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00주년 · 1926–2026/100주년 기념판 · Monologue/화가의 독백
2부 · Part Two · 100주년 기념판
화가의 독백
풍토 앞에서 바뀌어간 한 사람의 기록
글 변정훈
100주년 기념판의 독백은 본편 『독백』과 다른 텍스트입니다. 본편 『독백』(3편) 보기 →
독백 서문
나는 화가다.
그러나 오래도록
무엇을 그리는 사람인지
나도 잘 몰랐다.
도쿄에서는 그림을 배웠고
서울에서는 형식을 배웠다.
선 세우는 법,
화면 붙드는 법,
무너지지 않게 끝내는 법을 배웠다.
그런데 섬에 와서 알았다.
내가 배운 것들은
너무 곧았고
너무 단단했고
너무 빨리 끝나려 했다.
바람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내 선은 기울었고
내 형체는 풀어졌다.
처음에는 실패인 줄 알았다.
나중에는 알았다.
무너진 것은
그림이 아니라
내 버릇이었다.
나는 이 섬을 그린 것이 아니다.
이 섬 앞에서
조금씩 바뀌어간
내 자세를 그렸다.
None
도쿄에서 나는 선을 배웠다
곧은 선
오래 버티는 선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가는 선
그것이 잘 그리는 일이라고 배웠다
선생이 말했다
형태를 잡아라
그것이 그림의 뼈대다
나는 잘 배웠다
그림은 반듯해졌고
화면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그 그림들은
숨을 쉬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내 실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더 잘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섬에 와서야 알았다
잘 그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 선이 살아 있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None
나는 오기 전에
오래 망설였다
결심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더 이상 서울에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을 때
갈 곳이 필요했다
섬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섬이 남은 것이었다
배에서 내릴 때
나는 이곳에서
무엇이 되려는지 몰랐다
화가로 다시 시작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화가이기를
잠시 내려놓으려는 것인지
그것을 몰랐다는 것이
어쩌면 유일하게 정직한 시작이었다
None
첫날 밤 잠들지 못했다
어둠이 낯설어서가 아니었다
조용해서였다
서울에서는 소리가 많았다
소리 속에서 나는 내가 무엇을 못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여기서는 들렸다
붓을 드는 것이 두려운 사람이
여기 누워 있다는 것이
나는 천장을 보며
오래 있었다
손이 떠올랐다
이 손으로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가 아니라
이 손이 아직 그릴 수 있는가가
먼저 떠올랐다
그것이 이 섬에서의
첫 번째 질문이었다
None
어느 날
나는 흙을 만졌다
물감은 많았으나
내 손을 붙든 것은
이름 붙은 색이 아니었다
바람을 오래 맞고
햇볕에 바래고
시간 속에서 마른
흙의 빛이었다
나는 그것을
노랑이라 부를 수 없었다
황토라 불러도
조금 모자랐다
그것은
마른 풀잎색에 가까웠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찾던 것은
눈을 놀라게 하는 색이 아니라
살아남은 뒤에 남는 색이라는 것을
None
처음에는
까마귀가 그저 검은 새인 줄 알았다
늘 보이는 것
너무 흔한 것
굳이 오래 보지 않아도 되는 것
그러나 이 섬에서는
늘 보이는 것들이
끝내 가장 오래 남는다
까마귀는
돌담 위에 앉아 있었고
바람 센 날에도
태연했다
나는 한동안
그것을 지나쳤다
그러다 알았다
저 검음은
먹의 검음과 닮았다는 것을
튀기 위한 색이 아니라
오래 본 뒤에 남는 색
그 뒤로
나는 까마귀를
다시 보았다
None
나는 한동안
말을 잃은 사람처럼 그렸다
캔버스는 있었고
붓도 있었으나
아무리 그어도
그 선이 내 것이 아니었다
도쿄에서 배운 선은 너무 단정했고
서울에서 익힌 화면은 너무 익숙했다
그것들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곳에서는 숨을 쉬지 못했다
어느 날 밤
나는 붓을 내던졌다
벽에 부딪힌 붓은
바닥에 조용히 떨어졌다
그 조용함이 오히려 더 나를 흔들었다
화를 내도 그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그 붓을 줍지 않았다
바닥에 그대로 두었다
제주의 바람은
곧은 선을 오래 두지 않았다
나는 오래도록
그것을 미완성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림은 죽어갔다
그제야 알았다
내게 필요한 것은
새 기교가 아니라
새 언어라는 것을
언어는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먼저 가진 것을 다 잃은 뒤에야
비로소 다른 것이 들어올 자리가 생겼다
None
나는 해녀를 보면서
처음에는 그리려 했다
몸의 선을 잡으려 했고
바다의 색을 찾으려 했고
구도를 잡으려 했다
그것이 내가 아는
그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녀들이 물속으로 들어갔을 때
수면만 남았다
나는 그 수면을
오래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수면이었다
그러나 나는 붓을 들 수 없었다
그녀가 없는 바다가
그녀가 있는 바다보다
더 그녀에 가까웠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오래도록 잘못 이해하고 있던 것이 있었다
그리는 것은
보이는 것을 옮기는 일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남기는 일이었다
해녀는 내게
그림을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림에서 빠뜨리고 있던 것을
돌려준 것이었다
None
오름에 오르면
말이 줄었다
올라가는 동안에는
숨이 차서 말할 수 없었고
정상에 서면
굳이 말할 까닭이 없었다
나는 오름 위에서
여러 번
아무것도 그리지 못했다
처음에는
헛일인 줄 알았다
그러나 오래 서 있다 보니
알게 되었다
어떤 풍경은
손보다 먼저
눈이 배워야 한다는 것을
멀고 가까운 것들이
하나의 숨처럼 이어지는 것은
서둘러 옮길 수 없었다
오름은
내게 풍경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머무는 법을 가르쳤다
None
나는 작업실에서 오래 살았다
그것이 집이었고
그것이 바다였고
그것이 오름이었다
밖에 나가지 않아도
그 안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황토색 벽
마른 물감의 냄새
끝내지 않은 캔버스들
아직 모르는 그림들
나는 그것들을 버리지 않았다
버리는 것은
아직 모른다는 뜻이니까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아, 이것이 그때 내가 하려던 것이었다, 고
그럴 때 나는 알았다
그림은 내가 혼자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그리는 것이라는 것을
작업실은
내가 홀로 있는 곳이 아니었다
시간과 함께 있는 곳이었다
None
황토를 얻은 뒤에도
무엇인가 모자랐다
황토는 따뜻했고
넓었고
오래된 시간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화면의 침묵이
끝까지 서지 못했다
그때 내 손에 다시 들어온 것이
먹이었다
그 검음은
단지 어두운 색이 아니었다
밤의 무게였고
현무암의 침묵이었고
말하지 않는 것들의 뼈 같았다
황토 위에 먹이 놓이자
화면은 비로소
버틸 힘을 얻었다
그제야 알았다
황토가 숨이라면
먹은 뼈라는 것을
None
처음에는 사람이 보고 싶었다
그림을 보여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잘 되고 있는지
아닌지를
혼자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오래 지나자
그 필요가 조금씩 줄었다
줄어든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타인의 눈 대신
내 손의 감각이
먼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이 선이 살아 있는지
이 색이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손이 먼저 알았다
나는 그것을
고독이 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타인의 눈이 없어졌을 때
비로소 내 눈이
제 역할을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전부였다
None
어떤 해에는
그리지 못했다
붓은 있었고
캔버스도 있었으나
손이 가지 않았다
억지로 그으면
그림이 죽는다는 것을
그때쯤에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기다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기다리는 것이
그리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뭔가를 하지 않는 것이
무능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섬은 그 시간에도 변하지 않았다
바람은 그 시간에도 불었다
황토빛 하늘은
그 시간에도 저녁마다 타올랐다
그것이 가르쳐주었다
기다림은
빈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게 쌓이는 것이다
None
어떤 시간들은
말보다 먼저 가라앉는다
섬의 땅속에는
쉽게 꺼낼 수 없는 기억이 있고
바다는 때때로
그 기억을 말없이 밀어 올린다
나는 오래도록
그것을 정면으로 말할 수 없었다
말하려 하면 너무 쉽게 설명이 되었고
설명하려 하면 오히려 멀어졌다
어떤 것들은
설명하는 순간
거짓이 된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검은 바다를 그렸다
다른 것은 하지 않았다
다만 검게 칠했다
층층이
물감이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위에 검게 칠했다
그 검음은
밤의 색만은 아니었다
지나갔으나
끝내 지나가지 않은 것들의 색이었다
이름을 붙이면 사라질 것들의 색이었다
나는 어둠을 남겼고
물결을 남겼고
말해지지 못한 시간의 무게를
조용히 남겼다
증언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내가 한 것은
그것보다 작고
그것보다 오래가는 무언가였다
나는 그것이 충분한지
지금도 모른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이었다
None
늙는다는 것은
갑자기 오는 일이 아니었다
어느 날은 무릎이 먼저 알았고
어느 날은 손이 먼저 알았고
어느 날은 눈이 먼저 알았다
예전처럼
오래 서 있기 어려웠고
힘 있게 긋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더 분명해지는 것도 있었다
무엇을 더 그릴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끝내 놓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것
나는 마지막까지
잘 그리려 하기보다
정직하게 남기려 했다
손이 떨리면
떨리는 대로
선이 약해지면
약해진 대로
그러다 어느 날
붓을 내려놓고
오래 바라보았다
방 안이 조용했다
그 조용함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None
사람이 떠난 뒤
무엇이 남는가를 생각한다
이름이 남고
작품이 남고
몇 장의 기록이 남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보다 먼저
남는 것이 있다
자세다
나는 무엇을 이루었는지보다
어떻게 견디며 살았는지가
더 오래 남는다고 믿는다
내 그림에 남은 것들은
내가 고른 것이 아니었다
황토빛이 남은 것은
그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다른 색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비스듬한 선이 남은 것은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곧은 선이 이 섬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선택이 아니라
남겨진 것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남겨진 것들이
내가 선택한 것보다
더 나에 가깝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처음 이 섬에 왔을 때
나는 이곳을 그리려 했다
오래 지난 뒤에야 알았다
내가 그린 것은
섬만이 아니라
섬 앞에서 바뀌어 간
내 자신의 자세였다는 것을
그러나 그 자세가 무엇인지를
나는 끝내 말로 다 하지 못했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말로 다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그림이 아니다
책끝에
『바람의 독백』은 풍토의 시선에서 화가를 기억하는 글이고, 『화가의 독백』은 그 풍토 앞에서 늦게 자신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돌아보는 글이다.
두 텍스트는 설명과 해설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비추는 두 개의 목소리로 읽히기를 바란다.
한쪽은 먼저 불어온 존재의 말이고 다른 한쪽은 그 바람을 오래 맞은 인간의 늦은 고백이다.
바람은 먼저 알고 있었다.
화가는 오래 지나서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