終 — 종합 · No. 50 / 50
다시, 변시지 앞에서 — 세계의 그림과 제주의 바람
Before Byun Shi-Ji Again — World Painting and the Wind of Jeju
종합과 맺음말.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지만 그것을 복사하지는 않는다.” — 변시지, 『예술과 풍토』
오십 점의 그림을 지나 다시 제주로 돌아온다. 별과 우유, 안개와 기차, 금빛과 검은색, 점과 선, 도시와 폐허를 보았다.
서양 명화는 하나의 길로 이어지지 않는다. 베르메르는 빛을 붙들었고, 고흐는 밤을 흔들었으며, 피카소는 시점을 부수고, 뒤샹은 예술의 문턱을 옮겼다. 로스코는 색 안에 침묵을 넓혔고, 키퍼는 땅속의 역사를 끌어냈다.
변시지는 그들과 같지 않다. 같다고 말할 필요도 없다. 그의 화면은 서양미술사의 결론이 아니라, 제주라는 한 풍토에서 태어난 독자적인 대답이다. 다만 다른 그림들을 오래 보고 돌아오면 그의 마른 풀잎색과 검은 선, 빈 바다와 굽은 사람을 더 정확히 볼 수 있다.
고흐의 뜨거운 밤 옆에서 변시지의 바람이 얼마나 마른지 알게 된다. 뉴먼의 곧은 선 옆에서 그의 선이 왜 휘어야 했는지 알게 된다. 로스코의 색면 옆에서 마른 풀잎색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시간의 층임을 알게 된다. 호퍼의 도시적 고독 옆에서 변시지의 고독이 자연과 대면하는 고독임을 알게 된다.
이 책의 비교는 우열을 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그림은 서로의 차이를 밝힌다. 서양의 그림을 변시지로 환원하지 않고, 변시지를 서양의 개념으로 가두지 않을 때 비로소 대화가 시작된다.
풍토는 지역색이 아니다. 인간이 세계와 만나는 조건이며, 몸의 자세와 기억의 깊이, 선의 방향을 만드는 힘이다. 변시지의 제주에는 바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바람을 맞고도 남아 있는 사람과 말, 나무와 집이 있다.
예술은 이기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사라지는 것을 한 번 더 있게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잠시 보이게 하며, 견딘 흔적을 다음 사람에게 건넨다.
오십 점의 그림이 끝난 자리에서 한 장의 마른 풀잎색 화면이 다시 열린다.
바람은 아직 불고 있다.
본문의 해석은 필자의 것이다. 확인되지 않은 발언은 화백의 말로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