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풍토는 형식을 낳는다/제5부 · 물질성

화가와 풍토 · 제15장 · 21 / 24

골즈워디, 그 자리에서 구한 것

제5부 · 물질성

하나

사진 한 장이다.

그림이 아니다.
사진밖에 없다.

가운데에 돌이 쌓여 있다.
알 모양이다.
아래가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진다.

접착제는 없다.
돌이 서로를 눌러 서 있다.

주위는 갯벌이다.
물이 빠진 자리다.

돌의 색과 갯벌의 색이 거의 같다.
같은 곳에서 나왔으니 같다.

사진 아래에 날짜가 적혀 있다.
장소도 적혀 있다.

이 두 줄이 중요하다.
작품의 제목이 사실상 날짜와 장소다.

그리고 이 돌은 지금 없다.

물이 들어와 무너뜨렸다.
그날 오후에 그렇게 되었다.

다른 사진도 있다.

땅바닥에 사람 모양이 남아 있다.
누운 자리다.

주위는 젖어 있고 그 자리만 말라 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 그가 누웠다.
그리고 비가 그치기 전에 일어났다.

젖지 않은 자리가 사람 형태로 남았다.

이것도 지금은 없다.
곧 말랐고, 마르면서 사라졌다.

또 다른 사진이 있다.

얼음 조각이 아침 햇빛에 붙어 있다.
고드름을 이어 붙여 곡선을 만들었다.

접착제 대신 물을 썼다.
얼려 붙인 것이다.

해가 올라오면 녹는다.
그래서 해가 뜨기 전에 만들었다.

작품의 수명이 몇 시간이다.

둘

앤디 골즈워디는 1956년에 잉글랜드에서 태어났다.

요크셔 근처에서 자랐다.
소년 시절에 농장에서 일했다.

돌을 옮기고 울타리를 고치고 건초를 쌓았다.

그는 훗날 그 일이 자기 작업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반복되는 노동, 몸으로 익힌 순서, 계절에 맞춘 일감.

농사는 자연을 이기려는 일이 아니다.
자연의 순서에 맞추는 일이다.

씨는 정해진 때에 뿌린다.
그때를 놓치면 다음 해를 기다린다.

이 감각이 그의 작업에 남아 있다.

그가 자란 곳에는 돌담이 많다.
잉글랜드 북부와 스코틀랜드의 들판을 가르는 담이다.

접착제를 쓰지 않고 쌓는다.
돌의 모양을 보고 놓을 자리를 찾는다.

수백 년 된 담이 아직 서 있다.
무너진 곳은 그때그때 고쳐 쌓는다.

이 기술을 만든 사람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
그 땅에서 오래 반복된 방법만 남았다.

골즈워디는 이 전통 안에 있다.
새로 발명한 것이 아니라 이어받은 것이다.

담을 쌓는 사람은 예술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밭을 가르려고 쌓는다.

그런데 그 담이 그 땅의 형식이다.

돌이 많은 땅에서는 돌담이 나온다.
나무가 많은 땅에서는 나무 울타리가 나온다.

풍토가 형식을 낳는 가장 오래된 예가 담이다.

그림보다 담이 먼저였다.

미술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남부의 작은 마을로 갔다.

1980년대 중반이었다.
그때부터 그곳에 산다.

한 곳에 오래 머무는 작가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의 방식에 필요한 조건이다.

같은 땅을 여러 해 보아야 무엇이 언제 있는지를 안다.

어느 나무의 잎이 먼저 붉어지는지.
어느 개울이 언제 얼는지.
어느 돌담이 어느 계절에 무너지는지.

이것은 자료로 알 수 없다.
살아야 안다.

그는 대개 손으로 작업한다.
도구를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돌을 쌓을 때 균형이 무너지면 처음부터 다시 한다.
여러 번 무너진 뒤에 서는 경우도 있다.

무너지는 것도 작업의 일부다.

그의 작업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곧 사라지는 것이다.
얼음과 잎과 젖은 자리.

다른 하나는 오래 남는 것이다.
돌로 쌓은 담과 케언.

사라지는 것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남는 것도 계속 만든다.

사라짐만이 그의 주제는 아니다.
시간이 그의 주제다.

몇 시간의 시간과 몇백 년의 시간을 함께 다룬다.

셋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골즈워디는 재료를 옮기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구한다.
그 자리에서 만든다.
그 자리에 둔다.

앞 장의 키퍼는 땅을 화면으로 옮겼다.
골즈워디는 화면을 땅에 두었다.

반대 방향이다.

이렇게 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다섯 가지가 달라진다.

첫째, 작품이 장소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 갯벌의 돌은 그 갯벌에서만 그 작품이다.
같은 돌을 미술관에 가져와 똑같이 쌓아도 다른 것이 된다.

빛이 다르고 물이 없고 냄새가 없다.

풍토가 작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배경이 아니라 재료다.

이 책의 명제가 여기서 가장 문자 그대로 성립한다.
풍토가 형식을 낳는다는 말이 비유가 아니게 된다.

둘째, 사라짐이 형식이 된다.

보통 작가는 작품이 오래 남기를 바란다.
재료를 고르는 기준에 내구성이 들어간다.

골즈워디는 그 기준을 뺀다.

얼음으로 만들면 녹는다.
잎으로 만들면 흩어진다.

녹고 흩어지는 것을 알고 만든다.

그러면 작품은 물건이 아니라 사건이 된다.
있었던 일이 된다.

셋째, 노동이 보인다.

돌 하나를 놓고 다음 돌을 얹는 일에는 시간이 든다.
그 시간이 결과에 남는다.

기계로 하면 빠르고 정확하다.
손으로 하면 느리고 조금씩 어긋난다.

어긋난 자리가 사람의 흔적이다.

넷째, 실패가 기록된다.

무너진 것도 사진으로 남는다.
그는 무너짐을 감추지 않는다.

완성만 보여주면 작품은 결과가 된다.
무너짐까지 보여주면 작품은 과정이 된다.

다섯째, 관객이 늦게 온다.

작품이 만들어질 때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개 혼자 만든다.

우리가 보는 것은 언제나 이미 지난 것이다.

회화는 그렇지 않다.
그림은 우리를 기다린다.

백 년 뒤에 가도 그 자리에 걸려 있다.

골즈워디의 작업은 기다리지 않는다.
먼저 사라지고, 우리는 나중에 도착한다.

늦게 도착하는 일에는 애도가 섞인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이 남는다.

작품은 사라지고 사진이 남는다.
그러면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사진을 작품으로 볼 것인가, 증언으로 볼 것인가.

이 물음에는 정답이 없다.
그는 사진 없이는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고, 사진만으로는 그 자리에 있던 것이 되지 않는다.

남는 것과 사라진 것 사이에 사진이 걸려 있다.

넷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골즈워디가 자연 속에서 작품을 만들었다면, 변시지는 자연의 힘을 화면 안으로 불러들였다.

방향이 다르다.

골즈워디는 나가서 만든다.
변시지는 들여와서 그린다.

골즈워디의 작업은 그 땅을 떠날 수 없다.
변시지의 그림은 그 땅을 떠나 서울에도 걸리고 도쿄에도 걸린다.

그런데 떠나서도 섬을 데리고 간다.

이것이 회화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장소를 옮기면서 장소를 보존한다.

두 사람의 공통점을 보자.

둘 다 한 곳에 오래 머물렀다.

골즈워디는 스코틀랜드의 한 마을에 사십 년 가까이 산다.
변시지는 제주에서 서른여덟 해를 살았다.

1975년에 갔고 2013년에 세상을 떠났다.

오래 머물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형식이 있다.
두 사람이 그것을 증명한다.

머무름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한곳에서 나서 그곳에 남는 머무름.
떠났다가 돌아와 남는 머무름.

골즈워디는 앞쪽에 가깝다.
잉글랜드에서 태어나 스코틀랜드로 갔으니 완전히 앞쪽은 아니다.
그러나 같은 문화권 안의 이동이었다.

변시지는 뒤쪽이다.
다섯 살에 떠나 마흔아홉에 돌아왔다.

돌아온 사람의 눈은 다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본다.

골즈워디는 어느 나무의 잎이 먼저 붉어지는지 안다.
변시지는 그것을 몰랐을 것이다.

대신 그는 바람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곳에서 자란 사람은 바람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아는 것과 놀라는 것은 다르다.

골즈워디의 작업에는 아는 것이 쌓여 있다.
변시지의 화면에는 놀란 것이 남아 있다.

둘 다 오래 머물러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오래 머문 뒤에 남은 것이 다르다.

그리고 바람이 있다.

골즈워디는 바람에 기댄 적이 있다.
몸을 기울여 바람에 몸을 맡기는 작업을 했다.

바람이 그를 밀고 그가 버틴다.
그 사이의 어느 각도에서 몸이 멈춘다.

변시지의 노인이 바로 그 각도에 서 있다.

한쪽은 자기 몸으로 그 각도를 만들었다.
다른 쪽은 그 각도를 그렸다.

젖지 않은 자리도 그렇다.

골즈워디가 누웠다 일어난 자리에 사람 형태가 남았다.
사람은 없고 형태만 있다.

변시지의 화면에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얼굴이 없을 때가 많다.

멀리 있어서 없거나, 숙여서 안 보인다.

두 경우 다 특정한 누구가 아니다.
사람이 있었다는 것만 남는다.

차이도 분명하다.

골즈워디의 작업에는 슬픔이 없다.
사라지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변시지의 화면에는 슬픔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애도가 있다.

노인의 숙인 고개는 돌아오지 않은 이들에게 갖추는 예(禮)다.

이것은 해석이다.
다만 그림 앞에 오래 서 있으면 그렇게 읽힌다.

섬에는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그 일을 4·3이라 부른다.

화백은 구술에서 그 시절을 말했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구술사, 2004–2005, 241–243쪽)

골즈워디의 땅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사라짐은 자연의 사라짐이다.

변시지의 사라짐은 사람의 사라짐이다.

같은 물질성의 문 앞에 서 있어도, 무엇이 사라졌는지가 다르면 형식이 달라진다.

다섯

물이 들어온다.

돌이 하나 움직이고, 그다음에 여러 개가 움직인다.
쌓인 것이 흩어진다.

그는 물러서서 본다.
막지 않는다.

제주의 돌담도 물러서는 방식으로 서 있다.
빈틈으로 바람을 지나가게 한다.

막지 않고 통과시킨다.

두 사람은 서로를 모른다.
같은 것을 배운 적도 없다.

그런데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견딤은 버티는 것이 아니다.
지나가게 하는 것이다.

돌은 흩어졌고 갯벌은 그대로다.
다음 물이 빠지면 다시 쌓을 수 있다.

쌓을 수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을 쌓는다는 것은 다르다.

같은 것은 두 번 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