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비평/풍토는 풍경이 아니다/서론
학술판 · 풍토는 풍경이 아니다 · 서론 · 1 / 34
풍토는 풍경이 아니다
마른 풀잎색 언덕에 노인이 서 있다. 곁의 소나무도, 노인의 등도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1
조금 기울어, 오래 선다.
이 책은 이 장면을 제주 풍경의 묘사로 읽는 데서 출발하지 않는다. 질문은 오히려 그 반대편에 있다. 왜 바람과 볕, 바다와 돌, 노동과 기억이 회화의 선·색·여백·자세로 변형되었는가.
변시지 회화에서 제주는 도상(iconography)의 목록이기 전에 형식을 변화시키는 조건이다. 이 조건을 이 책은 '풍토'라 부른다.
핵심 명제는 세 문장으로 압축된다. 풍토는 풍경이 아니다. 풍토는 몸에 들어온다. 몸에 들어온 풍토는 형식으로 전환된다. 이 세 문장은 이 책의 기억 장치다. 학술적으로는 풍토를 외부 원인이 아니라 몸과 환경의 관계 속에서 체화되고, 작업을 매개로 회화 형식으로 번역되는 조건으로 한정한다.
따라서 이 연구의 대상은 '제주를 그린 그림'이 아니라, 제주에서 오래 살아 낸 시간이 어떻게 회화의 문법을 재조직했는가 하는 문제다.
1문제설정: '제주 풍경화가'라는 명명의 한계
변시지를 '제주의 화가' 혹은 '향토적 화가'로 부르는 것은 일정한 사실을 담지만, 동시에 그의 회화를 소재의 범주에 고정할 위험이 있다. 바다·초가·말·까마귀가 제주를 지시한다는 사실만으로는 후기 회화의 급격한 단순화, 평면화, 색채의 수렴, 인물의 축소를 설명할 수 없다.
이 책은 향토성을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형식 생성의 문제로 이동시킨다. 지역적 소재가 화면에 들어왔다는 사실보다, 한 장소에 머문 시간이 시각과 신체의 습관을 바꾸고 그 변화가 화면의 조직 원리로 정착했다는 점을 추적한다.
이 관점에서 1975년 제주 정착은 단절이 아니라 변형의 계기다. 일본에서 습득한 인물화의 구조, 서울 비원에서 단련된 관찰의 지속성, 제주에서 체화된 바람과 볕이 서로를 지우지 않고 재배열된다.
따라서 변시지의 제주 회화는 귀향이나 전통 회귀의 결과만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동을 통해 축적된 회화적 기술이 특정한 풍토 안에서 다시 조직된 결과다.
2풍경·풍토·밀리외
와쓰지 데쓰로의 『풍토』(1935)는 풍토를 외부 환경의 물리적 총합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이미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관계적 조건으로 제시했다.2 아우구스탱 베르크는 이 개념을 단순한 climate보다 milieu로 옮길 때 그 상호구성성을 더 잘 포착할 수 있다고 보았다.3
메를로퐁티의 지각 현상학 역시 시선을 세계 밖의 중립적 관찰점으로 두지 않는다. 보는 몸은 세계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4 이 책은 이러한 사유를 영향 관계의 증거가 아니라, 변시지의 화면에서 확인되는 체화된 시각성을 분석하기 위한 비교 좌표로 사용한다.
따라서 여기서 풍경은 주체가 거리를 두고 조망하는 시각적 장면을, 풍토는 몸·기후·생활·시간·사회적 기억이 얽힌 '살아진 장소'의 조건을 가리킨다.
3환경결정론을 넘어서
풍토를 강조한다고 해서 제주라는 자연환경이 회화 형식을 일방적으로 '결정'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설명은 작품을 기후의 수동적 결과로 축소한다.
실제로 굽은 몸은 제주 이전의 인물화에 이미 존재했고, 단순화를 향한 문제의식도 도쿄 시절에 형성되었다. 제주가 한 일은 무에서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축적된 조형 감각과 기술을 다른 관계망 속에서 다시 작동하게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책에서 '풍토가 형식이 된다'는 문장은 인과 법칙이 아니라 매개(mediation)의 서술이다. 풍토는 화가의 몸, 기억, 훈련, 노동, 매체를 통과하면서 회화적 형식으로 번역된다.
팀 잉골드의 '거주 관점'과 '태스크스케이프(taskscape)'는 이 점을 보강한다. 장소는 완성된 배경이 아니라 사람들이 일하고 이동하고 기다리고 돌보는 활동의 시간적 얽힘 속에서 형성된다.5 해녀의 몸, 밭갈이, 말과 사람의 관계를 이 책이 노동의 풍토로 읽는 이유다.
풍토는 자연과 문화, 대상과 주체를 단순히 합치는 총합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이 구분들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서로를 구성하는지를 묻는 관계적 범주다.
이 책은 따라서 작품의 형식적 증거와 생애 자료를 먼저 제시하고, 철학적 개념은 그 뒤에 제한적으로 배치한다. 이론이 작품을 대신해서 말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바람' 역시 상징으로 먼저 읽지 않는다. 먼저 기운 선, 낮아진 집, 갈기의 방향, 몸의 중심축을 본다. 해석은 그 다음에 온다.
이 순서는 책 전체의 방법론적 원칙이다: 화면의 사실 → 자료로 확인되는 작가의 말 → 형식 분석 → 비교 이론 → 해석의 한계.
4이동하는 근대: 일본을 통한 양화와 식민지적 매개
변시지의 "근대 회화"는 유럽에서 제주로 곧바로 이동한 것이 아니다. 서양화는 일본의 미술교육과 전람회 제도를 거쳐 조선인 화가들에게 전달되었고, 해방 이후 다시 한국의 제도와 미술장 속에서 재배치되었다. LACMA와 국립현대미술관의 《The Space Between: The Modern in Korean Art》는 1897~1965년 한국 근대미술을 바로 이러한 다중의 매개와 재해석의 역사로 제시한다.6
특히 김지영의 오사카미술학교 연구는 이 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을 단순한 "일본 유학생"으로만 볼 수 없다고 지적한다. 오사카의 조선인 학생 상당수는 제국의 산업화와 이주 과정 속에서 가족과 함께 일본에 건너온 배경을 갖고 있었고, 해방 이후 서울보다 제주와 남부 지역으로 돌아가 미술교육과 지역 미술에 관여한 경우가 많았다.7 변시지의 오사카 경험 역시 이러한 역사적 장 안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책은 유럽 모더니즘 → 일본 → 한국이라는 일방향의 영향사 대신, 제국의 이동·교육·언어·전람회 제도를 통과하며 형식이 변형되는 경로를 추적한다. 이 이유로 본문의 첫 부를 "이동하는 근대"에 둔다.
5풍토모더니즘과 인접 개념: 무엇이 다른가
변시지의 후기 회화를 반모더니즘이나 전통 회귀로 규정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는 일본에서 서양화의 해부학·원근·명암·색채 이론을 학습했고, 이후 그 규칙들을 제주에서 점차 느슨하게 풀거나 다른 기능으로 전환했다. 평면성은 강화되지만 거리의 감각은 사라지지 않고, 형상은 축소되지만 재현은 폐기되지 않는다.
이 책이 제안하는 '풍토모더니즘'은 역사적으로 조직된 사조명도, 화가 자신의 자칭도 아니다. 특정 장소의 도상을 그리는 지역주의와 달리, 외부에서 습득한 근대 회화의 언어가 장기간의 거주 경험을 통과하면서 형식적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을 지칭하는 분석적 개념이다.
이 범주는 기존의 지역주의나 장소 이론을 다시 이름 붙이려는 것이 아니다. 비판적 지역주의는 보편화된 기술 문명과 장소의 구체성 사이의 긴장을,8 다중 근대성은 근대성의 복수성을,9 탈중심화된 모더니즘은 미술사의 중심/주변 파생 모델을 문제 삼아 왔다.10 풍토모더니즘은 이 문제들을 한 화가의 장기 거주가 지각·신체·작업 과정에 어떻게 축적되고, 그 축적이 선·색·공간·스케일·반복이라는 회화적 층위로 번역되는가라는 미시적 질문으로 좁힌다.
풍토모더니즘이 이들과 구별되는 지점은 분석의 규모에 있다. 그것은 한 지역의 정체성이나 복수의 근대 전체를 설명하기보다, 한 화가의 장기 거주가 지각·신체 습관·작업 과정에 어떻게 축적되고, 그 축적이 선·색·공간·스케일·반복이라는 회화적 층위로 번역되는지를 추적한다.
따라서 풍토모더니즘은 사조명이 아니라 작업 과정의 미시적 모델이다. 영어에서는 이를 고유명사로 고정하지 않고, 설명적 표현인 "a modernism of milieu"를 사용한다. 일본어 음역 fūdo는 와쓰지의 개념을 직접 논하는 자리에서만 사용한다.
6연구 방법과 자료의 위계
이 연구는 네 종류의 자료를 구분한다. 첫째, 작품 자체의 가시적 사실. 둘째, 작가가 출간한 글과 구술채록. 셋째, 전시 기록·신문·연보·비평문. 넷째, 가족 구술과 저자 직접 확인이다. 네 층위는 동일한 증거력을 갖지 않으며, 충돌할 경우 그 차이를 본문이나 주에서 명시한다.
특히 제작연도·작품명·재료·크기·소장처는 해석보다 먼저 확정되어야 한다. 이 원고의 대괄호 표시는 아직 원자료 대조가 끝나지 않은 항목이다. 출판본에서는 미확정 사실을 서술의 전제로 사용하지 않는다.
화면 해석에서도 같은 원칙을 적용한다. 작품에 보이는 것, 작가가 말했다고 확인되는 것, 저자가 해석하는 것을 문장 수준에서 구분한다.
7비교의 원칙과 이론의 위계
이 책이 호출하는 외부 이론은 변시지에게 직접 영향을 주었다고 입증된 계보가 아니다. 영향사를 만들지 않고, 작품과 자료가 제기한 문제를 더 정확히 분절하기 위한 비교 좌표로 사용한다.
비교의 위계도 구분한다. 풍토·지각·노동·평면성·탈중심화에 직접 관여하는 이론은 핵심 분석틀로 사용하고, 다른 작가·사상가와의 병치는 특정 형식의 차이를 검증할 때만 제한적으로 사용한다. 비교가 작품보다 앞에 서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8'싸우지 않는 미학'과 '저항의 자세': 두 층위의 분석
이 책은 '싸우지 않는 미학'과 '저항의 자세'를 서로 배제하는 개념으로 두지 않는다. 두 말은 서로 다른 힘과의 관계를 가리킨다.
'싸우지 않는 미학'은 자연의 힘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낮아짐·기울기·멈춤을 통해 관계를 지속하는 화면의 형식을 가리킨다. 화가는 『예술과 풍토』에서 부두에 서서 수평선을 바라보며, 인간이 "영원히 대자연을 극복할 수 없으리라"는 감각을 적었다.11 그의 화면에서 나무는 기울고, 집은 낮아지고, 사람은 등을 굽힌다. 싸우지 않는다는 것은 버티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기려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저항의 자세'는 역사적·정치적 힘과 관계 맺는 층위를 가리킨다. 2005년 구술에서 화가는 제주 사람들의 삶을 "바람에 싸우면서 저항하면서 살아 남을라고 하는 집념"이라 말했고,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자신의 마음이 그 소재와 "심리적으로" 맞아 들어갔다고 회고했다.12 이 진술은 작품들이 그려진 때보다 늦은 자기해석이므로 개별 작품의 최초 의도를 증명하는 자료로 쓰지 않는다(제16장 사례 A). 다만 화가가 자기 화면의 굽음을 패배가 아니라 버팀으로 이해했다는 점은 보여 준다.
따라서 굽은 몸을 저항의 부재로 규정할 수 없다. 동시에 자연 앞에서 몸을 낮추는 형식을 곧바로 정치적 저항의 도상으로 환원할 수도 없다. 두 층위는 같지 않지만, 변시지의 화면에서는 둘 다 직접적인 충돌 장면보다 힘을 받은 몸의 변형—굽음, 기울기, 낮음, 멈춤—을 통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은 두 층위가 작품 안에서 만나는 자리를 '굽은 몸의 형식'으로 분석하고, 그 접점을 동일성이 아니라 긴장으로 보존한다.
그러므로 '싸우지 않는 미학'은 저항을 지우는 말이 아니며, '저항의 자세'는 모든 굽은 몸을 정치적 상징으로 만드는 말도 아니다. 두 개념의 관계는 제16장 사례 B에서 작품과 함께 다시 검토한다.
9논증의 지도와 책의 구성
이 책은 스무 개의 장을 아홉 개의 논증 아래 묶는다. 각 논증은 선언이 아니라 반증 가능한 가설로 다룬다.
논증 I. 근대는 중심에서 주변으로 복제되는 것이 아니라 이동하는 제도·기술·신체 속에서 재구성된다(제1~3장).
논증 II. 귀향은 원점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익숙한 장소를 다시 지각하고 다시 배우는 과정이다(제4~5장).
논증 III. 변시지의 표현은 재현을 폐기한 결과가 아니라 반복과 재현의 훈련을 통과해 불필요한 것을 덜어낸 결과다(제6~7장).
논증 IV. 풍토는 배경이 아니라 시선과 거리의 체계다. 수평선·먼 배·평면성은 섬에서 살아가는 지각의 구조를 조직한다(제8~9장).
논증 V. 풍토는 색·선·여백·빛으로 형식화된다. 마른 풀잎색과 검은 선은 장소의 표지가 아니라 제주 시기 작품군에서 되풀이되는 회화적 문법이다(제10~11장).
이 다섯 논증의 결과는 '이론적 중간결론'에서 모아, 서론이 제안한 분석어 풍토모더니즘을 향토색 담론과 구별하며 다시 정의한다.
논증 VI. 풍토는 몸·나무·집의 자세를 조직한다. 기울기·낮음·방향은 외부의 힘과 관계 맺은 서로 다른 존재와 구조의 형식이다(제12~13장).
논증 VII. 노동과 동물은 신체의 관계와 선택을 드러낸다. 다만 모든 짐승의 이미지가 이 관계망에 속하는 것은 아니며, 예외 작품이 적용 범위를 제한한다(제14~15장).
논증 VIII. 자연의 힘 앞에서 변시지의 화면은 이기려 들지 않는다('싸우지 않는 미학'). 그러나 사라지지도 않는다. 시대의 힘에 대한 작가의 기억('저항의 자세')은 이 형식과 같지 않지만 굽은 몸에서 만난다. 저항·상실·기다림은 영웅적 직립이나 이김의 서사가 아니라, 낮아지고 기울면서도 남는 지속의 형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작품을 포괄하는 단일한 정서 모델이 아니다(제16~17장).
논증 IX. 변시지의 근대성은 한국 현대미술 안의 병렬적 비교와, 풍토라는 말의 비대칭적 번역 속에서 위치 지어진다(제18~20장).
각 논증의 첫머리에는 ① 주장, ② 작품 증거, ③ 1차 자료, ④ 반례, ⑤ 자료 한계, ⑥ 기존 미술사와의 차이, ⑦ 잠정 결론을 표로 둔다. 반례는 주의사항이나 자료 부족이 아니라 명제에 실제로 들어맞지 않는 작품이다. 자료의 시차와 서지의 불확실성은 '자료 한계'로 따로 적는다. 한 작품의 인상이나 작가의 후대 회고만으로 전체 시기를 일반화하지 않는다.
여러 장은 서로 비추는 두 사례를 한 장에 묶는다. 예컨대 제4장은 〈빈 집〉의 머묾과 〈제주〉(1976)의 다시 보기를, 제16장은 〈태풍〉의 견딘 자세와 〈노송과 노인〉의 굽은 몸을 함께 다룬다. 사례 A와 B는 같은 물음에 서로 다른 작품으로 답하며, 장의 처음과 끝에서 그 물음을 묶는다.
마지막 결론은 작가가 자기 삶을 유배라 하고 그림 그리는 일을 축복이라 한 말을 낭만적 고통의 미학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삶의 조건이 작업을 통해 형식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검토함으로써, 유배와 축복 사이에 놓인 '작업'의 윤리를 밝힌다.13
이 책의 목표는 변시지를 제주라는 지역성 안에 가두는 것도, 세계미술사라는 추상적 보편성 속에 용해시키는 것도 아니다. 장소에 깊이 뿌리내린 형식이 다른 장소의 관람자에게 어떻게 다시 읽힐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풍토는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그림 밖의 배경이 아니라, 그림이 그렇게 그려지게 된 관계의 조건이다.
101차 자료·코퍼스·연구 윤리
핵심 1차 자료는 변시지의 『예술과 풍토』(열화당, 1988), 2004~2005년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의 『변시지 구술채록문』, 작가노트, 전시·신문 자료, 그리고 현재 확인 가능한 작품 도판이다.14
작품에 대한 가족의 직접 기억은 중요한 증언이지만 출판물·도록·원작 확인과 구분하여 표기한다. 저자가 화가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자료 접근의 장점인 동시에 해석적 편향의 가능성을 만든다. 따라서 가족 기억은 작품의 의미를 확정하는 최종심이 아니라, 다른 자료와 대조되어야 하는 1차 증언으로 다룬다.
따라서 이 책은 가족 기억을 '증거의 최종심'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자료의 출처와 확인 수준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독자가 판단할 수 있게 한다.
비교 이론은 작품의 가치 순위를 정하는 척도가 아니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근대적 회화의 문제가 어떤 매개를 통해 재구성되는지를 비교하기 위한 도구다.
이 원칙 아래에서 '풍토모더니즘'은 완결된 이론이 아니라 검증 가능한 가설로 제시된다. 작품군 전체에서 그 개념이 얼마나 설명력을 갖는지는 각 장의 형식 분석이 판단한다.
이제 처음의 얼굴로 간다. 풍토의 형식을 말하기 전에, 그 형식을 배운 몸이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부터 볼 차례다.
주와 출처
- ↑ 여는 장면의 그림 〈노송과 노인〉(1987). 화면은 byunshiji.org 작품 100의 도판(FŪDO 079)으로 확인. 화면 묘사는 제16장의 주에 있다.
- ↑ 和辻哲郎, 『風土 — 人間学的考察』(岩波書店, 1935); Watsuji Tetsurō, Climate and Culture: A Philosophical Study, trans. Geoffrey Bownas (New York: Greenwood Press, 1988).
- ↑ Augustin Berque, "Milieu et logique du lieu chez Watsuji," Revue Philosophique de Louvain 92, no. 4 (1994): 495–507.
- ↑ Maurice Merleau-Ponty, "Le doute de Cézanne"(1945), Sens et non-sens; 영역 "Cézanne's Doubt," in Sense and Non-Sense, trans. Hubert L. Dreyfus and Patricia Allen Dreyfus (Evanston, IL: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64).
- ↑ Tim Ingold, "The Temporality of the Landscape," World Archaeology 25, no. 2 (1993): 152–174.
- ↑ Virginia Moon, ed., The Space Between: The Modern in Korean Art (Los Angeles: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 DelMonico Books, 2022). 전시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이 함께 열었다.
- ↑ 김지영, 「해방 전 오사카미술학교의 조선인유학생들의 실태와 귀국 후 행방에 대하여」, 『한국근현대미술사학』 32 (2016): 202–230.
- ↑ Kenneth Frampton, "Towards a Critical Regionalism: Six Points for an Architecture of Resistance," in The Anti-Aesthetic: Essays on Postmodern Culture, ed. Hal Foster (Port Townsend, WA: Bay Press, 1983).
- ↑ S. N. Eisenstadt, "Multiple Modernities," Daedalus 129, no. 1 (2000): 1–29.
- ↑ Partha Mitter, "Decentering Modernism: Art History and Avant-Garde Art from the Periphery," The Art Bulletin 90, no. 4 (2008): 531–548.
- ↑ 변시지, 『예술과 풍토』(열화당, 1988), 「제주에 산다」 가운데 '제주의 태양, 바다'. 제16장에서 다시 다룬다.
- ↑ 『변시지 구술채록문』(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 채록연구 이인범) 제5차 구술(2005년 1월 18일, 기당미술관), 221쪽. 인용한 말은 제16장에서 다시 다룬다.
- ↑ 화가는 생전에 자기 삶을 '유배'라 하고 그림 그리는 일을 '축복'이라 했다. 저자(아들)가 직접 들은 말이다(저자 확인, 2026-09-29). 구술채록문과 『예술과 풍토』에는 '삶은 유배, 예술은 축복'이라는 문장이 글자 그대로 실려 있지 않다.
- ↑ 『변시지 구술채록문』(2004년 12월~2005년 4월, 일곱 차례); 변시지, 『예술과 풍토』(열화당, 1988); 캐럴 네비스(Carole Neves), 「화가와 바다: 변시지」; 홍성후, 「경계를 넘어서: 변시지의 삶과 예술」; 「그림의 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