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풍토는 형식을 낳는다/제4부 · 문법

화가와 풍토 · 제11장 · 16 / 24

피카소, 부수고 다시 놓다

제4부 · 문법

하나

얼굴 하나다.

여자의 얼굴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두 눈이 같은 쪽에 있다.

정면에서 본 눈처럼 둘 다 동그란데, 얼굴은 옆을 보고 있다.

코는 옆에서 본 모양이다.
콧날이 선으로 그려져 있다.

입은 정면이다.

한 얼굴 안에 두 방향이 있다.

앞에서 본 것과 옆에서 본 것이 같은 자리에 있다.

색은 면으로 나뉘어 있다.

한쪽 뺨이 노랗고 다른 쪽이 회색이다.
경계가 분명하다.

그림자로 나뉜 것이 아니다.
그냥 나뉘어 있다.

굵은 검은 선이 면들을 가른다.

윤곽선이다.

실제 얼굴에는 윤곽선이 없다.
여기에는 있다.

깊이가 없다.

코가 앞으로 나오지 않는다.
같은 평면에 있다.

배경은 한 색이다.

방인지 밖인지 알 수 없다.

가까이 가면 물감이 고르게 칠해져 있다.

두껍지 않다.
문지른 자리도 없다.

빠르게 칠했지만 정확하다.

앞 부에서 본 터너의 화면과 정반대다.

터너는 경계를 지웠다.
여기서는 경계를 그렸다.

둘

파블로 피카소는 1881년에 스페인 남부에서 태어났다.

말라가다.

지중해에 붙어 있는 도시다.

아버지가 그림을 가르치는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렸다.
아주 잘 그렸다.

열 몇 살에 이미 어른처럼 그렸다.

바르셀로나로 갔고 마드리드에도 있었다.

1900년 무렵 파리로 갔다.

가난했다.

파란색으로 그린 시기가 있다.
마르고 굶은 사람들을 그렸다.

그다음에 분홍이 섞인 시기가 있다.

1907년에 큰 화면 하나를 그렸다.

여자 다섯이 있는 그림이다.

얼굴 몇 개가 가면처럼 생겼다.

그 무렵 그는 아프리카와 이베리아의 조각을 보았다.

박물관에서 보았고 화실에 두기도 했다.

그 조각들은 사람을 닮게 만들지 않았다.
사람을 다르게 만들었다.

눈이 크고 코가 곧고 얼굴이 납작하다.

그것이 서툰 것이 아니라 다른 문법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 뒤 몇 해 동안 그는 형태를 조각냈다.

사물을 여러 면으로 쪼개고 다시 놓았다.

한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본 것을 한 화면에 겹쳤다.

이것을 뒤에 사람들이 큐비즘이라 불렀다.

그는 오래 살았다.

아흔이 넘게 살았고 죽을 때까지 그렸다.

방식을 여러 번 바꿨다.

고전적으로 그린 시기가 있고 다시 부순 시기가 있다.

1937년에 큰 회색 화면을 그렸다.

스페인의 한 마을이 폭격당한 일을 그린 것이다.

소와 말과 사람이 뒤엉켜 있고 위에 램프가 있다.

색이 없다.
회색과 검정과 흰색뿐이다.

만년에는 남프랑스에서 살았다.

도자기를 만들고 판화를 찍었다.

1973년에 세상을 떠났다.

셋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이 장은 조심해서 써야 한다.

피카소를 풍토로 설명하려 하면 무리가 생긴다.

그는 파리에서 그림을 만들었다.
스페인이 아니라 파리다.

그리고 그의 방식은 세계로 퍼졌다.

어느 한 땅에 묶이지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 묻는 편이 정확하다.

그가 문법을 부술 수 있었던 조건은 무엇이었는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빛이다.

지중해의 빛은 세다.

빛이 세면 그림자가 진해진다.

그러면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딱 갈린다.
중간이 얇아진다.

정오의 강한 빛 아래에서 사람의 얼굴은 입체로 보이지 않는다.
면으로 잘려 보인다.

북쪽의 흐린 빛에서는 다르다.

빛이 부드러우니 밝음에서 어두움으로 천천히 넘어간다.
그것이 입체가 된다.

북쪽 회화가 명암과 입체에 강한 이유가 여기 있다.

앞 부의 터너는 그 흐린 빛에서 형태를 녹였다.

남쪽에서는 형태가 녹지 않는다.
잘린다.

잘린 면을 다시 배열하는 일은 남쪽의 눈에 자연스럽다.

둘째는 겹침이다.

이것이 더 중요하다.

스페인 남부는 여러 문화가 지나간 땅이다.

로마가 있었고 이슬람이 오래 있었고 유대인이 살았다.
바다 건너 아프리카가 가깝다.

한 도시 안에 여러 시대의 건물이 있다.

이슬람의 장식은 사람의 형상을 만들지 않았다.
기하 무늬로 갔다.

그 옆에 성당의 조각이 있다.

같은 자리에 두 가지 문법이 있는 것이다.

그런 땅에서 자란 사람은 문법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것을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냥 알게 된다.

문법이 하나뿐이라고 믿는 사람은 그것을 부수지 못한다.
부술 것이 있다는 생각을 못 한다.

여러 개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 부순다.

여기서 세 가지가 따라온다.

첫째, 강한 빛이 평면을 낳는다.

앞의 부들에서 우리는 이 논지를 여러 번 만났다.

타마요의 화면에 깊이가 없었다.
오키프의 화면에도 없었다.

두 땅 다 마르고 빛이 셌다.

피카소도 그 계열에 있다.

지중해와 멕시코와 뉴멕시코가 한 줄에 놓인다.

강한 빛의 회화는 평면으로 간다.

둘째, 겹친 문화가 복수의 문법을 낳는다.

서장에서 우리는 풍토의 범위를 정했다.

전쟁도 풍토가 되고, 여러 문화가 지나간 자리도 풍토가 된다고 했다.

이 장이 두 번째 경우다.

그 자리에서 자란 사람의 몸에는 하나 이상의 문법이 들어 있다.

셋째, 부수는 일에는 문법이 필요하다.

그는 아주 잘 그릴 수 있었다.

열 몇 살에 이미 정확하게 그렸다.

그 정확함이 있어야 부술 수 있다.

문법을 모르는 사람이 어긋나게 쓰면 그것은 실수다.
문법을 아는 사람이 어긋나게 쓰면 그것은 형식이다.

같은 화면이 실수도 되고 형식도 된다.

무엇이 그것을 가르는가.

옆의 것이 정확한지가 가른다.

3부의 첫머리에서 우리는 같은 말을 했다.

여백은 그 옆의 것이 증명한다.

부순 문법도 그 옆의 것이 증명한다.

넷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이 대면은 대립이 선명하다.

피카소는 문법을 부수었다.
변시지는 문법을 지켰다.

변시지의 화면 문법은 아주 단순하다.

수평선 하나가 화면을 위아래로 나눈다.
아래가 땅이고 위가 하늘이다.

사람은 대개 아래쪽에 서 있다.

멀리 있는 것은 작고 가까운 것은 크다.

깨진 데가 없다.

부순 것이 아니라 줄인 것이다.

여기에 이 대면의 핵심이 있다.

부수는 것과 줄이는 것은 둘 다 단순해지는 길이다.

그런데 결과가 반대다.

부수면 낯설어진다.

두 눈이 한쪽에 있는 얼굴은 낯설다.
처음 보는 것이 된다.

줄이면 익숙해진다.

수평선과 사람 하나만 있는 화면은 익숙하다.
누구나 아는 배치다.

낯설게 만들면 다시 보게 되고 익숙하게 만들면 오래 보게 된다.

다시 보는 것과 오래 보는 것은 다른 일이다.

왜 한 사람은 부수고 다른 사람은 줄였는가.

땅이 달랐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땅에는 문법이 여럿 겹쳐 있었다.

겹친 자리에서는 부술 수 있다.
부술 것이 여러 개 있으니 어느 하나에 매이지 않는다.

변시지가 돌아온 섬에는 문법이 하나 있었다.

바람이 하나이고 바다가 하나이고 수평선이 하나다.

여럿이 없는 땅에서는 부술 수 없다.

부수면 남는 것이 없다.

그러니 줄이는 쪽으로 간다.

하나뿐인 것을 더 정확하게 놓는 쪽으로 간다.

두 번째 차이가 있다.

피카소는 방식을 여러 번 바꿨다.

파란 시기와 큐비즘과 고전적인 시기와 만년의 도자기.

한 사람의 작업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 다르다.

변시지는 한 방식을 오래 지켰다.

제주에 간 뒤 서른여덟 해 동안 같은 방향으로 갔다.

바꾸는 사람과 지키는 사람이다.

여기에 우열은 없다.

바꾸는 사람은 넓어지고 지키는 사람은 깊어진다.

넓어지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고 깊어지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세 번째로 볼 것이 있다.

두 사람 다 폭력을 그렸다.

피카소는 폭격당한 마을을 그렸다.

날짜가 있는 사건이다.
어느 해 어느 달의 일이다.

변시지는 폭풍을 그렸다.

그리고 훗날 구술에서 폭풍은 날씨가 아니라 저항이라고 말했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구술사, 2004–2005, 171쪽)

날짜가 없다.

사건이 아니라 상태다.

사건을 그리면 그 사건을 아는 사람이 읽는다.
상태를 그리면 그 상태를 겪는 사람이 읽는다.

사건은 끝나고 상태는 이어진다.

그래서 한쪽 화면은 증언이 되고 다른 쪽 화면은 견딤이 된다.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증언이 없으면 잊히고 견딤이 없으면 살 수 없다.

다섯

얼굴에 두 방향이 있다.

앞에서 본 것과 옆에서 본 것이 함께 있다.

한 사람을 한 번에 다 보려 한 것이다.

먼 섬의 화면에는 노인이 등을 보이고 있다.

한 방향뿐이다.

앞은 보이지 않는다.

한쪽은 다 보려 했고 다른 쪽은 덜 보여 주었다.

다 보면 알게 되고 덜 보면 남는다.

두 화면 다 사람을 그렸다.

놓는 방식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