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풍토 · 제14장 · 20 / 24
키퍼, 재가 된 땅
제5부 · 물질성
하나
큰 화면이다.
사람보다 높고 팔을 벌린 것보다 넓다.
가까이 서면 화면이 아니라 벽처럼 느껴진다.
한 걸음 물러나야 전체가 보인다.
그런데 물러나면 표면이 안 보인다.
이 그림은 두 거리를 요구한다.
멀리서 보는 거리와 가까이서 보는 거리.
먼저 멀리서 본다.
밭이 보인다.
고랑이 화면 아래에서 위로 좁아지며 멀어진다.
그런데 자란 것이 없다.
고랑만 있고 작물이 없다.
하늘은 없다.
화면 위쪽까지 흙이 올라와 있다.
멀리 보이는 것은 지평선이 아니라 흙의 끝이다.
이제 가까이 간다.
표면에 짚이 붙어 있다.
마른 짚이다.
색이 빠지고 부스러질 듯하다.
그림에 붙은 짚이 아니라 그림이 된 짚이다.
그 아래에 재가 깔려 있다.
회색이지만 회색만은 아니다.
탄 것의 색이다.
물감이 두껍다.
갈라진 곳이 있다.
마르면서 스스로 금이 갔다.
금은 화가가 그린 것이 아니다.
재료가 만든 것이다.
측면에서 보면 표면이 울퉁불퉁하다.
전시장의 조명이 그 위에 작은 그림자를 만든다.
그림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지금 이 자리의 빛이 만든 것이다.
조명을 옮기면 그림자도 옮겨진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매번 조금씩 다르다.
그림이 시간을 견딘 흔적을 이미 갖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견디고 있다.
둘
안젤름 키퍼는 1945년에 태어났다.
전쟁이 끝난 해다.
독일 남서부의 작은 도시였다.
그가 처음 본 세계는 폐허였다.
무너진 건물, 치운 돌더미, 빈 자리.
아이는 그것을 폐허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저 세계라고 부른다.
무너진 것이 정상인 세계에서 자란 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온전한 것을 나중에 배운다.
여기서 한 가지를 생각해 두어야 한다.
풍토를 자연 조건으로만 보면 키퍼는 설명되지 않는다.
독일의 기후나 지형은 그의 화면과 별로 관계가 없다.
그의 땅은 역사가 지나간 땅이다.
풍토에는 두 겹이 있다.
자연이 만든 겹과 사람이 만든 겹.
바람은 자연이 만든다.
폐허는 사람이 만든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구분이 없다.
둘 다 그냥 거기 있었던 것이다.
전쟁도 풍토가 된다.
한 세대가 그 위에서 나고 자라면 그렇게 된다.
서장에서 넓힌 명제가 여기서 가장 분명해진다.
그 땅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도 풍토다.
제주를 읽을 때도 이 넓힘이 필요하다.
바람만으로는 다 읽히지 않는다.
키퍼는 처음에 법을 공부했다.
그다음에 그림으로 옮겼다.
젊은 시절에 그는 사진 작업을 했다.
여러 장소에서 지난 시대의 인사를 하는 자신을 찍었다.
1969년이었다.
많은 사람이 불편해했다.
지금도 그 작업은 논쟁거리다.
그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는 여러 갈래로 읽힌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독일 미술이 오래 피해 온 자리로 걸어 들어갔다.
그 시절 독일에서 신화와 역사는 다루기 어려운 재료였다.
누가 그것을 어떻게 썼는지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퍼는 피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쉬운 길이 아니었다.
칭찬만 받지도 않았다.
앞선 세대에 요제프 보이스가 있었다.
보이스는 펠트와 기름을 썼다.
물감이 아닌 것으로 작업하는 길을 먼저 냈다.
키퍼는 그 길에서 더 갔다.
보이스가 재료를 골랐다면 키퍼는 재료로 땅을 옮겼다.
그는 시를 오래 읽었다.
파울 첼란의 시에서 두 여자의 이름을 가져왔다.
마르가레테와 줄라미트.
한쪽은 금빛 머리카락이고 다른 쪽은 재빛 머리카락이다.
첼란은 독일어로 썼다.
그 언어로 쓰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언어로 쓰는 일이 쉽지도 않았다.
키퍼는 금빛 자리에 짚을 붙였다.
재빛 자리에는 재를 놓았다.
비유를 물질로 바꾼 것이다.
시에서 읽은 것을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만들었다.
이것이 그의 방법이다.
말로 된 것을 물질로 되돌린다.
훗날 그는 프랑스로 작업장을 옮겼다.
넓은 땅에 건물과 통로를 짓고 그 안에 작품을 두었다.
그림을 걸 곳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림이 살 곳을 만들었다.
셋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키퍼는 땅을 그리지 않았다.
땅을 옮겼다.
흙을 화면에 발랐다.
짚을 붙였다.
납을 녹여 얹었다.
재를 뿌렸다.
재현이 아니라 이동이다.
풍경화는 땅을 보고 그린다.
땅은 화면 밖에 있고, 화면 안에는 그 모습만 있다.
키퍼의 화면에는 모습이 아니라 것이 있다.
흙의 모습이 아니라 흙이 있다.
이렇게 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네 가지가 달라진다.
첫째, 시간이 화면 안으로 들어온다.
물감은 마르면 멈춘다.
흙과 짚은 마른 뒤에도 계속 변한다.
색이 빠지고 부스러지고 떨어진다.
그림이 늙는다.
사람처럼 늙는다.
보통 그림에서 시간은 그려지는 것이다.
저녁이거나 겨울이거나 노년이다.
키퍼의 화면에서 시간은 그려지지 않는다.
일어난다.
둘째, 무게가 생긴다.
큰 화면은 옮기기 어렵다.
납이 얹힌 화면은 더 어렵다.
그림이 장소를 갖게 된다.
쉽게 움직일 수 없으니 그 자리에 머문다.
가벼운 그림은 세계를 돌아다닌다.
무거운 그림은 사람을 오게 한다.
방향이 반대다.
셋째, 재료가 뜻을 품는다.
납은 무겁고 독이 있다.
연금술에서 납은 금이 되기 전의 물질이다.
아직 되지 않은 것, 기다리는 것.
재는 무엇이 있었다는 증거다.
탄 것이 없으면 재도 없다.
재는 부재의 물질적 형태다.
짚은 곡식의 나머지다.
알곡을 거둔 뒤에 남는 것.
쓸모를 다한 뒤에 남은 몸.
이 재료들을 골랐다는 것 자체가 문장이다.
넷째, 그림이 만지고 싶어진다.
미술관은 만지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표면이 손을 부른다.
보는 그림과 만지고 싶은 그림은 다른 종류다.
만지고 싶어지는 순간 그림은 사물이 된다.
사물이 되면 우리와 같은 자리에 놓인다.
그림을 올려다보는 대신 그림과 나란히 서게 된다.
그러니까 키퍼에게 물질성은 기법이 아니다.
말하는 방식이다.
독일의 땅은 무엇을 태웠고 무엇을 묻었는가.
그 물음을 그림이 재료로 되묻는다.
말로 물으면 논쟁이 된다.
재료로 물으면 남는다.
논쟁은 끝나고 재는 남는다.
넷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키퍼의 화면과 크기가 다르다.
대개 사람 키보다 작다.
품에 안을 수 있는 것도 많다.
두께도 다르다.
키퍼의 화면은 두껍고 변시지의 화면은 얇다.
그런데 두 사람은 같은 것을 다룬다.
견딤이다.
키퍼는 견딘 땅을 화면으로 옮겼다.
변시지는 견디는 몸을 화면에 세웠다.
키퍼가 독일의 폐허를 그렸다면, 변시지는 제주의 바람을 그렸다.
방향이 반대다.
키퍼는 쌓는다.
흙과 재와 납을 올린다.
화면이 무거워진다.
변시지는 덜어낸다.
구름을 지우고 길을 지우고 집을 지운다.
화면이 가벼워진다.
무거워진 화면과 가벼워진 화면이 같은 것을 말한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땅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독일의 폐허는 쌓인 것이다.
무너진 것들이 층으로 남았다.
파면 나온다.
제주의 바람은 쌓이지 않는다.
지나간다.
지나가면서 깎는다.
쌓인 땅에서는 쌓는 형식이 나오고, 깎이는 땅에서는 덜어내는 형식이 나온다.
같은 물음에 두 답이 있다.
한 가지를 더 보아야 한다.
키퍼의 재료는 그가 가져온 것이다.
짚을 구해 와서 붙였다.
변시지의 재료는 그가 가져온 것이 아니다.
그는 유화 물감과 캔버스를 썼다.
서양에서 온 재료다.
일본에서 배운 방식이기도 하다.
오사카에서 익힌 손이 제주에서도 그대로 움직였다.
대신 그는 색을 바꾸었다.
물감은 사 온 것이지만 마른 풀잎색은 사 온 것이 아니다.
그 색은 섬에서 왔다.
재료를 바꾸지 않고 색을 바꾸었다.
물질을 옮기지 않고 물질의 이름을 옮겼다.
여기에 조건의 차이가 있다.
키퍼는 자기 땅에서 자랐다.
쓸 재료가 발밑에 있었다.
변시지는 다섯 살에 섬을 떠났다.
돌아왔을 때 그는 마흔아홉이었다.
손은 이미 다른 곳에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니 그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재료가 아니라 색이었다.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었다.
두 방식 사이에 우열은 없다.
가진 조건이 달랐을 뿐이다.
키퍼에게는 폐허가 있었고, 변시지에게는 바람이 있었다.
또 하나가 있다.
키퍼의 화면에는 사람이 잘 나오지 않는다.
땅과 건물과 이름이 나온다.
변시지의 화면에는 사람이 있다.
거의 언제나 있다.
노인 한 사람이 서 있다.
폐허를 그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없어진 것을 보여주는 방법.
남은 사람을 보여주는 방법.
키퍼는 앞쪽을 택했고 변시지는 뒤쪽을 택했다.
다섯
키퍼의 화면에서 짚은 언젠가 떨어질 것이다.
미술관은 그것을 막으려 애쓴다.
온도를 맞추고 습도를 맞추고 손대지 못하게 한다.그래도 떨어질 것이다.
키퍼는 그것을 알고 재료를 골랐다.
변시지의 화면에서 마른 풀잎색은 떨어지지 않는다.
물감이니 남는다.그러나 그 색이 가리키는 풀은 이미 없다.
그해 겨울에 마른 풀은 그해에 흩어졌다.한쪽은 사라질 재료로 남는 것을 말했다.
다른 쪽은 남는 재료로 사라진 것을 말했다.두 사람 다 없어지는 것을 오래 보았다.
큰 화면 앞에서 물러나 본다.
짚이 붙어 있다.
재가 깔려 있다.밭에는 아직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