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03 · PART I · 끝이 가까워지니 보이는 것들
내 기억만큼만
〈회상〉 · 1988
글 변정훈
말 한 마리가
늘 거기 있었다.
돌담 옆에.
초가 곁에.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것처럼.
밭을 갈 때
나란히 걸었고
아이가 울면
고개를 돌려보았고
비가 오면
같은 처마 아래 섰다.
한 번도
안아 본 적 없다.
한 번도
이름을 불러 본 적 없다.
너무 자주 보아서
본다는 것도 몰랐다.
그런데
그리려 하니
손이 느려졌다.
등의 선을
조금 진하게 했다.
선은 또렷해졌는데
말이 낯설어졌다.
색을 덜어냈다.
말의 등이
배경 속으로 흐려졌다.
사라진 줄 알고
가까이 가서 보았다.
거기 있었다.
내 기억만큼만.
나는 그 앞에서
천천히 숨을 골랐다.
RELATED ARCHIVE
이 이야기에서 아카이브로
FOLLOW THIS PATH
ABSENC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