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풍토는 형식을 낳는다/제3부 · 여백

화가와 풍토 · 제9장 · 13 / 24

터너, 지워진 여백

제3부 · 여백

하나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다.

화면 가운데가 밝다.
노란 빛이다.

그 빛에서 바깥으로 소용돌이가 퍼진다.

어두운 회색과 갈색이 돌아간다.
붓이 원을 그리며 지나갔다.

아래쪽에 검은 것이 있다.

배일 것이다.

돛대 같은 선이 하나 비스듬히 서 있다.
연기 같은 것이 옆으로 눕는다.

그런데 확실하지 않다.

배의 윤곽이 어디에서 끝나고 물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 모르겠다.

경계가 없다.

물과 공기와 배가 한 덩어리로 섞여 있다.

가까이 가 보자.

물감이 얇다.

문지른 자리가 많다.
붓이 아니라 손이나 천으로 문지른 것 같다.

긁어낸 자리도 있다.
아래 색이 드러나 있다.

칠하기만 한 화면이 아니다.
칠하고 지운 화면이다.

밝은 자리는 물감을 걷어내서 밝다.
흰색을 올린 것이 아니다.

빼서 밝게 만든 것이다.

앞 장들과 다르다.

팔대산인은 붓을 대지 않아 비웠다.
윌리엄스는 같은 것으로 채워 비웠다.

여기서는 그렸다가 없앴다.

지워서 비운 것이다.

둘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는 1775년에 런던에서 태어났다.

이발사의 아들이었다.

집이 넉넉하지 않았다.

어려서 그림에 재주가 있었다.
아버지가 가게에 아들의 그림을 걸어 두고 팔았다고 한다.

열네 살에 왕립미술원에 들어갔다.

아주 빨랐다.

젊어서 이미 인정을 받았다.

처음에는 수채로 시작했다.
건물과 풍경을 정확하게 그렸다.

여행을 많이 했다.

영국을 걸어 다녔고 알프스를 넘었고 이탈리아에 여러 번 갔다.
베네치아를 오래 그렸다.

물이 있는 곳을 좋아했다.

바다와 강과 호수.

나이가 들면서 그림이 바뀌었다.

형태가 점점 줄었다.

젊을 때는 배를 배처럼 그렸다.
나중에는 배가 어디 있는지 찾아야 했다.

빛이 많아지고 사물이 적어졌다.

당대에도 논쟁이 있었다.

너무 흐리다고, 완성이 안 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계속 그 방향으로 갔다.

한번은 눈보라 속의 증기선을 그렸다.

그 그림에 대해 그가 배의 돛대에 몸을 묶고 폭풍을 보았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그 화면을 보면 밖에서 본 폭풍이 아니라 안에서 본 폭풍처럼 보인다.

말년에 그는 기차도 그렸다.

비 오는 날 다리 위를 달리는 기차다.

새로 생긴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1851년에 세상을 떠났다.

작품 대부분을 국가에 남겼다.

남긴 것이 아주 많았다.

유화와 수채와 스케치가 수만 점이었다.

그중 많은 것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그것을 버리지 않았다.

완성과 미완의 경계가 그에게는 흐렸던 것이다.

경계를 흐리게 하는 사람은 자기 작업의 경계도 흐리게 둔다.

셋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잉글랜드의 습기는 형태를 녹인다.

1부에서 우리는 오키프를 보았다.

마른 공기에서 윤곽이 칼처럼 섰다.
먼 것도 선명했다.

여기는 정반대다.

공기에 물기가 많으면 빛이 그 물기에 부딪쳐 흩어진다.

그러면 멀리 있는 것의 경계가 풀린다.
색도 옅어진다.

섬나라의 공기가 그렇다.

바다에 둘러싸여 있으니 습기가 마르지 않는다.

안개와 비와 흐린 날이 많다.

그 땅에서 오래 본 사람의 눈에는 윤곽이 원래 흐린 것이다.

그는 그 흐림을 결점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밀었다.

실제보다 더 흐리게 그렸다.

여기에 이 장의 핵심이 있다.

풍토가 준 것을 그는 과장했다.

풍토가 형식을 낳는다는 말은 화가가 받아 적는다는 뜻이 아니다.

받아서 밀고 나가는 것이다.

땅이 조금 흐리게 보여 주면 화가가 아주 흐리게 만든다.

조건은 방향을 정하고 화가는 거리를 정한다.

여기서 세 가지가 따라온다.

첫째, 여백이 밝다.

팔대산인의 여백은 흰 종이다.
그런데 조용하다.

윌리엄스의 여백은 황갈색이다.
조용하다.

터너의 여백은 빛이다.

밝고 시끄럽다.

빈 자리가 가장 강한 자리가 된다.

보통 여백은 물러난다.
여기서는 여백이 앞으로 나온다.

둘째, 여백이 움직인다.

소용돌이 때문이다.

붓이 원을 그리며 지나갔으니 눈도 돌아간다.

가만히 있는 여백과 도는 여백은 다른 것이다.

가만히 있는 여백은 기다림이다.
도는 여백은 사건이다.

셋째, 여백에 중심이 있다.

이것이 가장 특별하다.

앞의 두 여백에는 중심이 없었다.

종이는 어디나 같고 황갈색 땅도 어디나 같다.

터너의 여백에는 중심이 있다.

빛이 가장 밝은 한 자리가 있고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이 퍼진다.

그러니 이 여백은 비어 있으면서 무엇이다.

빛이 그 자리에 있다.

빈 곳이 가장 실한 곳이 된 것이다.

넷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먼저 닮은 것을 본다.

두 사람 다 바다를 오래 보았다.

터너는 섬나라에서 살았다.
변시지는 섬에서 살았다.

둘 다 물에 둘러싸인 곳이다.

두 사람 다 습한 땅의 화가다.

그리고 두 사람 다 보이지 않는 것을 여백으로 만들었다.

터너의 여백은 빛이다.
변시지의 여백은 바람이다.

빛도 보이지 않고 바람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빛을 보는 것이 아니라 빛이 닿은 것을 본다.
바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흔든 것을 본다.

두 사람 다 그것을 그리지 않고 있게 했다.

이제 차이를 보자.

가장 큰 차이는 바다까지의 거리다.

터너의 바다는 화면을 삼킨다.

물이 가까이 있다.
아주 가까이 있다.

우리가 물속에 있는 것 같다.

변시지의 바다는 멀리 있다.

수평선 근처에 있다.
화면의 위쪽에 얇게 있다.

왜 이렇게 다른가.

서 있는 자리가 다르다.

터너는 배 위에서 보았다.
혹은 물가에 아주 가까이 서서 보았다.

변시지는 언덕에서 보았다.

바다 안에서 본 바다와 바다를 바라보는 바다는 다른 것이다.

그러면 여백의 성질도 달라진다.

터너의 여백은 나를 둘러싼다.

앞뒤와 위아래가 다 그것이다.
빠져나갈 데가 없다.

변시지의 여백은 내 앞에 있다.

저쪽에 있다.
나는 여기에 서 있다.

둘러싸인 여백은 무섭다.
앞에 있는 여백은 외롭다.

무서움과 외로움은 다른 감정이다.

무서움은 지금의 일이고 외로움은 오래된 일이다.

그래서 터너의 화면은 순간처럼 보이고 변시지의 화면은 오랜 시간처럼 보인다.

두 번째 차이가 있다.

배가 다르다.

터너는 증기선을 그렸다.

연기를 내고 물을 가르며 나아간다.
움직이는 배다.

변시지는 조각배를 그렸다.

돛도 잘 보이지 않는다.
떠 있는 배다.

터너의 배는 폭풍과 싸운다.

변시지의 배는 싸우지 않는다.

떠나는 중인지 돌아오는 중인지도 알 수 없다.

서장에서 우리는 제주의 돌담을 보았다.

막지 않고 통과시키는 담이다.

터너의 배는 막는 쪽이고 변시지의 배는 통과시키는 쪽이다.

세 번째 차이가 있다.

터너의 화면에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다.

빛이 사람을 먹어 버린다.

변시지의 화면에는 사람이 있다.

바람이 세도 사람은 남는다.

지워지는 사람과 남는 사람.

한쪽에서 자연은 사람을 삼키고 다른 쪽에서 자연은 사람을 견디게 한다.

여기에 우열은 없다.

삼켜지는 것을 그리는 일도 진실이고 견디는 것을 그리는 일도 진실이다.

다섯

빛이 가운데에 있다.

주위가 돌아간다.
배는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

물러나 보아도 마찬가지다.

먼 섬의 화면에는 언덕이 있다.

바다는 저쪽에 있고 노인은 이쪽에 있다.
조각배가 수평선 가까이 떠 있다.

물러나 보면 더 잘 보인다.

한쪽은 물러나도 흐리고 다른 쪽은 물러나면 분명해진다.

가까이 가면 어떤가.

터너의 화면은 가까이 가면 물감이 보인다.
문지른 자리와 긁어낸 자리.

변시지의 화면은 가까이 가면 선이 보인다.
떨린 자리와 끊긴 자리.

한쪽에서는 지운 흔적이 남고 다른 쪽에서는 그은 흔적이 남는다.

두 화면 다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렸다.

하나는 지워서 그렸고 하나는 남겨서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