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풍토 · 제7장 · 11 / 24
팔대산인, 먹 몇 점과 종이의 나머지
제3부 · 여백
하나
종이가 세로로 길다.
가운데 아래쪽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다.
먹 몇 번으로 그렸다.
몸통 한 획, 지느러미 두어 획.
비늘은 없다.
눈이 있다.
동그란 테두리 안에 점이 하나 있다.
그 점이 가운데 있지 않다.
위로 치우쳐 있다.
그래서 흘겨보는 것처럼 보인다.
물고기가 사람을 보고 있다.
물이 없다.
물결도 없고 수초도 없다.
바닥도 없다.
물고기가 종이 위에 그냥 있다.
떠 있는 것도 아니고 누운 것도 아니다.
나머지는 전부 비어 있다.
위쪽 열 중 아홉이 비었다.
아래쪽도 비었다.
한쪽 위에 글씨가 조금 있다.
서명이다.
그 서명의 글자가 이상하다.
읽으면 이름인데 모양은 다른 것처럼 보인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하다.
먹의 농담이 아주 적다.
진한 먹 몇 자리와 옅은 먹 몇 자리.
중간이 거의 없다.
번짐도 적다.
젖은 붓이 아니다.
적당히 마른 붓이다.
앞 부에서 본 셋슈의 화면과 다르다.
셋슈는 번지게 두었다.
여기서는 번지지 않게 했다.
같은 먹인데 다르게 쓴 것이다.
둘
팔대산인은 1626년에 중국에서 태어났다.
명나라 왕실의 후손이었다.
먼 방계였지만 왕족이었다.
집에 그림과 글씨가 있었다.
어려서 시를 지었고 글씨를 썼다.
1644년에 명나라가 무너졌다.
그는 열여덟이나 열아홉이었다.
한 왕조가 없어지는 것을 그 나이에 본 것이다.
그는 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이십 년 넘게 절에 있었다.
여러 이름을 썼다.
호가 아주 많다.
팔대산인이라는 호는 늦게 쓴 것이다.
쓰기 전에 다른 이름들이 여럿 있었다.
이름을 계속 바꾸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기록이다.
한동안 그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문 앞에 벙어리라는 글자를 붙였다고 한다.
웃거나 울기만 했다고도 한다.
미친 사람처럼 지낸 시기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뒤에 쓰인 것이 많다.
어디까지 사실인지 알기 어렵다.
다만 하나는 분명하다.
그는 새 나라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가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는 것과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은 같은 일이다.
만년에 그림을 많이 그렸다.
새와 물고기와 연꽃과 돌.
크게 그리지 않았다.
많이 그리지 않았다.
한 화면에 하나씩 놓았다.
1705년에 세상을 떠났다.
여든 무렵이었다.
셋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그의 여백은 비워 둔 것이면서 비워진 것이다.
두 가지가 겹쳐 있다.
비워 둔 것은 방법이다.
문인화에는 여백의 전통이 있다.
다 그리지 않는 것이 격이라 여겼다.
그는 그 전통 안에 있었다.
비워진 것은 사정이다.
물고기에게 물이 없다.
이것을 기법으로만 볼 수 없다.
물이 없는 물고기는 살 곳이 없는 물고기다.
새가 앉을 가지가 없으면 갈 곳이 없는 새다.
그는 나라가 없는 사람이었다.
살던 왕조가 없어졌고 그 자리에 다른 나라가 섰다.
그는 그 나라의 사람이 되지 않았다.
속할 곳이 없는 사람의 형식이 이 여백이다.
배경을 그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배경이 없어진 것이다.
여기서 세 가지가 따라온다.
첫째, 하나가 남으면 그 하나가 커진다.
화면에 물고기 하나만 있다.
크기는 작다.
그런데 무겁다.
옆에 아무것도 없으니 견줄 것이 없다.
견줄 것이 없으면 그것이 전부가 된다.
여백은 남은 하나를 크게 만든다.
이것은 1부에서 본 오키프의 경우와 닮았다.
배경이 없으면 크기의 기준이 사라진다.
그런데 방향이 다르다.
오키프는 뼈를 산만큼 크게 그렸다.
크게 그려서 크게 만들었다.
팔대산인은 작게 그렸다.
작게 그리고 나머지를 비워 크게 만들었다.
한쪽은 채워서 키우고 다른 쪽은 비워서 키운다.
둘째, 여백이 시간을 만든다.
빈 종이 위에 물고기 하나가 있으면 눈이 오래 머문다.
볼 것이 적으니 빨리 볼 것 같지만 반대다.
볼 것이 많으면 눈이 옮겨 다닌다.
볼 것이 하나면 눈이 그 자리에 있는다.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여백은 그림을 느리게 만든다.
느린 그림 앞에서 보는 사람의 마음이 움직인다.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오래 기억되는 것과 같다.
셋째, 서명이 형태가 된다.
그의 서명은 읽히기도 하고 보이기도 한다.
글자인데 그림처럼 생겼다.
이름을 쓰면서 이름을 감춘 것이다.
여백이 넓은 화면에서 서명은 눈에 잘 띈다.
숨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서명 자체를 화면의 일부로 만들었다.
빈 자리에 놓인 글씨는 그림이 된다.
넷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먼저 닮은 것을 본다.
두 사람 다 여백이 아주 넓다.
두 사람 다 하나만 남긴다.
물고기 하나.
노인 하나.
옆에 아무것도 두지 않는다.
그리고 두 사람 다 그 하나를 작게 그린다.
화면을 채우지 않는다.
두 번째 닮음이 있다.
두 사람 다 말할 수 없는 시대를 지났다.
팔대산인은 왕조가 바뀐 뒤에 살았다.
전 왕조의 후손이 무엇을 말할 수 있었겠는가.
변시지는 다른 종류의 시대를 지났다.
그는 폭풍을 그렸다.
그리고 훗날 구술에서 폭풍은 날씨가 아니라 저항이라고 말했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구술사, 2004–2005, 171쪽)
말로 하지 않고 그림으로 한 것이다.
말로 하면 위험한 시절에는 그림이 말을 대신한다.
두 사람이 같은 방법을 썼다.
세 번째 닮음이 있다.
두 사람 다 자기를 부르는 이름을 따로 지었다.
팔대산인은 호를 여럿 지었고 계속 바꿨다.
변시지는 자신을 풍운아라 불렀다.
아호는 우성이었다.
이름을 지어 붙이는 일은 자기를 다시 놓는 일이다.
이제 차이를 보자.
여백의 성질이 반대다.
팔대산인의 여백에는 아무것도 없다.
물이 없다.
그것이 요점이다.
없는 것의 여백이다.
변시지의 여백에는 바람이 있다.
그려져 있지 않지만 있다.
있는 것의 여백이다.
한쪽의 빈 자리는 상실을 가리키고 다른 쪽의 빈 자리는 힘을 가리킨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팔대산인이 잃은 것은 제도였다.
왕조와 신분과 자리.
제도는 없어지면 그 자리가 빈다.
변시지가 마주한 것은 자연이었다.
바람과 바다.
자연은 없어지지 않는다.
보이지 않을 뿐이다.
제도의 부재와 자연의 비가시는 다르다.
앞의 부에서 우리는 추사를 보았다.
추사도 유배였고 팔대산인도 왕조를 잃었다.
둘 다 상실이 있었다.
그런데 추사의 여백에는 그 상실이 없다.
종이일 뿐이다.
팔대산인의 여백에는 상실이 있다.
같은 문인화의 여백인데 하나는 형식이고 하나는 사정이다.
이 구별이 이 부의 핵심이다.
인물의 태도도 다르다.
팔대산인의 새와 물고기는 흘겨본다.
눈동자가 치우쳐 있다.
사람을 마주 보지 않으면서 보고 있다.
노려보는 저항이다.
변시지의 노인은 고개를 숙인다.
우리를 보지 않는다.
땅을 본다.
숙이는 저항이다.
두 자세 다 저항이다.
하나는 눈으로 하고 하나는 목으로 한다.
노려보는 쪽이 더 강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숙이는 것은 오래 할 수 있다.
노려보는 것은 오래 못 한다.
견딤의 길이가 다르다.
다섯
종이 위에 물고기가 있다.
물은 없다.
있어야 할 것이 없다.물고기는 흘겨본다.
먼 섬의 화면에는 노인이 있다.
바람은 없다.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노인은 고개를 숙인다.
둘 다 나머지가 비어 있다.
그 비어 있음의 뜻이 다르다.
없어서 빈 것과 보이지 않아서 빈 것.
두 화면은 서로를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나란히 놓으면 여백에 종류가 있다는 것이 보인다.
먹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