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비평/풍토는 풍경이 아니다/논증 IX/제18장
학술판 · 풍토는 풍경이 아니다 · 제18장 · 29 / 34
동시대 한국 회화의 다른 길
앵포르멜·단색화·구상과 변시지의 평행한 현대성
논증 IX · 근대성은 병렬적 비교와 비대칭 번역 속에 위치한다
1동시대성의 문제: 1975년 제주와 서울의 미술장
변시지가 1975년 제주에 정착했다는 사실은 단지 한 화가가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생애사의 사건이 아니다. 그 시점은 한국 회화가 전후 추상, 실험미술, 단색조 회화 등 서로 다른 현대성의 언어를 빠르게 만들어 가던 때와 겹친다. 따라서 그의 제주 회화를 세계 모더니즘과 비교하기 전에 먼저 같은 시대 한국 회화의 장 안에 놓을 필요가 있다.
한국 근대미술의 서사는 처음부터 단일한 내부 발전이 아니었다. LACMA와 국립현대미술관이 공동 기획한 《The Space Between: The Modern in Korean Art》가 보여 주듯, 서양화는 일본을 매개로 한 제국기 이동과 교육,1 해방 이후 미국을 비롯한 새로운 국제적 영향, 전쟁과 분단의 조건을 통과하며 재구성되었다.2 변시지의 이동 경로—제주, 오사카, 도쿄, 서울, 다시 제주—는 이 복수의 매개를 한 개인의 생애 안에 압축한다.
따라서 질문은 그가 당대의 어느 사조에 "속했는가"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같은 역사적 시간 안에서 서로 다른 회화적 문제들이 어떻게 병존했고, 변시지가 그 가운데 어떤 문제를 지속적으로 붙들었는가이다.
2전후 추상과 형식의 재편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한국 미술에서 전후 추상과 앵포르멜은 재현의 규범을 흔들고 화면의 물질성, 제스처, 행위의 흔적을 전면화했다. 변시지는 같은 시기 서울에서 추상에 가까운 실험을 거쳤지만(제3장), 장기간 그 방향에 머물지는 않았다. 그의 작업은 인물과 풍경, 노동하는 몸, 비원의 세밀한 관찰을 계속 통과했다.
화가가 앵포르멜을 어떻게 읽었는지는 육필원고에 조금 남아 있다. 일본어 원고 「추상화와 리얼리티」(이미지 Image_20240121_0026~0028)에는 앵포르멜을 자연이나 대상물에서 어떤 형식도 빌려 오지 않는 주장으로 적고, 마티외를 대표로 들었다. 온통 검게 칠한 화면을 두고 무엇을 그렸느냐고 물을 때 '밤 속의 까마귀다'라고 답한다면 그것이 앵포르멜일 것이라는 대목도 있다. 한글 수첩 원고 No.185~186(이미지 img20240209_23560317·23571341)에는 1952년 타피에가 이 흐름에 이름을 붙였고, 오십 년대 후반에는 행위와 마티에르의 관계가 굳어져 신선함을 잃으면서 육십 년대의 새 흐름으로 이어진다고 적혀 있다. 이 쪽들은 읽은 글의 정리일 수 있고 판독도 중·하이다. 여기서는 화가가 이 흐름을 알고 있었고, 그 전개를 끝까지 적어 두었다는 데까지만 말한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변시지의 후기에 형상은 줄어들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노인·말·집·배는 거의 기호에 가까울 정도로 축소되면서도 관계의 좌표를 유지한다. 즉 그의 단순화는 재현의 폐기가 아니라 재현의 최소화에 가깝다. 형상은 줄어든 만큼 더 많은 공간적·정서적 기능을 떠맡는다.
따라서 변시지의 회화를 추상으로 가지 못한 구상화로 보거나, 반대로 향토적 구상을 모더니즘의 바깥에 두는 이분법은 충분하지 않다. 그에게 근대성의 문제는 추상/구상의 선택보다, 습득한 재현 언어를 어느 정도까지 덜어내면서도 세계와의 관계를 남길 것인가에 있었다.
3단색화와 변시지: 감소의 공통성, 방법의 차이
1970년대 이후 한국 단색화는 색채의 절제, 반복 행위, 재료의 물성, 회화의 표면에 대한 집중을 통해 국제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얻었다. Joan Kee는 단색화를 단순한 "한국적 정신성"의 표명보다, 밀고·스미게 하고·긁고·찢고·반복하는 제작의 방법(method)으로 분석한다.3 국립현대미술관 역시 1970년대 단색조 회화의 특징으로 반복 행위, 재료의 물성, 재현의 최소화를 제시한다.4
변시지의 제주 회화도 색의 수가 줄고, 화면은 평평해지며, 반복되는 모티프와 장기간의 작업을 통해 형식이 응축된다는 점에서 동시대적 공명을 보인다. 그러나 차이는 더 크다. 단색화의 많은 작업이 캔버스·한지·안료·신체 행위 자체를 회화의 문제로 전면화한다면, 변시지의 화면은 끝까지 노인·말·집·배·수평선이라는 관계적 세계를 남긴다.
그의 마른 풀잎색은 단일 색조의 절제라는 점에서는 단색화와 비교될 수 있지만, 그 기능은 동일하지 않다. 그것은 재료적 반복의 장이기 전에 하늘·바다·땅을 하나의 기후적 장 안에 묶는 색이다. 검은 선 역시 순수한 행위의 흔적이라기보다 몸과 사물의 자세, 거리, 방향을 조직한다.
그러므로 변시지의 단색성은 단색화에 편입될 수도, 단색화의 반대편에 놓일 수도 없다. 두 작업은 동일한 시대에 "덜어냄"과 "평면"이라는 문제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처리했다. 이 차이를 통해 한국 모더니즘 내부의 복수성이 더 분명해진다.
4구상은 후퇴가 아니다
한국 현대미술의 서사를 추상으로의 진전이라는 선형적 도식으로 쓰면, 변시지의 작은 인물과 말, 배는 쉽게 보수적 잔여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후기 형상은 아카데믹 재현으로의 복귀가 아니다. 초기 인물화의 부피와 해부학적 정확성은 사라지고, 몇 개의 선과 점에 가까운 몸만 남는다.
이때 형상은 서사의 주인공이 아니라 관계를 측정하는 장치가 된다. 작은 배는 거리의 단위가 되고, 굽은 노인은 바람의 힘을 몸으로 가시화하며, 말은 움직임보다 멈춤을 조직한다. 형상은 무엇을 "묘사"하기보다 화면의 공간과 시간, 힘의 관계를 구성한다.
따라서 변시지의 구상성은 모더니즘에 대한 미완의 잔존이 아니라, 형상을 폐기하지 않고도 평면성과 환원, 반복과 색채 감소를 수행한 하나의 방법으로 읽어야 한다.
5한 시대의 서로 다른 시간
같은 1970~80년대에 서로 다른 회화 언어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누가 더 앞섰는가"라는 질문보다 "어떤 역사적·사회적·장소적 조건에서 어떤 문제를 선택했는가"를 묻게 한다. 《Korean Art from 1953》 같은 최근의 연구가 한국 현대미술을 충돌·혁신·상호작용의 복합적인 계보로 서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5
변시지는 국제 전위의 형식을 빠르게 갱신하는 방식보다, 이미 배운 유화를 한 장소에서 오래 반복하며 다시 구성했다. 이 느린 재구성은 동시대 미술의 속도와 다르지만, 그 차이 자체가 동시대성의 한 양상이다. 근대는 하나의 시계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 책에서 풍토모더니즘은 바로 이 평행한 현대성을 기술하기 위한 미시적 개념이다. 지역성을 찬양하는 이름도, 한국 현대미술의 또 하나의 사조를 만들어내기 위한 이름도 아니다. 이동을 통해 습득된 회화 언어가 장기 거주와 작업을 거쳐 어떻게 다른 형식으로 재조직되는지를 추적하는 분석 틀이다.
6국내 미술사에서의 위치
이 비교가 보여 주는 것은 변시지가 단색화보다 더 "한국적"이거나, 전후 추상보다 더 독자적이라는 가치 판단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 현대미술의 근대성이 추상·단색·실험만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구상과 장소, 노동과 기억을 끌어안은 다른 회화적 근대도 같은 시간에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변시지의 후기 회화는 재현을 완전히 버리지 않은 채 평면성을 강화하고, 색을 줄이면서도 장소의 차이를 남기며, 반복을 통해 이미지를 동일하게 복제하지 않고 기억을 갱신했다. 이 조합은 한국 모더니즘의 내부를 더 복수적으로 보게 한다.
따라서 세계 미술사와의 비교는 이제 한국 미술사를 건너뛰지 않는다. 오사카와 도쿄에서 배운 양화, 전후 서울의 회화, 1970년대 이후의 한국 모더니즘을 통과한 뒤에야 제주와 세계의 비교가 시작될 수 있다.
주와 출처
- ↑ 김지영, 「해방 전 오사카미술학교의 조선인유학생들의 실태와 귀국 후 행방에 대하여」, 『한국근현대미술사학』 32 (2016): 202–230. 오사카미술학교의 조선인 학생을 단순 유학생이 아니라 제국 내 이주와 지역 미술 형성의 맥락에서 분석한다.
- ↑ Virginia Moon, ed., The Space Between: The Modern in Korean Art (Los Angeles: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 DelMonico Books, 2022). 전시는 1897~1965년 한국 근대미술을 일본을 통한 유럽 미술의 수용과 재해석, 전쟁 전후의 새로운 국제적 영향 속에서 서술한다.
- ↑ Joan Kee, Contemporary Korean Art: Tansaekhwa and the Urgency of Method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3). 단색화를 물질과 반복 행위의 "방법"으로 재해석한다.
- ↑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의 단색화: Dansaekhwa—Korean Monochrome Painting》, 2012. 전시 자료는 1970년대 단색조 회화의 특징으로 반복 행위, 재료의 물성, 재현의 최소화를 제시한다.
- ↑ Yeon Shim Chung, Sunjung Kim, Kimberly Chung, and Keith B. Wagner, eds., Korean Art from 1953: Collision, Innovation, Interaction (London: Phaidon, 2020). 한국 현대미술을 단일 진보 서사가 아니라 복합적인 운동과 상호작용의 역사로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