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풍토 · 종장 · 23 / 24
제주화, 바람이 언어가 될 때
1. 다시 언덕
언덕 위에 노인이 서 있다.
말 한 마리가 곁에 있다.
바다는 멀고, 바람은 가깝다.
화면은 마른 풀잎색이다.
수평선 가까이 조각배가 떠 있다.
까마귀 한 마리가 낮게 지나간다.
서장에서 우리는 이 언덕에 섰다.
그리고 열여섯 개의 언덕을 지나왔다.
멕시코의 마른 볕과 뉴멕시코의 맑은 공기.
노르웨이의 붉은 하늘.
제주의 가시울타리 안과 일본의 젖은 종이.
캐나다 서해안의 솟는 숲.
명말의 빈 종이와 호주의 넓은 흙.
잉글랜드의 물기와 런던의 만들어진 구멍.
지중해의 겹친 문법과 러시아의 낮은 지평선.
타히티의 분홍 땅.
독일의 재와 스코틀랜드의 돌과 프로방스의 두꺼운 물감.
이제 다시 여기다.
그림은 그대로다.
노인도 그대로고 말도 그대로다.
조각배도 그 자리에 있다.
그런데 다르게 보인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그림이 달라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열여섯 곳을 지나왔다.
비교는 대상을 바꾸지 않는다.
보는 사람을 바꾼다.
그것이 이 책이 한 일이다.
2. 지나온 것
열여섯 사람 가운데 넷은 반대 증인이었다.
그들의 증언을 다시 들어야 한다.
뭉크는 색이 안에서 나온다고 했다.
노르웨이의 겨울은 어둡고 그의 하늘은 붉었다.
땅이 준 색이 아니었다.
추사는 풍토를 차단해도 형식이 나온다고 했다.
여덟 해를 이 섬에서 보내고도 이 섬을 그리지 않았다.
그의 눈은 옛 글자에 있었다.
카푸어는 여백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계산하고 파고 칠하면 어느 땅의 것도 아닌 비움이 생긴다.
고갱은 가장 아픈 말을 했다.
그 땅에 살아도 그 땅의 문법이 나오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십 년을 살고도 가지고 간 문법으로 그렸다.
네 증언을 다 듣고 나면 명제가 작아진다.
풍토가 형식을 낳는다는 말이 모든 그림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래도 남는 것이 있다.
어떤 그림은 풍토 없이 설명되지 않는다.
설명하려 하면 빈 데가 생긴다.
왜 이 색인지, 왜 이 선인지, 왜 이만큼 비었는지를 말할 수 없다.
변시지가 그 경우다.
이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증명은 하나로 좁히는 일이고, 그림은 하나로 좁혀지지 않는다.
다만 보일 수 있다.
다섯 문을 다시 지나면서 보이려 한다.
3. 색 — 젖었다가 마른 것
1부에서 우리는 색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물었다.
타마요의 붉음에는 흙이 섞여 있었다.
오악사카의 마른 땅이 그 색을 주었다.
오키프의 색은 마른 공기에서 왔다.
습기가 없으니 색이 흐려지지 않았다.
마른 풀잎색은 그 둘과 다르다.
오키프의 마름은 처음부터 마른 것이다.
사막의 뼈는 젖은 적이 없다.
살이 없어진 뒤로 계속 말라 있었다.
마른 풀잎색은 젖었다가 마른 것이다.
제주는 습하다.
바다에 둘러싸여 있으니 그렇다.
그런데 바람이 세다.
바람이 세면 마른다.
젖으면서 마르는 땅이다.
이 모순이 그 색의 조건이다.
풀은 비를 맞고 자랐다.
여름에는 초록이었다.
그리고 바람에 말랐다.
그러니 그 색에는 두 시간이 들어 있다.
자란 시간과 마른 시간.
여름의 초록이 아니라 겨울을 지난 풀의 색이다.
죽은 색이 아니라 견딘 색이다.
이 색을 그는 찾았다.
훗날 구술에서 그 색을 어떻게 찾았는지 말했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구술사, 2004–2005, 293–294쪽)
찾았다는 말을 오래 보아야 한다.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다.
다섯 살에 섬을 떠났으니 몸에 없었다.
오사카에서 자랐고 서울에서 그렸다.
비원을 십 년 넘게 그렸다.
그때의 색은 단정하고 차분하다.
마흔아홉에 돌아와서 찾았다.
그래서 이 색은 유산이 아니다.
발견이다.
타마요는 그 색을 가지고 태어났다.
변시지는 그 색을 찾아냈다.
찾아낸 색에는 찾은 사람의 시간이 들어간다.
이름이 없다는 점도 보아야 한다.
황토색이 아니다.
노란색도 아니다.
기존의 이름으로 부를 수 없어서 새로 지어야 했다.
이름 없는 색은 그 땅에서만 만들어진다.
이름이 있는 색은 어디서나 살 수 있다.
4. 선 — 옆으로 눕는 것
2부에서 우리는 붓의 속도가 무엇이 정하는지를 물었다.
추사의 선은 돌에서 왔다.
칼이 돌을 파는 속도였다.
셋슈의 선은 젖은 종이에서 왔다.
번지기 전에 지나가야 했다.
에밀리 카의 선은 위로 갔다.
숲의 나무가 위로 자라기 때문이다.
변시지의 선은 옆으로 눕는다.
바람이 센 곳에서 나무는 눕는다.
바람이 오는 쪽 가지가 자라지 못한다.
나무는 제 몸으로 바람의 방향을 기록한다.
사람도 그렇다.
어깨가 기울고 고개가 숙는다.
그의 화면에서 인물은 자주 휘어 있다.
이 휘어짐이 언제부터 있었는가.
1945년의 누드 습작에 이미 있다.
2013년의 마지막 그림에도 있다.
예순여덟 해다.
한 곡선이 예순여덟 해를 이어졌다.
다만 뜻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노동의 몸이었다.
도쿄 시절의 습작과 〈Femme〉이 그렇다.
짐을 진 몸, 일하는 몸이 휘어 있었다.
서울에서는 지게꾼과 나무 패는 사람이 그 자리를 이었다.
제주에서는 마부와 해녀와 농사꾼이 되었다.
세 시기의 노동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노인이 나타난다.
노인의 몸은 짐을 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휘어 있다.
견딤의 몸이다.
일하는 몸이 견디는 몸으로 바뀐 것이다.
말년으로 갈수록 고개가 더 숙어진다.
그 숙임은 피로가 아니다.
예(禮)에 가깝다.
이것은 해석이다.
화백이 그렇게 말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하나는 사실이다.
형식이 예순여덟 해 동안 한 방향으로 갔다.
한 방향으로 오래 가면 그것은 습관이 아니라 문장이 된다.
5. 여백 — 두 겹으로 빈 것
3부에서 우리는 네 종류의 여백을 보았다.
팔대산인의 여백에는 물이 없었다.
없어서 빈 자리다.
윌리엄스의 여백은 같은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되풀이되어 빈 자리다.
터너의 여백은 지워져 있었다.
습기가 형태를 녹인 자리다.
카푸어의 비움은 만들어져 있었다.
설계된 자리다.
변시지의 여백은 어디에 속하는가.
보이지 않아서 빈 자리다.
바람이 있다.
그려져 있지 않지만 있다.
팔대산인의 여백은 없음의 여백이고 이 여백은 비가시의 여백이다.
제도가 없어진 자리와 자연이 보이지 않는 자리는 다르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가 더 있다.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의 자리다.
섬은 오래전 많은 사람을 잃었다.
그 일을 4·3이라 부른다.
화백은 구술에서 그 시절을 말했다.
(같은 기록, 241–243쪽)
그리고 제주에는 이어도 이야기가 있다.
바다 어딘가에 있다는 섬이다.
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그 섬에 관한 글을 손으로 남겼다.
(같은 기록, 23–26쪽)
그러니 그의 여백은 두 겹이다.
자연이 보이지 않아서 빈 것.
그리고 사람이 없어서 빈 것.
이 두 겹이 겹쳐 있다.
그래서 그 빈 자리가 밝지 않다.
터너의 여백은 밝았다.
빛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여백은 낮다.
없는 사람이 있는 여백은 밝을 수 없다.
노인의 숙인 고개는 그 여백을 향한 예다.
이것도 해석이다.
다만 그림 앞에 오래 서 있으면 그렇게 읽힌다.
6. 문법 — 하나와 하나
4부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디에 놓는가를 물었다.
피카소는 문법을 부수었다.
여러 문법이 겹친 땅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레비탄은 지평선의 높이 하나로 뜻을 정했다.
평평한 땅에서 정할 것이 그것뿐이었다.
고갱은 배치가 정확했으나 소속이 없었다.
변시지는 줄였다.
그의 문법은 세 요소뿐이다.
수평선 하나.
사람 하나.
그리고 나머지 여백.
때로 말이 더해지고 까마귀가 더해지고 조각배가 더해진다.
그 이상은 거의 없다.
왜 줄였는가.
부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겹친 땅에서는 부술 수 있다.
여러 개가 있으니 어느 하나에 매이지 않는다.
돌아온 섬에는 하나가 있었다.
바람이 하나이고 바다가 하나이고 수평선이 하나다.
하나뿐인 것은 부술 수 없다.
부수면 남는 것이 없다.
그러니 더 정확하게 놓는 쪽으로 간다.
줄이면 각 요소의 자리가 결정적이 된다.
셋만 있으면 하나를 조금 옮겨도 화면이 다 달라진다.
수평선의 높이가 뜻을 정한다.
높이면 바다가 넓어지고 낮추면 하늘이 넓어진다.
사람을 어디에 세우는가도 뜻을 정한다.
그의 노인은 대개 화면의 아래쪽에 있다.
그리고 가운데에서 조금 비켜서 있다.
정중앙에 두면 기념비가 된다.
비켜 두면 사람이 된다.
그리고 등을 보인다.
이것이 마지막 결정이다.
고갱의 인물은 우리를 본다.
정면으로 앉아 눈을 크게 뜨고 있다.
보여지기 위해 놓인 자리다.
그러면 우리는 관객이 된다.
변시지의 노인은 등을 보인다.
우리를 보지 않는다.
우리와 같은 방향을 본다.
그러면 우리는 관객이 아니게 된다.
그 사람 옆에 서게 된다.
같은 바람을 맞는 자리에 놓인다.
이것이 이 문법의 목적이다.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게 하는 것.
7. 물질성 — 얇게 두는 것
5부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그리는가를 물었다.
키퍼는 땅을 화면으로 옮겼다.
흙과 재와 납과 짚을 올렸다.
골즈워디는 화면을 땅에 두었다.
그 자리에서 구해 그 자리에 만들었다.
반 고흐는 물감 자체를 물질로 만들었다.
두께로 빛을 받았다.
변시지는 얇게 두었다.
세 사람은 더했고 그는 더하지 않았다.
이것을 부족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
마른 것은 얇다.
물감을 두껍게 올리면 촉촉해 보인다.
두께에는 습기의 느낌이 있다.
마른 풀잎색을 두껍게 칠하면 마른 풀잎색이 아니게 된다.
그러니 얇음은 색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다.
재료가 색을 배반하지 않게 한 것이다.
여기에 조건이 하나 더 있다.
그의 재료는 그 땅의 것이 아니다.
유화 물감과 캔버스를 썼다.
서양에서 온 재료다.
오사카에서 익힌 손이 제주에서도 그대로 움직였다.
키퍼는 발밑의 흙을 썼다.
골즈워디는 그 자리의 돌을 썼다.
변시지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
다섯 살에 떠났고 마흔네 해 뒤에 돌아왔다.
손은 이미 다른 곳에서 만들어져 있었다.
재료를 바꿀 수 없었다.
그래서 색을 바꾸었다.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었다.
이것도 견딤이다.
가진 것으로 하는 일에는 이름이 잘 붙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대개 사람이 하는 일이다.
8. 제주화라는 이름
이제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제주화라 부른다.
제주를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면 지역색이 된다.
서장에서 우리는 그것을 갈랐다.
지역색은 소재의 문제다.
그 땅의 사물을 그렸다는 뜻이다.
제주화는 소재의 이름이 아니다.
형식의 이름이다.
무엇이 그것을 성립시키는가.
다섯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한다.
젖었다가 마른 색.
옆으로 눕는 선.
두 겹으로 빈 여백.
하나와 하나의 문법.
마름을 지키는 얇은 표면.
이 다섯이 따로 있으면 특징이다.
함께 있으면 형식이다.
그리고 다섯이 다 같은 조건에서 나왔다.
바람이다.
바람이 풀을 말리고 나무를 눕히고 습기를 실어 가고 사람의 어깨를 기울인다.
하나의 조건이 다섯 자리에 나타나면 그것은 양식이 된다.
여기서 정직해야 한다.
한 사람이 만든 것을 양식이라 부를 수 있는가.
부를 수 있다.
다만 계보가 아직 짧다.
양식은 이어져야 양식이 된다.
한 사람에게서 끝나면 그것은 개인의 방식이다.
뒤에 오는 사람이 이어받으면 양식이 된다.
그 일은 이 책의 몫이 아니다.
이 책은 이름을 놓아 두는 데까지만 한다.
이름이 있으면 찾을 수 있다.
찾을 수 있으면 이어받을 수 있다.
9. 유배와 축복
이 책의 뿌리 문장은 이것이다.
삶은 유배요, 예술은 축복이다.
이 책을 지나오며 유배가 여러 번 나왔다.
추사의 유배는 제도가 내린 것이었다.
문서가 있고 기간이 있고 사면이 있었다.
팔대산인은 왕조를 잃었다.
속할 곳이 없어졌다.
레비탄은 도시에서 쫓겨났다.
이름이 있는 화가였는데도 그랬다.
고갱은 스스로 떠났다.
떠나고 돌아오고 다시 떠났다.
카푸어는 두 땅에 걸쳐 있다.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다.
변시지의 유배는 이것들과 다르다.
돌아온 자리에서의 유배다.
태어난 섬으로 돌아왔는데 이방인이었다.
마흔네 해를 떠나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말이 다르고 익힌 것이 다르고 아는 사람이 적었다.
그런데 더 갈 곳이 없었다.
돌아온 곳이 마지막 자리였다.
그래서 그의 유배에는 사면이 없다.
제도의 유배는 끝난다.
쫓겨난 사람은 돌아올 수 있다.
떠난 사람은 다시 떠날 수 있다.
돌아온 자리에서의 유배는 끝나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 것은 견디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가 남긴 말은 유배로 끝나지 않는다.
예술은 축복이다.
축복은 환희가 아니다.
기쁨이 넘치는 상태가 아니다.
견딤 뒤에 오는 빛이다.
그 빛이 무슨 색인가.
마른 풀잎색이다.
마른 풀은 죽은 것이 아니다.
겨울을 지난 것이다.
지나고 남은 것에 색이 있다.
그 색이 축복이다.
이 책의 명제와 이 문장이 여기서 만난다.
풍토는 형식을 낳는다.
그리고 그 형식이 견딤을 축복으로 바꾼다.
바람은 사람을 괴롭힌다.
그것이 유배다.
바람이 남긴 자리에서 색이 나온다.
그것이 축복이다.
같은 바람이 두 가지를 한다.
10. 바람이 언어가 될 때
바람은 말이 아니다.
소리를 내지만 뜻이 없다.
같은 소리가 되풀이될 뿐이다.
그런데 오래 맞으면 뜻이 생긴다.
사람의 몸이 그 뜻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나무가 한쪽으로 눕는다.
돌담에 구멍이 생긴다.
초가의 지붕을 새끼줄로 눌러 놓는다.
사람의 어깨가 기운다.
이것들은 바람이 쓴 글이다.
쓴 것은 읽을 수 있다.
읽을 수 있으면 언어다.
변시지가 한 일은 바람을 그린 것이 아니다.
바람은 그려지지 않는다.
그가 한 일은 바람이 남긴 것을 읽고 그것을 다시 쓴 것이다.
그래서 그의 화면은 번역이다.
바람의 말을 사람의 눈으로 옮긴 번역.
번역에는 원문이 있다.
그의 그림의 원문은 그 섬이다.
원문을 모르고도 번역은 읽힌다.
그러나 원문을 알면 다르게 읽힌다.
이 책이 하려 한 일이 그것이다.
원문 쪽으로 한 걸음 가는 일.
다시 언덕이다.
노인이 서 있다.
말이 곁에 있다.
조각배가 수평선 가까이 떠 있다.
까마귀가 낮게 지나간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 읽힌다.
그는 제주를 설명하지 않았다.
오래 바라보았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선 하나를 그었다.
그 선을 우리는 이제 읽을 수 있다.
읽고 나면 다시 조용해진다.
언덕에 노인이 서 있다.
바람이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