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명화, 다시 읽기/Ⅶ 오늘의 사람들

Ⅶ — 오늘의 사람들 · No. 44 / 50

리히터 — 〈추상화〉

Gerhard Richter — Abstract Painting

1980년대 이후 다수 연작. 캔버스에 유채, 스퀴지와 붓을 병용.

“색채의 혼합과 배열은 사물의 색을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화면의 질서를 만든다.” — 변시지, 『예술과 풍토』

색의 층이 밀리고 긁혀 있다. 아래에 있던 붉음과 파랑, 초록이 군데군데 드러나고 다시 덮인다.

리히터는 큰 스퀴지로 물감을 끌어 화면을 가로질렀다. 작가는 색을 선택하지만, 그 색이 어떻게 벗겨지고 섞일지는 완전히 지배하지 못한다. 의도와 우연이 같은 표면에 남는다.

그의 추상화는 즉흥적 감정의 직접 표출만은 아니다. 칠하고 덮고 긁어내는 과정이 반복되며, 그림은 보이는 것과 감추어진 것의 층이 된다.

변시지의 마른 풀잎색도 한 번에 얻어진 단색이 아니다. 수많은 시간과 기후가 겹쳐 바래고 마른 색이다. 리히터는 물감을 밀어 과거의 층을 드러내고, 변시지는 색을 낮추어 세월의 층을 가라앉힌다.

한 화면은 긁힌 기억이고, 다른 화면은 말라붙은 기억이다.

덮인 색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본문의 해석은 필자의 것이다. 확인되지 않은 발언은 화백의 말로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