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풍토 · 부록 · 24 / 24
풍토 모더니즘의 지도
회화 밖에서
들어가며
이 책은 열여섯 사람을 지나왔다.
각자 자기 땅에서 자기 형식을 낳았다.
그런데 한 가지를 묻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는가.
터너가 영국의 습기를 그린다고 생각하며 그렸을 리 없다.
레비탄이 러시아의 지평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었을 리 없다.
풍토는 대개 모르는 사이에 들어온다.
그런데 아는 채로 들어간 사람들이 있다.
땅을 자기 과제로 삼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적어 두는 것이 이 부록이다.
그리고 하나를 더 적는다.
이 일에는 그늘이 있다.
그 그늘을 먼저 말하지 않으면 나중에 그 자리에서 무너진다.
하나 — 세 층위
풍토와 형식의 관계는 한 가지가 아니다.
세 층위로 나뉜다.
첫째, 배어든 경우.
본인은 의식하지 않는다.
그 땅에서 나고 자랐고 그 빛만 보았다.
다른 빛을 모르니 비교할 것이 없다.
터너와 레비탄과 셋슈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의 대부분이 이 층위다.
둘째, 과제로 삼은 경우.
한 사람이 땅을 고른다.
그리고 오래 파고든다.
선언하지는 않는다.
그저 계속한다.
이 층위는 자각이 있으나 강령이 없다.
셋째, 강령이 된 경우.
여럿이 모여 선언한다.
우리는 이 땅의 미술을 세운다고 말한다.
글을 쓰고 운동을 만든다.
가장 힘이 세고 가장 위험하다.
이 부록은 둘째와 셋째를 본다.
둘 — 건축에는 이미 이름이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를 인정해야 한다.
회화가 하려는 일을 건축이 먼저 했다.
이름도 먼저 얻었다.
1981년에 두 사람이 한 용어를 처음 썼다.
알렉산더 초니스와 릴리안 르페브르다.
「격자와 길」이라는 글에서였다.
두 해 뒤 케네스 프램튼이 같은 말을 조금 다른 뜻으로 다시 썼다.
1983년의 글이다.
비판적 지역주의라고 부른다.
프램튼의 글은 한 물음으로 시작한다.
폴 리쾨르에게서 가져온 물음이다.
어떻게 현대적이 되면서 동시에 근원으로 돌아갈 것인가.
이 물음이 이 책의 물음과 같다.
그다음 논지는 이렇다.
세계 어디에나 같은 건물이 서고 있다.
유리와 철로 만든 상자들이다.
그것이 국제양식이다.
그 균질함에 저항해야 한다.
그런데 옛 지붕을 흉내 내는 쪽으로 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향수이지 저항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저항하는가.
빛으로, 지형으로, 바람으로, 손에 닿는 감촉으로 저항한다.
프램튼은 이 대목에서 하이데거를 인용했다.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이다.
1954년의 글이다.
거기서 한 문장을 가져왔다.
경계는 무엇이 멈추는 자리가 아니라 무엇이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하는 자리다.
이 책이 서장에서 지나간 자리와 같다.
그리고 3부에서 우리가 여백을 두고 한 말과도 같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회화에서 물으려는 것을 건축은 사십 년 전에 물었다.
이 사실은 이 책에 불리하지 않다.
오히려 발판이 된다.
새 개념을 세우면 증명할 것이 많다.
이미 있는 계보 옆에 서면 위치가 바로 잡힌다.
여기에 속하는 이름들을 적어 둔다.
알바르 알토, 핀란드.
요른 웃손, 덴마크.
루이스 바라간, 멕시코.
제프리 바와, 스리랑카.
리파트 차디르지, 이라크.
스베레 펜, 노르웨이.
발크리슈나 도시와 찰스 코레아, 인도.
페터 춤토어, 스위스.
한 사람만 더 본다.
글렌 머컷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집을 지었다.
그는 그 땅을 가볍게 딛는다고 말했다.
땅을 깎지 않고 그 위에 얹었다.
바람이 지나가게 두었다.
제주의 돌담과 같은 생각이다.
막지 않고 지나가게 한다.
두 곳에서 같은 답이 나왔다.
셋 — 과제로 삼은 사람들
둘째 층위다.
이 자리가 이 책과 가장 가깝다.
아므리타 셰르길
1913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인도 사람이고 어머니는 헝가리 사람이었다.
파리에서 그림을 배웠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에콜 데 보자르에 있었다.
그리고 1934년 말에 인도로 돌아갔다.
돌아간 뒤 그림이 바뀌었다.
파리에서 쓰던 색이 인도에서 맞지 않았다.
그는 마을을 다녔다.
1937년에 아잔타의 벽화를 보았다.
색이 낮아지고 형태가 단순해졌다.
스물여덟에 죽었다.
짧은 생애였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이 있다.
배우러 나갔다가 돌아와 색이 바뀌었다.
이 곡선이 낯설지 않다.
셋슈가 그랬고 변시지가 그랬다.
다만 셰르길은 더 일찍 갔고 더 일찍 떠났다.
요하네스 캬르발
아이슬란드 사람이다.
그는 용암을 그렸다.
그 땅에는 나무가 적다.
대신 굳은 용암과 이끼가 있다.
아무도 그리지 않던 것이다.
그는 평생 그것을 그렸다.
땅이 준 것 중에 가장 볼품없는 것을 골라 평생의 대상으로 삼았다.
프레드 윌리엄스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이다.
그는 그 대륙이 평평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유럽의 풍경화에는 지평선과 앞과 뒤가 있다.
그 대륙에는 없다.
그래서 그는 지평선을 위로 밀어 올리거나 아예 없앴다.
나무 한 그루씩을 점처럼 흩어 놓았다.
그림이 지도처럼 보인다.
그 땅이 실제로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넷 — 강령이 된 경우
셋째 층위다.
여기서부터 힘이 세지고 그늘도 짙어진다.
캐나다, 일곱 사람의 모임
1920년 무렵이다.
일곱 사람이 모였다.
그들은 캐나다 미술이 유럽을 흉내 내고 있다고 여겼다.
북쪽으로 갔다.
호수와 바위와 침엽수를 그렸다.
강한 색과 굵은 선을 썼다.
그리고 이것이 캐나다의 미술이라고 말했다.
성공했다.
지금도 캐나다에서 그 그림들은 국민적이다.
에밀리 카를 알아본 것도 그들 중 한 사람이다.
남미, 뒤집힌 지도
호아킨 토레스-가르시아는 우루과이 사람이다.
유럽에서 오래 지내다 돌아왔다.
1934년에 그는 지도를 하나 그렸다.
남미를 거꾸로 놓은 지도다.
남쪽이 위로 갔다.
그는 말했다.
우리의 북쪽은 남쪽이라고.
작은 그림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이 강령이 되었다.
일본, 무명의 손
야나기 무네요시가 있었다.
그는 이름 없는 장인들이 만든 물건을 모았다.
밥그릇과 옷과 소반 같은 것들이다.
민예라고 불렀다.
그 물건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이름을 남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역의 흙과 지역의 손이 만든 것들이다.
이 생각에는 힘이 있다.
그런데 뒤에 볼 그늘도 여기서 나온다.
오스트레일리아, 사막의 회화
1971년에 한 학교에서 시작되었다.
파푸냐라는 곳이다.
제프리 바던이라는 교사가 있었다.
그가 아이들에게 벽화를 그려 보라고 했다.
그것을 본 마을의 어른들이 붓을 들었다.
원주민 화가들이 물감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전에는 모래와 몸에 그렸다.
화면은 점으로 채워졌다.
위에서 내려다본 것 같기도 하고 지도 같기도 하다.
서양 사람들은 그것을 추상이라고 불렀다.
틀렸다.
그것은 추상이 아니다.
땅의 구조다.
물길과 야영지와 이야기가 지나간 길이 그대로 화면이 되었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닮아 보이는데 출처가 다른 경우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와 화면이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하나는 화가의 몸짓에서 나왔고 다른 하나는 땅에서 나왔다.
이 책이 단색화와 변시지를 놓고 말한 것과 같은 구조다.
닮은 화면이 같은 뿌리를 뜻하지 않는다.
이집트, 흙으로 지은 집
하산 파티가 있었다.
그는 콘크리트 대신 흙벽돌로 지었다.
그 땅에 있던 재료다.
값이 싸고 더위를 막아 준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집을 지으려 했다.
성공한 부분도 있고 실패한 부분도 있다.
다만 물음은 분명했다.
이 땅의 재료로 이 땅의 집을 지을 수 있는가.
다섯 — 그늘
이제 어려운 자리다.
풍토를 강령으로 삼으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자리가 있다.
땅을 말하면 소속을 말하게 된다.
소속을 말하면 누가 속하고 누가 속하지 않는지를 말하게 된다.
그러면 배제가 따라온다.
세 가지를 적는다.
하나.
일곱 사람이 그린 북쪽에는 사람이 없다.
빈 땅이다.
그런데 그 땅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
비어 있다고 그린 것이 문제가 되었다.
지금도 논의 중이다.
둘.
민예의 눈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눈이 식민지의 물건을 볼 때 어떤 자리에 서 있었는지는 다른 문제다.
보는 사람과 보이는 사람 사이에 힘의 차이가 있었다.
이것도 논의 중이다.
셋.
가장 나쁜 경우가 있다.
피와 흙이라는 말이 있었다.
땅과 핏줄을 하나로 묶은 말이다.
그 말이 어디로 갔는지 우리는 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야 한다.
풍토는 사람을 묶는 데 쓰일 수 있다.
그때 풍토는 조건이 아니라 소유가 된다.
조건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소유는 주인을 정한다.
이 책은 풍토를 조건으로 쓴다.
소유로 쓰지 않는다.
이 구분을 놓치면 이 책은 위험해진다.
여섯 — 선언하지 않은 사람의 자리
여기서 변시지를 다시 본다.
그는 어느 층위에 있는가.
첫째는 아니다.
그는 다섯 살에 섬을 떠났다.
색이 몸에 없었다.
마흔아홉에 돌아가기로 정했다.
그것은 선택이었다.
셋째도 아니다.
그는 모임을 만들지 않았다.
글로 강령을 쓰지 않았다.
우리의 미술을 세우자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러니 둘째다.
혼자 정하고 오래 계속한 사람이다.
삼십팔 년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가 드러난다.
선언하지 않은 것이 그를 지켰다.
선언하면 대표하게 된다.
대표하면 대표되지 않는 사람이 생긴다.
그는 누구를 대표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러니 누구를 지운 적도 없다.
그의 화면에 있는 것은 한 노인이다.
제주 사람 전체가 아니다.
한 사람이다.
싸우지 않는 미학은 소극성이 아니었다.
그것이 그를 그늘에서 벗어나게 했다.
맺음
지도를 그려 보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이 물음은 한 사람의 물음이 아니었다.
핀란드에서, 인도에서, 우루과이에서, 아이슬란드에서, 이집트에서.
같은 물음이 각각 일어났다.
이 땅의 것으로 이 시대의 것을 만들 수 있는가.
답은 저마다 달랐다.
건물이 된 곳도 있고 그릇이 된 곳도 있고 그림이 된 곳도 있다.
강령이 된 곳도 있고 조용히 넘어간 곳도 있다.
변시지는 조용한 쪽이다.
그는 아무것도 세우지 않았다.
다만 섬으로 갔고 오래 있었다.
그리고 색을 하나 찾았다.
지도 위에 점을 하나 찍는다면
그 점은 소리를 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