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풍토 · 제16장 · 22 / 24
반 고흐, 물감의 두께
제5부 · 물질성
하나
「까마귀 나는 밀밭」이다.
1890년 7월,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그렸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이다.
작은 화면이다.
앞의 두 장에서 본 것과 크기가 다르다.
팔을 벌리지 않아도 다 보인다.
다만 옆으로 길다.
높이의 두 배가 넘는다.
그래서 눈이 좌우로 움직인다.
위아래로는 갈 곳이 없다.
이 비례가 이미 하나의 문장이다.
넓게 펼쳐진 것을 보게 하고, 올려다보지는 못하게 한다.
밀밭이다.
익은 밀이 화면의 아래쪽 절반을 채운다.
길이 밭 사이로 들어가다 끊긴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하늘은 어둡다.
파란색인데 무겁다.
검은 점들이 흩어져 있다.
새다. 까마귀다.
날고 있는지 떨어지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이제 옆에서 본다.
화면이 평평하지 않다.
물감이 산처럼 올라와 있다.
붓이 지나간 자리마다 두둑이 생겼다.
그 두둑에 지금 이 방의 빛이 걸린다.
작은 그림자가 생긴다.
그림자는 그려진 것이 아니다.
표면이 만든 것이다.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면 그림이 조금 달라진다.
빛을 받는 면이 바뀌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정지해 있지 않다.
밀의 노란색을 보자.
한 겹이 아니다.
아래에 다른 색이 있고 그 위에 노란색이 올라갔다.
아래 색이 사이사이로 보인다.
물감을 섞어 색을 만든 것이 아니라 색을 쌓아 색을 만들었다.
둘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목사의 아들이었다.
여러 일을 했고 여러 곳에서 실패했다.
그림을 시작한 것은 스물일곱 무렵이다.
세상을 떠난 것은 서른일곱이다.
화가로 산 시간이 십 년이다.
이 십 년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앞쪽은 북쪽에서 보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
흐린 하늘, 낮은 빛, 젖은 땅.
그 시기의 화면은 어둡다.
갈색과 검은색과 흙색이 많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이 그 시기의 것이다.
등불 하나가 어두운 방을 겨우 밝힌다.
색이 어두운 것은 취향이 아니었다.
그가 본 빛이 그랬다.
북쪽의 광부와 농부는 어두운 곳에서 일한다.
그 어두움을 밝게 그리면 거짓이 된다.
뒤쪽은 남쪽에서 보냈다.
파리를 지나 남프랑스로 갔다.
아를이었다.
1888년이다.
빛이 달랐다.
북쪽에서 본 적 없는 빛이었다.
색이 올라갔다.
노란색과 파란색이 화면을 채웠다.
여기까지는 잘 알려진 이야기다.
북쪽의 어두움에서 남쪽의 밝음으로.
그런데 이 장은 다른 것을 보려 한다.
색만 바뀐 것이 아니다.
물감의 두께가 바뀌었다.
남쪽에서 그의 물감이 두꺼워졌다.
왜 그런가.
빛이 너무 세면 색만으로는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색은 표면에 얹히는 것이다.
빛이 세면 색이 날아간다.
그때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색이 아니라 표면이다.
두꺼운 물감은 스스로 요철을 만든다.
요철은 실제 빛을 받는다.
그리면 빛의 그림이 되고, 쌓으면 빛을 받는 물건이 된다.
그는 두 번째를 택했다.
아를에는 바람이 있다.
미스트랄이라고 부른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마르고 센 바람이다.
며칠씩 이어진다.
그는 밖에서 그렸다.
바람이 이젤을 넘어뜨렸다.
편지에 그 이야기가 남아 있다.
땅에 못을 박아 이젤을 고정했다고 썼다.
바람 속에서 그린 그림은 바람의 흔적을 갖는다.
붓질이 급해진다.
망설일 시간이 없다.
한 번에 긋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그래서 그의 선은 짧고 반복된다.
같은 방향으로 여러 번 긋는다.
이것은 성격이 아니라 조건이다.
바람 속에서 오래 붓을 대고 있을 수는 없다.
물감을 많이 썼다.
돈이 부족했다.
동생에게 물감을 보내 달라고 여러 번 썼다.
두껍게 그리는 일은 비싼 일이다.
그는 그 값을 치르면서 두껍게 그렸다.
그리고 두꺼운 물감은 잘 마르지 않는다.
마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화면을 쌓아 둘 수 없다.
운반도 어렵다.
물질이 삶의 조건을 바꾼다.
셋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반 고흐는 색의 화가로 읽혀 왔다.
아를의 노란색이 그의 이름과 함께 온다.
그런데 색은 절반이다.
나머지 절반은 두께다.
이 책이 그를 색 부가 아니라 물질성 부에 놓은 이유다.
키퍼는 땅을 화면으로 옮겼다.
골즈워디는 화면을 땅에 두었다.
반 고흐는 아무것도 옮기지 않았다.
그는 물감으로만 그렸다.
그런데 그 물감을 물질로 만들었다.
흙을 붙이지 않고 물감을 흙처럼 썼다.
잎을 붙이지 않고 물감을 잎처럼 세웠다.
같은 재료로 다른 일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네 가지가 달라진다.
첫째, 그림이 두 번 빛을 받는다.
한 번은 그려진 빛이다.
화면 안에 그린 해와 등불.
또 한 번은 실제 빛이다.
지금 이 방의 조명이 요철에 걸린다.
두 빛이 겹친다.
둘째, 시간이 표면에 남는다.
두꺼운 붓질은 지울 수 없다.
얇은 물감은 덧칠하면 사라지지만 두꺼운 물감은 흔적이 남는다.
그러니 한 번 그은 것이 끝까지 보인다.
망설임이 없는 화면은 망설일 수 없는 화면이다.
셋째, 그림이 사물이 된다.
평평한 화면은 창문에 가깝다.
그 너머를 본다.
울퉁불퉁한 화면은 벽에 가깝다.
표면에서 멈춘다.
멈추면 그림이 물건으로 보인다.
넷째, 풍토가 표면으로 나타난다.
남쪽의 센 빛과 센 바람.
그 두 가지가 두께를 요구했다.
빛은 표면을 요구했고 바람은 속도를 요구했다.
두꺼운 물감과 빠른 붓질.
그의 형식이 여기서 나왔다.
이것은 성격의 결과가 아니다.
조건의 결과다.
그를 뜨거운 기질의 화가로만 읽으면 이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기질은 어디서나 같다.
형식은 땅마다 다르다.
북쪽에서 그는 어둡고 얇게 그렸다.
남쪽에서 그는 밝고 두껍게 그렸다.
같은 사람이었다.
땅이 달랐다.
넷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두 사람 다 바람 속에서 그렸다.
반 고흐는 미스트랄 속에서 이젤을 못으로 박았다.
변시지는 제주의 바람 속에서 그렸다.
그런데 대응이 다르다.
반 고흐는 바람에 맞섰다.
이젤을 고정하고 그렸다.
바람은 방해였다.
변시지는 바람을 들였다.
화면 안으로 불러들였다.
바람은 주제였다.
한쪽은 바람을 견디며 그렸고, 다른 쪽은 바람을 그렸다.
두께도 반대다.
반 고흐는 쌓았다.
물감을 올려 표면을 만들었다.
변시지는 말렸다.
색을 얇게 두어 마른 느낌을 남겼다.
마른 풀잎색은 두꺼울 수 없다.
마른 것은 얇다.
물감을 두껍게 올리면 촉촉해 보인다.
얇게 두면 말라 보인다.
그러니 얇음은 부족이 아니라 선택이다.
한쪽은 물질을 쌓아 빛을 받았다.
다른 쪽은 물질을 줄여 마름을 얻었다.
두 방식 다 물질성이다.
쌓는 것만 물질성이 아니다.
까마귀를 보자.
「까마귀 나는 밀밭」의 까마귀는 어두운 하늘에 있다.
검은 점으로 흩어져 있다.
변시지의 화면에도 까마귀가 있다.
낮게 지나간다.
둘 다 검은 점이다.
둘 다 소리가 없다.
그러나 자리가 다르다.
반 고흐의 까마귀는 위에서 다가온다.
하늘 쪽에서 사람 쪽으로 온다.
변시지의 까마귀는 낮게 있다.
사람의 눈높이 근처를 지난다.
여기서 조심할 것이 있다.
변시지의 화면에서 수평선 근처의 작은 검은 형태는 새가 아니다.
조각배다.
멀리 있는 것은 배이고, 가까이 낮게 지나는 것이 까마귀다.
이 구분을 놓치면 그림이 달라진다.
배는 떠남과 돌아옴이고, 까마귀는 곁에 있는 것이다.
시간의 길이도 다르다.
반 고흐는 십 년을 그렸다.
남쪽에서 보낸 시간은 두 해 남짓이다.
두 해 안에 형식이 완성되었다.
변시지는 예순여덟 해를 그렸다.
1945년의 습작에서 2013년의 마지막 그림까지.
제주에서만 서른여덟 해다.
한쪽은 짧게 태웠고 다른 쪽은 오래 견뎠다.
여기에 우열은 없다.
속도가 달랐을 뿐이다.
빠르게 낳는 풍토가 있고 느리게 낳는 풍토가 있다.
남프랑스의 볕은 즉시 온다.
받는 순간 안다.
제주의 바람은 즉시 오지 않는다.
여러 해 맞아야 안다.
볕은 강도로 오고 바람은 반복으로 온다.
그래서 하나는 두 해에 형식을 냈고, 다른 하나는 수십 해에 냈다.
마지막으로 하나가 남는다.
반 고흐는 남프랑스에서 이방인이었다.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그곳 사람이 되지도 못했다.
변시지도 돌아온 자리에서 이방인이었다.
태어난 섬이었지만 마흔네 해를 떠나 있었다.
두 사람 다 자기 땅이 아닌 곳에서 자기 형식을 낳았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떠났다가 닿은 땅에서만 그 땅이 보인다.
처음부터 있던 사람에게는 바람이 그냥 날씨다.
돌아온 사람에게 바람은 사건이 된다.
다섯
작은 화면이다.
물감이 두껍다.
밀은 익었고 하늘은 무겁다.까마귀가 흩어져 있다.
빛을 옮기면 표면의 그림자가 옮겨진다.
그림이 조금 달라진다.그러니 이 그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먼 곳의 다른 화면에서는 노인이 서 있다.
그쪽 화면은 얇고 말라 있다.한쪽은 물감을 쌓아 빛을 받았다.
다른 쪽은 색을 말려 바람을 받았다.둘 다 화면 밖의 것을 화면 안으로 들였다.
그것이 이 문의 물음이었다.
무엇으로 그리는가.
답은 하나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