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풍토는 형식을 낳는다/제3부 · 여백

화가와 풍토 · 제8장 · 12 / 24

프레드 윌리엄스, 채워진 여백

제3부 · 여백

하나

가로로 아주 넓은 화면이다.

세로가 짧다.

색은 황갈색이다.
회색이 섞인 마른 색이다.

화면 전체가 거의 한 색이다.

그 위에 점들이 있다.

작은 점, 짧은 획.
검은 것과 어두운 초록.

나무다.

그런데 나무처럼 생기지 않았다.
줄기와 가지가 없다.

점 하나가 나무 하나다.

점들이 고르게 흩어져 있다.

몰린 자리도 있고 드문 자리도 있다.
그러나 규칙이 없다.

지평선을 찾아보자.

없다.

화면 위쪽 끝에 아주 얇은 띠가 있다.
그것이 하늘일 수 있다.

없을 때도 있다.

하늘이 없으면 위아래가 사라진다.

이 화면은 앞에서 본 풍경인가 위에서 본 지면인가.

정할 수 없다.

둘 다일 수도 있다.

가까이 가면 표면이 얇다.

물감이 두껍지 않다.
문지른 자리가 많다.

점만 조금 두껍다.

점은 붓을 눌러 놓았다.

멀리서 보면 점들이 리듬으로 보인다.
가까이 보면 점 하나하나가 서로 다르다.

같은 점이 없다.

둘

프레드 윌리엄스는 1927년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났다.

멜버른이었다.

그곳에서 그림을 배웠다.

1952년에 런던으로 갔다.

사 년쯤 있었다.

미술관에서 유럽의 그림을 보았다.
풍경화의 오랜 전통을 보았다.

그리고 돌아왔다.

돌아와서 문제에 부딪쳤다.

유럽에서 배운 방법으로 호주의 땅을 그릴 수 없었다.

유럽의 풍경에는 초점이 있다.

교회의 탑이 있거나 큰 나무가 있거나 길이 있다.
눈이 갈 곳이 있다.

그리고 소실점이 있다.

길이 멀어지면서 좁아진다.
그것으로 깊이를 만든다.

호주의 부시에는 그런 것이 없다.

큰 나무가 없고 길이 없고 탑이 없다.

어디를 봐도 비슷하다.

앞을 봐도 그렇고 뒤를 봐도 그렇다.

초점이 없는 땅이다.

그는 이것을 결핍으로 보지 않았다.

특징으로 보았다.

그래서 초점 없는 화면을 그리기로 했다.

멜버른 근처의 낮은 산을 여러 해 그렸다.

같은 곳을 여러 번 갔다.

나중에는 서쪽의 광산 지대로 갔다.

붉은 땅이었다.
철이 많은 흙이다.

그곳을 그린 화면은 색이 다르다.
더 붉고 더 뜨겁다.

1982년에 세상을 떠났다.

오래 살지 못했다.

셋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호주의 빈 땅에서 여백은 하늘이 아니라 땅이다.

이것이 이 장의 특별한 자리다.

앞 장의 팔대산인은 종이를 비웠다.
붓을 대지 않았다.

윌리엄스는 비우지 않았다.

화면을 다 칠했다.
황갈색으로 끝까지 칠했다.

그런데 비어 보인다.

채워졌는데 비어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같은 것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넓이는 비어 보인다.

바다가 그렇고 사막이 그렇다.
물이 가득한데 비어 보이고 모래가 가득한데 비어 보인다.

여백은 없음이 아니라 같음이다.

이 발견이 이 부에 필요하다.

여백을 만드는 방법이 두 가지인 것이다.

지우는 방법과 되풀이하는 방법.

여기서 세 가지가 따라온다.

첫째, 초점 없음이 형식이 된다.

초점이 있는 화면에서 눈은 목적지가 있다.

먼저 초점을 보고 그다음에 주변을 본다.

초점이 없는 화면에서 눈은 헤맨다.

어디를 먼저 볼지 정해지지 않는다.

그러면 보는 순서가 사람마다 달라진다.

화면이 한 가지로 읽히지 않는다.

그 땅에서 길을 잃는 것과 같은 일이 화면 안에서 일어난다.

둘째, 점이 리듬이 된다.

점 하나는 나무 하나다.

그런데 점 백 개는 나무 백 그루가 아니다.

리듬이다.

멀리서 보면 점들이 음악처럼 배열된다.

가까이 보면 다시 나무가 된다.

두 거리에서 다른 것이 보인다.

이것은 앞 부의 셋슈와 닮았다.

셋슈의 급한 선도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다른 것이 된다.

셋째, 지평선을 없애면 화면이 지면이 된다.

지평선이 있으면 우리는 서서 보게 된다.

땅이 아래에 있고 하늘이 위에 있다.
그 사이에 우리가 서 있다.

지평선을 없애면 그 관계가 사라진다.

땅이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 있는 것처럼 된다.

내려다보는 눈이 된다.

호주 내륙은 실제로 비행기에서 보는 일이 많다.

넓은 땅은 걸어서 다 볼 수 없다.

그러니 위에서 보는 눈이 그 땅의 눈이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여야 한다.

호주의 내륙은 오래된 땅이다.

산이 깎여 낮아졌고 흙이 얇다.
새로 솟은 것이 없다.

높낮이가 없는 땅은 오래된 땅이다.

오래된 땅에서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미 다 일어났다.

그래서 그 화면에 극적인 것이 없다.

극적인 것이 없는 것이 그 땅의 성격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리려면 극적이지 않게 그려야 한다.

넷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먼저 닮은 것을 본다.

두 땅이 다 비어 있다.

호주의 부시에 큰 나무가 없다.
제주의 들에도 큰 나무가 드물다.

두 화면 다 마른 색이다.

황갈색과 마른 풀잎색.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색이라는 점도 같다.

두 번째 닮음이 있다.

두 사람 다 밖에서 배워 돌아왔다.

윌리엄스는 런던에서 사 년을 보내고 돌아왔다.
변시지는 오사카에서 자라고 서울을 거쳐 돌아왔다.

두 사람 다 돌아온 뒤에 문제에 부딪쳤다.

배운 방법이 그 땅에 맞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 다 방법을 바꾸었다.

앞 부에서 우리는 셋슈도 그랬다는 것을 보았다.

밖에서 배워 안으로 돌아오는 궤적이 이 책에 여러 번 나온다.

이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 땅에서만 자란 사람은 그 땅의 이상함을 모른다.
밖을 본 사람이 돌아와야 이상함이 보인다.

이제 차이를 보자.

가장 큰 차이는 지평선이다.

윌리엄스는 지평선을 없앴다.

변시지는 지평선을 남겼다.

남긴 것이 아니라 주인으로 만들었다.

그의 화면에서 가장 긴 선은 대개 수평선이다.

왜 반대가 되었는가.

바다 때문이다.

대륙의 빈 땅에는 끝이 없다.

걸어가도 같은 것이 계속 나온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다.

끝이 없으면 지평선은 임의의 자리다.
지워도 된다.

섬의 빈 땅에는 끝이 있다.

걸어가면 바다가 나온다.
반드시 나온다.

끝이 있으면 그 끝이 화면의 주인이 된다.

지울 수 없다.

그래서 대륙의 화가는 지평선을 지우고 섬의 화가는 지평선을 세운다.

두 번째 차이가 있다.

윌리엄스의 화면에는 사람이 없다.

점이 나무이고 나무가 여럿이다.

변시지의 화면에는 사람이 있다.

노인이 하나다.

작다는 점은 같다.

두 화면 다 인물 혹은 사물이 작다.

그런데 여럿의 작음과 하나의 작음은 다르다.

여럿이 작으면 그것은 무리다.
하나가 작으면 그것은 외로움이다.

점 백 개는 서로를 견딘다.
노인 하나는 혼자 견딘다.

세 번째 차이가 있다.

윌리엄스의 눈은 위에 있다.

내려다본다.

변시지의 눈은 옆에 있다.

마주 본다.

내려다보는 눈에는 사람이 잘 안 보인다.
너무 작아진다.

마주 보는 눈에는 사람이 보인다.

높이를 어디에 두느냐가 무엇을 볼지를 정한다.

다섯

넓은 화면 앞에 서 있다.

황갈색이 끝까지 이어진다.
점들이 흩어져 있다.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오래 본다.

먼 섬의 화면에는 수평선이 있다.

어디를 봐야 할지 알겠다.
그 선을 본다.

그리고 그 위의 작은 배를 본다.

한쪽은 갈 곳을 주지 않고 다른 쪽은 갈 곳을 준다.

두 화면 다 비어 있다.

하나는 끝이 없어서 비고 하나는 끝이 있어서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