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풍토 · 제2장 · 4 / 24
오키프, 마른 공기의 윤곽
제1부 · 색
하나
뼈 하나가 화면을 다 채운다.
골반뼈다.
소의 것이다.
가운데에 구멍이 있다.
뼈에 원래 있는 구멍이다.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인다.
파랗다.
아주 파랗다.
탁한 데가 없다.
뼈는 흰색이다.
그런데 흰색만은 아니다.
푸른 기가 도는 자리가 있고 누런 기가 도는 자리가 있다.
빛이 닿는 각도에 따라 다르다.
배경이 없다.
땅도 없고 지평선도 없다.
뼈와 하늘뿐이다.
크다.
실제 뼈보다 훨씬 크다.
사람 상반신만 하다.
크기의 기준이 없으니 얼마나 큰지 알 수 없다.
뼈가 산처럼 보이기도 한다.
윤곽이 선명하다.
흐린 자리가 없다.
뼈와 하늘이 만나는 선이 칼처럼 서 있다.
앞 장에서 본 화면과 반대다.
타마요의 표면은 거칠었다.
이 표면은 매끄럽다.
붓 자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색이 면으로 고르게 놓여 있다.
가까이 가도 표면이 달라지지 않는다.
멀리서 본 것과 가까이서 본 것이 같다.
숨긴 것이 없는 화면이다.
둘
조지아 오키프는 1887년에 미국 위스콘신에서 태어났다.
농장이었다.
시카고와 뉴욕에서 그림을 배웠다.
한동안 학교에서 가르쳤다.
텍사스에서 가르친 때가 있었다.
평원이었다.
아무것도 가리지 않는 땅이었다.
그때 넓은 땅을 처음 알았다.
뉴욕으로 돌아와 이름을 얻었다.
꽃을 크게 그렸다.
작은 꽃을 화면 가득 채웠다.
사람들이 꽃을 지나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크게 만들면 보게 된다.
도시의 건물도 그렸다.
성공한 화가였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이 있다.
크게 그리는 방법을 그녀는 도시에서 익혔다.
사막에 가기 전이었다.
그런데 사막에서 그 방법이 땅과 맞았다.
배경을 지우고 하나를 크게 놓는 방식.
그것이 바로 그 땅이 보이는 방식이었다.
방법이 먼저 있었고 땅이 그것을 옳게 만들었다.
풍토는 형식을 낳기도 하고, 이미 있던 형식을 제자리에 놓아 주기도 한다.
1929년에 처음 뉴멕시코에 갔다.
마흔한 살이었다.
그리고 매년 여름마다 갔다.
1940년에 사막의 목장에 집을 얻었다.
몇 해 뒤 근처에 또 하나를 얻었다.
1949년에 완전히 옮겼다.
예순두 살이었다.
늦은 이주다.
이미 이름이 있었고 이미 방식이 있었다.
바꿀 이유가 없는 나이였다.
그런데 바꾸었다.
창밖에 산이 하나 보였다.
평평한 정수리를 가진 산이다.
그 산을 오래 그렸다.
여러 번 그렸고 여러 계절에 그렸다.
사막에서 뼈를 주워 왔다.
소의 두개골, 골반뼈, 척추뼈.
모아서 집에 두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죽음의 상징으로 읽었다.
사막과 뼈와 해골.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뼈를 남은 것으로 보았다.
살이 없어진 뒤에도 형태가 있는 것.
살은 썩고 뼈는 남는다.
그 남음이 그의 관심이었다.
셋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건조가 윤곽을 낳는다.
공기에 물기가 있으면 멀리 있는 것이 흐려진다.
경계가 풀리고 색이 옅어진다.
그림에서 이것을 이용한다.
먼 것은 흐리게, 가까운 것은 진하게.
그러면 평면에 깊이가 생긴다.
사막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공기가 맑으면 먼 산도 선명하다.
십 리 밖의 바위도 윤곽이 보인다.
그러면 흐림으로 거리를 만들 수 없다.
여기서 앞 장과 같은 지점에 이른다.
타마요의 화면에도 깊이가 없었다.
오키프의 화면에도 깊이가 없다.
두 땅이 다 마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다음이 다르다.
타마요는 평면에서 무게를 얻었다.
색을 쌓아 벽처럼 만들었다.
오키프는 평면에서 윤곽을 얻었다.
색을 면으로 나누어 경계를 세웠다.
같은 조건에서 두 답이 나온 것이다.
여기서 네 가지가 따라온다.
첫째, 색이 면으로 나뉜다.
윤곽이 분명하면 색도 구역을 갖는다.
이쪽은 흰색이고 저쪽은 파란색이다.
섞이는 자리가 좁다.
색이 서로 스미지 않는다.
습한 곳의 색은 스민다.
마른 곳의 색은 서로 부딪친다.
둘째, 그림자를 그릴 이유가 줄어든다.
부드러운 그림자는 공기가 만든다.
빛이 물기에 부딪쳐 흩어지면 그림자의 경계가 풀린다.
맑은 공기에서는 그림자의 경계가 칼처럼 선다.
경계가 선명한 그림자는 형태에 가깝다.
그러면 그림자를 따로 그리는 대신 형태를 하나 더 그리게 된다.
그녀의 화면에 부드러운 음영이 적은 것은 솜씨의 문제가 아니다.
본 것이 그랬기 때문이다.
셋째, 크기의 기준이 사라진다.
배경이 없으면 무엇과 비교할 수 없다.
뼈가 손바닥만 한지 집만 한지 알 수 없다.
사막은 실제로 그렇다.
기준이 될 것이 없다.
나무도 없고 집도 없고 사람도 없다.
먼 바위가 큰 것인지 가까운 돌이 작은 것인지 헷갈린다.
마른 땅은 크기의 기준을 지운다.
그래서 그녀는 뼈를 산만큼 크게 그릴 수 있었다.
땅이 먼저 그것을 허락했다.
넷째, 하늘이 물체가 된다.
습한 곳의 하늘은 공기다.
멀고 옅고 경계가 없다.
마른 곳의 하늘은 면이다.
색이 고르고 끝이 분명하다.
뼈의 구멍에 들어온 파랑은 공기처럼 보이지 않는다.
푸른 종이를 붙인 것처럼 보인다.
하늘이 배경이 아니라 형태가 된 것이다.
그러면 하늘과 뼈가 같은 자격으로 놓인다.
어느 쪽이 앞이고 어느 쪽이 뒤인지 정해지지 않는다.
마른 땅은 위아래를 지운다.
넷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먼저 닮은 것을 본다.
두 사람 다 늦게 그 땅에 갔다.
오키프는 마흔한 살에 처음 갔고 예순두 살에 옮겼다.
변시지는 마흔아홉에 갔다.
둘 다 이미 화가였다.
배울 나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땅에서 형식이 바뀌었다.
늦게 가는 일에는 다른 힘이 있다.
젊어서 간 사람은 그 땅을 배운다.
늦게 간 사람은 그 땅에 놀란다.
놀람이 형식을 바꾼다.
닮은 것이 하나 더 있다.
둘 다 마른 것을 그렸다.
오키프는 뼈를 그렸다.
변시지는 마른 풀을 그렸다.
그런데 마름의 종류가 다르다.
뼈의 마름은 살이 없어진 마름이다.
남는 마름이다.
풀의 마름은 계절이 지난 마름이다.
흩어지는 마름이다.
뼈는 백 년을 남는다.
마른 풀은 한 겨울을 못 넘긴다.
그래서 오키프의 화면에는 견고한 것이 있고, 변시지의 화면에는 사라질 것이 있다.
이제 차이를 보자.
가장 큰 차이는 공기다.
두 땅이 다 마르다.
그런데 공기의 투명도가 반대다.
사막은 마르고 맑다.
바람이 없으면 먼지가 가라앉는다.
제주는 마르지 않다.
바다가 옆에 있으니 습하다.
그런데 바람이 세서 마르게 한다.
젖은 공기와 마르는 바람이 함께 있는 것이다.
바람은 먼지와 물기를 들어 올린다.
그러면 공기가 흐려진다.
같은 마름인데 하나는 맑고 하나는 흐리다.
그래서 여백의 밝기가 다르다.
오키프의 빈 화면은 밝다.
파란 하늘이 그대로 있다.
변시지의 빈 화면은 낮다.
색이 가라앉아 있다.
건조한 곳의 여백은 밝고, 바람 부는 곳의 여백은 흐리다.
윤곽도 다르다.
오키프의 윤곽은 매끄럽다.
한 번에 그은 선처럼 보인다.
변시지의 선은 떨린다.
곧게 가다가 흔들린다.
맑은 공기의 윤곽과 바람 속의 윤곽이 그렇게 다르다.
가장 큰 차이가 하나 더 있다.
오키프는 사람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뼈와 산과 꽃과 하늘.
사람이 없다.
변시지는 거의 언제나 사람을 그렸다.
노인 하나가 서 있다.
마른 땅에 사람이 없으면 뼈가 주인공이 된다.
사람이 있으면 노인이 주인공이 된다.
그런데 둘은 닮아 있다.
뼈는 남은 몸이다.
노인은 남은 사람이다.
둘 다 남은 것이다.
한쪽은 사람이 없어진 뒤에 남은 것을 그렸고, 다른 쪽은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을 그렸다.
무엇을 오래 그렸는지도 다르다.
오키프는 산을 오래 그렸다.
창밖의 그 산을 여러 번 그렸다.
변시지는 수평선을 오래 그렸다.
산은 있는 것이다.
가서 만질 수 있다.
수평선은 없는 것이다.
가까이 가면 사라진다.
물체를 오래 본 사람과 경계를 오래 본 사람.
그 차이가 화면에 남았다.
다섯
뼈의 구멍으로 하늘이 보인다.
구멍은 뼈가 아닌 자리다.
없는 자리다.그 없는 자리로 무엇이 보인다.
섬의 화면에서는 여백으로 바람이 보인다.
바람은 그려져 있지 않다.
그리지 않은 자리에서 보인다.두 사람 다 없는 것을 통해 보게 했다.
하늘은 아직 파랗다.
구멍은 아직 비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