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00주년 · 1926–2026/100주년 기념판 · Monologue/바람의 독백
1부 · Part One · 100주년 기념판
바람의 독백
풍토가 기억한 화가의 시간
글 변정훈
100주년 기념판의 독백은 본편 『독백』과 다른 텍스트입니다. 본편 『독백』(3편) 보기 →
독백 서문
나는 바람이다.
이름이 없다. 시작도 없다.
제주의 현무암 틈새에서 태어났다고도 하고,
한라산 정상에서 내려왔다고도 하지만,
진실은 — 나는 언제나 여기 있었다.
나는 화가를 기억한다.
그가 처음 이 섬에 발을 디뎠을 때,
나는 그의 화구를 쓸어버렸다.
도쿄에서 가져온 물감들,
서울에서 익힌 법칙들,
그것들을 다 날려보내야
비로소 내가 그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그는 처음에 화를 냈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바람은 사람의 감정에 굴하지 않는다.
세월이 흘렀다.
그는 붓을 바꿨다.
물감을 바꿨다.
무엇보다 — 눈을 바꿨다.
어느 날 아침,
그가 황토를 처음 손에 쥐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나는 알았다.
드디어 이 사람이
이 섬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나는 그의 캔버스 위를 지나갔다.
물감이 마르기 전에,
붓이 떠나기 전에.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내 흔적이 남아 있다.
직선이 없는 것은 나 때문이다.
완성이 없는 것도 나 때문이다.
나는 완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완성된 것들은 죽은 것들이다.
그가 떠난 뒤에도 나는 여기 있다.
그의 그림들도 여기 있다.
우리는 이 섬에서 함께 숨 쉬고 있다.
첫 번째 — 도착
나는 그가 배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다
서귀포 항구, 1975년 겨울
그는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있었다
화구, 빈 캔버스 몇 장
그리고 서울에서 가져온 피로
나는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의 방식이다
나는 그의 외투를 세게 당겼다
"여기서는
네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두 번째 — 첫 번째 밤
그는 오두막에서 잠들지 못했다
나 때문이었다
나는 밤새 창문을 두드렸다
그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왔는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옳았다
아직 대답할 자격이 없었으니까
세 번째 — 황토
어느 날 그가 흙을 파기 시작했다
그것이 나를 놀라게 했다
도쿄에서 온 화가가
제주의 흙을 물감으로 쓴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나는 그의 손 위에 앉아
오래된 시간의 냄새를 맡았다
이 흙 속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잠들어 있는지를
그는 아직 몰랐다
나는 형태가 없다
그러니 색도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매일 황토를 들어올린다
아주 조금씩
먼지처럼, 안개처럼
그리고 저녁 하늘을 물들인다
제주의 저녁이
그토록 황토빛으로 타오르는 것은
그림이 아니다
내가
매일
이 흙을 하늘로 보내기 때문이다
그의 캔버스 위의 황토색은
흙에서 온 것만이 아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기도 하다
네 번째 — 까마귀
나는 까마귀를 그에게 보냈다
매일 아침
검은 것 하나가 창밖에 앉아
그는 처음에 쫓아버리려 했다
나는 웃었다
제주에서는 까마귀를 쫓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웃이다
열흘이 지나자
그가 붓을 들었다
그리고 까마귀를 그렸다
다섯 번째 — 폭풍의 해
그 해 겨울 나는 혹독했다
그것이 나의 시험이었다
그는 일주일씩 밥을 먹지 않았다
술로 배를 채웠다
나는 보았다
그가 선을 긋고
다시 지우는 것을
도쿄에서 가져온 선이었다
서울에서 익힌 화면이었다
그것들이 이 섬에서는
살아 숨 쉬지 못했다
어느 날 밤
그는 붓을 벽에 던졌다
나는 창문 틈새로 들어가
그 소리를 들었다
새 언어는
그렇게 얻어진다
무너진 다음에야
비로소 새것이 들어올 자리가 생긴다
나는 그의 방 안에서도 불었다
창문 틈새로
"아직이다
아직 네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내보내지 않았다
이 섬에서 나가는 것은
내가 허락해야 한다
여섯 번째 — 해녀
그가 처음 해녀를 그렸을 때
나는 그의 뒤에 서 있었다
그녀들은 나와 친구다
바다 속에서 숨을 참을 때
나는 수면 위에서 기다린다
그녀들이 올라올 때
나는 그 숨을 받아준다
화가는 이 교환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것이 그의 첫 번째 제주 그림이었다
일곱 번째 — 오름
그가 오름에 올랐다
나는 정상에서 기다렸다
그는 숨이 찼다
나는 그의 폐를 가득 채웠다
제주의 공기로
정상에서 그는 한참 서 있었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다
다만 보았다
그것이 더 좋은 그림이었다
여덟 번째 — 먹
마른 풀잎색만으로는 부족했다
그가 먹을 집어들었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먹은 나의 색이다
밤의 색, 현무암의 색
말하지 않는 것들의 색
누런색과 먹이 만났다
빛과 어둠이 아니라
삶과 침묵이 만났다
아홉 번째 — 비
비는 나의 사촌이다
내가 불면 비가 온다
어느 봄날 나는 비를 보냈다
그가 붓을 내려놓고
창문을 열기를 바랐다
그는 열었다
빗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렸다
비의 형태가 아니라
비의 감각을
그것이 처음으로
진짜 제주 그림이었다
열 번째 — 조랑말
조랑말은 바람을 안다
그래서 달린다
그가 처음 조랑말을 그렸을 때
나는 그것을 화면 밖으로 몰았다
그는 세웠다
그러나 방향은 남겨두었다
멈춰 있으나 달리는 것
그것은 이 섬의 방식이기도 하다
열한 번째 — 석양
나는 매일 저녁
석양을 배달한다
제주의 서쪽 하늘에
그가 처음 석양을 그렸을 때
나는 물감이 마르기 전에 지나갔다
조금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더 좋았다
석양은 선명한 것이 아니다
번지는 것이다
열두 번째 — 고독
고독은 나의 선물이다
모두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이 섬에 남는 특별한 자들에게만
그는 고독을 처음에 두려워했다
당연한 일이다
고독은 처음에
공허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래 있으면 안다
공허가 아니라
가득 참이라는 것을
나는 그것을
그에게 천천히 가르쳤다
열세 번째 — 유럽
그가 유럽에 간다고 했을 때
나는 따라가지 않았다
유럽에도 바람은 있지만
그것은 나의 사촌들이다
우리는 다르다
그는 파리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의 눈은 제주의 눈이었다
몽마르뜨를 바라보는
누런 시선
그것이 그가 유럽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유럽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열네 번째 — 성산포
성산포에서 나는 가장 세게 분다
일출봉이 나를 가르기 때문이다
그가 성산포를 그렸을 때
나는 그 위에 있었다
캔버스 위에서
나는 방향을 여러 번 바꾸었다
누런 하늘이 기울었다
먹의 선이 떨었다
그것이 그 그림이 된 것이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가
열다섯 번째 — 올림픽
세상이 서울에 왔을 때
그는 제주에 있었다
세상에게 무엇을 보낼까
그는 마른 풀잎색을 골랐다
나는 그의 선택을 지지했다
제주의 바람이 세계로 가는 것
그것이 내가
항상 원했던 것이었다
열여섯 번째 — 4·3
이 섬의 땅속에는
말해지지 못한 것들이 있다
나는 그것들을 안다
나는 그 날들도
이 섬 위에 있었다
1948년 봄
그가 검은 바다를 그렸을 때
나는 그 날들을 불어넣었다
그림 속에 조용히
그것이 화가의 증언이었다
언어가 되지 못한 것들의
유일한 언어
열일곱 번째 — 빈집
나는 빈집을 좋아한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나는 자유롭게 들어간다
그러나 빈집은 비지 않았다
떠난 사람의 온기가 남아있다
냄새가 남아있다
그리고 나 —
바람이 드나들며
그 온기를 지켜준다
그가 빈집을 그렸을 때
나는 그 안에 들어가 앉았다
그림 속 바람으로
열여덟 번째 — 아틀리에
나는 작업실 안을 안다
그는 창문을 자주 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
유리창 테두리를
종이처럼 얇은 틈새로
안에는
마른 물감 냄새가 있었다
황토 가루가 있었다
쌓인 캔버스들이 있었다
끝내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그는 혼자였다
그러나 작업실은 비지 않았다
나는 이것을 안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
가장 많은 것들과 함께 있다
그가 붓을 들고
캔버스 앞에 오래 서 있을 때
나는 그의 어깨 위에 가볍게 앉았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한 동행이었다
열아홉 번째 — 오름 위에서
그가 늙어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오름에 올랐다
무릎이 아파도
붓이 떨려도
그는 올라갔다
오름 위에서
나는 그를 부드럽게 안았다
이 섬에서 오래 산 사람에게
나는 그렇게 한다
처음처럼 밀어붙이지 않는다
우리는 오래된 친구가 되었다
스무 번째 — 편지
그는 말년에
그림을 편지라고 불렀다
수신인이 없는 편지
나는 그 편지들의 배달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나는 안다
바람은 방향이 있다
편지도 방향이 있다
수신인을 쓰지 않아도
닿아야 할 곳에 닿는다
스물한 번째 — 공수래 공수거
그가 마지막으로 쓴 말
공수래 공수거
나는 이 말을 안다
나도 그렇다
나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고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
다만 지나갈 뿐이다
그리고 지나가며
흔들어놓을 뿐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스물두 번째 — 마지막 붓
그가 마지막으로 붓을 놓은 날
나는 조용했다
평소와 다르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창문도 두드리지 않고
캔버스 위도 지나지 않았다
다만 방 안에 조용히 있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애도였다
스물세 번째 — 이후
그가 떠난 뒤
그의 그림들은 남았다
나는 가끔 미술관에 간다
창문 틈새로
전시실 안으로
나는 그의 그림들 위를 지나간다
아직 물감 냄새가 난다
아직 황토의 냄새가 난다
우리는 아직 함께 있다
스물네 번째 — 백년
백 년이라는 것
나에게는 짧다
나는 수천 년을
이 섬에 있었다
그러나 바람에게도
기억나는 시간이 있다
한 사람이 와서
이 섬의 흙을 손에 쥐고
이 섬의 공기를 폐에 채우고
이 섬의 고독을 몸으로 배워나간 시간
그것이 내게는 백 년이다
나는 그런 시간을
드물게 만난다
만날 때마다
잊지 않는다
바람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말하지 않을 뿐이다
스물다섯 번째 — 마지막 독백
나는 계속할 것이다
화가가 없어도
그림들이 박물관으로 가도
이 섬이 변해도
나는 계속 불 것이다
현무암 틈새에서
한라산 정상에서
서귀포의 수평선에서
그리고 가끔
어느 미술관 전시실에서
창문 틈새로 들어가
그의 그림들 위를 조용히 지나갈 것이다
그것이 나의 방식이다
그것이 바람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