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풍토 · 제3장 · 5 / 24
뭉크, 안에서 나온 붉음
제1부 · 색
하나
하늘이 붉다.
노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붉다.
피에 가깝다.
붉음이 띠처럼 누워 있다.
가로로 길게 몇 겹이다.
그 사이에 노란 띠가 섞여 있다.
아래쪽은 파랗고 검다.
물이다. 만이다.
앞에 다리가 있다.
난간이 비스듬히 뻗어 화면 밖으로 나간다.
그 선이 급하다.
곧게 가지 않고 화면을 가른다.
다리 위에 사람이 있다.
얼굴이 사람 얼굴이 아니다.
뼈만 남은 것 같기도 하고 벗겨진 것 같기도 하다.
두 손을 뺨에 대고 있다.
입이 벌어져 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멀리 두 사람이 서 있다.
검은 형체다. 등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이쪽을 보지 않는다.
화면의 모든 선이 흐른다.
하늘의 띠도 흐르고 물의 선도 흐르고 사람의 몸도 흐른다.
다리의 난간만 곧다.
곧은 것 하나와 흐르는 것 전부가 부딪친다.
색을 보자.
붉음이 얇다.
앞의 두 장과 다르다.
타마요는 색을 쌓았고 오키프는 색을 면으로 놓았다.
여기서는 색이 흘러 있다.
칠한 것이 아니라 문지른 것처럼 보인다.
둘
에드바르 뭉크는 1863년에 노르웨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였다.
믿음이 엄한 집이었다.
다섯 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결핵이었다.
열세 살에 누나가 세상을 떠났다.
같은 병이었다.
집 안에 병이 오래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병을 보았다.
누워 있는 사람과 앉아서 지켜보는 사람.
그림을 시작한 뒤에도 그 방을 여러 번 그렸다.
침대와 창과 앉아 있는 사람.
같은 장면을 평생 다시 그렸다.
그는 여러 나라를 오래 다녔다.
파리와 베를린에서 지냈다.
그곳에서 새 그림을 보았고 논쟁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한동안 몸과 마음이 무너졌다.
요양을 받았다.
그 뒤 노르웨이로 돌아와 오래 살았다.
오슬로 근처에 집이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가 놀랍다.
그는 그림을 밖에 내놓았다.
마당에 세워 두고 비를 맞혔다.
눈도 맞혔다.
일부러 그랬다.
그는 그것을 거친 처방이라 불렀다.
캔버스가 상하고 물감이 벗겨졌다.
그래도 계속했다.
그림이 날씨를 견디고 나면 무언가 달라진다고 여겼다.
이 이야기를 이 책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풍토가 그림에 직접 닿은 사례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비가 화면에 떨어졌다.
그런데 무엇이 달라졌는가.
표면이 달라졌다.
물감이 상하고 결이 생겼다.
색은 달라지지 않았다.
풍토가 그의 표면을 만졌지만 그의 색을 만들지는 않았다.
이것이 이 장의 핵심이다.
셋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뭉크의 색은 땅에서 오지 않았다.
노르웨이의 겨울은 길다.
해가 낮고 낮이 짧다.
그 땅의 빛은 회색과 청색으로 기운다.
그런데 그의 화면은 붉다.
붉음이 그 땅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노을은 어디에나 있다.
여기서 알아 둘 것이 있다.
「절규」의 붉은 하늘을 두고 한 가설이 있다.
1883년에 인도네시아에서 큰 화산이 터졌다.
그 재가 대기를 돌아 여러 해 동안 세계의 노을을 붉게 만들었다.
그때 유럽의 하늘이 실제로 이상하게 붉었다는 기록이 있다.
뭉크가 그 하늘을 보았을 수 있다는 가설이다.
흥미로운 이야기다.
그리고 이 책의 명제에는 오히려 유리한 이야기다.
풍토가 색을 낳았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가설은 가설이다.
확정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같은 하늘을 본 사람이 수십만 명이었다.
그 하늘을 그린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게 그린 사람은 그뿐이다.
그가 남긴 글에서 그는 그 하늘을 날씨로 말하지 않았다.
길을 걷다가 멈춰 섰고, 하늘이 붉어졌고, 자연을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고 썼다.
날씨의 기록이 아니다.
몸의 기록이다.
그러니까 붉음은 밖에서 왔더라도 안에서 다시 만들어졌다.
방향이 반대인 것이다.
앞의 두 화가는 땅에서 색을 받았다.
타마요는 흙의 붉음을 받았다.
오키프는 마른 공기의 파랑을 받았다.
뭉크는 색을 안에서 밀어냈다.
여기서 두 가지가 따라온다.
첫째, 색이 형태를 따라가지 않는다.
오키프의 색은 형태에 붙어 있었다.
뼈는 흰색이고 하늘은 파란색이다.
뭉크의 색은 형태를 떠난다.
하늘이 붉을 이유가 화면 안에 없다.
설명이 없다.
색이 사물의 속성이 아니라 상태의 이름이 된다.
둘째, 색이 소리를 낸다.
「절규」에서 소리는 그려질 수 없다.
그런데 화면이 시끄럽다.
붉음이 소리를 대신한다.
색이 감각의 자리를 옮긴 것이다.
눈으로 듣게 만들었다.
이것은 큰 발명이다.
그리고 이것은 풍토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다.
여기서 서장의 구분을 다시 가져와야 한다.
풍토는 여럿이 함께 겪는 것이다.
바람은 섬사람 모두가 맞는다.
전쟁은 한 세대가 함께 지난다.
그래서 그 안에서 공통의 형식이 나온다.
뭉크의 상실은 한 집안의 것이었다.
어머니와 누나를 잃은 것은 그와 그 형제들의 일이다.
노르웨이 사람 모두의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풍토가 아니다.
전기(傳記)다.
풍토와 전기는 다르다.
이 구분이 이 책을 지킨다.
뭉크가 반대 증인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색은 전기에서 나왔다.
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결함이 아니다.
색이 안에서 나오는 길도 있다는 증언이다.
그 길로 그는 아주 멀리 갔다.
넷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두 사람 다 상실을 그렸다.
그런데 상실의 크기가 다르다.
뭉크의 상실은 한 집의 것이다.
어머니와 누나.
변시지의 화면에 있는 상실은 섬의 것이다.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
섬은 오래전 많은 사람을 잃었다.
그 일을 4·3이라 부른다.
화백은 구술에서 그 시절을 말했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구술사, 2004–2005, 241–243쪽)
노인의 숙인 고개는 돌아오지 않은 이들에게 갖추는 예(禮)다.
이것은 해석이다.
다만 그림 앞에 오래 서 있으면 그렇게 읽힌다.
한쪽은 개인의 상실이고 다른 쪽은 공동의 상실이다.
그래서 형식이 다르다.
개인의 상실은 밖으로 나간다.
소리를 지른다.
공동의 상실은 안으로 들어간다.
말을 줄인다.
여럿이 같은 것을 잃으면 설명할 필요가 없다.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는 것이 예가 된다.
색도 그렇다.
뭉크의 붉음은 소리를 낸다.
변시지의 마른 풀잎색은 소리를 낮춘다.
한쪽은 색으로 외쳤고 다른 쪽은 색으로 침묵했다.
인물의 자세도 반대다.
「절규」의 사람은 정면을 본다.
우리를 본다.
변시지의 노인은 고개를 숙인다.
우리를 보지 않는다.
그런데 두 인물 다 얼굴이 없다.
뭉크의 인물은 얼굴이 있으나 사람의 얼굴이 아니다.
변시지의 노인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한쪽은 지워서 없앴고 다른 쪽은 가려서 없앴다.
둘 다 특정한 누구가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두 화면 다 우리를 대신한다.
이제 위계를 두지 않고 말해야 한다.
뭉크의 방향이 틀린 것이 아니다.
색이 안에서 나온 그림은 그 나름의 진실을 가진다.
그 진실은 땅과 무관하게 사람에게 닿는다.
「절규」가 세계에서 읽히는 이유가 그것이다.
어느 땅의 이야기도 아니기 때문에 어느 땅에서도 읽힌다.
변시지의 그림은 반대다.
한 섬의 이야기다.
그래서 그 섬을 알아야 더 깊이 읽힌다.
두 가지가 다 있어야 회화가 온전하다.
땅에서 나온 색과 안에서 나온 색.
이 책은 앞쪽을 따라가지만 뒤쪽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가 남는다.
뭉크는 그림을 밖에 내놓아 비바람을 맞혔다.
변시지는 그림을 안에서 그렸다.
그러나 화면 안으로 바람을 들였다.
한쪽은 그림을 풍토에 내놓았고 다른 쪽은 풍토를 그림에 들였다.
방향이 반대다.
그리고 둘 다 풍토와 만났다.
만나는 방식이 여럿이라는 것이 이 책의 발견이다.
다섯
붉음이 아직 하늘에 있다.
만은 어둡고 다리는 비었다.
멀리 두 사람은 여전히 등을 보이고 있다.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먼 섬의 화면에서는 노인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거기서도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한쪽은 지르고 다른 쪽은 참는다.
둘 다 우리에게는 조용하다.
색은 어디에서 오는가.
땅에서 오기도 하고 안에서 오기도 한다.
첫 번째 문은 이렇게 닫힌다.
답을 하나로 만들지 않고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