뎌낸 사람의 자세를 그렸다.

말 한 마리, 까마귀 한 마리, 작은 배 한 척, 낮은 돌담과 흔들리는 수평선. 만년의 그는 화면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지워 갔다. 마지막에는 꼭 있어야 할 것만 남았다.

노인 하나.
말 한 마리.
까마귀 한 마리.
그리고 바람.

변시지의 그림에서 제주는 배경이 아니다. 인간의 몸과 정신을 형성하는 조건이며, 모든 존재가 함께 살아가는 풍토이다.

그는 제주를 그렸지만, 그의 그림이 말하는 것은 제주에만 머물지 않는다. 떠남과 귀환, 상처와 침묵, 고독과 존엄, 그리고 끝내 삶을 견디어 내는 인간의 보편적인 자세에 관한 것이다.

2013년, 그의 붓은 멈추었다. 그러나 그림은 여전히 바람 속에 서 있다.

삶은 유배요,
예술은 축복이다.화가와 풍토
↑ 차례

서장 — 풍토가 형식을 낳을 때

1. 두 개의 창

기차를 타고 낯선 나라를 지나는 사람이 있다.

창밖으로 들판이 흐른다. 그는 그것을 본다.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사진을 찍고, 지나간다. 그에게 그 들판은 풍경이다.

같은 들판에 한 사람이 서 있다. 그는 그 흙에서 났고, 그 바람에 마르고, 그 볕에 그을렸다. 들판은 그의 창밖에 있지 않다. 살갗에 닿아 있다. 그에게 그 들판은 풍경이 아니다. 풍토다.

풍경은 보는 것이고, 풍토는 사는 것이다. 여행자는 풍경을 지나가지만, 거주자는 빛과 바람, 노동과 기억 속에서 장소와 서로를 바꾼다.

이 글은 두 번째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 장소를 오래 살아내며, 그 장소가 요구하는 변화에 자기 몸과 기억과 기술로 응답한 화가들의 이야기.

2. 풍토라는 말

풍토(風土)는 바람 풍에 흙 토로 쓴다.

하늘에서 움직이는 것과 땅에 머무는 것. 인간은 그 사이에서 산다. 바람은 얼굴에 닿고, 흙은 발밑에 있다.

그러나 풍토는 기후와 지리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 땅에서 일하고 집을 짓고, 상처를 기억하고 죽은 이를 애도해 온 방식까지 포함한다. 자연과 생활, 역사와 기억이 서로 얽혀 인간이 세계를 만나는 자리 전체다.

일본의 철학자 와쓰지 데쓰로는 이 말로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다시 생각했다. 인간은 완성된 채 자연 앞에 서는 존재가 아니라, 추위와 습기와 건조 속에서 이미 자기를 발견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 존재라고.

풍토는 인간 바깥에 놓인 배경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가 서로를 드러내는 관계의 장이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거주의 문제로 물었다. 사람은 공간에 놓인 물건이 아니라, 땅 위에 하늘 아래 머물며 관계를 이루는 존재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영토를 고정된 소유물이 아니라 떠남과 되돌아옴, 해체와 재구성이 거듭되는 과정으로 보았다. 이 글에서 장소 역시 혈통이나 소유의 이름이 아니라, 몸과 문법이 실제로 변화하는 관계의 이름이다.

이 글은 그 사유들 곁에 한 문장을 더 놓는다.

풍토는 형식을 낳는다.

3. 명제

그림에는 형식이 있다. 색, 선, 여백, 문법, 물성. 화가는 이것들을 자유롭게 고르는 사람처럼 보인다. 양식의 진열대에서 하나를 집어 드는 사람처럼.

이 글의 명제는 그 자유가 언제나 조건 속의 자유라는 데서 시작한다. 깊은 형식은 취향만으로 선택되지 않는다. 풍토는 어떤 형식을 가능하게 하고, 다른 형식을 어렵게 하며, 화가에게 응답을 요구한다.

서구 원근법으로 한눈에 붙잡히지 않는 호주의 대지에서 한 화가는 오래된 의례의 점과 선을 현대 회화의 거대한 언어로 확장했다. 끝없이 젖은 평원 앞에서 한 러시아 화가는 인간을 물러나게 했다. 바다를 밀어내고 자로 나눈 땅에서 한 네덜란드 화가는 수평과 수직의 격자에 도달했다. 마른 빛이 형태의 뼈를 드러내는 남프랑스에서 한 화가는 붓질을 벽돌처럼 쌓았다.

이들 가운데 다수는 중심에서 배운 문법을 지니고 한 장소 앞에 섰다. 그 문법은 그대로 적용되지 않았고, 화가의 몸과 기억, 장소의 빛과 역사 사이에서 변형되었다. 형식은 자연의 명령도 화가의 독단도 아니다.

풍토와 인간이 서로를 바꾸는 자리에서 태어난 응답이다.

그러므로 이 글의 장들은 비슷한 물음을 다른 땅에서 되묻는다. 무엇을 배웠는가. 그 문법은 어디서 흔들렸는가. 화가는 어떤 형식으로 응답했는가. 같은 인과를 열다섯 번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질문이 얼마나 다른 답을 낳는지 보려는 것이다.

4. 다시 쓰기가 아니라 다시 읽기

미술사는 오랫동안 하나의 중심을 가진 이야기였다. 파리에서 태어난 현대가 뉴욕으로 건너가고, 나머지 세계는 그 빛을 받아 뒤늦게 밝아지는 이야기.

지난 수십 년, 이 이야기는 이미 무너져 왔다. 미술관들은 변방이라 불리던 곳의 화가들을 다시 걸었고, 학자들은 복수의 모더니즘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현대는 한 곳에서 태어나 퍼진 것이 아니라, 여러 땅에서 저마다 태어났다고.

이 글은 그 다시 쓰기에 싸움 하나를 보태려는 글이 아니다. 다만 그 흩어진 사실들에 하나의 물음을 놓으려 한다. 왜 저마다의 현대는 저마다 다른 얼굴을 가졌는가.

답은 하나의 원인으로 닫히지 않는다. 작가가 배운 전통과 시대, 개인의 기억도 형식을 만든다. 그러나 서로 다른 장소가 같은 문법을 서로 다르게 굽히고 변형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복수의 모더니즘은 중심의 양식이 여러 지방에 복제된 결과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조건 속에서 각기 다른 응답이 태어난 결과다. 이 글이 미술사에 보태려는 것은 새 지도가 아니라, 그 지도를 읽는 하나의 원리다.

5. 세 사람의 증인

명제에는 반례가 필요하다. 이 글은 세 사람을 대조의 증인으로 부른다.

추사 김정희. 그는 제주에 유배되어 세한도를 남겼다. 그러나 세한도에 제주의 바람은 불지 않는다. 그 겨울은 마음속의 겨울이다. 풍토 없이도 위대한 그림은 태어난다 — 정신에서. 추사는 이 글의 명제가 전부가 아님을 증언한다. 형식은 땅에서만 오지 않는다.

뭉크. 그의 하늘은 사람과 함께 운다. 그러나 그 방향은 이 글과 반대다. 안의 폭풍이 밖으로 쏟아진 것이지, 밖의 풍토가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다. 뭉크는 경계선을 증언한다. 요동치는 화면이 모두 풍토의 화면은 아니다.

고갱. 그는 풍토를 찾아 지구 반대편의 섬으로 갔고 폴리네시아에서 오랜 시간을 살았다. 그러나 체류의 길이가 곧 거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는 식민지 정착민의 위치에서 섬을 바라보았고, 실제의 공동체보다 자신이 꿈꾸던 낙원을 화면에 투사했다. 고갱은 이 글의 윤리적 조건을 증언한다. 장소는 오래 머문다고 소유되는 것이 아니다. 풍토가 형식으로 이어지려면, 화가는 장소를 자기 욕망의 배경으로 만들지 않고 그 장소에 의해 변화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정신으로도 위대한 그림은 태어나고, 안의 폭풍이 밖의 세계를 바꾸기도 하며, 타지에서 오래 작업할 수도 있다. 이 셋을 인정하고 나면 이 글이 말하는 거주의 뜻이 선명해진다. 여기서 ‘자기 땅’은 반드시 태어난 땅이 아니다. 오래 살아내고 책임 있게 관계를 맺으며, 자기 문법이 바뀌는 것을 허락한 장소다.

6. 이 글의 길

글은 다섯 개의 방을 지난다. 색, 선, 여백, 문법, 물성. 그림을 이루는 다섯 통로다. 여기서 여백은 동아시아 회화의 고유 개념만을 뜻하지 않는다. 형상이 물러난 자리에서 빛과 거리, 침묵과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비교 미학적 용어다. 각 방의 세 화가는 완전한 회화 세계를 지니지만, 이 글은 그 세계에서 풍토의 작용이 가장 선명한 한 통로를 골라 읽는다.

고흐의 노랑은 아를의 태양과 만나 뜨거워졌고, 레베론의 화면은 카리브의 지나친 빛 앞에서 거의 희어졌다.

응와레이의 선은 그가 속한 알할커의 문화적 지식과 이어지고, 셋슈의 여백은 안개의 열도에서 젖었다.

세잔의 붓질은 프로방스의 마른 빛 앞에서 쌓였고, 키퍼의 납과 재는 독일의 역사와 물질적으로 맞물렸다.

열다섯 장소, 열다섯 응답.

다섯 방을 지난 뒤, 그 통로들이 한 화면 안에서 어떻게 교차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한 사람이 있다. 앞의 열다섯 화가가 풍토로부터 한 요소만을 얻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의 회화는 저마다 완전한 세계다.

다만 이 글은 고흐에게서 색을, 셋슈에게서 여백을, 키퍼에게서 물성을 중심으로 보았다. 변시지에 이르면 이 다섯 분석의 통로가 한 화면에서 유난히 단단하게 맞물린다.

제주의 바람은 변시지의 색과 선, 여백과 문법, 화면의 물성을 함께 바꾸었다. 마른 풀잎색, 흔들리는 검은 선, 바람이 지나는 빈 자리, 수평선의 구조가 노인과 조랑말과 까마귀와 초가와 조각배의 도상과 한 언어를 이룬다. 폭풍을 그려도 그 언어이고, 고요를 그려도 그 언어다. 이 글은 변시지가 제주의 풍토를 이 다섯 형식 요소로 통합해 세운 독자적 회화 언어를 제주화(濟州畵)라 부르려 한다. 이 명명은 통용되는 사실이 아니라 이 글이 제안하는 비평적 개념이다.

변시지는 다른 화가들의 정점이 아니다. 다만 이 글이 따라온 다섯 갈래가 한 언어 안에서 만나는 통합적 사례다. 그 교차의 자리가 바람의 섬에 있다.

7. 문 앞에서

이제 첫 방으로 들어간다.

들어가기 전에, 창밖의 들판을 한 번 더 본다.

저 들판이 누군가에게는 풍경이고, 누군가에게는 풍토다.

이 글의 화가들은 모두 두 번째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그림 앞에 서면, 우리도 잠시 두 번째 사람이 된다.

↑ 차례
제1부 · 색

빈센트 반 고흐 — 타오르는 노랑

1. 여름의 들판

남프랑스의 여름 들판이 있다.

밀은 익어 노랗고, 해바라기는 키를 넘게 자라고, 하늘은 흔들림 없이 파랗다. 태양은 북쪽의 태양과 다르다.

어루만지지 않고 내리누른다. 그리고 이 땅에는 바람이 있다. 미스트랄. 론강 골짜기를 타고 내려와 며칠씩 그치지 않고 부는 북풍. 사이프러스가 그 바람에 평생 비틀리며 자란다.

빛은 태우고, 바람은 흔드는 땅.

1888년, 한 네덜란드 사내가 이 땅에 도착했다. 서른다섯. 화가가 된 지 팔 년째. 그때까지 그의 그림은 이 들판과 아무 상관이 없는 색을 하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노랑이 아니라, 그 반대의 색에서 시작한다.

2. 감자의 색, 파리의 색

그의 첫 팔레트는 북쪽 땅의 것이었다.

네덜란드 뉘넌. 낮은 하늘, 젖은 들, 이탄 늪의 흙. 그는 그 마을에서 베 짜는 사람들과 감자 캐는 농부들을 그렸다. 1885년의 〈감자 먹는 사람들〉. 화면 전체가 흙빛이다. 어둡고, 무겁고, 축축하다. 훗날 그는 그 얼굴들을 흙 묻은 감자의 색으로 그리고 싶었다고 썼다. 첫 풍토가 준 첫 색이었다. 젖은 북쪽 땅은 젖은 어둠을 주었다.

1886년, 그는 파리로 갔다. 동생 테오가 있는 도시. 거기에 시대의 문법이 있었다. 인상파와 점묘파. 빛을 순간으로 쪼개고, 색을 병치하는 법. 그의 팔레트가 두 해 만에 밝아졌다. 파리에서 그는 이백 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파리는 그를 지치게 했다. 1888년 2월, 그는 그 도시를 떠났다. 남쪽으로. 더 강한 빛을 찾아서.

북쪽 땅이 첫 색을 주었고, 파리가 문법을 주었다. 이제 세 번째 땅이 기다리고 있었다. 앞의 둘을 다 태워 버릴 땅이.

3. 남쪽

아를의 빛은 파리의 빛과 달랐다. 인상파의 빛은 아른거리는 빛이다. 물 위에서, 나뭇잎 사이에서, 잘게 떨리는 빛. 그 빛은 잘게 쪼갠 붓질에 담겼다. 그러나 프로방스의 태양은 아른거리지 않는다. 정면으로 타오른다. 밀밭 전체가 한 덩어리의 노랑으로 서 있고, 그림자는 칼로 자른 듯 짙다. 쪼개서 담을 수 있는 빛이 아니었다.

그는 문법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색은 더 이상 관찰의 기록이 아니었다. 본 것보다 더 강하게, 느낀 만큼 세게. 물감은 튜브에서 나온 그대로 두껍게 발렸다. 파리에서 배운 병치는 남았으나, 그 위로 남쪽의 강도가 얹혔다.

1888년 5월 1일, 그는 라마르틴 광장 2번지의 방 네 칸을 빌렸다. 월세 십오 프랑. 그는 그 집의 바깥벽을 노랗게 칠하게 했다. 노란 집. 화가들이 모여 사는 남쪽의 화실을 그는 꿈꾸었다.

집만 노란 것이 아니었다. 그해 여름, 그의 화면 전체가 노랑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4. 노랑

1888년 8월, 그는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었다.

고갱이 온다는 소식에, 손님의 방을 해바라기 그림으로 채우려 했다. 1888년 8월 21일 또는 22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문장이 있다. “나는 마르세유 사람이 부야베스를 먹듯 신나게 그리고 있다. 큰 해바라기를 그리는 일이라면, 너도 놀라지 않겠지.”

해바라기 연작은 회화사에서 낯선 그림이다. 노랑 꽃을, 노랑 화병에, 노랑 바탕 위에 그렸다. 노랑 위의 노랑 위의 노랑. 색이 명암의 도움 없이, 대비의 도움도 거의 없이, 저 혼자 화면을 세운다. 이것은 단순한 관찰의 기록이 아니다. 이 땅의 태양이 요구한 강도에 화가가 자기 감각으로 응답한 결과다. 북쪽에서 감자의 색을 받아 적던 정직함으로, 그는 이제 남쪽의 태양을 번역했다. 땅이 바뀌자 색이 바뀌었지만, 변화는 장소와 화가가 함께 만든 것이었다.

밀밭이, 추수가, 씨 뿌리는 사람이, 밤의 카페가 차례로 노랑을 입었다. 아를의 열다섯 달 동안 그는 그때까지의 어느 시기보다 빠르고 뜨겁게 그렸다. 그가 남긴 유화 가운데 상당수는 생의 마지막 두 해에 집중되어 있다. 남쪽이 그의 속도였고, 노랑이 그의 언어였다.

같은 여름, 바람도 화면으로 들어왔다. 미스트랄에 비틀린 사이프러스, 흔들리는 밀. 그의 붓질이 바람의 결을 따라 굽이치기 시작했다. 빛이 색을 주었다면, 바람은 선을 주고 있었다.

작품 보기 · 〈해바라기〉 1889, 반고흐미술관(암스테르담)

5. 소용돌이

노란 집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해 10월 고갱이 왔고, 12월에 두 사람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착란 속에서 그는 자기 왼쪽 귀의 일부를 잘랐다. 이듬해 5월, 그는 스스로 생레미의 요양원에 들어갔다.

요양원의 창에서 그는 밤하늘을 그렸다. 〈별이 빛나는 밤〉. 하늘 전체가 거대한 소용돌이로 돈다.

아를에서 바람이 가르쳐 준 굽이치는 선이, 이제 안의 폭풍과 만나 하늘을 휘젓는다. 이 화면 앞에서 밖의 바람과 안의 바람을 가르는 일은 부질없어 보인다. 두 바람은 하나가 되어 있었다.

1890년 5월, 그는 북쪽의 오베르로 옮겼다. 칠십 일 동안 칠십여 점을 그렸다. 밀밭 위로 낮게 나는 까마귀들. 그리고 7월 27일, 들에서 돌아온 그는 스스로 입힌 총상으로 이틀을 앓다가,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서른일곱이었다.

십 년의 화가 인생이었다. 그 십 년 동안 그는 세 개의 땅을 지났고, 장소와 배움이 바뀔 때마다 색도 달라졌다. 젖은 북쪽의 흙빛, 파리의 밝아진 팔레트, 그리고 남쪽의 노랑. 그의 생애는 이 글의 명제를 빠르게 압축해 보여 준다. 풍토는 팔레트의 가능성을 바꾸고, 화가는 그 조건에 자기 생의 강도로 응답한다.

작품 보기 · 〈해바라기〉 1888, 런던 내셔널갤러리

6. 들판은 남는다

아를의 들판은 지금도 여름마다 노랗다.

해바라기는 피고, 미스트랄은 불고, 사이프러스는 비틀리며 자란다.

그가 오기 전에도 그랬다. 다만 아무도 그 노랑을 그 온도로 받아 적지 않았을 뿐이다.

한 사람이 끝까지 보았고, 들판은 그 뒤로 영영 그의 색이 되었다.

↑ 차례

아르만도 레베론 — 빛이 색을 지운다

1. 정오

카리브의 정오가 있다.

베네수엘라 북쪽 해안. 태양은 머리 바로 위에 있고, 바다는 금속처럼 번쩍이고, 모래는 눈이 아프게 희다.

그늘 밖으로 나서면 세상이 순간 하얗게 바랜다. 사물의 색이 빛에 먹혀 사라지고, 윤곽만 아지랑이 속에 떤다.

아를의 태양이 색을 태우는 태양이라면, 이곳의 태양은 색을 지우는 태양이다. 빛이 모자라면 색이 죽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빛이 넘쳐도 색이 지워진다는 것은, 이 해안에 서 본 사람만 안다.

한 화가가 이 해안에 오두막을 짓고 서른 해를 살았다. 아르만도 레베론. 1889년 카라카스에서 태어나, 유럽에서 그림을 배우고 돌아와, 끝내 거의 흰 그림에 도달한 사람.

그의 이야기도 다른 색에서 시작한다. 파랑이다.

2. 파랑까지

그는 카라카스에서 그림을 시작해 바다를 건넜다.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에서 배웠고, 마드리드에서는 프라도의 고야를 보았다. 파리도 거쳤다. 유럽의 문법 — 아카데미의 소묘, 거장들의 어둠과 빛 — 을 몸에 익힌 뒤, 그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직후의 그림들은 파랗다. 1919년부터 몇 해 동안, 그의 화면에는 차가운 청색과 몽환의 밤이 흐른다.

러시아에서 온 화가 페르디난도프가 그를 그 꿈의 색으로 이끌었다. 미술사는 이 시기를 청색시대라 부른다.

아름다운 그림들이다. 그러나 그 파랑은 아직 남의 색이었다. 유럽의 상징주의가 꾸던 밤의 꿈, 수입된 어스름. 카리브의 해안에 밤은 짧고, 이 땅의 진실은 밤이 아니라 정오에 있었다.

1921년, 그는 도시를 떠났다. 마쿠토의 해안으로.

3. 카스티예테

그는 바닷가에 손수 집을 지었다.

나무 기둥을 세우고 야자 잎으로 지붕을 이었다. 엘 카스티예테 — 작은 성. 화실이자 살림집이었다. 평생의 동반자 후아니타가 곁에 있었다. 붓은 바다가 밀어 올린 유목을 깎아 만들었고, 허리에는 그 붓들을 꽂는 주머니를 찼다. 캔버스가 모자라면 거친 천에 그렸다. 물감이 모자라면 덜 쓰는 법을 배웠다. 사람들은 그를 베네수엘라의 로빈슨 크루소라 불렀고, 뒤에서는 마쿠토의 광인이라 불렀다. 훗날 미술사는 그의 자작 도구와 인형에서 설치미술과 아르테 포베라를 선취한 듯한 물질 감각을 읽었다.

그러나 그가 해안으로 간 것은 예술 운동을 하러 간 것이 아니다. 빛 곁으로 간 것이다. 도시의 화실에서는 그릴 수 없는 것이 거기 있었다. 정오의 눈부심. 그 앞에서 유럽에서 배운 어둠의 문법도, 청색의 꿈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문법을 버리고 눈을 믿기 시작했다.

4. 흰 그림

1920년대 중반부터 십 년 남짓, 그는 거의 흰 그림을 그렸다.

백색시대. 라틴아메리카 미술사가 가장 아끼는 시기다. 화면에서 생생한 색이 하나씩 지워진다. 파랑이 가고, 초록이 가고, 마지막에는 흰색과 바탕의 살빛만 남는다. 바다도 희고, 야자수도 희고, 해안의 오두막도 희다. 그린 것이 아니라 빛에 바랜 것 같은 화면. 어떤 그림은 몇 걸음 물러서야 형태가 겨우 떠오른다.

정오의 해변에서 눈이 부셔 사물이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이, 화면 위에 있다.

그는 빛을 보고 싶어 했다. 빛에 비친 사물이 아니라 빛 그 자체를. 그러나 빛을 정면으로 보려는 눈은 멀어 버린다. 그의 흰 그림은 그 눈멂의 정직한 기록이다. 색을 지운 것은 그가 아니다. 빛이었다. 그는 다만 눈이 본 대로 적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을 뿐이다.

여기서 이 글의 첫 부가 완성하려는 대구가 선다. 아를의 태양은 색을 끝까지 밀어 올렸고, 카리브의 태양은 색을 지웠다. 같은 정직함이 한 땅에서는 가장 뜨거운 노랑이 되고, 다른 땅에서는 거의 흰 침묵이 된다.

색은 화가의 기질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빛의 분량도 팔레트의 가능성을 바꾼다. 빛은 모자라도 색을 죽이고, 넘쳐도 색을 지운다.

작품 보기 · 뉴욕 현대미술관(MoMA) 레베론 작가 페이지

5. 세피아, 그리고 인형들

1940년 무렵부터 화면에 갈색이 돌아온다.

세피아 시대. 라과이라 항구와 해안의 흙빛 풍경들. 흰빛의 절정을 지나온 눈이, 이제 땅의 낮은 색으로 내려앉은 것이다.

정신의 위기도 깊어졌다. 어린 날의 장티푸스 이후 평생 그를 따라다닌 발작과 우울. 무너짐 뒤에 요양원에 들어갔고, 회복한 뒤에는 자기가 만든 사물들의 우주로 물러났다. 천으로 지은 실물 크기의 인형들 — 무녜카. 그는 그들을 모델로 세우고, 그들과 함께 살았다. 세상은 그것을 광기라 불렀지만, 훗날의 미술은 거기서 설치와 오브제 예술의 새벽을 읽는다.

1954년, 그는 예순다섯으로 세상을 떠났다. 카스티예테는 박물관이 되었다.

그리고 1999년 12월, 큰비가 산을 무너뜨려 그 해안을 덮쳤다. 카스티예테도 흙에 묻혔다. 빛이 그의 색을 지웠듯이, 땅이 그의 집을 도로 가져갔다. 이 해안에서는 자연이 언제나 마지막 붓질을 한다.

6. 빛이 남긴 것

카리브의 정오는 지금도 희다.

바다는 번쩍이고, 모래는 눈이 아프고, 그늘 밖의 세상은 순간 바랜다.

그 눈부심 속에 오두막 한 채가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그림들만 기억한다.

거의 흰 그림들. 빛이 그린 자화상들.

↑ 차례

루피노 타마요 — 흙의 색

1. 흙이 색인 땅

멕시코 남부의 오아하카가 있다.

골짜기의 흙은 붉고, 산은 마르고, 태양은 수직으로 내리쬔다. 사포텍 사람들이 삼천 년을 산 땅. 그들이 산에 세운 옛 도시의 돌은 지금도 흙과 같은 색으로 서 있다.

이 땅에서는 흙이 곧 색이다. 집의 벽이 흙색이고, 그릇이 흙색이고, 축제의 물감이 흙에서 나온다. 시장에 가면 그 흙 위에 과일이 쌓인다. 수박의 붉음, 파파야의 주황, 라임의 초록. 마른 땅일수록 과일의 색은 깊다.

1899년, 이 땅에서 사포텍의 피를 받은 아이가 태어났다. 루피노 타마요. 구두장이의 아들, 재봉사의 아들.

그의 색은 학교에서 오지 않았다. 두 곳에서 왔다. 시장과 박물관이다.

2. 시장과 박물관

열두 살에 어머니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이는 멕시코시티의 이모에게 보내졌다. 이모는 과일 장사를 했다. 그는 시장에서 이모의 일을 도우며 자랐다. 새벽의 좌판, 쌓여 가는 과일 더미, 그 위로 쏟아지는 빛. 그것이 첫 학교였다. 훗날 그의 화면에 평생 돌아오는 과일들 — 특히 쪼개 놓은 수박의 붉음 — 은 그 좌판에서 왔다.

1917년 이모가 그를 산카를로스 미술학교에 넣었다. 그는 시대의 문법들을 실험했다. 입체파, 인상파, 야수파. 그러나 학교는 그에게 맞지 않았고, 그는 곧 독학의 길을 택했다.

그 대신 다른 학교가 왔다. 1921년, 그는 바스콘셀로스 밑에서 민족지 소묘부의 일을 얻었다. 콜럼버스 이전의 유물들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부서였다. 훗날 부서의 책임자가 되었다. 매일, 조상들이 흙으로 빚은 것들을 손으로 따라 그리는 일. 사포텍과 아스테카의 토기, 신상, 인장. 유럽의 미술학교가 석고 데생으로 가르치는 것을, 그는 자기 땅의 삼천 년으로 배웠다.

시장이 색을 주었고, 박물관이 뿌리를 주었다. 이제 그 둘을 흔드는 시대가 왔다.

3. 벽의 시대에 홀로

혁명이 끝난 멕시코는 벽화의 나라가 되었다. 리베라, 오로스코, 시케이로스. 세 거장이 관공서의 벽에 민족의 서사시를 그렸다. 혁명과 노동과 역사.

그림은 인민의 교과서여야 했고, 화가는 이념의 병사여야 했다. 위대한 시대였다. 그리고 그 위대함이 하나의 명령이 된 시대였다.

타마요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멕시코의 진실은 정치의 서사 이전에 색과 형태 속에도 있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이 만든 것에 흡수되고 파괴될 수 있다는 위험을 경고하며, 이념이 회화를 완전히 삼키는 상황을 경계했다.

돌아온 것은 배신자라는 낙인이었다. 조국을 그리지 않는 자, 이념 없는 자. 자유롭게 그릴 수 없다고 느낀 그는 1926년 뉴욕으로 떠났다.

그러나 여기에 이 장의 역설이 있다. 벽화가들은 멕시코를 이야기했고, 타마요는 멕시코로 그렸다. 주제가 아니라 물질로. 서사가 아니라 색으로. 누가 더 멕시코적이었는가는, 시간이 대답하게 된다.

4. 줄일수록 깊어진다

뉴욕에서도, 뒤에 옮겨 간 파리에서도, 그의 팔레트는 오아하카였다.

태운 흙의 적갈색, 도기의 살빛, 마른 땅의 자줏빛, 그리고 수박의 붉음. 그는 세계의 중심 도시들에서 이십 년 넘게 살았지만, 색만은 한 번도 이주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말했듯, 여행은 그의 멕시코 사랑을 오히려 키웠다. 몸은 떠나도 색은 고향에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는 색의 수를 줄였다. 한 화면에 몇 가지 색만. 그는 사용하는 색이 줄어들수록 가능성은 오히려 풍부해진다고 말했다. 많은 색은 서로를 지우지만, 적은 색은 저마다 깊어진다. 만년의 〈노래하는 세 사 람〉 같은 화면에서 붉음과 보랏빛 몇 가지가 화면 전체를 울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절제는 취향이 아니라 출신이다. 콜럼버스 이전의 토기는 흙 몇 가지 색으로 삼천 년을 말해 왔다.

오아하카의 시장 좌판은 흙빛 바탕 위의 과일 몇 알로 이미 완성된 그림이었다. 그는 자기 땅이 늘 하던 방식을 회화의 원리로 옮겼을 뿐이다.

제1부의 세 화가가 여기서 하나의 삼각을 이룬다. 아를의 빛은 색을 끝까지 밀어 올렸고, 카리브의 빛은 색을 지웠고, 오아하카의 흙은 색을 주었다. 빛의 두 극단과 물질의 색. 세 땅, 세 답, 하나의 명제 — 땅이 물감을 고른다.

작품 보기 · 타마요 미술관(멕시코시티) 공식 사이트

5. 돌려줌

1964년, 그는 아내 올가와 함께 멕시코로 돌아와 정착했다. 그리고 두 개의 미술관을 지었다. 하나는 고향 오아하카에 — 평생 모은 콜럼버스 이전의 유물들을 넣었다.

젊은 날 박물관에서 따라 그리던 그 조상들의 흙을, 이제 자기 손으로 고향에 돌려준 것이다. 또 하나는 멕시코시티의 차풀테펙 숲가에 — 아내와 함께 모은 세계 현대미술을 넣어 1981년에 열었다.

받은 자리에 돌려놓는 생애였다. 시장에서 받은 색과 박물관에서 받은 뿌리를 평생 쓰고, 늙어서 그 두 배움을 두 채의 집으로 지어 갚았다.

만년까지 그는 새 판화 기법을 만들며 그렸다. 1991년 6월, 아흔한 해의 생을 마쳤다.

배신자라 불리던 사람은 그때 이미 나라의 훈장을 다 받은 뒤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판결은 다른 데 있다.

오늘 오아하카의 젊은 화가들이 세계로 나갈 때, 그들이 딛고 서는 이름이 타마요라는 것. 벽의 시대에 홀로 이젤 앞에 섰던 사람이, 한 지방의 흙색으로 세계에 닿는 길을 먼저 내놓은 것이다.

6. 시장의 아침

오아하카의 시장은 지금도 새벽마다 선다.

흙빛 좌판 위에 수박이 쪼개져 놓인다. 붉음이 아침 빛에 깊어진다.

한 아이가 그 곁에서 자랐고, 그 붉음을 평생 지니고 다녔다.

색은 그렇게 물려받는 것이다. 물감이 아니라, 아침의 좌판으로.

↑ 차례

사이 I — 제주로 건너가는 색

제1부의 세 화가는 색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얻었다. 아를의 빛은 색을 끝까지 밀어 올렸고, 카리브의 정오는 색을 거의 지웠으며, 오아하카의 흙은 적은 색 안에 깊이를 응축했다. 세 화가의 회화가 색 하나로 환원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풍토가 눈과 팔레트 사이에 개입하는 세 방향이 이들에게서 가장 선명하게 보인다.

이 세 방향을 지나 제주로 건너가면 네 번째 색이 나타난다. 변시지의 마른 풀잎색이다. 그것은 단순한 황토색이나 노랑이 아니다. 볕에 바래고 바람에 오래 마른 풀잎, 여러 계절이 지나간 뒤에도 완전히 죽지 않은 생명의 색이다. 이 색에는 순간의 광도보다 축적된 시간이 많다.

고흐의 노랑과 마른 풀잎색은 멀리서 닮아 보인다. 넓은 단색의 바탕과 요동치는 선, 바람과 고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흐의 노랑이 지금 타오르는 연소의 색이라면, 변시지의 색은 불과 계절을 지나온 견딤의 색이다. 한 화면은 안의 열기가 밖으로 번지고, 한 화면은 밖의 바람을 몸이 받아낸다.

레베론과 변시지는 색을 거의 내려놓은 자리에서 만난다. 그러나 레베론의 흰색은 정오의 과잉이 만든 순간의 소거다. 변시지의 마른 풀잎색은 볕과 바람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든 축적이다. 하나는 눈부심이 시간을 멈추게 하고, 하나는 시간이 화면 속으로 스며든다.

타마요와 변시지는 적은 색이 더 넓은 가능성을 연다는 원리에서 가까워진다. 타마요의 적갈색은 수직으로 내리쬐는 태양이 달군 흙에서 왔다. 변시지의 마른 색은 수평으로 부는 바람이 말린 풀잎에서 왔다. 뜨거운 색과 마른 색. 절제는 같지만 두 풍토의 방향이 색의 온도를 갈랐다.

그러므로 마른 풀잎색은 세 화가의 뒤에 놓인 결론이 아니다. 연소와 소거와 침전이라는 세 가능성과 나란히 놓이는 네 번째 응답이다. 풍토는 물감의 이름을 직접 정하지 않는다. 빛과 시간의 분량을 바꾸고, 화가는 그 조건을 자기 생의 색으로 번역한다.

↑ 차례
제2부 · 선

에밀리 캄 응와레이 — 땅이 그은 선

1. 알할커의 원로

호주 대륙의 한가운데, 앨리스스프링스에서 북동쪽으로 약 이백오십 킬로미터. 안마티어(Anmatyerr) 공동체의 나라 알할커(Alhalker)가 있다.

마른 땅이다. 그러나 빈 땅이 아니다. 땅속에는 연필얌의 덩굴뿌리가 그물처럼 뻗어 있다. 비가 오면 그 뿌리가 땅을 가르며 부풀고, 지표에는 노란 꽃이 핀다. 사람들은 그 뿌리의 궤적을 따라 땅을 파서 얌을 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선들의 지도가, 이 땅의 살림이고 이야기다.

1910년대 무렵, 이 땅에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에밀리 캄 응와레이. 그는 공동체에서 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알할커의 원로이자 문화적 지식의 보유자로 살아갔다.

그가 여든에 가까워 캔버스를 처음 잡았을 때, 그림의 내용은 새로 고른 소재가 아니었다. 평생 살아온 나라와 의례, 식물과 물길의 지식이 새로운 매체를 만난 것이었다.

2. 캔버스 이전의 화가

이 글의 다른 장들은 대개 비슷한 세 단계를 지난다. 중심에서 문법을 배우고, 한 장소 앞에서 그 문법의 한계를 경험하며, 화가와 풍토의 관계 속에서 문법을 다시 구성한다.

응와레이의 장에는 서구 미술학교에서 배운 문법과 고향의 충돌이라는 3 막이 없다. 미술학교도, 파리 유학도 없었다. 대신 캔버스 이전부터 이어진 전혀 다른 배움이 있었다.

대신 다른 배움이 있었다. 그는 안마티어의 원로로서 여성들의 아웰리(awely) 의례와 나라에 관한 지식을 오랫동안 익혀 왔다. 몸과 땅에 그려지는 선과 무늬, 노래와 춤 속에서 전승되는 지식이었다. 캔버스가 오기 전부터 그의 시각 언어에는 긴 시간이 축적되어 있었다. 이 문화적 지식의 일부는 공동체의 권한과 맥락 속에서 다뤄져야 하므로, 서구의 도상 해설처럼 모두 풀어 설명할 수는 없다.

1977년, 우토피아의 여성들이 바틱을 시작했다. 천에 밀랍으로 그리고 물들이는 일. 응와레이도 그 무리에 있었다. 십일 년 동안 그는 천 위에 자기 나라의 것들을 그렸다. 에뮤와 도마뱀과 풀과 씨앗.

그리고 1988년 여름, 캔버스와 아크릴 물감이 마을에 왔다.

3. 여든의 속도

그때 그는 일흔 중반 무렵이었다. 그 뒤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약 팔 년. 그 짧은 기간에 그는 삼천 점이 넘는 그림을 남겼다. 하루 한 점을 넘는 놀라운 속도다. 미술사에서도 보기 드문 만년이다. 오랜 세월 축적된 지식과 감각이 캔버스라는 새로운 매체를 만나 폭발적으로 펼쳐진 것이다.

그리는 방식도 전통적인 서구 화실과 달랐다. 그는 캔버스를 땅에 펴고 그 위나 곁에 앉아 작업했다. 생활과 제작이 분리되지 않은 현장에서 그림은 지면과 가까운 자세로 태어났다.

같은 대륙의 윌리엄스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대지의 무늬를 만년의 화면으로 옮겼다. 응와레이는 땅 가까이 앉아 그렸다. 그의 화면이 서구 관객에게 조감도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그것은 외부의 높은 시점이라기보다 나라 안에서 축적된 지식이 조직한 전체에 가깝다.

4. 얌의 선

그의 여러 작품에서 얌의 뿌리와 땅의 흐름을 떠올리게 하는 선은 화면의 바탕 구조가 되었다.

땅속에서 덩굴뿌리가 뻗어 가는 길, 비가 지나가고 식물이 자라는 흐름. 잘게 겹친 점들의 층은 사막의 아지랑이처럼 화면을 떨리게 했고, 만년으로 갈수록 굵고 자유로운 선이 전면에 나섰다. 1995년의 대작 〈Anwerlarr anganenty (Big Yam Dreaming)〉에서는 검은 바탕 위를 흰 선들이 얽히며 달린다.

뿌리와 물길, 핏줄과 번개를 동시에 떠올리게 하지만, 그 의미를 서구적 추상 하나로 닫을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알할커의 식물과 동물, 의례와 나라에 관한 지식 전체와 이어져 있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하나의 소재를 분리해 그린 그림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세계를 그린 그림이었다.

이 답을 이 글의 언어로 옮기면, 그의 선은 땅을 외부에서 묘사하는 선이라기보다 뿌리가 뻗고 씨앗이 흩어지며 비가 지나가는 움직임을 회화로 이어 가는 선이다. 화가와 나라의 관계가 대상과 관찰자의 구도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글의 명제는 풍토가 형식을 낳는다는 것이다. 응와레이는 그 명제를 가장 관계적인 방식으로 보여 준다.

풍토는 그에게 외부에서 명령하는 상대가 아니라, 친족과 의례와 식물의 지식으로 이미 삶 속에 이어진 세계였다. 그는 그 일부로서 그렸다.

[전시 보기] 「에밀리 캄 응와레이」 회고전, 테이트모던(런던)

5. 마지막 두 주

1996년, 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작업을 계속했다.

그 무렵 제작된 그림들은 훗날 〈나의 나라 — 마지막 연작〉으로 불렸다. 생의 마지막까지 그의 손은 자기 나라와 이어져 있었다. 이 듬 해 그 의 작 품 은 베 네 치 아 비 엔 날 레 호 주 관 에 소 개 되 었 다. 죽 은 뒤 였 다. 2023년 캔 버 라 의 호주국립미술관은 가족과 공동체 원로들의 자문 속에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고, 그 전시는 2025년 런던 테이트모던으로 이어졌다.

일흔 중반에 첫 캔버스를 잡은 사막의 원로가, 약 삼십 년 뒤 런던의 전시장에서 이십 세기의 가장 중요한 화가들 곁에 걸린 것이다.

미술사의 시계로는 설명되지 않는 생애다. 풍토의 시계로는 설명된다. 얌은 땅속에서 오래 자라다가, 비가 온 뒤에 한꺼번에 꽃을 피운다.

6. 그림은 먼저 있었다

알할커에는 지금도 비가 오면 노란 꽃이 핀다.

땅속에서는 덩굴뿌리가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있다.

그 선을 평생 몸에 지니고 다닌 사람이 있었다. 이름에, 어깨의 그림에, 모래의 손가락 자국에.

캔버스는 마지막 팔 년에 왔을 뿐이다.

그림은 언제나 거기 있었다.

↑ 차례

마스든 하틀리 — 메인의 화가

1. 무거운 땅

미국의 북동쪽 끝, 메인이 있다.

화강암의 해안. 파도가 백만 년을 때려 깎아 놓은 검은 바위들. 차가운 바다, 짧은 여름, 안개. 내륙으로 들어가면 숲의 바다 위로 산 하나가 홀로 솟아 있다. 카타딘. 원주민의 말로 가장 큰 산이라는 뜻이다.

가벼운 것이 살아남지 못하는 땅이다. 바위도, 어부의 배도, 사람의 말수도 무겁다.

1877년, 이 땅의 방직 공장 마을 루이스턴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아홉 남매의 막내. 여덟 살에 어머니를 잃었다. 훗날 그는 뉴잉글랜드의 유년과 그 지방의 억양을 사무치는 외로움의 기억으로 되돌아보았다.

그는 이 땅을 떠나는 데 반생을 썼고, 돌아오는 데 나머지 반생을 썼다.

2. 떠돎

이상한 일은, 그의 첫 성숙작이 이미 메인의 산이었다는 것이다.

서부 메인의 러벨 마을, 키자 호수와 언덕들. 그 그림들이 뉴욕의 스티글리츠를 그 자리에서 사로잡아, 1909년 전설의 화랑 291 에서 첫 개인전이 열렸다. 답은 처음부터 그의 손안에 있었다. 다만 그는 그것이 답인 줄 몰랐고, 알기 위해 삼십 년을 돌아야 했다.

1912년 그는 유럽으로 갔다. 파리에서 거트루드 스타인의 서클에 드나들었고, 베를린으로 옮겨 칸딘스키· 프란츠 마르크와 벗했다. 그의 화면은 추상과 독일 표현주의와 신비주의가 뒤섞인, 시대의 최전선이 되었다.

베를린에서 그는 프로이센의 젊은 장교 카를 폰 프라이부르크와 가까웠다. 1914년 전쟁이 그 청년을 데려갔다. 상실 속에서 하틀리는 〈독일 장교의 초상〉을 그렸다. 군기와 견장과 철십자가 사람의 자리를 대신 채운 화면. 얼굴 없는 초상. 이십 세기 미국 회화의 걸작 하나가 그렇게, 잃어버린 사람의 자리에서 태어났다.

전쟁이 그를 미국으로 돌려보냈지만, 그는 어디에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프로빈스타운, 버뮤다, 뉴욕, 뉴멕시코. 1921년 그림 백여 점을 경매로 넘겨 여비를 만들고 다시 유럽으로. 떠돎이 그의 주소였다.

3. 남의 산들

1920년대의 유럽에서 그는 세잔의 발자취를 따라 걸었다. 세잔이 보던 남프랑스의 빛 속에서 정물과 풍경을 그렸다. 산 하나를 평생 그린 사람의 방법을, 그는 그 산 앞에서 배우려 했다. 1930년에는 뉴햄프셔의 산을 그렸고, 다른 해에는 다른 산을 그렸다. 그는 산의 화가가 되어 가고 있었다. 다만 아직, 남의 산의 화가였다.

세잔에게 배울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방법은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산은 배울 수 없다. 산은 자기 것이어야 한다.

1935년, 그는 배를 타고 북쪽으로 갔다. 노바스코샤의 작은 어촌 블루록스. 메이슨이라는 어부 가족의 집에서 두 해 여름을 살았다. 평생 겉돌던 사람이 처음으로 식구처럼 살았다. 1936년 9월, 허리케인이 왔고, 메이슨 가족의 두 형제와 사촌 한 명이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두 번째 상실이었다. 베를린에서 한 번, 블루록스에서 또 한 번. 사랑하는 것들은 그의 곁에서 자꾸 데려가졌다. 남은 것은 이제 하나뿐이었다. 떠나온 땅.

4. 메인의 화가

1937년, 예순의 하틀리는 선언하고 돌아왔다. 메인의 화가가 되겠다고.

선언이 필요했다는 것이 이 귀향의 아픈 부분이다. 태어난 땅으로 돌아가는 데에 선언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

반생을 밖에서 산 사람, 고향에서조차 이방인이 된 사람. 그는 문장으로 먼저 돌아가고, 몸이 그 문장을 따라갔다.

조지타운, 비널헤이븐, 코레아. 그는 메인의 해안 마을들을 옮겨 다니며 그렸다. 그리고 화면이 변했다.

베를린의 세련된 추상도, 세잔풍의 구축도 아닌, 무겁고 뭉툭한 그림이 나왔다. 굵은 검은 윤곽이 바위를, 파도를, 통나무를, 어부의 몸을 감싼다. 다듬지 않은 선. 파도에 맞으며 깎인 바위의 윤곽 같은 선.

블루록스의 형제들을 기리는 초상에서 어부들의 몸은 바위처럼 앉아 있다.

평생 유럽의 문법들을 지나온 손이, 마지막에 도달한 것은 세련이 아니라 무게였다. 이 땅에서는 가벼운 선이 살아남지 못한다. 메인이 그의 손에서 장식을 깎아 내고, 버티는 윤곽만 남긴 것이다.

그리고 카타딘. 만년의 그는 그 산을 거듭 그렸다. 세잔의 산을 기웃거리던 사람이 마침내 자기 산을 얻은 것이다. 눈 덮인 봉우리, 검은 호수, 무거운 구름. 남의 산 앞에서 배운 방법으로, 자기 산을 그렸다.

작품 보기 · 스미소니언 미국미술관 하틀리 작가 페이지

5. 강으로

귀향의 시간은 여섯 해뿐이었다.

1943년 9월, 그는 메인의 엘즈워스에서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났다. 예순여섯이었다. 재는 앤드로스코긴 강에 뿌려졌다. 태어난 마을 루이스턴을 지나 흐르는 강이다. 여덟 살에 어머니를 잃은 아이가, 베를린과 파리와 뉴멕시코와 노바스코샤를 돌아, 강물이 되어 고향을 지나게 된 것이다.

여섯 해는 짧다. 그러나 그 여섯 해의 그림들로 미국은 메인의 무게를 자기 언어로 바꾼 화가를 얻었다.

유럽에 깊이 들어갔던 화가가 돌아와 지역의 바위와 바다를 새롭게 보았다. 멀리 떠난 경험은 귀향을 보장하지 않지만, 하틀리에게는 고향을 다시 읽는 거리가 되었다.

6. 가장 짧은 귀향

카타딘은 지금도 숲 위에 솟아 있다.

파도는 여전히 해안의 바위를 때리고, 강은 루이스턴을 지나 바다로 간다.

그 강물 어딘가에 한 화가가 섞여 흐른다.

평생을 돌아서, 가장 짧은 길로 돌아온 사람.

↑ 차례

다나카 잇손 — 스스로 택한 섬

1. 신동

이 장은 남쪽 섬이 아니라, 붓을 쥔 아이에서 시작한다.

1908년, 도쿄 북쪽의 도치기라는 고장에서 목조각가의 맏아들이 태어났다. 아이는 도쿄에서 자랐고, 어려서부터 남화 — 문인의 수묵 — 에 재능을 보여 신동이라 불렸다. 일곱 살에 아동화전에서 큰 상을 받았고,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베이손(米邨)이라는 아호를 지어 주었다. 열몇 살에 이미 부손과 모쿠베이 같은 옛 대가들의 남화를 자유자재로 흉내 냈다.

매화와 난과 대나무. 안개 낀 산과 물. 남화의 선은 온대의 선이다. 부드럽게 흐르고, 여백에 스민다. 아이의 손은 그 선을 완벽하게 익혔다.

1926년, 그는 도쿄미술학교 일본화과에 들어갔다. 동기 중에 히가시야마 가이이가 있었다. 훗날 일본화의 국민화가가 될 이름들과 같은 교실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리고 두 달 만에 그만두었다. 학교의 지도 방침이 맞지 않았고, 아버지가 병들었다. 열여덟의 그는 남화를 그려 팔아 가족을 먹였다.

여기서 두 갈래 길이 갈라진다. 교실에 남은 동기들은 화단의 길을 갔다. 교실을 떠난 그는, 사십 년 뒤 지도에 없는 길의 끝에서 발견된다.

2. 낙선

1931년, 그는 평생 그려 온 남화와 스스로 결별했다. 마음 가는 대로 그린 새 그림을 후원자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생계가 끊겼다. 1938년 지바로 옮겨 친척에게 의지했다.

1947년, 서른아홉에 청룡사전에 입선했다. 이때 처음으로 잇손(一村)이라는 이름을 썼다. 한 마을 — 홀로 하나의 마을이라는 이름. 이듬해 두 점을 냈다가 한 점만 입선하자, 낙선한 그림에 승복할 수 없어 입선마저 사퇴하고 그 화회와 절연했다. 타협을 모르는 손이었다.

1953년, 그는 닛텐에 출품했다. 심사석에는 히가시야마 가이이가 있었다. 두 달을 같이 다닌 동기.

낙선이었다. 이듬해 다시 냈다. 심사석에는 또 다른 동기 둘이 있었다. 또 낙선이었다.

교실을 떠난 자와 교실에 남은 자들이, 이십칠 년 뒤에 심사받는 자와 심사하는 자로 다시 만난 것이다.

화단의 문은 그렇게 닫혔다. 쉰이 가까운 그는 규슈와 시코쿠와 기슈를 스케치하며 돌았다.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화단이 아닌 다른 심사자를. 그리고 1958년, 그는 짐을 꾸렸다. 홀로, 일본의 남쪽 끝으로. 아마미오시마. 몇 해 전에야 미국 통치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구로시오 해류 위의 아열대 섬.

3. 염색공의 자리

쉰 살의 이주였다. 연고도 없고, 부르는 이도 없는 섬.

그는 셋집을 얻어 밭을 갈았고, 1962년부터 나제의 오시마 명주 공장에서 염색공으로 일했다. 오시마 명주 — 이 섬이 천 년을 이어 온 비단. 진흙과 식물로 물들이는 이 섬만의 검은 천. 그는 그 천에 물을 들이며 생계를 벌고, 남는 시간에 그렸다.

그의 셈법은 단순하고 처절했다. 오 년을 일해 돈을 모으면, 삼 년을 그림에만 쓴다. 1967년에 공장을 그만두고 삼 년을 전념했다. 1970년에 다시 공장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이 년 — 도쿄에서 개인전을 열 비용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개인전은 끝내 열리지 못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중앙 화단에 인정받지 못했다.

서장에서 우리는 거주를 출생이나 체류 기간이 아니라, 장소에 의해 자기 문법이 실제로 바뀌는 관계라고 정의했다. 잇손의 자리를 보라. 그는 섬의 명주에 섬의 진흙 물을 들이는 염색공으로 일하며 주민들의 노동과 생활 속에 몸을 놓았다. 그 관계가 오래 지속되는 동안, 온대 남화의 선은 아마미의 식생 앞에서 새로운 선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훗날 그를 일본의 고갱이라 부른 것은, 그래서 절반만 맞다. 남쪽 섬으로 갔다는 것은 같다. 그러나 고갱은 낙원을 가지러 갔고, 잇손은 자리를 얻으러 갔다.

4. 아열대의 선

섬이 그의 손에 시킨 일은, 선의 개종이었다.

남화 신동의 손이 평생 익힌 것은 온대의 선이다. 매화 가지의 굴곡, 난 잎의 휘어짐, 안개에 풀리는 산의 윤곽. 그런데 아마미의 식물들은 그 선을 거부한다. 아단 잎은 칼처럼 곧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돋았다.

소철은 부챗살로 폭발하고, 파초 잎은 굵은 맥으로 갈라진다. 부드럽게 흐를 것이 하나도 없는, 강선(強線) 의 식생.

그는 그 선들을 받아 적었다. 화면 가득 아단과 파초와 소철이 날카롭게 겹치고, 그 틈으로 남국의 새가 앉는다. 일본화의 정밀함은 그대로인데, 그 정밀함이 담는 것은 일본화가 한 번도 그려 본 적 없는 식물들이다. 온대의 화조화가 아열대의 밀림 앞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훗날 어떤 이들은 그 빽빽하고 원초적인 화면에서 앙리 루소를 떠올렸다. 그러나 루소의 밀림이 파리의 온실에서 꾼 꿈이라면, 잇손의 밀림은 매일 그 잎 그늘을 지나 공장으로 걸어간 사람의 기록이다. 그는 사진도 찍었다. 지바 시절에 익힌 사진으로 섬의 새와 물고기와 잎을 촬영해 관찰을 벼렸다. 신동의 붓과 염색공의 눈과 사진가의 정밀이 한 화면에 모였다.

중앙 화단이 끝내 몰라본 그 화면들이, 지금은 일본화가 이십 세기에 도달한 가장 독창적인 자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심사석의 동기들이 그린 어떤 그림보다, 교실을 두 달 다닌 사람의 그림이 멀리 갔다.

작품 보기 · 다나카 잇손 기념미술관(아마미) 공식 페이지

5. 궁전

1977년 9월 1일, 그는 밭 가운데 외딴집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그 집을 궁전이라 불렀다. 고텐. 평생 셋집과 공장을 오간 사람이, 마지막 거처에 붙인 이름이었다.

농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농담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집의 창밖에는 그가 택한 왕국 — 아단과 파초와 새들 — 이 있었으니까.

열흘 뒤인 9월 11일 저녁, 그는 저녁밥을 짓다가 심부전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예순아홉.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칠 년이 지난 1984년 겨울, NHK 의 미술 프로그램이 그를 다뤘다. 구로시오의 화보 — 이단의 화가 다나카 잇손. 방송이 나가자 일본이 그를 찾기 시작했다. 전국 순회전이 열렸고, 화집이 나왔고, 2001년에는 아마미에 기념미술관이 섰다. 탄생 백 년에는 대규모 특별전이 열렸다.

생전에 열리지 못한 개인전이, 죽은 뒤에 나라 전체의 전시가 된 것이다. 마지막 열흘의 집은 지금 잇손 종언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보존되어 있다. 그가 붙인 이름이 맞았던 셈이다. 궁전은 궁전이 되었다.

6. 홀로 하나의 마을

아마미의 아단은 지금도 해안에서 칼 같은 잎을 세우고 있다.

명주 공장의 진흙 물은 여전히 검고, 구로시오는 여전히 섬을 지나 북으로 흐른다.

그 해류를 따라 올라간 이름 하나가, 이제 온 나라의 미술관에 걸려 있다.

홀로 하나의 마을이던 사람.

마을은 이제 크다.

↑ 차례

사이 II — 땅과 손이 맺는 네 관계

선은 사물의 윤곽만이 아니다. 화가가 장소와 어떤 거리를 맺는가를 드러내는 관계의 흔적이다. 제2부의 세 화가는 한 장소와 맺을 수 있는 세 관계를 보여 주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 일부인 관계, 떠난 뒤 돌아오는 관계, 낯선 땅을 스스로 선택하여 변화되는 관계.

에밀리 캄 응와레이에게 땅은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었다. 알할커의 식물과 물길, 의례와 친족의 지식은 그의 삶과 분리되지 않았다. 그의 선은 풍경을 묘사하기보다 땅의 움직임을 몸과 캔버스로 이어 간다. 그리는 자와 그려지는 것의 경계가 가장 얇아지는 선이다.

마스든 하틀리의 선은 귀향 뒤에 무게를 얻었다. 유럽의 여러 문법을 지나 메인으로 돌아온 그의 손은 바위와 파도를 두껍고 둔중한 윤곽으로 세웠다. 떠난 거리는 고향을 낯설게 다시 보게 했고, 돌아온 몸은 그 무게를 자기 선으로 받아냈다.

다나카 잇손의 선은 선택한 섬에서 개종했다. 온대의 남화 문법은 아마미의 아단과 소철, 습기와 밀림 앞에서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았다. 그의 손은 빽빽하고 강한 아열대의 선을 새로 익혔다. 거주는 출생이 아니라 변화의 깊이로 증명될 수 있다는 사례다.

변시지의 선은 이 셋과 또 다르다. 그는 땅과 완전히 합쳐지지도, 바위처럼 멈추지도, 밀림처럼 화면을 채우지도 않는다. 바람이 먼저 불고 사람이 그 앞에 남는다. 검은 선은 기울고 떨리지만 끊어지지 않는다. 풍토와 하나가 되는 선이라기보다 풍토 앞에서 관계를 지속하는 선이다.

어느 관계가 더 깊다고 말할 수는 없다. 소속, 귀향, 선택, 마주 섬은 각각 다른 윤리와 형식을 낳는다. 중요한 것은 장소를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장소와의 관계가 손의 습관을 실제로 바꾸었는가이다.

↑ 차례
제3부 · 여백

셋슈 — 젖은 여백

1. 안개의 열도

일본 열도는 물의 땅이다.

사방이 바다이고, 여름에는 장마가 길고, 골짜기마다 안개가 고인다. 산은 늘 어딘가가 지워져 있다. 능선의 허리가 안개에 잠기고, 섬의 밑동이 바다 김에 풀린다. 이 땅에서 사물은 온전히 다 보이는 법이 드물다.

보이는 것과 지워진 것이 늘 함께 있다.

이런 땅의 그림에서 비어 있는 자리는 빈 것이 아니다. 안개가 차 있는 것이다. 물기가 차 있는 것이다.

3부는 여백을 다룬다. 여백은 형식 가운데 가장 오해받는 요소다. 그리다 만 자리, 못 채운 자리로 읽히기 쉽다. 그러나 이 부의 세 화가는 증언한다. 여백은 땅이 비우게 한 자리라고. 그리고 땅마다 다르게 비우게 한다고.

첫 증인은 오백 년 전의 승려다.

2. 보지 않은 중국을 그리다

1420년, 빗추 — 지금의 오카야마 — 의 무인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는 어려서 절에 들어갔다.

전설이 하나 전한다. 어린 셋슈가 경은 읽지 않고 그림만 좋아하자, 스님이 그를 불당 기둥에 묶어 두었다.

아이는 바닥에 떨어진 제 눈물을 엄지발가락에 찍어, 마루에 쥐 한 마리를 그렸다. 그 쥐가 하도 살아 있는 것 같아, 스님은 그리는 일을 허락했다는 이야기다. 이 일화는 이백 년 뒤의 책에 처음 실린 것이라 후대의 창작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창작이라 해도 정확한 창작이다. 눈물과 맨발가락으로 그린 첫 그림 — 물기로 시작한 화가의 전설로, 이보다 맞는 것이 없다.

열 살 무렵 그는 교토의 상국사로 옮겨, 선은 슈토에게, 그림은 당대 최고의 화승 슈분에게 배웠다.

그가 배운 문법은 중국의 것이었다. 송과 원의 수묵 산수. 안개 낀 강, 깎아지른 봉우리, 물가의 정자. 그런데 이 문법에는 기이한 데가 있었다. 그것을 배우는 일본의 화승들 가운데 그 산수를 실제로 본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림을 보고 그림을 그렸다. 보지 않은 중국을, 중국 그림의 문법대로. 관념이 관념을 낳는 그림.

셋슈는 그 관념의 벽 끝까지 갔다. 그리고 서른 중반, 교토를 떠나 서쪽 끝 주방 — 지금의 야마구치 — 으로 갔다. 명나라와 교역하던 오우치 가문의 땅. 거기에 대륙으로 가는 배가 있었다.

3. 그림 속의 중국과 발밑의 중국

1467년, 마흔여덟의 셋슈는 견명선을 타고 바다를 건넜다.

약 두 해였다. 닝보에서 베이징까지, 그는 대륙을 종단했다. 선종의 사원들을 찾았고, 이재라는 화가에게 중국의 화법을 배웠으며, 문인의 그림뿐 아니라 직업 화가들의 그림도 공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평생 그려 온 산수를 처음으로 눈으로 보았다.

여기서 이 글의 다른 장들과 반대 방향의 충돌이 일어난다. 다른 화가들은 수입한 문법이 자기 땅 앞에서 부서지는 것을 보았다. 셋슈는 문법의 본고장에 가서, 문법과 실물 사이의 틈을 보았다. 그림 속의 중국과 발밑의 중국이 같지 않았던 것이다. 화첩의 산은 실제 산의 요약이었고, 그 요약은 그 땅의 공기가 한 일이었다.

그러니 배워야 할 것은 요약된 그림만이 아니라, 산천을 요약하는 법이었다. 산천이 스승이고 화첩은 선배일 뿐이라는 것 — 약 두 해의 대륙 체류가 가르친 것은 그것이었다.

1469년 무렵 그는 귀국했다. 한동안 분고국, 오늘날의 오이타 일대에서 활동한 뒤 다시 야마구치로 돌아왔다. 전란의 수도로 곧바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결과적으로 그를 교토 중심부 바깥의 화가로 남게 했다. 이후 오우치 가문의 비호 아래 운코쿠안에 자리 잡고 작업을 이어 갔다.

4. 젖은 여백

돌아온 셋슈는 여행하는 화가가 되었다.

그는 각지를 다니며 눈앞의 산천을 사생했다. 중국에서 배운 요약하는 법으로, 이번에는 일본의 산천을 요약했다. 후대의 미술사는 그의 공을 이렇게 적는다. 중국화를 그대로 베끼는 일에서 벗어나, 일본 독자의 수묵화풍을 세웠다고.

그 독자성이 어디서 오는가. 송·원 산수의 대륙적 공간감과 달리, 셋슈가 돌아와 마주한 일본의 산천에는 습기와 안개가 자주 윤곽을 흐렸다. 그는 중국에서 배운 요약의 방법을 그 젖은 산천에 적용했고, 여백은 점차 물기를 머금은 공간이 되었다.

1495년, 일흔 중반의 그는 한 폭의 산수를 그렸다. 〈파묵산수도〉. 붓을 정확히 대는 대신 먹을 부수어 떨어뜨린 그림. 젖은 먹이 번지며 산이 되다 만다. 형태의 절반은 먹이고 절반은 안개다. 어디까지가 산이고 어디부터가 여백인지 경계가 없다. 안개 낀 골짜기에서 실제로 눈이 겪는 일이 종이 위에서 일어난다.

만년의 〈아마노하시다테도〉에서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소나무 모래톱과 주변의 실제 지형이 한눈에 펼쳐진다. 관념 속 산수의 문법을 지나, 눈앞의 일본 장소를 자기 방식으로 조직한 그림이다. 현재 셋슈의 이름으로 전하는 여섯 작품이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한 화가의 작품군으로는 이례적인 대우다.

5. 서쪽 끝에서

그는 끝까지 변방의 사람이었다.

교토의 화단은 가노파의 시대로 가고 있었지만, 그는 야마구치와 이와미의 서쪽 땅에서 그리고, 뜰을 짓고, 제자를 길렀다. 1506년, 여든 중반에 세상을 떠났다. 화실 운코쿠안은 제자에게 이어졌고, 그의 법은 여러 화파의 뿌리가 되었다. 훗날 에도의 화가들은 저마다 셋슈의 후계를 자처했다. 중심에 살지 않은 사람이, 중심들의 조상이 된 것이다.

그의 생애를 한 줄로 줄이면 이렇다. 문법을 배우러 그 문법의 나라까지 갔던 사람이, 돌아와 변방에 앉아, 자기 열도의 물기로 그 문법을 다시 썼다.

6. 안개 속의 말

열도의 골짜기에는 오늘도 안개가 고인다.

산허리가 지워지고, 섬의 밑동이 풀린다.

오백 년 전 한 승려가 그 지워짐을 종이에 옮기는 법을 찾았다.

그 뒤로 이 나라의 그림은, 안개 속에 무엇이 있는지 말하지 않고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 차례

이사크 레비탄 — 빈 길

1. 광활

러시아의 평원이 있다.

지평선이 사방으로 열려 있다. 걸어도 걸어도 같은 자작나무, 같은 들, 같은 낮은 하늘. 산이 시야를 막아 주지 않고, 바다가 끝을 그어 주지 않는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데, 어디에도 닿을 것 같지 않은 땅.

이 광활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든다. 러시아 말에는 그 마음을 부르는 단어가 따로 있다. 토스카. 대상 없는 그리움, 이유 없는 사무침. 무엇을 잃었는지 모르면서 잃은 것 같은 마음. 땅이 너무 넓으면, 슬픔도 갈 곳을 잃는다.

셋슈의 열도가 안개로 여백을 만들었다면, 이 평원은 광활로 여백을 만든다. 지워서 비우는 것이 아니라, 너무 넓어서 비는 것이다.

이 땅의 침묵을 화폭에 옮긴 사람은, 정작 이 땅이 거듭 내쫓은 사람이었다.

2. 자리 없는 아이

1860년, 제국의 서쪽 변경 키바르티의 유대인 마을에서 그는 태어났다.

가난하지만 배운 집이었다. 랍비의 아들이던 아버지는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번역 일을 했다.

1870년 가족은 모스크바로 옮겼고, 열세 살의 이사크는 모스크바 회화조각건축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잃기 시작했다. 열다섯에 어머니가 죽었다. 열일곱에 아버지가 죽었다. 네 남매는 바닥 모를 가난으로 떨어졌다. 학교는 재능과 처지를 보아 장학금으로 그를 붙들었다.

열아홉이 되던 1879년,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이 터지자 제국은 대도시의 유대인들을 몰아냈다. 레비탄의 가족도 모스크바에서 쫓겨나 교외로 밀려났다. 그해 가을, 미술계 인사들의 탄원으로 그만은 돌아올 수 있었다.

고아, 극빈, 추방. 이 나라는 소년에게 자리를 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자리를 얻지 못한 소년의 화폭에, 이 나라의 땅이 들어와 앉기 시작한 것이다.

3. 무드

그의 스승은 사브라소프였다. 남들이 장엄한 경치를 찾을 때, 눈 녹는 삼월의 진창과 그 위로 돌아오는 까마귀 떼를 그린 사람 — 일 년 중 가장 볼품없는 순간의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이 땅의 심정을 길어 올린 사람. 풍경은 경치가 아니라 심정이라는 것을, 소년은 그 반에서 배웠다. 스무 살에 수집가 트레티야코프가 그의 그림을 샀다. 무명 학생의 그림을 당대 최고의 눈이 알아본 것이다.

트레티야코프는 그 뒤로도 그의 그림을 스무 점 넘게 사들였다.

같은 학교에 화가 니콜라이 체호프가 있었고, 그 동생이 안톤 체호프였다. 의사이자 작가인 이 동갑내기와 레비탄은 평생의 벗이 되었다. 훗날 사람들은 두 사람을 나란히 읽게 된다. 체호프의 소설에 흐르는 그 적막 — 말해지지 않는 슬픔, 일어나지 않는 사건 — 이 레비탄의 화폭에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동파의 전시에 그림을 냈다. 민중 속으로 그림을 들고 가자는 화가들. 그러나 동료들이 러시아 민중의 고단한 삶을 화면에 담아 메시지를 전하려 할 때, 그는 다만 아름다움을 그리려 했다. 고발 대신 응시.

서사 대신 침묵. 사람들은 그의 장르에 이름을 붙였다. 무드 풍경 — 심정의 풍경화.

4. 빈 길

1892년 9월, 제국은 다시 유대인들을 모스크바에서 몰아냈다. 서른둘의 레비탄은 이번에도 짐을 쌌다.

이미 러시아에서 가장 사랑받는 풍경화가였는데도. 지인들의 주선으로 그는 연말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같은 해에 그는 〈블라디미르카〉를 그렸다.

블라디미르카는 길 이름이다.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시베리아 유형지로 이어지는 길. 수 세대의 유형수들이 쇠사슬을 끌며 걸어간 길이다. 화면에는 그 길과 들과 낮은 하늘뿐이다. 걸어간 사람들은 없다.

길가에 작은 성상 하나. 지평선으로 사라지는 길 하나.

사람을 그리지 않은 것이 이 그림의 웅변이다. 이 광활 앞에서 인물은 성립하지 않는다. 어떤 얼굴을 세워도 이 슬픔보다 작다. 그래서 땅이 사람의 자리를 대신 진다. 길이 기억하고, 하늘이 애도하고, 들이 침묵한다.

그의 화면들이 대체로 인간의 형상 없이 비어 있는 것은 기법이 아니라 이 땅의 요구였다. 평원의 여백 — 너무 넓어서, 사람이 지워지는 여백.

이 대목에서 서장의 거주 개념은 기이한 변주를 이룬다. 레비탄에게 법적 자리를 준 것은 국가가 아니었다.

국가는 두 번 그를 내쫓았다. 그러나 볼가의 물빛과 자작나무, 저녁 종소리를 오래 바라보는 동안 그의 회화 문법은 러시아의 자연과 깊이 얽혔다. 쫓겨난 자가 그 나라의 대표적 풍경화가가 되었다는 역설은, 장소와 국가가 같은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소장처] 트레티야코프 미술관(모스크바) — 〈블라디미르카〉·〈영원한 안식 위에〉·〈저녁 종소리〉 소장

5. 마지막 빛

심장이 일찍부터 나빴다. 만년의 그는 병을 안고 그렸다. 1899년 말에서 1900년 새해 무렵에는 크림반도 얄타의 체호프를 찾아 잠시 머물렀다. 의사인 벗은 화가의 심장이 어디까지 왔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상한 것은 그림이다.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화면은 점점 빛으로 차올랐다. 자작나무 숲의 금빛, 봄물의 반짝임, 건초 더미 위의 달. 어두워질 이유가 가장 많던 시기에 가장 밝은 그림들이 나왔다. 고요와, 러시아 자연의 영원한 아름다움 — 훗날의 기록은 그의 마지막 그림들을 그렇게 요약한다.

1900년 여름, 그는 마흔을 며칠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풍경화들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핵심 소장품이 되었고, 러시아 사람들이 자기 땅을 떠올릴 때 함께 떠올리는 화면으로 남았다.

자리를 두 번 빼앗긴 사람이, 그 나라의 눈이 된 것이다.

6. 길이 기억하는 것

블라디미르카는 지금도 있다. 포장이 되고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다.

길가의 들판은 여전히 넓고, 하늘은 여전히 낮다.

그 길을 그린 사람은, 쫓겨나는 일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알았을 것이다. 빈 길이 얼마나 많은 발자국을 기억하는지.

↑ 차례

빌헬름 하메르스회 — 방으로 들어온 풍토

1. 빛이 귀한 땅

북위 55 도의 코펜하겐이 있다.

겨울의 해는 늦게 떠서 일찍 진다. 뜬 동안에도 높이 오르지 못하고, 지붕들 위를 낮게 스치며 잿빛으로 흐른다. 몇 달 동안 이 도시의 빛은 밖에 있지 않고 창을 통해 방으로 스민다. 벽에 비스듬히 앉는 창백한 사각형 하나 — 그것이 하루의 태양이다.

빛이 귀한 계절에는 실내가 풍경이 된다. 바깥의 짧은 낮은 창을 통과하며 방 안의 벽과 문, 마룻바닥 위에서 길게 머문다. 이 도시에서 빛은 생활의 안쪽으로 들어온다.

제3부의 여백은 이제 마지막 방에 든다. 셋슈의 여백은 안개였고, 레비탄의 여백은 광활이었다. 둘 다 바깥의 여백이다. 세 번째 여백은 안에 있다. 빈 벽, 닫힌 문, 등 돌린 사람 — 방으로 들어온 풍토다.

2. 잿빛을 택한 제자

1864년 코펜하겐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여덟 살부터 소묘를 배웠다.

왕립미술아카데미를 거쳐, 자유연구학교에서 크뢰위에르에게 배웠다. 크뢰위에르 — 스카겐의 화가.

덴마크의 북쪽 끝 바닷가에서 여름의 눈부신 빛과 푸른 시간을 좇던 사람. 당대 덴마크에서 빛을 가장 밝게 그리던 화가가 그의 스승이었다.

제자는 반대로 갔다. 1885년, 스물한 살의 데뷔작 〈젊은 여인의 초상〉 — 여동생 안나를 그린 그림 — 부터 이미 그의 화면은 낮고 조용했다. 잿빛 살결, 내리깐 눈. 당대부터 주목받은 작품이었다. 스승이 여름의 스카겐으로 갈 때, 제자는 겨울의 코펜하겐에 남았다. 밝음이 시대의 유행이라면, 잿빛은 이 도시가 그에게 준 모국어였다.

1891년 그는 이다 일스테드와 결혼했다. 이다는 그의 평생의 모델이 된다. 다만 세상의 어느 초상과도 다른 방식으로 — 대개, 등을 보인 채.

3. 스트란가데 30번지

1898년, 부부는 항구 곁 옛 거리의 집으로 들어갔다. 스트란가데 30번지.

십일 년을 그 집에서 살았고, 그는 그 방들을 그리고 또 그렸다. 흰 문과 문틀, 빈 벽, 마룻바닥에 앉은 창백한 빛, 피아노, 탁자, 그리고 이다. 검은 옷을 입고 등을 보인 채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이다. 같은 방을 수십 번 그렸지만 같은 그림은 없다. 문이 열리는 각도가 다르고, 빛이 앉는 자리가 다르고, 이다가 있거나 없다. 1909년 스트란가데 30번지를 떠난 뒤 몇 차례 거처를 옮겼지만, 1913년 그는 다시 같은 거리의 25번지로 돌아왔다. 세잔에게 산이 하나였듯, 그에게는 거리가 하나였고 방이 들판이었다.

팔레트는 극도로 좁았다. 회색들, 그리고 채도를 낮춘 노랑과 초록 몇 가지. 금욕이라기보다 이 위도의 빛에 대한 충실한 선택에 가까웠다. 그는 남쪽의 색을 빌려오기보다 코펜하겐의 겨울 방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미세한 색차를 오래 바라보았다.

4. 방의 여백

그의 여백은 벽이다.

화면의 태반이 아무것도 걸리지 않은 벽과 닫힌 문이다. 사건이 없고, 이야기가 없고, 때로는 사람도 없다.

빈 방에 빛만 비껴 든 그림들. 그런데 그 빈자리가 화면에서 가장 크게 말한다. 무언가 방금 일어났거나 일어나려는 것 같은 긴장 — 그러나 끝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

사람이 있을 때도 여백은 줄지 않는다. 이다가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얼굴은 표정을 주고, 표정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등은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다. 등을 보인 사람은 방의 침묵에 편입된다. 사람이면서 여백인 것이다.

그가 밖에서 사랑한 풍경도 실내를 닮은 것들이었다. 그는 런던을 특히 아꼈다. 안개와 석탄 연기에 잠겨, 도시 전체가 커튼 친 방 같던 시절의 런던. 밖에서도 그는 자기 방의 대기를 찾아다녔던 것이다.

1905년, 시인 릴케는 하메르스회의 작품을 빠르게 설명해 버릴 수 없는, 넓고 느린 그림으로 보았다. 잿빛 위도의 낮이 짧은 대신 방 안에서 길게 흐르듯, 그의 화면도 짧게 보이고 오래 남는다.

작품 보기 · 덴마크 국립미술관(SMK) 소장품 검색 — 하메르스회

5. 침묵의 시

그는 조용히 살다 조용히 갔다.

인터뷰를 거의 남기지 않았고, 선언도 유파도 만들지 않았다. 1916년, 쉰한 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십 세기의 소란 속에서 오래 잊혔다. 미술이 크게 외치던 백 년 동안, 잿빛으로 속삭이는 그림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재평가는 세기가 저물 무렵 본격화되었다. 파리의 오르세와 뉴욕의 구겐하임이 회고전을 열었고, 2008년 런던 왕립아카데미의 전시에는 〈침묵의 시〉라는 제목이 붙었다. 그의 생애보다 작품의 고요가 먼저 말하게 한 제목이었다. 소란한 세기에는 들리지 않다가 그 세기가 끝나자 들리기 시작한 그림 — 어쩌면 그것이 침묵의 화가들이 세상과 만나는 시간표인지 모른다. 그들은 늦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6. 방은 조용하다

스트란가데의 그 집은 지금도 있다.

겨울이면 창백한 빛이 여전히 창으로 들어와, 벽에 비스듬히 앉을 것이다.

방은 그를 기억하지 않는다. 방은 다만 그때처럼 조용할 뿐이다.

그거면 된다. 그가 그린 것이 그것이었으니까.

↑ 차례

사이 III — 빈 곳에 무엇이 차 있는가

여백은 아무것도 없는 곳이 아니다. 무엇이 물러난 뒤에도 화면을 움직이는 힘이 남아 있는 자리다. 제3부의 세 화가는 서로 다른 문화와 문법 안에서 빈 공간을 만들었지만, 그 빈 곳은 저마다 다른 것으로 가득했다.

셋슈의 여백에는 안개와 물기가 차 있다. 먹이 번지고 산이 사라지는 동안, 보이지 않는 공간이 깊이를 만든다. 그의 비움은 젖은 비움이다. 형태가 물속으로 물러난 뒤에도 기운이 남는다.

레비탄의 여백에는 거리와 발자국이 차 있다. 러시아의 평원은 넓어서 인간을 작게 만들고, 때로는 사람을 화면 밖으로 밀어낸다. 빈 길과 낮은 하늘이 인간 대신 슬픔을 짊어진다. 부재가 정서의 주체가 되는 여백이다.

하메르스회의 방에는 잿빛과 침묵이 차 있다. 닫힌 문, 비어 있는 벽, 등을 보인 인물은 이야기를 줄이는 대신 시간의 밀도를 높인다. 바깥의 기후가 방 안의 빛과 생활의 리듬으로 번역된 여백이다.

변시지의 여백은 마르고 열려 있다. 바람이 지나갈 길이며, 수평선 너머에서 누군가 돌아와야 하는 자리다. 셋슈의 안개처럼 차오르지 않고, 레비탄의 광활처럼 삼키지 않으며, 하메르스회의 방처럼 닫히지 않는다. 비어 있기 때문에 기다릴 수 있는 여백이다.

등을 보인 하메르스회의 인물이 방 안으로 잠긴다면, 변시지의 노인은 바다 쪽으로 열려 있다. 닫힌 침묵과 열린 침묵. 두 화면 모두 말하지 않지만, 하나는 내면으로 가라앉고 하나는 돌아오지 않은 존재를 향해 남아 있다.

여백을 비교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전통을 하나의 개념으로 평평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안개, 광활, 방, 바람이 형상을 물러나게 하는 서로 다른 방식을 보는 일이다. 빈 곳은 풍토가 가장 조용하게 형식이 되는 자리다.

↑ 차례
제4부 · 문법

폴 세잔 — 산 하나

1. 산 하나

산 하나가 있다.

엑상프로방스 동쪽. 석회암의 등뼈가 하늘로 솟아 있다. 생트빅투아르. 아침에는 잿빛이고, 낮에는 희고, 저녁에는 푸르다. 마을 어디에서나 보인다. 밭에서도, 길에서도, 채석장에서도.

한 사람이 그 산을 그렸다. 그리고 또 그렸다. 유화로, 수채로, 연필로. 십 년을 그리고, 이십 년을 그렸다.

죽는 해까지 그렸다.

같은 산이었다. 그러나 같은 그림은 한 장도 없었다.

폴 세잔. 1839년 이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 은행가의 아들. 파리에서 거절당한 화가. 쉰여섯이 되어서야 첫 개인전을 연 사람. 그가 그 산 앞에서 무엇을 했는지가, 그 뒤에 온 모든 회화의 운명을 바꾸었다.

이야기는 산이 아니라 파리에서 시작한다.

2. 파리

아버지는 그를 은행가로 만들려 했다.

모자 장수에서 은행가가 된 사람. 아들은 1859년 엑스 대학의 법학부에 들어갔다. 이 년을 견디다가, 그림을 택했다. 파리로 갔다.

파리는 그를 받아 주지 않았다. 에콜 데 보자르는 그를 떨어뜨렸다. 그는 수업료 없는 아카데미 쉬스에서 그렸고, 루브르에서 옛 그림을 베꼈다. 살롱은 해마다 그의 그림을 돌려보냈다. 거기서 그는 열 살 위의 피사로를 만났다. 두 사람은 퐁투아즈의 들판에서 나란히 이젤을 세웠다.

그 들판에서 그는 시대의 문법을 배웠다. 인상주의. 빛은 순간이다. 형태는 빛 속에 녹는다. 붓은 그 순간을 좇아 빨라진다. 센강의 물빛과 파리 근교의 젖은 대기가 낳은 문법이었다. 그 땅에서는 옳은 문법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문법 속에서 편하지 않았다. 그의 손은 자꾸 형태를 세우려 했다. 순간이 아니라 지속을, 인상이 아니라 구조를 원했다.

그리고 남쪽에는, 그를 기다리는 다른 빛이 있었다.

3. 부서짐

프로방스의 빛은 파리의 빛과 다르다. 젖어 있지 않고 말라 있다. 흐르지 않고 서 있다. 그 빛 아래에서 사물은 녹지 않는다. 오히려 또렷해진다.

바위는 더 바위가 되고, 소나무는 더 소나무가 된다. 순간을 좇는 붓은 이 땅에서 할 일이 없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오래 그 자리에 있다. 산은 백만 년을 서 있었다.

그는 남쪽으로 돌아갔다. 고향의 집과 들판으로. 파리와 남부를 오가던 발걸음은 갈수록 남쪽에 오래 머물렀다.

돌아온 그에게 세상은 차가웠다. 1886년, 어린 시절의 벗 졸라가 소설 『작품』을 발표했다. 실패한 화가 클로드 랑티에는 세잔을 비롯한 여러 화가의 모습이 겹친 인물로 읽혀 왔고, 이 무렵 두 사람의 서신은 사실상 끊겼다. 소설 한 권만이 결별의 원인이었는지는 논쟁적이지만, 오랜 우정이 끝난 시기였음은 분명하다. 같은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유산은 그에게 그림에 전념할 경제적 자유를 주었다.

벗을 잃고, 살롱을 잃고, 파리를 잃은 사람. 남은 것은 고향의 빛과 산 하나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4. 새 문법

그는 빠른 붓을 버렸다.

대신 작은 붓질을 하나씩 쌓았다. 벽돌을 놓듯이. 한 획이 하나의 면(面)이다. 면과 면이 맞물려 바위가 되고, 소나무가 되고, 산이 된다. 사람들은 훗날 이것을 구축적 붓질이라 불렀다. 인상파의 붓이 순간을 받아 적었다면, 그의 붓은 시간을 쌓아 올렸다. 마른 빛의 땅이 가르친 방법이었다.

원근법도 그의 손에서 조용히 무너졌다. 르네상스 이래 화면은 한 사람의 눈이 한 순간에 본 창이었다.

그러나 그는 산을 한 번 보고 그리지 않았다. 백 번을 보고 그렸다. 아침의 산과 저녁의 산, 길에서 본 산과 채석장에서 본 산이 한 화면에 겹쳐 쌓였다. 탁자 위의 사과들이 저마다 다른 각도에서 본 것처럼 앉아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눈은 하나가 아니다. 보는 일은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

만년에 그는 젊은 화가 에밀 베르나르에게 편지를 썼다. 자연을 원기둥과 구와 원뿔로 다루라고. 이 한 줄은 뒷날 수없이 인용되지만, 그 뜻은 기하학 교실이 아니라 프로방스의 들에 있다. 이 땅의 사물들이 실제로 그렇게 서 있었다. 마른 빛이 형태의 뼈를 드러내는 땅. 그는 본 것을 적었을 뿐이다.

1895년, 화상 볼라르가 파리에서 그의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의 나이 쉰여섯이었다. 젊은 화가들이 그 전시장에서 처음으로 미래를 보았다.

작품 보기 · 〈큰 소나무가 있는 생트빅투아르산〉 1887년경, 코톨드 미술관

5. 폭풍

만년의 그는 거의 산과 단둘이 살았다.

1901년 엑스 북쪽 언덕에 땅을 샀고, 이듬해 그 길가에 화실을 지었다. 로브 화실. 창밖으로 산이 보였다.

비베뮈스 채석장에는 오두막을 빌렸다. 주황빛 바위가 각으로 서 있는 곳. 그는 아침마다 걸어서 모티프 앞으로 갔다. 늙은 몸으로, 화구를 지고.

1906년 10월 15일. 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폭풍우를 만났다. 그는 그치지 않았다. 두 시간을 더 그렸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쓰러졌다. 지나가던 세탁 수레가 그를 실어 왔다.

이튿날, 그는 다시 정원에 나갔다. 정원사의 초상을 그렸다. 몸은 이미 폐렴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10월 22 일, 그는 세상을 떠났다. 예순일곱이었다.

폭풍 속에서 두 시간을 더 그린 사람. 그에게 그리는 일과 사는 일은 마지막 주까지 같은 일이었다.

그가 남긴 문법은 그의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젊은 화가들이 그 붓질에서 입체파를 꺼냈고, 입체파에서 이십 세기가 나왔다. 훗날 호주의 덤불 앞에 선 한 화가도, 원근법을 버리는 법을 그의 구조에서 배웠다. 한 지방의 마른 빛이 낳은 문법이, 세계의 문법이 되었다.

작품 보기 · 〈대수욕도〉 1894–1905, 런던 내셔널갤러리

6. 산 하나로 충분하다

산은 지금도 거기 있다.

아침에는 잿빛이고, 낮에는 희고, 저녁에는 푸르다. 백만 년을 그랬듯이.

달라진 것은 산이 아니라 보는 눈이다. 한 사람이 그 산을 오래 보았고, 본 대로 적었고, 그 뒤로 세계는 다르게 보게 되었다.

풍토는 그렇게 형식이 된다.

산 하나로도 충분하다.

↑ 차례

피트 몬드리안 — 평평한 나라

1. 평평한 나라

세상에서 가장 평평한 땅이 있다.

산이 없다. 언덕도 드물다. 땅의 많은 부분이 바다보다 낮다. 지평선은 어디서나 곧고, 하늘은 땅의 절반이 아니라 거의 전부다.

그리고 이 땅은 사람이 만든 땅이다. 바다를 밀어내고, 둑을 쌓고, 물을 퍼내고, 운하를 곧게 그었다. 들판은 자로 잰 듯 나뉘어 있다. 자연이 놓은 곡선 위에, 사람이 그은 직선의 그물.

수직으로 서 있는 것은 몇 가지뿐이다. 교회의 탑. 풍차. 나무. 그것들이 곧은 지평선 위에 하나씩 서 있다.

수평의 땅과 몇 개의 수직. 이 나라의 풍경은 태어날 때부터 거의 기하학이었다.

1872년, 이 땅의 아메르스포르트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피트 몬드리안. 훗날 회화에서 자연을 지운 사람으로 불리게 될 사람. 그러나 순서를 바로 세우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는 자연을 단순히 삭제한 것이 아니라, 풍경에서 반복해 본 수평과 수직의 관계를 끝까지 추상화했다.

2. 풍차와 강

그는 풍경화가로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림 교사였고, 삼촌은 헤이그파 화가 빌럼 마리스의 제자였다. 어린 피트는 삼촌과 함께 헤인강 가에서 그렸다. 1892년 암스테르담의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갔고, 그 뒤로 오래 고향의 것들을 그렸다.

풍차, 들판, 강. 헤이그파의 어법으로, 그다음엔 이런저런 어법을 갈아입으며.

그 시절 그림들을 나란히 놓으면 한 가지가 보인다. 무엇을 그리든 화면에는 늘 곧은 지평선이 있고, 그 위에 수직 하나가 서 있다. 풍차 한 대. 나무 한 그루. 탑 하나. 소재는 바뀌어도 뼈대는 바뀌지 않는다. 땅이 준 뼈대였다.

1912년, 마흔의 그는 파리로 갔다. 거기에 시대의 새 문법이 있었다. 입체파. 사물을 면으로 부수고 다시 짜는 법. 그는 그 문법을 빠르게 익혔다. 나무 한 그루가 그의 화면에서 해마다 면들로 부서져 갔다.

그러나 파리의 입체파는 부순 것을 결국 사물 쪽으로 되돌렸다. 그는 되돌리고 싶지 않았다. 더 가고 싶었다.

어디까지인지는 아직 몰랐다.

그것을 가르쳐 준 것은 파리가 아니라, 고향의 바다였다.

3. 바다 앞에서

1914년, 가족을 만나기 위해 고향을 방문하던 중 전쟁이 터졌다.

그는 발이 묶였다. 파리의 화실로 돌아갈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는 자기가 떠나온 평평한 땅에 갇혀 있었다.

그 갇힘이 그를 완성했다.

그는 바다 앞에 오래 서 있었다. 북해. 수평선이 화면의 전부인 바다. 그 앞에 방파제가 곧게 뻗어 있었다.

수평의 물결과 수직의 말뚝. 그는 그것을 그렸다. 그리고 또 그렸다. 그릴수록 사물은 줄고 선만 남았다.

1915년의 〈흑백의 구성 10〉에 이르면 화면에는 짧은 수평선과 수직선들만 남는다. 더하기와 빼기 기호처럼 흩어진 획들. 바다는 사라졌는데, 바다의 리듬은 처음으로 온전히 남았다.

입체파가 한 일과 바다가 한 일은 달랐다. 입체파는 사물을 부수는 법을 가르쳤다. 바다는 부수고 나면 무엇이 남는지를 보여 주었다. 수평과 수직. 이 땅이 처음부터 그에게 보여 주던 두 방향.

전쟁의 시기, 그는 라렌의 화가촌에서 같은 길을 걷던 판 데르 레크와 판 두스뷔르흐를 만났다.

1917년 판 두스뷔르흐가 창간한 잡지 《데 스테일》에 몬드리안은 핵심 이론가이자 작가로 참여했다.

4. 격자

그는 회화의 어휘를 끝까지 줄였다.

세 원색. 빨강, 파랑, 노랑. 세 무채색. 검정, 하양, 회색. 그리고 두 방향. 수평과 수직. 그것이 전부였다.

1919년 말부터 격자가 나타났고, 1920년에 이르러 세상이 아는 몬드리안이 완성되었다. 검은 선의 그물, 그 사이에 앉은 원색 몇 칸.

그는 이것을 신조형주의라 불 렀고, 자연을 넘어선 보편의 아름다 움이라 설명했다. 1914년의 한 편지에서도 평평한 화면 위에 선과 색의 관계를 구축하는 일을 강조했다. 여기서 ‘평평한 화면’은 회화의 조건을 뜻하지만, 동시에 바다를 밀어내고 둑과 운하로 나눈 그의 고향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격자는 자연의 단순한 부정이라기보다, 자연과 인간의 구축이 만난 질서를 멀리 추상화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그가 무엇을 끝내 허락하지 않았는지를 보면 이것이 더 분명해진다. 대각선이다. 1924년부터 두 사람의 견해 차이는 깊어졌다. 이듬해 판 두스뷔르흐가 대각선을 새로운 조형 원리로 제시하자, 몬드리안은 데 스테일과 결별했다. 그는 마름모꼴 그림에서 캔버스를 마흔다섯 도 기울일 때조차, 그 안의 선만은 수평과 수직으로 지켰다. 틀은 기울어도 선은 기울지 않는다. 평평한 나라에서 온 사람의 마지막 선이었다.

작품 보기 · 몬드리안 컬렉션 · 테이트 작가 페이지

5. 격자의 도시

1938년, 전쟁의 그림자가 다시 유럽을 덮자 그는 파리를 떠나 런던으로 갔다. 1940년, 고국이 점령되고 파리가 무너지자 대서양을 건넜다. 뉴욕이었다.

예순여덟의 화가가 도착한 곳은, 공교롭게도 또 하나의 격자였다. 맨해튼. 자로 그은 거리들, 직각의 블록들.

사람이 그린 또 하나의 땅. 그는 그 도시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의 격자가 처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검은 선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작은 색 사각형들의 행렬이 잇는다. 노랑 위를 빨강과 파랑이 점멸하며 달린다. 반세기 동안 고요하던 수평과 수직이, 재즈의 박자로 뛰기 시작한 것이다.

격자가 춤을 배웠다.

그는 다음 그림 〈빅토리 부기우기〉를 완성하지 못했다. 1944년 2월 1일, 뉴욕에서 눈을 감았다. 일흔한 살이었다.

화실 벽에는 색종이 조각들이 마지막 구성을 기다리며 붙어 있었다. 수평으로, 수직으로.

작품 보기 · 〈빅토리 부기우기〉 1942–44(미완), 헤이그 미술관

6. 추상의 밑에 있는 땅

그 나라는 지금도 평평하다.

운하는 곧고, 들판은 자로 잰 듯 나뉘어 있고, 지평선 위에 탑이 하나 서 있다.

기차를 타고 그 땅을 지나는 사람은 창밖에서 몬드리안을 본다. 그가 그린 것이 아니라, 그를 그리게 한 것을.

가장 추상적인 그림의 밑에, 가장 구체적인 땅이 있다.

↑ 차례

프레드 윌리엄스 — 중심 없는 땅

1. 그릴 수 없는 땅

유칼립투스 몇 그루가 서 있다.

간격은 아무렇게나다. 앞의 나무와 뒤의 나무가 다르지 않다. 길은 없다. 언덕도 이렇다 할 것이 없다.

시선을 끌고 들어갈 것이 아무것도 없다. 왼쪽을 보아도 같고, 오른쪽을 보아도 같다. 한 시간을 걸어도 같다.

유럽의 화가라면 여기서 이젤을 접었을 것이다.

그림이 안 되는 땅. 호주의 내륙은 오래 그렇게 불렸다. 식민지의 화가들은 이 땅에 영국의 안개를 입히고, 프랑스의 빛을 입혔다. 나무를 참나무처럼 그렸고, 마른 덤불을 목가적인 숲으로 바꾸었다. 땅은 말이 없었다. 다만 그 그림들 속에 있지 않았을 뿐이다.

한 화가가 이 땅 앞에 다시 섰다. 프레드 윌리엄스. 1927년 멜버른의 리치먼드에서 태어나, 열네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상점 진열장 만드는 공방의 도제가 되었던 사람. 그가 이 땅의 침묵을 처음으로 받아 적게 된다.

그러나 그 전에, 그는 먼저 유럽의 문법을 배우러 갔다.

2. 수입된 문법

1951년이 끝나갈 무렵, 윌리엄스는 런던으로 떠났다.

첼시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배우고, 센트럴 미술공예학교에서 동판화를 배웠다. 사우스켄싱턴의 셋방에서 살았고, 액자 가게에서 일하며 물감값을 벌었다. 그 시절 그가 그린 것은 풍경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뮤직홀의 배우들, 거리의 얼굴들. 5년 가까운 세월이었다.

그가 배운 것은 유럽 풍경화의 오랜 문법이었다. 화면은 창이다. 앞쪽에 무언가를 놓고, 가운데로 길을 내고, 멀리 하늘로 빠져나간다. 가까운 것은 크고 짙게, 먼 것은 작고 흐리게. 나무 한 그루가 액자처럼 화면 가장자리를 잡아 준다. 시선은 그 길을 따라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아름다운 문법이다. 수백 년 동안 유럽의 들판과 강과 성당을 담아 온 문법. 그 들판에는 길이 있었고, 강은 굽이쳤고, 마을은 저 멀리 첨탑을 세우고 있었다. 문법은 땅에서 나온 것이었다. 유럽의 땅에서.

1956년, 그는 런던 생활을 정리하고 멜버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듬해, 붓을 들고 고향의 덤불 앞에 섰다.

3. 충돌

문법이 부서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땅에는 길이 없었다. 시선을 끌고 들어갈 중심 이 없었다. 앞과 뒤가 구분되지 않았다. 가까운 유칼립투스와 먼 유칼립투스는 크기만 다를 뿐 같은 회갈색이었다. 굽이치는 강도, 첨탑도, 액자가 되어 줄 우람한 참나무도 없었다. 있는 것은 흩어짐뿐이었다. 마른 땅 위에 나무들이, 아무 의도 없이, 끝없이, 흩어져 있었다.

유럽의 창으로 내다보면 이 땅은 텅 비어 보였다. 그릴 것이 없어 보였다.

여기서 두 갈래 길이 있었다. 하나는 땅을 기존 문법에 맞게 고치는 길이었다. 없는 길을 그려 넣고, 없는 그늘을 만들어 넣는 것. 또 하나는 배운 문법을 이 땅 앞에서 다시 조직하는 길이었다.

윌리엄스는 두 번째 길을 택했다.

같은 시기의 동료들이 인간의 형상을 지키자는 선언에 이름을 올릴 때에도, 그는 조용히 비켜서 있었다.

그의 물음은 다른 데 있었다. 이 땅은 어떤 형식을 원하는가.

4. 발명

답은 화면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는 땅을 화면과 나란하게 일으켜 세웠다. 원근법의 창을 닫은 것이다. 깊이는 사라지고, 땅은 벽처럼, 지도처럼 화면 가득 펼쳐졌다. 멀어짐을 알려 주는 것은 이제 가느다란 수평선 하나뿐이다. 어떤 그림에서는 그 선마저 없다. 그러면 땅은 화면 전체가 된다. 위도 아래도 없이, 다만 펼쳐진 땅.

1962년 겨울, 그는 멜버른과 질롱 사이의 화강암 능선, 유양스에 처음 갔다. 현장에서 수채로 그리고, 화실로 돌아와 그것을 밀고 나갔다. 그 위에 그는 물감의 매듭을 얹었다. 툭, 툭. 짙은 물감 한 덩이가 나무 한 그루다. 획 하나가 쓰러진 둥치다. 1960년대 중반의 유양스 연작에서 이 언어는 완성된다. 마른 바탕색 위에 흩어진 검은 매듭들. 공중에서 내려다본 것 같은 땅. 훗날 사람들은 그 물감 매듭을 서예적이라 불렀다.

붓이 형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붓 자국 하나가 그대로 사물 하나가 되는 것 — 동양의 붓이 오래 알고 있던 일을, 그는 호주의 덤불 앞에서 혼자 다시 찾아냈다.

이 추상이 무(無)에서 온 것은 아니다. 그 뼈대는 세잔과 입체파의 구조 연구에서 왔다. 유럽의 가장 깊은 문법을 배운 손이, 그 문법으로 유럽의 창을 닫은 것이다. 부순 것이 아니라, 배운 것으로 넘어선 것. 〈You Yangs Landscape〉는 1963년 윈상(Wynne Prize)에 출품되었고, 훗날 이 연작의 대표작으로 꼽히게 된다. 흩어짐은 더 이상 결함이 아니었다. 그것이 이 땅의 질서였다. 중심이 없다는 것이 이 땅의 중심이었다.

유럽의 눈에 텅 비어 보이던 땅이, 새 문법 속에서 처음으로 가득 차 보였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시드니 놀런의 비합리성과 러셀 드라이스데일의 형식성 사이를 잇는 고리로 설명한 적이 있다. 그 좁은 길로 그는 한 대륙의 풍경을 데리고 지나갔다.

1977년, 뉴욕 현대미술관이 그의 개인전을 열었다. 호주 화가로서는 처음이었다. 전시의 이름은 이랬다.

한 대륙의 풍경.

작품 보기 · 〈You Yangs Landscape〉 1963, NSW 주립미술관

5. 하늘에서 본 불

1976년, 그는 볼로냐의 아트페어로 가는 비행기에 탔다.

밤이었다. 노던 테리토리 상공이었다. 창 아래로 산불의 선들이 지나갔다. 어둠 속에서 불의 선만 남은 대지.

땅의 뼈 같은 것이 거기 있었다.

그는 그해에 열두 장의 과슈 연작을 그렸다. 그리고 만년의 마지막 연작이 이어진다. 필바라. 대륙 북서쪽의 마른 붉은 땅. 철광석의 땅. 1979년부터 1981년까지, 그는 그 땅의 무늬를 그렸다.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쉰다섯이었다.

그의 여정은 하나의 문장으로 줄일 수 있다. 유럽의 창을 배우러 갔던 사람이 돌아와 그 창의 한계를 깨닫고, 마지막에는 하늘에서 자기 대륙의 무늬를 내려다보았다. 문법은 땅 앞에서 흔들렸고, 그는 그 흔들림을 외면하지 않았다.

정직한 화가에게 풍토는 장식적 취향으로 오지 않는다. 기존의 시선을 흔들고, 다른 문법으로 응답할 것을 요구한다.

작품 보기 · 〈Waterfall polyptych〉 1979, NSW 주립미술관

6. 이제는 그림이다

호주는 오래 물었다. 우리 땅은 왜 그림이 안 되는가.

윌리엄스가 답했다. 그림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문법이 없었던 것이라고. 땅은 처음부터 자기 문법을 갖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흩어진 나무들은 지금도 거기 서 있다.

아무렇게나. 끝없이. 이제는 그것이 그림이다.

↑ 차례

사이 IV — 땅이 시선을 다시 조직하는 방식

문법은 대상을 무엇으로 그리는가보다, 세계를 어떤 질서로 보게 하는가의 문제다. 세잔과 몬드리안, 프레드 윌리엄스는 중심에서 배운 회화의 문법을 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다. 자기 장소 앞에서 그 문법을 다시 조직했다.

세잔은 생트빅투아르산 앞에서 원근법의 한순간을 포기했다. 산을 여러 번 보고, 시간의 면을 겹쳐 쌓았다. 프로방스의 마른 빛은 형태를 분명히 드러냈고, 그의 붓은 그 뼈대를 면과 색의 구조로 세웠다.

몬드리안은 네덜란드의 평평한 대지와 운하, 방파제와 바다에서 수평과 수직을 길어 올렸다. 그는 고향을 그대로 묘사하지 않고 구조를 증류해 몸에 지닌 채 떠났다. 격자는 장소를 지운 결과가 아니라, 장소의 방향을 가장 멀리 추상화한 결과로 읽을 수 있다.

윌리엄스는 호주의 덤불 앞에서 유럽 풍경화의 전경과 중심, 안정된 지평선을 잃었다. 땅은 어디서나 비슷하게 반복되고 시선은 머물 중심을 찾지 못한다. 그는 화면을 펼치고 작은 획들을 분산해, 중심 없는 대지를 중심 없는 문법으로 응답했다.

변시지의 문법은 수평선에서 시작하지만 수평선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늘과 바다와 들을 같은 마른 빛으로 잇고, 그 광막 속에 노인과 조랑말과 초가를 낮게 둔다. 윌리엄스가 하늘에서 내려다본 대지의 분산을 그렸다면, 변시지는 땅 위에 서서 바람을 맞는 존재의 눈높이를 지켰다.

같은 수평도 서로 다른 세계를 조직한다. 몬드리안의 수평은 어디서나 작동하는 추상적 질서가 되었고, 변시지의 수평선은 돌아오지 않는 배와 이어도가 걸린 기다림의 경계로 남았다. 하나는 장소를 휴대 가능한 구조로 증류했고, 하나는 장소에 머물며 그 선의 기억을 지켰다.

풍토가 다르면 동일한 형식이 절대로 나올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같은 원근법과 같은 수평, 같은 검은 획도 서로 다른 조건 속에서 다른 기능을 얻는다. 풍토가 형식을 낳는다는 말은 형태의 외양을 결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시선의 질서와 의미의 방향을 바꾼다는 뜻이다.

↑ 차례
제5부 · 물성

안젤름 키퍼 — 납과 재와 짚

1. 폐허에서 태어난 아이

1945년 3월, 독일 남부의 도나우에싱겐.

전쟁이 끝나기 두 달 전, 폭격으로 무너진 도시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가 눈을 떠 처음 본 세상은 폐허였다. 무너진 벽, 그을린 들보, 벽돌 더미. 그는 그 잔해 속에서 놀며 자랐다. 또래들이 숲과 강을 첫 풍경으로 가질 나이에, 그의 첫 풍경은 부서진 것들이었다.

이 글의 마지막 부는 물성을 다룬다. 재료의 종류뿐 아니라 화면이 무게와 촉각, 균열과 마름을 얻는 방식의 이야기다. 어떤 풍토는 색과 선과 여백만으로 충분히 말해지지 않는다. 흙과 돌과 재의 감각이 화면의 살갗으로 올라와야 한다.

독일이 그런 땅이다. 이 땅의 문제는 경치만이 아니라 그 밑에 묻힌 역사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숲과 강 아래에 인류가 저지른 가장 어두운 시간이 묻혀 있다. 키퍼에게는 물감만으로 그 무게를 감당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폐허에서 태어난 아이가 그것을 증명하게 된다.

2. 침묵의 문법

그가 자란 전후의 서독에는 문법이 하나 있었다. 말하지 않는다는 문법이다.

아버지들의 전쟁에 대해, 이웃이 사라진 일에 대해, 재건의 나라는 침묵을 택했다. 폐허는 빠르게 치워졌고, 물음은 그보다 빠르게 치워졌다.

미술 교사의 아들이던 그는 대학에서 법학을 삼 학기 다니다 그만두고 미술로 옮겼다. 그리고 1969년, 스물넷의 그는 이 나라의 침묵을 정면으로 건드렸다. 아버지가 입던 국방군 군복을 꺼내 입고, 프랑스와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이곳저곳에서 나치식 경례를 재연하며 사진을 찍은 것이다. 「점령들」이라 이름 붙은 연작이었다.

나라가 뒤집혔다. 금기를 조롱하는 것인가, 되살리려는 것인가. 그의 답은 둘 다 아니었다. 기억하라는 것이었다. 제삼제국의 광기가 이 문화에서 무엇을 앗아 갔는지 인정하라는 것. 잊기로 한 나라에서, 잊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화가의 생이 시작되었다.

이 글의 다른 화가들은 수입된 회화의 문법을 부수며 출발했다. 키퍼가 부순 첫 문법은 회화의 것이 아니었다. 조국의 침묵이었다.

3. 짚 — 물감이 모자라는 순간

뒤셀도르프에서 그는 보이스에게 비공식으로 배웠다. 펠트와 기름 덩어리로 작업하던 사람. 재료가 곧 이야기일 수 있음을 보여 준 스승이었다. 젊은 키퍼는 유리와 짚과 나무와 식물로 작업했다. 부서지고 삭는 재료들 — 영원을 약속하지 않는 재료들이었다.

그리고 파울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가 왔다. 수용소에서 부모를 잃은 시인은 독일 문화의 마르가레테와 유대 전통의 줄라미트를 금빛 머리카락과 재의 이미지로 병치했다.

키퍼는 이 시를 화면으로 옮기며 결정적인 발걸음을 내디뎠다. 마르가레테의 금발을 물감으로 그리지 않고, 진짜 짚을 캔버스에 붙인 것이다. 유화와 짚 — 〈마르가레테〉의 재료 목록은 그렇게 적힌다.

왜 물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는가. 물감으로 그린 금발은 재현에 머물 수 있지만, 마르고 타기 쉬우며 시간이 지나면 삭는 짚은 실제 물성을 화면에 들여온다. 그 짚이 마르가레테의 머리카락을 암시하는 순간, 그림은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일에서 물질이 증언하는 일로 넘어간다.

물감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자리에서 화가는 재료의 실제 성질을 불러온다. 5부의 명제가 여기서 선다.

4. 납 — 무게의 회화

그다음은 납이었다.

그는 이 금속의 물성에 매료되었다고 말해 왔다. 녹이고 달굴 때 표면에 떠오르는 여러 빛깔들, 특히 금빛 — 연금술사들이 찾던 그 금을 그는 납이 녹는 순간에서 보았다. 가장 천한 금속에서 금을 꺼내려던 오랜 꿈.

가장 무거운 과거에서 무언가를 꺼내려는 화가에게, 이보다 맞는 재료는 없었다.

납으로 그는 책을 만들었다. 펼칠 수 없이 무거운 책들. 날 수 없는 납 비행기를 만들고, 화면 위에 납판을 덧대었다. 재와 흙과 셸락과 해바라기 씨가 그 위에 얹혔다. 그의 화면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 쌓는 것이 되었다. 몇 겹의 물질이 앉은 표면은 갈라지고 부스러지며, 그림이라기보다 발굴 현장의 단면처럼 보인다.

주제도 발굴이었다. 그는 나치 건축의 거대한 내부와 광장을 그렸다. 〈무명 화가에게〉 같은 작품에서 기념비적 공간은 영광의 무대가 아니라 비어 있는 증거물이 된다. 바그너의 서사와 게르만 신화, 금기가 된 이름들을 화면으로 끌어냈지만, 그것은 미화보다 대면에 가까웠다.

1980년, 그는 바젤리츠와 함께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독일관에 섰다. 논쟁은 격렬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세계는 이해하게 된다. 이 무거운 화면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땅에 묻힌 시간을 파내는 일 — 삽 대신 납과 재와 짚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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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라 리보트

1992년, 그는 독일을 떠나 남프랑스 바르자크로 갔다.

버려진 견직 공장과 삼십오 헥타르의 땅. 그는 거기에 라 리보트라는 자기만의 세계를 지었다. 유리 건물들, 지하 통로, 수장고, 탑. 화실이라기보다 하나의 총체예술 — 폐허에서 태어난 사람이 이번에는 자기 손으로 폐허와 건축 사이의 풍경을 지은 것이다.

2008년 파리로 옮길 때 수많은 트럭이 작품을 실어 날랐지만, 바르자크의 건축과 지하 공간은 그 자리에 남았다. 2023년에는 빔 벤더스가 그의 생애와 작업을 영화로 만들었다.

팔십 대에 이른 뒤에도 그는 납과 짚, 재와 식물을 다루는 작업을 이어 왔다. 태어나며 마주한 폐허를 평생 기억의 물질로 되돌려 주는 작업이었다.

6. 물질이 기억하는 것

독일의 들판은 다시 푸르다.

폐허는 치워졌고, 도시들은 새로 섰고, 그 위로 여든 해가 넘는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한 화가의 화실에서는 아직도 납이 녹고 짚이 탄다.

땅은 잊어도, 물질은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가 평생 증명한 것은 그 한 가지다.

↑ 차례

요하네스 캬르발 — 용암과 이끼

1. 젊은 땅

아이슬란드는 지구에서 가장 젊은 땅에 속한다.

두 대륙판이 갈라지는 틈 위에 얹힌 섬. 화산이 여전히 땅을 만들고 있고, 굳은 용암 위에 이끼가 첫 살림을 차린다. 나무는 드물다. 거친 기후와 얕은 흙, 오랜 벌목과 방목의 역사가 함께 숲을 줄였다. 눈에 보이는 것은 검은 용암 벌판과 그 위를 덮은 연둣빛 이끼, 이끼 사이의 바위들이다.

유럽 풍경화의 문법은 이 섬에서 재료를 찾지 못한다. 그 문법이 필요로 하는 것들 — 우거진 숲, 굽이치는 강, 마을의 첨탑, 부드러운 원경 — 이 여기에는 없다. 있는 것은 땅 자체다. 갓 태어난, 아직 식지 않은 것 같은, 땅의 맨살.

키퍼의 독일에서 물성은 역사의 지층과 만났다. 이 섬에서 물성은 지질과 만난다. 아직 굳어 가는 용암과 이끼, 태어나는 중인 땅의 표면이다.

그 땅의 살갗을 평생 그린 화가가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이 지금도 지폐 속에서 매일 만나는 얼굴이다.

2. 잔디집의 아이

1885년, 그는 아이슬란드 남부 메달란드의 잔디집에서 태어났다.

잔디집 — 나무가 없는 땅의 집이다. 돌을 쌓고 그 위에 흙과 잔디를 덮어 짓는다. 땅으로 지은 집. 열세 남매의 아홉째였고, 집은 가난했다. 네 살에 그는 동쪽 끝 보르가르피외르뒤르의 친척에게 맡겨졌다. 여섯 살에 양을 지켰고, 훗날 스스로 말하기로는 여덟 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라서는 어부가 되었다. 청년 캬르발은 고기잡이배에서 일하며 남는 시간에 그렸다. 기초는 선배 화가 아우스그리뮈르 욘손에게 조금 배웠을 뿐이다.

잔디집에서 태어나, 양을 치고, 바다에서 일한 사람. 이 이력은 가난의 기록이지만, 다르게 읽으면 한 화가가 제 나라의 물질들 — 흙과 돌과 이끼와 바다 — 을 몸으로 통과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는 아이슬란드를 배우기 전에 아이슬란드를 살았다.

3. 바다 건너의 배움

1911년, 스물여섯의 그는 지원금을 받아 런던으로 갔다. 레이캬비크 청년협회와 아이슬란드 의회가 마련한 돈이었다. 런던에서는 왕립미술원 입학을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미술관을 돌며 터너를 비롯한 거장들의 그림을 들여다보고 베껴 그리는 것으로 배움을 이어 갔다. 거절당한 유학생의 시간이었다.

1912년 코펜하겐으로 옮겨 기술학교에서 소묘를 공부했고, 1914년 마침내 왕립미술아카데미에 들어갔다. 그는 1918년까지 그곳에서 수학하며 인상파와 표현파, 입체파 등 시대의 문법을 익혔다.

국가의 지원과 도시의 배움은 그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었다. 소묘에 능한 화가가 되어 프랑스와 이탈리아도 둘러보았다. 그리고 돌아왔다. 자신이 떠나온 섬으로.

그 지원은 한 개인의 호의가 아니라, 아직 독립국이 아니던 아이슬란드 사회가 젊은 화가의 가능성을 공적으로 뒷받침한 일이었다. 한 나라의 그리움이 한 사람을 미술학교에 보낸 셈이다.

배움의 길은 더뎠지만, 그는 끝내 돌아와 자기 땅의 표면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4. 시선을 낮추다

돌아온 그의 앞에 그 땅이 있었다. 배운 문법이 통하지 않는 땅이.

숲을 그리는 법을 배웠는데 숲이 없었다. 원경을 짜는 법을 배웠는데, 이 섬의 진실은 멀리 있지 않았다.

그는 결정적인 한 가지를 했다. 시선을 낮춘 것이다.

그의 풍경화들은 배경의 산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땅바닥에 초점을 둔다. 발밑의 용암, 바위의 주름, 이끼의 살결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산과 하늘은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풍경화의 문법으로 보면 거꾸로 된 그림이다. 주인공이어야 할 원경이 조연이 되고, 밟고 지나가는 땅바닥이 주인공이 된다.

그 클로즈업 속에서 회화가 물질화로 넘어간다. 용암의 표면은 어떤 추상보다 복잡한 질감이고, 그는 배운 입체파의 면 분할을 그 질감을 받아 적는 데 썼다. 화면은 반쯤 추상이 되었는데, 추상하려 해서가 아니라 이 땅의 표면이 원래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바위들 속에 그는 이따금 얼굴을 그려 넣었다. 엘프와 신화의 존재들이 용암의 주름 사이로 어른거린다. 아이슬란드 설화에 전하는 숨은 존재들이 풍경의 표면과 겹쳐지는 장면이다. 그의 화면에서 땅은 물질인 동시에 이야기가 깃든 이웃이 된다.

덧붙이자면, 캬르발이라는 성은 그가 스물다섯 무렵 형제들과 함께 지어 가진 것이다. 아일랜드의 옛 왕의 이름이라 한다. 잔디집의 아홉째 아이가 스스로에게 준 왕관이었다.

작품 보기 · 레이캬비크 미술관 캬르발스타디르

5. 훈장을 사양한 사람

그는 살아서 이미 나라의 화가였다.

괴짜였고, 사랑받았고, 전설이 되었다. 1965년, 국가가 매 훈장의 대십자를 수여하려 하자 그는 이를 사양한 것으로 전한다. 국가의 격식보다 화가의 자유를 앞세운 일화로 남았다.

1972년 그는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레이캬비크에 그의 이름을 붙인 미술관 캬르발스타디르가 문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이천 크로나 지폐에 올랐다. 1977년에는 비외르크라는 열한 살 소녀가 첫 음반에 그를 기리는 플루트 곡을 실었다. 훗날 세계가 알게 될 그 목소리의 첫 헌정이 화가에게 간 것이다.

훈장은 사양하고 지폐에는 오른 사람. 국가의 격식은 사절했지만, 백성의 주머니 속으로는 들어간 사람.

섬의 지원으로 배움을 이어 간 화가는, 끝까지 그 섬의 것이었다.

6. 시선을 낮춘 자리

아이슬란드의 용암 벌판에는 오늘도 이끼가 자란다.

아주 느리게, 검은 돌을 연둣빛으로 덮으면서.

그 느린 살결을 들여다본 사람이 있었다.

무릎을 굽히고, 시선을 낮추고, 남들이 밟고 지나가는 것 앞에 멈춰 선 사람.

그림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 차례

앤드루 와이어스 — 마른 계절의 표면

1. 늦가을의 나라

펜실베이니아의 채즈퍼드에 늦가을이 온다.

잎이 지고, 풀이 마르고, 언덕의 살이 빠진다. 여름내 초록에 덮여 있던 땅의 뼈대 — 능선의 흐름, 밭의 골, 헛간의 각 — 가 드러난다. 색은 갈색과 잿빛과 낡은 흰색으로 줄어든다. 관광객이 떠나는 계절. 그림엽서가 외면하는 계절.

한 화가는 특히 이 계절을 사랑했다. 그는 늦가을과 겨울을 풍경의 뼈대가 드러나는 때, 쓸쓸함 밑에 이야기가 숨어 있는 때로 바라보았다.

키퍼의 물성이 역사와 만났고 캬르발의 물성이 지질과 만났다면, 이 화가의 표면은 계절과 만난다. 마른 계절. 그리고 그는 그 계절을 그리기 위해 광택이 적고 천천히 쌓이는 재료를 골랐다.

2. 아버지의 학교

1917년, 그는 채즈퍼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대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삽화가 N. C. 와이어스.

보물섬과 로빈 후드의 그림을 그린 사람이다.

몸이 약했던 앤드루는 학교 대신 집에서 배웠다. 미술 학교도 아버지의 화실이 전부였다. 다섯 남매가 모두 재능을 보인 그 집에서, 막내는 풍경과 인물과 수채를 익혔다. 그의 학교는 아버지와, 창밖의 채즈퍼드였다.

1945년 10월, 아버지와 세 살배기 조카를 태운 차가 집 근처 건널목에서 멈춰 섰고, 기차가 그것을 덮쳤다.

그는 훗날 아버지의 죽음을 자기 예술의 형성적 사건이라 불렀다. 실제로 그 직후, 그의 그림은 성숙기의 양식으로 단단해졌다. 밝던 수채의 시절이 끝나고, 마르고 낮고 조용한 화면이 시작된 것이다. 상실이 지나간 자리의 색 — 그의 늦가을은 계절이면서 동시에 그 해 이후의 마음이었다.

3. 달걀과 마른 붓

그가 고른 재료가 이 장의 물성을 만든다. 달걀 템페라.

유화보다 오래된 재료다. 달걀노른자에 마른 안료 가루와 물을 섞어 쓴다. 기름의 윤기가 적고, 얇은 층을 오래 겹쳐 쌓을 수 있다. 느리고 세심한 작업을 요구하는 재료다. 누나 헨리에타의 남편인 화가 피터 허드가 1936년 이 기법을 그에게 알려 주었다.

수채를 쓸 때도 그는 물을 줄였다. 마른 붓 — 물기를 거의 짜낸 붓끝으로 풀 한 포기, 머리카락 한 올을 세워 가는 기법. 왜 이 물감들이어야 했는가. 그의 땅과 계절이 그런 질감이기 때문이다. 늦가을 들판의 마른 풀, 바랜 판자, 낡은 회벽, 서리 앉은 흙 — 유화의 기름진 윤기로는 이 마른 것들이 그려지지 않는다. 템페라의 무광이 마른 풀의 무광이고, 마른 붓의 갈필이 마른 풀잎의 결이다. 재료의 물성과 풍토의 물성이 일치하는 자리 — 5 부가 찾아온 것이 바로 이 일치다.

그는 스스로를 추상화가로 여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사물을 꼭 닮게 그리는 화가의 말로는 이상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의 화면에서 진짜 주인공이 형상이 아니라 질감과 톤 — 마름의 정도, 빛의 온도 — 임을 보면 그 말이 맞다. 그는 사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사물에 앉은 계절을 그렸다.

4. 두 개의 땅, 이웃의 얼굴

그의 세계 지도에는 두 곳뿐이다. 겨울의 채즈퍼드와 여름의 메인주 쿠싱. 평생을 이 두 마을 사이에서만 오갔다. 대가가 된 뒤에도 뉴욕으로도 파리로도 옮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 두 마을의 이웃들이 그의 평생의 모델이 되었다. 채즈퍼드에서는 쿠어너 부부의 농장을 삼십 년 가까이 그렸다. 쿠싱에서는 올슨 남매의 낡은 집과, 그 집의 크리스티나를 그렸다.

1948년의 〈크리스티나의 세계〉. 마른 풀밭에 한 여인이 앉아, 저 멀리 언덕 위의 잿빛 집을 향해 몸을 뻗고 있다. 크리스티나 올슨은 보행이 어려워 주로 팔과 상체의 힘으로 이동했으며 휠체어 사용을 꺼렸다.

화면은 그 사연을 설명하지 않는다. 마른 풀밭의 질감과 집까지의 아득한 거리, 뻗은 몸 하나로 견딤의 감각을 만든다.

1986년에는 세상이 뒤집혔다. 1971년부터 1985년까지 제작된 247점의 헬가 연작이 ‘비밀의 그림들’이라는 이름과 함께 공개된 것이다. 다만 가족에게까지 완전히 비밀이었는가를 두고는 이후 논란이 이어졌다. 시대의 화단은 그를 오래 낮춰 보았다. 추상의 세기에 촌마을의 사실화가라고.

1977년 한 미술사가는 가장 과대평가된 화가와 가장 과소평가된 화가를 하나씩 대 보라는 물음에 두 자리 모두 같은 이름을 적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두 마을과 마른 계절, 이웃의 얼굴을 그렸다.

작품 보기 · 브랜디와인 미술관(채즈퍼드) — 와이어스 3 대 컬렉션

5. 눈 내리는 언덕

그는 아흔한 살까지 그렸다.

2009년 1월, 겨울의 채즈퍼드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평생 사랑한 계절 속에서였다.

훈장으로 치면 미국이 화가에게 줄 수 있는 것을 다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자리를 증언하는 것은 훈장보다 두 채의 집이다. 쿠어너 농장과 올슨 하우스 — 그가 그린 이웃들의 그 평범한 집들이, 그와의 인연 하나로 국가 사적이 되었다. 화가가 세상을 뜬 뒤, 그림의 무대가 기념비가 된 것이다. 위대한 풍경을 찾아다닌 화가들은 많다. 그는 반대의 증명이다. 두 개의 평범한 마을, 몇 집의 이웃, 그리고 남들이 외면한 계절 — 그것으로 평생이 모자라지 않았다. 풍토는 넓이가 아니라 깊이의 문제라는 것. 5 부의 마지막 증인이 남기는 증언이다.

6. 끝까지 바라본 풍경

채즈퍼드의 언덕은 지금도 시월이면 살이 빠진다.

풀이 마르고, 뼈대가 드러나고, 색이 갈색으로 내려앉는다.

관광객이 떠난 들판에 서면, 누구나 잠시 그의 그림 속에 서게 된다.

그가 만든 풍경이 아니다. 그가 끝까지 바라봐 준 풍경이다.

바라봄이 오래되면, 사람은 그 땅의 한 증언자가 된다.

↑ 차례

사이 V — 시간이 화면의 살갗이 될 때

물성은 재료의 목록만을 뜻하지 않는다. 화면이 빛을 반사하거나 삼키는 방식, 두껍게 쌓이거나 마르게 스미는 방식, 시간이 표면에 남는 방식까지 포함한다. 제5부의 세 화가는 역사와 지질과 계절이 회화의 살갗으로 바뀌는 서로 다른 과정을 보여 주었다.

키퍼에게 납과 재와 짚은 묘사할 수 없는 역사를 실제 무게로 불러오는 물질이다. 화면은 그려진 창이 아니라 발굴된 지층이 된다. 재료가 기억을 대신 증언하고, 균열과 부스러짐이 시간의 상처를 보존한다.

캬르발에게 용암과 이끼는 젊은 땅의 표면이다. 그는 돌을 화면에 붙이지 않았지만, 배운 면 분할과 가까운 시선을 통해 용암의 주름을 회화의 조직으로 바꾸었다. 물성은 재료 자체뿐 아니라 사물을 보는 거리와 붓질의 촉각에서도 태어난다.

와이어스의 물성은 달걀 템페라와 마른 붓에서 온다. 얇고 무광인 표면은 늦가을 들판과 낡은 집, 인물의 마른 몸과 같은 호흡을 갖는다. 재료의 성질과 계절의 성질이 서로 닮아 갈 때 화면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촉각적 경험이 된다.

변시지의 화면도 마름을 품는다. 그러나 마름을 하나의 신비한 재료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광택을 억제한 표면, 제한된 바탕색, 빠르고 거친 검은 선이 제주 들판의 마른 촉감과 조응한다. 앞으로 안료와 바탕칠, 물감층에 대한 보존과학적 조사가 더해진다면 이 물성의 언어는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키퍼가 역사를 물질로 쌓았다면, 변시지는 구술과 유족 기록이 전하는 섬의 기억을 폭풍의 각도와 숙인 몸, 비어 있는 들판으로 번역했다. 두 방식은 우열의 관계가 아니다. 말할 수 있는 조건과 말하기 어려웠던 조건이 서로 다른 증언의 표면을 만들었다.

이제 변시지의 종장으로 간다. 앞의 열다섯 화가는 제주화를 예고하기 위해 존재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저마다 완전한 답이다. 다만 색과 선, 여백과 문법과 물성이라는 다섯 질문을 들고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면, 그 질문들이 한 언어 안에서 동시에 작동하는 드문 통합을 볼 수 있다. 종장

↑ 차례
종장

변시지 — 제주화, 바람이 언어가 될 때

1. 바람의 섬

언덕 위에 노인이 서 있다.

말 한 마리가 곁에 있다. 초가 한 채, 돌담 한 줄. 바다는 멀고, 바람은 가깝다. 하늘과 땅이 같은 빛이다. 마른 풀잎의 빛. 그 빛 속을 검은 선 몇 개가 지난다. 기울어진 소나무, 낮게 나는 까마귀, 수평선에 걸린 조각배 하나.

그림의 이름을 모르고 보아도, 이 화면이 어느 섬의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안다. 제주. 바람이 모든 것을 흔드는 섬. 돌이 많고, 나무가 비틀리고, 사람들이 바람에 기대어 걷는 법을 배우는 땅.

이 글은 열다섯 화가와 열다섯 장소를 지나왔다. 아를의 태양과 카리브의 눈부심, 알할커의 식물과 메인의 바위, 안개의 열도와 러시아의 평원, 프로방스의 산과 호주의 덤불, 독일의 재와 아이슬란드의 용암. 그 과정에서 풍토가 색과 선, 여백과 문법, 물성의 가능성을 어떻게 바꾸고, 화가들이 그 조건에 어떻게 응답하는지를 보았다.

이제 마지막 방이다. 앞의 화가들이 하나의 요소만을 지녔다는 뜻은 아니다. 이 글이 따로 따라온 다섯 갈래가 한 화면 안에서 어떻게 맞물릴 수 있는지를, 변시지의 제주 시기 회화가 특히 선명하게 보여 준다는 뜻이다.

2. 두 개의 수도

1926년, 그는 이 섬의 서귀포에서 태어났다.

1931년 가족을 따라 바다를 건넜다. 오사카. 식민지의 아이가 제국의 도시에서 자랐다. 어린 날 다친 다리는 평생 지팡이를 쥐게 했다. 훗날 그의 화면에 서게 될 노인의 지팡이가, 화가 자신의 손에 먼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림에서 길을 찾았다. 일본 관학파의 화실에서 서양화의 법 — 인상파의 빛과 아카데미의 소묘 — 을 배웠고, 놀랍도록 빨리 인정받았다. 그런데 그 영예의 시절에 그린 인물들을 보라. 1945년, 전쟁이 끝나던 해의 고개 숙인 나부. 1947년, 노동복을 입은 여인 〈Femme〉. 화단이 최연소의 이름을 그에게 줄 때, 그의 붓은 시대의 짐 진 몸들 곁에 있었다. 첫 인간부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1957년, 그는 도쿄를 떠나 서울로 돌아왔다. 약 십팔 년의 서울 시절이 시작되었다. 그 시절의 화면에도 두 겹이 흐른다. 한 겹은 비원 — 나라를 잃은 왕조의 닫힌 정원. 고요한 고궁의 풍경 밑에 지나간 역사의 그늘이 있었다. 또 한 겹은 지게꾼과 나무 패는 사람 — 전후 서울의 밑바닥에서 짐을 지고 도끼를 휘두르는 몸들. 애도와 노동. 그의 눈은 어느 도시에서도 그 두 가지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성공한 화가였다. 두 수도가 그를 인정했다. 그러나 그가 익힌 문법은 아직 제주를 담는 언어가 아니었다. 하틀리에게 메인이, 잇손에게 아마미가 기다리고 있었듯이 — 그에게도 다시 만나야 할 섬이 있었다.

3. 나이 쉰의 귀향

1975년, 변시지는 서울을 떠나 제주로 돌아갔다.

선언은 없었다. 하틀리처럼 문장을 앞세우지도, 고갱처럼 낙원을 말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태어난 섬으로 갔다. 사십여 년 떠나 있던 자리로.

그리고 배운 문법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인상파의 빛은 아른거리고 머무는 빛이다. 그런데 이 섬의 빛은 바람과 한 몸이었다. 머물지 않고 지나가며, 사물을 어루만지기보다 흔들었다. 배워 온 문법만으로 이 섬을 그리면 그림은 되었지만, 그가 살아낸 제주에는 닿지 못했다. 익숙한 풍경은 남고 풍토는 빠졌다.

이 글의 화가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통과한 문 앞에 이제 그가 섰다. 배운 문법을 그대로 지킬 것인가, 제주 앞에서 다시 구성할 것인가.

그는 배운 것을 단순히 폐기하지 않고 다시 구성했다. 팔레트는 마른 풀잎의 빛과 먹처럼 검은 선으로 좁아졌고, 화면은 광택이 낮고 건조한 표면으로 바뀌었다. 검은 붓질은 바람의 리듬처럼 빠르고 거칠어졌다.

오십의 대가가 이미 익힌 기술을 숨긴 채, 신인처럼 다시 보는 법을 시작한 것이다.

무엇이 그 변화를 가능하게 했는가. 이 글의 대답은 장소와 화가의 긴 상호작용이다. 제주가 기존 문법의 한계를 드러냈고, 화가는 그 요구를 외면하지 않았다. 풍토는 취향의 장식이 아니라 시선을 바꾸라는 압력으로 왔고, 변시지는 그 압력에 자기 생의 기억과 기술로 응답했다.

4. 제주화 — 다섯 요소가 한 언어로

그 뒤 삼십팔 년 동안 형성된 독자적 회화 언어를, 이 글은 제주화(濟州畵)라 부르려 한다.

미리 말해 둔다. 이 이름은 통용되는 미술사 용어가 아니라 이 글이 제안하는 비평적 개념이다. 제주에서 제작된 모든 회화를 뜻하지도 않는다. 변시지가 제주의 풍토를 색과 선, 여백과 문법과 물성으로 통합해 세운 독자적 회화 언어를 가리킨다. 장차 그 영향과 계보가 확인될 때 더 넓은 양식 개념으로 확장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우선 한 작가의 성취를 정확히 명명하는 데서 시작한다. 색. 마른 풀잎색은 고흐의 타오르는 노랑도, 레베론의 눈먼 흰색도 아니다. 볕에 바래고 바람에 오래 마른, 그러나 아직 살아 있는 풀의 색이다. 적은 색이 더 넓은 가능성을 연다는 타마요의 절제와 나란히 놓이지만, 변시지의 색은 제주 들판의 시간에서 독자적으로 형성되었다.

선. 그의 검은 선은 형태를 그리지 않는다. 견디는 힘을 세운다. 응와레이의 선이 땅 자체의 궤적이고 하틀리의 선이 바위의 무게였다면, 이 선은 바람 앞에 선 것들의 선이다. 기울되 꺾이지 않는 소나무, 흔들리되 끊어지지 않는 수평선. 떨림이 곧 획인 선.

여백. 그의 여백은 셋슈의 안개처럼 지우지 않고, 레비탄의 광활처럼 삼키지 않고, 하메르스회의 방처럼 닫지 않는다. 그의 여백은 바람이 지나가는 길이고, 수평선 너머에서 누군가 돌아와야 하는 자리다.

하메르스회의 장에서 예고한 대로 — 이 섬의 여백에는 기다림이 차 있다.

문법. 화면은 대개 수평선 하나로 나뉜다. 세잔이 산 하나로, 몬드리안이 수평·수직으로, 윌리엄스가 세워진 화면으로 각자의 문법을 얻었듯이, 그의 문법은 수평선에서 출발한다. 하늘과 바다와 들이 같은 마른 빛으로 이어지고, 그 광막 속에 노인과 조랑말과 초가가 낮게 놓인다. 화면의 비례와 대상의 낮은 배치는 수평의 긴 호흡을 돕는다.

물성. 키퍼의 납과 재, 캬르발의 용암 같은 시선, 와이어스의 마른 템페라처럼 변시지의 화면에도 고유한 살갗이 있다. 광택을 억제한 바탕, 제한된 색층, 거칠고 빠른 검은 선이 마른 들판의 촉감과 조응한다. 다만 이 물성을 재료 분석 없이 비유만으로 닫아서는 안 된다. 작품의 안료와 바탕칠, 물감층에 대한 보존과학적 연구가 더해질 때 제주화의 물성은 더욱 단단한 언어를 얻을 것이다.

다섯 요소는 한 화면에서 만나 서로를 설명한다. 마른 풀잎색 위에서 검은 선이 서고, 그 선 사이로 여백이 열리며, 수평선은 화면의 문법을 조직한다. 그 모든 것이 건조하고 절제된 물성 위에서 한 호흡을 얻는다.

요소들의 우연한 동거가 아니라 반복 속에서 굳어진 체계이기에 언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폭풍을 그려도 이 언어이고, 고요를 그려도 이 언어다. 제주화는 한 섬의 풍토와 한 화가의 생애가 오랜 시간 서로를 바꾸며 형성한 회화 언어다.

5. 휘어진 몸 — 노동과 애도의 도상

이 언어에는 사람이 산다. 그 사람들을 자세히 보아야 한다.

흔히 제주화의 인물은 고독한 노인 하나로 기억된다. 그러나 화면들을 두루 보면 다른 이들이 함께 산다.

말을 부리는 마부, 물질하는 해녀, 밭을 가는 농사꾼. 일하는 섬사람들이다. 노인은 그들 가운데서 홀로 뽑힌 관념의 기호가 아니라, 평생 일하고 이제 지팡이를 짚은 — 그들의 대표다. 제주화는 쓸쓸한 풍경화가 아니라 한 섬의 살림 전체를 품은 회화다. 일하는 사람, 함께 일한 짐승, 살림의 집, 노동의 돌담, 생업의 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흔드는 바람. 그리고 이 사람들에게는 육십팔 년을 관통하는 자세가 하나 있다. 휘어진 몸, 숙인 고개다.

1945년의 고개 숙인 나부에서 시작되었다. 아름다움을 내보이는 장르인 누드에서조차 그의 인간은 고개를 숙였다. 1947년 노동복의 여인이 그 곡선을 이었고, 서울의 지게꾼이 등으로 그 곡선을 졌고, 제주의 노인이 바람 앞에서 그 곡선으로 버텼고, 2013년의 절필작이 그 곡선으로 끝났다. 노동의 몸에서 견딤의 몸으로, 견딤의 몸에서 애도의 몸으로 — 한 곡선의 육십팔 년.

애도라고 했다. 유족의 증언과 남아 있는 구술 기록은 이 해석의 중요한 근거다. 노인의 숙인 고개는 피로나 체념만이 아니라 예(禮)의 자세로 읽을 수 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앞에 숙인 머리. 수평선의 배와 이어도 역시 전설의 그리움에 머물지 않고,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기억하는 도상으로 확장된다.

돌아오지 못한 이들 — 이 섬에서 그 말은 무겁다. 2004년 구술에서 화가는 폭풍을 한국에 돌아온 뒤 수사기관에서 겪은 시달림과, 그 시달림에 대한 저항에 연결했다. 그러나 화면에는 사건의 이름이 직접 적히지 않는다. 키퍼의 장에서 보았듯, 기억을 공적으로 말할 수 있는 조건과 오랫동안 말하기 어려웠던 조건은 서로 다른 형식을 낳는다. 4·3 을 비롯한 섬의 상처를 오랫동안 공개적으로 말하기 어려웠던 제주에서, 역사는 폭풍의 각도와 기울어진 소나무, 숙인 고개의 예로 우회해 나타났다.

그러므로 제주화의 바람은 기상만이 아니다. 시대다. 그 화면의 고독은 관념의 고독이 아니라 노동을 다 지나온 몸의 고독이고, 그 침묵은 빈 침묵이 아니라 말할 수 없던 것들의 침묵이다. 풍토가 형식을 낳는다는 이 글의 명제는, 이 장에서 한 겹을 더 얻는다. 역사도 풍토다. 바람에 실려서라도, 그것은 형식이 된다.

6. 유배와 축복

그는 자신을 풍운아라 불렀다. 바람과 구름의 사람. 스스로 고른 이 말에 그의 생애가 들어 있다. 제국의 수도를 지나, 성공을 지나, 끝내 바람의 섬에 이른 사람.

그리고 한 문장을 남겼다. 삶은 유배요, 예술은 축복이다.

앞의 화가들을 지나온 독자에게 이 문장은 여러 갈래로 울릴 것이다. 고흐에게는 정착하지 못한 떠돎이 있었고, 고갱에게는 도착하지 못한 투사가 있었으며, 레비탄에게는 실제 추방이, 잇손에게는 스스로 택한 주변부가 있었다. 그러나 유배가 모든 화가의 공통 조건은 아니다. 더 넓게 말하면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중심과 주변, 떠남과 귀환, 소속과 거리 사이에서 작업했다. 변시지의 문장은 그 여러 거리를 자신의 생애 안에서 ‘유배와 축복’이라는 두 말로 압축한다.

변시지에게는 돌아온 섬과 그 들판에 선 몸, 그리고 삼십팔 년의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섬은 출생만으로 그의 것이 된 것이 아니다. 오랜 부재 뒤에 돌아와 자기 문법이 바뀌는 것을 받아들였기에 비로소 거주의 장소가 되었다. 그는 2013년, 여든일곱으로 붓을 놓았다. 마지막 화면에도 1945년에 시작된 숙인 어깨의 곡선이 남았다.

서귀포 기당미술관의 상설전시실에는 그의 회화가 연중 전시되고 있으며, 이 글은 탄생 백 년이 되는 해에 쓰인다. 재조명이라는 말을 쓰지만, 하메르스회의 장에서 배운 대로 고쳐 말하는 편이 정확하다. 침묵의 화가들은 늦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사조들의 소란한 세기가 지나갔다. 이제 바람 소리가 들리는 시간이다.

7. 이 글의 물음으로 돌아간다. 풍토는 어떻게 형식을 낳는가.

열다섯 장소는 하나의 답을 반복하지 않았다. 색과 선, 여백과 문법과 물성으로, 같은 질문이 얼마나 다르게 응답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마지막 섬의 답은 그들보다 우월한 결론이 아니다. 다만 이 글이 나누어 살핀 다섯 갈래가 한 회화 언어 안에서 유난히 밀도 있게 만나는 답이다.

한 사람이 그 가능성을 보여 준다. 두 수도의 문법을 배우고, 1975년에 돌아가, 배운 것을 버리기보다 바람 속에서 다시 구성하며, 삼십팔 년 동안 섬과 응답을 주고받은 사람. 그 긴 관계에서 형성된 언어를 이 글은 제주화라고 부른다.

언덕 위에 노인이 서 있다.

말 한 마리가 곁에 있다. 바다는 멀고, 바람은 가깝다.

노인은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다. 돌아오지 못한 이들에게, 지나간 시간에게, 그리고 어쩌면 이 그림 앞에 서게 될 우리에게.

바람은 지금도 분다.

그리고 이제, 바람은 언어를 가졌다.

↑ 차례

인용 및 주요 사실 출처

최종 대조했으며, 온라인 자료의 최종 확인일은 2026년 7월 16일이다.

서장 — 이론적 참조

  • 와쓰지 데쓰로, 『풍토: 인간학적 고찰』(1935).
  • 마르틴 하이데거, 「짓기, 거주하기, 사유하기」(1951).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1980), 영토화·탈영토화·재영토화 논의.

빈센트 반 고흐

  • 빈센트 반 고흐, 테오에게 보낸 편지 666번, 아를, 1888년 8월 21일 또는 22일
  • 반고흐미술관 〈해바라기〉 소장품 기록

루피노 타마요와 호세 바스콘셀로스

  • 멕시코시티 타마요 미술관 공식 자료
  • 멕시코국립자치대학교(UNAM), 바스콘셀로스 총장 취임 연설과 1920년 연대기

에밀리 캄 응와레이

  • 호주국립미술관, Emily Kam Kngwarray 학습 자료
  • 테이트모던, Emily Kam Kngwarray 전시 가이드
  • 안마티어 공동체의 문화적·지적 재산과 의례 지식은 공동체의 권한과 맥락을 존중하여 서술 범위를 제한했다.

앤드루 와이어스

  • 브랜디와인 미술관, 와이어스 가문 작가 자료 — 피터 허드와 달걀 템페라

변시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5년도 한국 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 변시지』, 채록연구 이인범. 특히 제2차(캔버스), 제4차(폭풍과 저항), 제5차(비원에서 제주), 제7차(누런색) 구술을 참조했다.
  • 변시지 작품·육필·가족 증언: Estate of Byun Shi-Ji / ARTSHIJI 아카이브. ‘숙인 고개=예(禮)’와 이어도· 귀환 도상에 관한 해석은 유족 기록에 근거한다.
  • 서귀포시 공립미술관, 기당미술관 소개와 변시지 상설전시

그 밖의 작가와 작품 각 장의 「작품 더 보기」에 연결된 국공립 미술관, 작가 재단, 주요 소장기관의 작가 소개와 작품 기록을 우선 기준으로 삼았다. 직접 출처를 확인하기 어려운 일화와 평가 문구는 삭제하거나 간접 서술로 조정했다.

보강 대조 자료

  • Museo Tamayo 공식 연보 — 파리 체류와 1964년 멕시코 귀국
  • Landsbankinn, Jóhannes Kjarval: Main Biographical Events and Exhibitions
  • 야마구치현립미술관·셋슈 공식 전기 자료 — 귀국 뒤 분고 활동과 야마구치 정착
  • Museo Nacional Thyssen-Bornemisza — 몬드리안과 데 스테일 연보
  • Ordrupgaard·The David Collection — 하메르스회 거주지 연보
  • Tretyakov Gallery Magazine — 이사크 레비탄 생애 연보
  • Brandywine Museum of Art — 〈헬가 연작〉 247점, 1971-1985
  • Marsden Hartley 전기 자료 — 1936년 블루록스 해난 희생자 3명
↑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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