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풍토 · 서장 · 1 / 24
풍토가 형식을 낳을 때
1. 언덕
언덕 위에 노인이 서 있다.
말 한 마리가 곁에 있다.
바다는 멀고, 바람은 가깝다.
화면은 마른 풀잎색이다.
그 색 위로 검은 선 몇 개가 지나간다.
수평선 가까이 조각배가 떠 있다.
노인이 어디를 보는지는 알 수 없다.
고개가 조금 숙어 있다.
지팡이는 땅을 짚었다.
말은 고삐가 없다.
묶여 있지 않은데 떠나지 않는다.
사람과 짐승이 같은 바람을 맞고 서 있다.
까마귀 한 마리가 낮게 지나간다.
울음은 들리지 않는다.
화면에는 그려지지 않은 것이 더 많다.
구름이 없다.
집도 없고 길도 없다.
없는 것들이 화면을 넓게 만든다.
이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대개 같은 것을 묻는다.
저 색은 무엇인가.
왜 이렇게 비어 있는가.
나는 다른 것을 물으려 한다.
왜 이 그림은 여기에서만 나왔는가.
2. 물음
세상의 그림을 오래 보다 보면 한 가지가 걸린다.
어떤 그림은 어디에서 그려도 상관이 없다.
어떤 그림은 그 땅이 아니면 나오지 않는다.
기법의 문제가 아니다.
재능의 문제도 아니다.
터너의 빛은 잉글랜드의 습기에서 나왔다.
그 빛은 윤곽을 지운다.
공기에 물기가 많으면 멀리 있는 것의 경계가 풀린다.
레비탄의 지평선은 러시아의 넓이에서 나왔다.
땅이 끝없이 이어지는 곳에서는 하늘과 땅의 비율이 달라진다.
사람은 작아지고 선은 길어진다.
오키프의 뼈와 하늘은 뉴멕시코의 건조에서 나왔다.
습기가 없으면 색이 흐려지지 않는다.
윤곽도 칼처럼 남는다.
키퍼의 화면은 무겁다.
전쟁이 지나간 땅의 흙과 재가 그대로 올라와 있다.
셋슈의 여백은 비어 있지 않다.
안개가 많은 땅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도 실재한다.
팔대산인의 새는 종이 위에 거의 없다.
먹 몇 점으로 앉아 있다.
망국의 유민이 그린 여백이다.
타마요의 붉음은 어둡고 깊다.
멕시코의 흙과 볕이 그 안에 있다.
에밀리 카의 숲은 위로 솟는다.
비가 많은 해안의 침엽수림이 그렇게 자란다.
이것을 지역색이라 부르면 설명은 거기서 끝난다.
그러나 끝나지 않는다.
지역색은 소재의 문제다.
그 땅의 사물을 그렸다는 뜻이다.
야자수를 그리면 남국이고, 자작나무를 그리면 북국이다.
소재는 옮길 수 있다.
파리의 화실에서도 야자수를 그릴 수 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소재가 아니다.
형식이다.
붓이 화면에 닿는 각도.
선을 어디에서 끊는가.
무엇을 비워 두는가.
지평선을 어디에 놓는가.
이런 것들은 옮기기 어렵다.
그 땅에서 오래 산 사람의 몸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몸은 배워서 바뀌지 않는다.
견뎌서 바뀐다.
3. 풍토라는 말
풍토(風土, fūdo)는 일본의 철학자 와쓰지 데쓰로가 1935년에 낸 책의 제목이다.
그는 이 말을 기후나 지리로 쓰지 않았다.
기후는 밖에 있다.
온도와 습도로 잴 수 있다.
풍토는 그렇게 재지 못한다.
풍토는 사람이 자기를 발견하는 자리다.
추위 속에서 사람은 추위를 아는 자기를 발견한다.
바람 속에서 사람은 바람을 견디는 자기를 발견한다.
춥다고 느끼는 순간, 추위는 이미 밖에 있지 않다.
그 사람 안에 들어와 있다.
와쓰지는 세계를 세 갈래로 나누어 보았다.
비가 많고 습한 몬순.
마르고 뜨거운 사막.
온화하고 규칙적인 목장.
몬순의 사람은 견딘다.
자연이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니, 맞서기보다 받아들인다.
사막의 사람은 맞선다.
목장의 사람은 자연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는다.
이 구분을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다.
너무 단순하고, 시대의 한계도 있다.
다만 하나는 남는다.
땅이 사람의 태도를 만든다는 생각.
그리고 그 태도가 형태로 나온다는 생각.
하이데거는 다른 자리에서 비슷한 데에 닿았다.
그는 짓는 일과 사는 일을 나누지 않았다.
사람은 살기 위해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짓는 방식으로 산다고 했다.
다리를 하나 놓으면 강의 양쪽이 처음으로 이쪽과 저쪽이 된다.
없던 관계가 생긴다.
짓는 일이 사는 일을 바꾼다.
들뢰즈는 또 다른 말을 썼다.
영토화.
새는 노래로 제 자리를 표시한다.
그 노래가 있어서 그 자리가 영토가 된다.
예술도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세 사람의 말은 서로 다르다.
철학의 계보가 다르고 시대도 다르다.
그러나 한 방향을 가리킨다.
사람은 땅 위에 사는 것이 아니다.
땅과 함께 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밝혀 둔다.
일본 철학자의 개념으로 한국 화가를 읽는 일에는 조심할 것이 있다.
개념이 그림을 덮어서는 안 된다.
이 책은 풍토를 틀로 쓰지 않는다.
말로 쓴다.
그림이 먼저 있었다.
그것을 부를 말이 필요했을 뿐이다.
마땅한 말이 없어서 빌렸다.
빌린 말이니 언제든 내려놓을 수 있다.
그림은 남는다.
한국어에서 풍토는 흔히 분위기라는 뜻으로 쓰인다.
학문의 풍토가 어떻다고 할 때의 그 말이다.
이 책에서 쓰는 풍토는 그 말이 아니다.
사람이 자기를 발견하는 자리로서의 풍토다.
그래서 이 말을 지역주의로도, 지역색으로도 옮기지 않는다.
옮기는 순간 뜻이 좁아진다.
지역주의는 중심에 대한 변방의 주장이다.
풍토는 주장이 아니다.
조건이다.
4. 배경이 아니다
풍경화라는 말에는 함정이 있다.
배경이 먼저 있고 그 앞에 사람이 서 있다는 생각.
무대가 있고 그 위에서 연기가 벌어진다는 생각.
풍토는 무대가 아니다.
바람이 센 곳에서는 나무가 눕는다.
눕는 것이 나무의 형태다.
바람은 나무의 배경이 아니라 나무의 형식이다.
제주의 나무는 한쪽으로 자란다.
바람이 오는 쪽 가지가 자라지 못한다.
나무는 제 몸으로 바람의 방향을 기록한다.
집도 그렇다.
제주의 초가는 낮다.
지붕을 새끼줄로 묶어 눌러 놓았다.
돌담은 구멍이 많다.
빈틈으로 바람을 지나가게 한다.
막지 않고 통과시킨다.
견딤에는 두 방식이 있다.
버티는 것과 흘려보내는 것.
섬은 두 번째를 배웠다.
사람도 같다.
바람이 센 곳에서 오래 산 사람은 걸음이 다르다.
어깨가 다르고 고개의 각도가 다르다.
그림도 같다.
변시지의 화면에서 인물은 자주 휘어 있다.
등이 굽고 고개가 숙어 있다.
그것을 자세라고만 읽으면 절반이다.
그 휘어짐은 바람의 모양이다.
바람은 그려져 있지 않다.
사람의 몸이 바람의 자리를 대신한다.
배경이 형식으로 들어온 것이다.
휘어진 몸은 그의 그림에서 오래된 것이다.
1945년의 누드 습작에 이미 있다.
2013년의 마지막 그림에도 있다.
예순여덟 해 동안 같은 곡선이 이어졌다.
다만 뜻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노동의 몸이었다.
짐을 진 몸, 일하는 몸이 휘어 있었다.
도쿄 시절의 습작과 〈Femme〉이 그렇다.
서울에서는 지게꾼과 나무 패는 사람이 그 자리를 이었다.
제주에서는 마부와 해녀와 농사꾼이 되었다.
그리고 노인이 나타난다.
노인의 몸은 짐을 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휘어 있다.
견딤의 몸이다.
말년으로 갈수록 고개가 더 숙어진다.
그 숙임은 피로가 아니다.
예(禮)에 가깝다.
이것은 해석이다.
화백이 그렇게 말한 기록은 없다.
다만 그림이 예순여덟 해 동안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5. 풍토는 어디까지인가
여기서 범위를 정해야 한다.
풍토를 기후로만 보면 좁다.
비와 바람과 볕.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림이 있다.
폐허 위에서 자란 아이가 있다.
무너진 것이 정상인 세계에서 자라면 온전한 것을 나중에 배운다.
그 아이에게 폐허는 배경이 아니다.
처음 본 세계다.
바람은 자연이 만들고 폐허는 사람이 만든다.
그런데 아이에게는 구분이 없다.
둘 다 그냥 거기 있었다.
그러니 전쟁도 풍토가 된다.
한 세대가 그 위에서 나고 자라면 그렇게 된다.
하나를 더한다.
여러 문화가 지나간 자리도 풍토가 된다.
한 도시 안에 여러 시대의 건물이 있는 곳이 있다.
사람의 형상을 만들지 않는 장식과 성당의 조각이 나란히 있는 곳이 있다.
그런 땅에서 자란 사람의 몸에는 문법이 하나 이상 들어 있다.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냥 알게 된다.
그러면 이런 물음이 온다.
병도 풍토인가.
가족의 죽음도 풍토인가.
여기서 멈춰야 한다.
모든 것이 풍토가 되면 풍토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니 선을 긋는다.
풍토는 여럿이 함께 겪는 것이다.
바람은 섬사람 모두가 맞는다.
전쟁은 한 세대가 함께 지난다.
여럿이 같은 것을 겪으면 그 안에서 공통의 형식이 나온다.
한 사람이 겪은 것은 다르다.
어머니를 잃은 일은 그 집안의 일이다.
한 나라 사람 모두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풍토가 아니다.
전기(傳記)다.
풍토와 전기는 다르다.
이 구분이 이 책을 지킨다.
구분이 없으면 명제가 커지고, 커진 명제는 아무 데도 닿지 않는다.
이 넓힘은 제주를 읽을 때도 필요하다.
바람만으로는 다 읽히지 않는다.
섬에는 바람이 있었고 그리고 다른 것도 있었다.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여럿이 함께 겪은 일이다.
그러니 그것도 풍토다.
6. 왜 '낳다'인가
이 책의 제목에서 동사는 '낳다'이다.
'만들다'로 바꾸지 않는다.
만드는 일은 손이 한다.
낳는 일은 몸이 한다.
만드는 사람은 무엇을 만들지 미리 안다.
설계가 있고 도구가 있다.
완성되면 만든 사람과 만들어진 것이 분리된다.
낳는 사람은 모른다.
무엇이 나올지 알지 못한다.
낳은 뒤에도 온전히 떨어지지 않는다.
풍토가 형식을 만든다고 하면, 땅이 설계도를 쥐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지 않다.
땅은 설계하지 않는다.
다만 오래 견디게 한다.
견딘 몸에서 형태가 나온다.
낳는 일에는 시간이 든다.
아프기도 하다.
그리고 낳은 것은 낳은 사람을 닮되, 그 사람은 아니다.
여기에 하나가 더 있다.
만든 것은 다시 만들 수 있다.
낳은 것은 다시 낳지 못한다.
같은 풍토에서도 같은 그림은 두 번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은 풍토를 원인이라 부르지 않는다.
조건이라 부른다.
원인은 결과를 정한다.
조건은 가능하게 할 뿐이다.
'낳다'는 그 사이에 있는 말이다.
없는 데서 나오지 않았고, 정해진 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변시지는 제주를 그린 것이 아니다.
제주에서 오래 견딘 몸이 그린 것을, 우리가 제주라고 부르는 것이다.
7. 다섯 개의 문
이 책은 다섯 개의 문을 지난다.
색.
그 땅의 빛이 팔레트를 정한다.
습기가 많은 곳의 색과 마른 곳의 색은 다르다.
북쪽의 색은 낮고 회색으로 기운다.
남쪽의 색은 높고 원색으로 간다.
색은 취향이 아니다.
눈이 오래 본 것의 결과다.
색에는 시간이 들어 있다.
한 번 본 색은 아직 색이 아니다.
여러 해 같은 빛을 본 뒤에 남는 것이 색이다.
선.
그 땅의 바람과 지형이 붓의 속도를 정한다.
급한 선이 나오는 땅이 있다.
느린 선이 나오는 땅이 있다.
선은 손의 흔적이면서 시간의 흔적이다.
얼마나 오래 망설였는지가 선에 남는다.
여백.
무엇을 비워 두는가는 무엇을 그리는가보다 그 땅을 잘 말한다.
빈 곳은 없는 곳이 아니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의 자리다.
혹은 이미 떠난 것의 자리다.
여백이 넓은 그림은 대개 기다림이 긴 땅에서 나온다.
문법.
사물을 놓는 순서와 관계.
어디에 지평선을 두는가.
사람을 화면의 어디에 세우는가.
무엇을 크게 하고 무엇을 작게 하는가.
이것은 규칙이 아니라 습관이다.
그리고 습관은 땅에서 온다.
물질성.
무엇으로 그리는가.
흙과 재와 납.
짚과 돌과 얼음.
손에 잡히는 것들이 화면에 남긴 것.
재료는 그 땅에서 구한 것일 때가 많다.
무엇으로 그렸는지를 보면 어디에서 그렸는지가 보인다.
때로는 재료가 그림보다 오래 남는다.
이 다섯 문을 지나며 열여섯 사람의 화가를 부른다.
추사, 팔대산인, 셋슈, 반 고흐, 고갱, 피카소, 키퍼, 터너, 레비탄, 오키프, 타마요, 에밀리 카, 프레드 윌리엄스, 골즈워디, 카푸어, 뭉크.
누가 어느 문 앞에 서는지는 각 부의 첫머리에서 밝힌다.
그리고 종장에서 변시지에게 닿는다.
8. 반대 증인 셋
명제는 반증을 견뎌야 산다.
풍토가 형식을 낳는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보아야 한다.
이 책은 세 사람을 반대 증인으로 부른다.
추사.
그는 제주에서 여러 해를 유배로 보냈다.
그 세월에 글씨가 완성되었다.
그런데 그 글씨에 제주의 풍경은 없다.
바다도 바람도 들어오지 않는다.
몸은 섬에 있었고 눈은 옛 글자에 있었다.
풍토가 그를 단련했으나 그 형식을 낳지는 않았다.
정신이 풍토를 지나쳐 간 자리다.
뭉크.
그의 하늘은 붉다.
그러나 그 붉음은 노르웨이의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다.
안에서 밖으로 나갔다.
풍토가 형식을 낳은 것이 아니라 내면이 풍토를 물들였다.
방향이 반대다.
고갱.
그는 타히티로 갔다.
그 땅의 색과 몸을 그렸다.
그러나 끝내 그 땅에 속하지 않았다.
바라보는 사람의 자리에 남았다.
그의 화면에서 타히티는 견딘 곳이 아니라 찾아간 곳이다.
소속 없이 현존한 화가다.
세 사람은 이 책의 명제를 흔든다.
흔들어야 한다.
풍토가 모든 것을 낳지는 않는다.
정신이 풍토를 넘어설 때가 있다.
내면이 풍토를 덮을 때가 있다.
발이 땅에 닿지 않은 채 그릴 때가 있다.
다만 어떤 그림은 풍토 없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 차이를 보는 것이 이 책의 일이다.
9. 나란히 놓는다
이 책은 순위를 매기지 않는다.
변시지를 세계의 화가들과 견주어 높이려는 책이 아니다.
같은 높이에 놓고 나란히 보려는 책이다.
터너가 앞이고 변시지가 뒤인 것이 아니다.
키퍼가 크고 변시지가 작은 것이 아니다.
각자 자기 땅에서 자기 형식을 낳았다.
그 일들을 한자리에 모아 보는 것이 다르게 읽는 방법이다.
비교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저울에 올리는 비교다.
어느 쪽이 무거운지를 묻는다.
다른 하나는 나란히 놓는 비교다.
둘 사이에 무엇이 오가는지를 본다.
이 책은 뒤쪽을 택한다.
나란히 놓으면 두 사람이 다 잘 보인다.
저울에 올리면 둘 다 흐려진다.
무게를 다투는 동안 그림은 뒤로 물러난다.
한국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색화는 진정한 성취다.
그 자리는 그 자리대로 온전하다.
반복과 절제로 도달한 곳이 있다.
변시지는 그 성취의 경쟁자가 아니다.
또 하나의 뿌리다.
뿌리는 서로 다투지 않는다.
각자 제 방향으로 내려간다.
땅속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같은 나무를 세운다.
10. 풍토는 운명이 아니다
풍토를 말할 때 조심해야 할 곳이 있다.
땅이 사람을 정한다는 말은 쉽게 다른 말로 바뀐다.
어떤 민족은 이렇고 어떤 민족은 저렇다는 말.
와쓰지의 책에도 그런 대목이 있다.
1930년대의 글이었고 시대의 한계가 있었다.
이 책은 그 길로 가지 않는다.
풍토는 집단의 성격이 아니다.
한 사람의 몸에 남은 자리다.
제주에서 산 화가가 모두 같은 그림을 그리지는 않는다.
같은 바람을 맞고도 다른 선이 나온다.
풍토는 답을 주지 않는다.
물음을 준다.
운명이라면 예술이 필요하지 않다.
정해진 것을 확인하는 일에 평생을 걸 사람은 없다.
변시지는 제주에 갔다.
간 것만으로 그림이 바뀌지는 않았다.
색은 나중에 왔다.
찾았다는 것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풍토는 조건이고, 형식은 선택이다.
조건 없이 선택은 없고, 선택 없이 형식은 없다.
이 책은 그 두 자리를 함께 본다.
11. 1975년, 서울에서 제주로
변시지는 1926년 서귀포 서홍동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에 오사카로 갔다.
일본에서 자랐고 일본에서 그림을 배웠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오사카미술학교에 다녔다.
데라우치 만지로에게 배웠다.
전쟁 중이었다.
그가 청년기를 어떻게 보냈는지는 구술에 남아 있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구술사, 2004–2005, 27–30쪽)
1947년 〈Femme〉으로 일전(日展)에 입선했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이었다.
이듬해 제34회 광풍회전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스물두 살이었다.
1949년에는 시세이도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일본에서 그는 이미 화가였다.
그대로 있었다면 다른 삶이 있었을 것이다.
1957년 11월 15일에 돌아왔다.
서울에서 살았다.
마포고등학교와 서라벌예술대학에서 가르쳤다.
1964년부터 비원을 오래 그렸다.
비원의 그림은 단정하다.
고궁의 나무와 담과 물이 차분한 색으로 놓여 있다.
담장 안의 풍경이다.
바람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그는 이 연작을 십 년 넘게 이어갔다.
가르치고 그렸다.
서울에서의 삶은 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담장 안이었다.
그리고 1975년, 서울을 떠나 제주로 갔다.
제주대학교에 부임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둔다.
일본에서 곧장 제주로 간 것이 아니다.
오사카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다시 제주로 갔다.
두 번의 이동이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동이 그의 형식을 바꾸었다.
마흔아홉이었다.
다섯 살에 떠난 섬으로 마흔네 해 만에 돌아온 것이다.
돌아온 그를 섬이 반긴 것은 아니다.
바람이 있었고 볕이 셌고 겨울이 길었다.
서울에서 쓰던 색은 섬에서 맞지 않았다.
습기가 다르고 볕이 다르고 바람이 달랐다.
그런데 색이 바뀌었다.
그는 훗날 구술에서 그 색을 어떻게 찾았는지 말했다.
(같은 기록, 293–294쪽)
그 색을 우리는 마른 풀잎색이라 부른다.
황토색이 아니다.
노란색도 아니다.
바람에 오래 마른 풀의 색이다.
여름의 초록이 아니라 겨울을 지난 풀의 색이다.
죽은 색이 아니라 견딘 색이다.
같은 구술에서 그는 폭풍에 대해서도 말했다.
폭풍은 날씨가 아니라 저항이라고 했다.
(같은 기록, 171쪽)
그림 속의 바람은 그러니까 기상이 아니다.
견딤의 이름이다.
그는 자신을 풍운아(風雲兒)라 불렀다.
아호는 우성(宇城)이었다.
1991년에 제주대학교에서 정년을 맞았다.
2013년 6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2016년에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남긴 그림은 W001부터 W110까지 정리되어 있다.
12. 남는 것
다시 그 언덕으로 돌아간다.
노인은 여전히 서 있다.
말은 곁에 있다.
수평선 가까이 조각배가 떠 있다.
배는 떠나는 중인지 돌아오는 중인지 알 수 없다.
그림은 말하지 않는다.
제주에는 이어도라는 섬의 이야기가 있다.
바다 어딘가에 있다는 섬이다.
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화백은 이어도에 관한 글을 손으로 남겼다.
(같은 기록, 23–26쪽)
섬은 오래전 많은 사람을 잃은 적이 있다.
그 일을 4·3이라 부른다.
그는 구술에서 그 시절을 말했다.
(같은 기록, 241–243쪽)
떠나는 배는 전설에 닿아 있고, 동시에 그 애도에 닿아 있다.
노인의 고개는 숙어 있다.
슬퍼서가 아니다.
돌아오지 않은 이들에게 갖추는 예(禮)다.
이것도 해석이다.
다만 그림 앞에 오래 서 있으면 그렇게 읽힌다.
이 책은 그 자세를 세계의 여러 언덕 위에서 다시 찾아보려 한다.
잉글랜드의 습한 빛 아래에서.
러시아의 긴 지평선 위에서.
뉴멕시코의 마른 하늘 아래에서.
땅은 다르고 색도 다르다.
그러나 오래 견딘 몸이 형태를 낳는다는 점은 같다.
이 책은 답을 내려놓지 않는다.
다만 열여섯 개의 언덕을 지난다.
언덕마다 한 사람이 서 있다.
그가 무엇을 견뎠는지 보고,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왔는지 본다.
그리고 마지막 언덕에서 이 노인을 다시 만난다.
그는 제주를 설명하지 않았다.
오래 바라보았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선 하나를 그었다.
그 선이 어떻게 나왔는지를 보는 일.
이 책은 거기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