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 WORKS · FŪDO · LANGU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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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 비평

서울, 1957–1975

1. 돌아온 사람

1957년 11월 15일, 그는 노스웨스트 항공기를 탔다.
도쿄에서 서울까지. 김포에 내렸다. <sup>[주1]</sup>

서른한 살이었다.

일본 화단에서 광풍상을 받았고, 광풍회 회원이었고, 심사위원이었다.

일전(日展)에는 심사를 거치지 않고 출품할 수 있었다.
당대 자료가 「무감사(無鑑査)」 또는 「의촉출품(依囑出品)」이라 부른 자격이다. <sup>[주2]</sup>

도쿄와 오사카에서 세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여섯 살에 떠난 나라로 돌아왔다. 스물여섯 해 만이었다.

서울대학교의 초빙이었다.


떠나기 전, 스승 데라우치 만지로가 글을 써 주었다.

邊君은 三十餘年 살아온 日本을 떠나 祖國 韓國에 돌아간다.

그 故鄕에 錦을 장식하는 일은 기쁘나, 一抹의 愛惜의 念을 禁할 수 없다.

— 「邊君을 보내는 말」, 1957년 가을

11월 2일, 광풍회가 회원증명서를 발급했다.
열사흘 뒤 그는 비행기를 탔다.


그가 왜 돌아왔는지, 본인의 말이 하나 남아 있다.

나이가 들면서 내 나라를 온전히 알아야 한다는 새로운 필요와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한국에 속하며, 내 나라에서라야 나만의 것을 이룰 수 있다.

— 1958년, 서울 발행 《코리아 리퍼블릭》 인터뷰


2. 1958년 5월 — 화신

이듬해 봄, 전시를 열었다.

「宇城 邊時志 油畵回顧展」
화신백화점 3층 화랑. 5월 23일 – 6월 1일. 유화 60점.

회고의 대상은 일본에서의 십칠 년이었다.
목록의 제목이 그것을 말한다 — 「在日本時代 作品」.

서울에 그의 그림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먼저 자기가 누구인지를 보여주어야 했다.

26점은 도쿄와 오사카에서 그린 것이었다.
학생 시절의 〈농가〉(1943), 스무 살의 〈자화상〉(1945),
광풍상을 받은 〈베레모의 여인〉(1948),
일전 초입선작 〈여인〉(1947)과 입선작 〈오후〉(1950).

34점은 그해에 그린 것이었다. 서울에서. 귀국하고 반년 만에.


3. 하루 6000명

Both shows are drawing more than 6000 visitors daily.

— 《코리아 리퍼블릭》

連日 超滿員

— 제주신보

조선일보는 이 전시를 「우리나라 初有의 회고전」이라 적었다.

1958년 서울에서, 그는 실패하지 않았다.


4. 세 갈래의 화면

《코리아 리퍼블릭》은 60점을 두 갈래로 보았다.

Pyun's 60 oils are grouped into two types.

One is marked by an academic influence and the other is abstract.

아카데믹한 것 — 일본에서 익힌 문법. 인물, 정물, 정확한 살결.

추상 — 〈건물(Structure)〉, 〈작품(Work)〉, 〈인물과 정물 B〉.
제목이 없는 그림들, 번호만 붙은 그림들.

그리고 목록에는 세 번째가 있었다.

〈지게꾼〉. 〈나무 패는 사람〉. 〈소와 두 사람〉.

모두 1958년작이다. 서울에서 그린 것이다.
짐을 진 사람, 도끼를 든 사람, 소를 끄는 사람.
굽은 등과 버티는 몸.

60점 가운데 《코리아 리퍼블릭》이 도판으로 실은 유일한 그림이 〈지게꾼〉이었다.


5. 시인이 본 것

6월 5일, 경향신문에 평문이 실렸다. 쓴 사람은 조병화였다.

그는 도쿄 시절의 그림을 사랑한다고 했다.
〈백색가옥과 흑색가옥〉(1950), 〈네모의 座像〉(1949).

그리고 새 그림들을 걱정했다.

예술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근원적인 아름다움의 탐구요,

〈이즘〉을 다투는 호기적인 경쟁의식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에콜〉이나 〈이즘〉의 노예가 되어

시대에 허덕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조병화, 「美□純粹한 空間」, 경향신문 1958. 6. 5

그리고 이렇게 썼다.

"귀국 이전의 작품들을 더 사랑한다. 그 세계로 다시 돌아갈 것을 권하고 싶다."


이 평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조병화는 특정 사조를 부정하지 않았다.
같은 시기 이즘의 길로 나아가 자기 자리를 찾은 화가들도 있다.
길이 여럿인 것이 화단이 건강하다는 표시다.

그가 바란 것은 하나였다. 화가가 자기 자리를 찾는 것.

1958년이었다. 추상의 물결이 한국 화단으로 밀려들기 직전이었다.
서른두 살의 화가가 그 물결을 향해 몸을 트는 것을,
시인은 걱정스럽게 보고 있었다.

그는 옳았다.

다만 화가의 대답은 도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십칠 년 뒤, 더 멀리, 섬으로 가는 것이었다.


6. 그가 그린 얼굴들

귀국 후 그는 초상을 그렸다.

60점 목록 50–56번, 초상 일곱 점.
「Portrait of Dr. Y / Dr. K / Dr. K / Dr. S / Dr. R / Dr. P / Mrs. K」

그가 실제 모델을 두고 그린 사람들의 명단이 남아 있다.

申泰煥 — 서울대학교 총장
權重輝 — 서울대학교 총장
李敭河 — 서울대학교 학장
金善琪 — 문교부 차관
金連甲 — 한양대학교 총장
邊時敏 — 제주대학교 학장
李升學 — 서라벌예술대학 학장
朴仁出마포고등학교 교장
尹日善 — 서울대학교 총장 · 陸芝修 · 張永淑 · 홍류유

서울대학교의 총장 세 사람과 학장, 그리고 교수들이 그에게 초상을 맡겼다.
마포고 교장의 초상도 그렸다.

그리고 이듬해, 마포고등학교의 후원으로 제5회 개인전이 열렸다.
중앙공보관 화랑. 1959년 4월.


7. 그해 9월

전시가 끝나고 석 달 뒤.

1958년 9월 1일, 그는 마포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신분증명서가 남아 있다.
본적 제주도 남제주군 서귀면 서홍리. 주소 서울 종로구 동숭동 192.
교장 박인출 — 그가 초상을 그린 바로 그 사람이다.


열 달의 순서

날짜
1957. 11. 15귀국. 서울대학교의 초빙.
1957. 11 – 1958. 6서울대학교. 여섯 달 반 <sup>[주3]</sup>
1958. 5. 23 – 6. 1화신 회고전. 60점. 하루 6000명
1958. 9. 1마포고등학교 교사

대학의 초빙으로 돌아왔다.

전시를 열었고, 하루 6000명이 왔다.

그리고 석 달 뒤, 고등학교 교사증을 받았다.


전시가 끝난 무렵, 대학도 끝났다.


8. 남아 있지 않은 것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문서는 남아 있지 않다.

서울대학교 재직을 증명하는 종이도,
사임의 시점을 적은 종이도,
그 이유를 적은 종이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짐작하지 않는다

「대학이 그를 밀어냈다」고 쓸 수 없다.

총장 세 사람과 학장, 그리고 교수들이 그에게 초상을 맡겼기 때문이다.
배척한 사람에게 자기 얼굴을 맡기지는 않는다.

「환대받았다」고도 쓸 수 없다.

열 달 만에 고등학교로 갔기 때문이다.

두 사실이 함께 있다. 그리고 그 사이가 비어 있다.


1958년의 한국에서, 어떤 일들은 기록되지 않는 방식으로 일어났다.

임용장은 남아도 사임의 이유는 남지 않는다.
그것이 그 시절의 방법이었다.


9. 그는 한 번 말했다

오십 년 가까이, 그는 이 일에 대해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원망도, 해명도, 이름도.

그러다 일흔여덟에, 딱 한 번 말했다.


2004년 12월 28일. 구술채록 제4차.
그의 자택이었다.

채록의 소제목이 이렇게 이어진다.

「정부의 감시를 받다」

「정보기관의 공작에 휘말리다」

「폭풍의 형상화」


그리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그 제주도에 가서 그 폭풍, 폭풍이라는 거는 제주도에서 폭풍에 시달리잖아?

사람들이? 초가집이 날아가고 뭐 농산물이 날아가고 말이지.

폭풍에 시달리는 시달림, 내가 한국에 와서 그런 수사기관에서 시달림.

이런 시달림에 대한 저항, 저항이 폭풍으로…

그 심상표현을 형상화 한 거야. 예술로 승화시킨 거야, 예술로.

그런 의미도 돼.

보통은 아무도 모르지.

— 2004년 구술채록, 제4차


10. 「보통은 아무도 모르지」

이 한 마디가 사십육 년의 침묵을 설명한다.

그는 모르게 두었다.
알아 달라고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말할 필요를 두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그의 폭풍을 제주의 자연으로 읽어 왔다.
그것도 맞다. 그 섬에서는 초가가 날아가고 농산물이 날아간다.

그러나 화백 자신은 또 하나의 뜻을 말한다.

시달림에 대한 저항.
그리고 그 저항을 그림으로 세운 것.


바람 앞에 굽은 등은 견디는 자세다.

그것이 자연 앞의 자세이자,
시대 앞의 자세이기도 했다.


11. 그리고 그는 그것으로 끝냈다

한 번 말하고,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원망을 남기지 않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누구를 탓하지도 않았다.

그는 싸우지 않았다.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억울하다고, 부당했다고.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그렸다.


그는 여백을 그린 사람이다.
말하지 않은 자리를 비워 두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생애에도 여백이 하나 있다.

그 여백은 비어 있지 않다.
한 번의 말과, 오십 년의 그림으로 차 있다.


12. 십칠 년

1958년부터 1975년까지, 그는 서울에 있었다.

이 시기를 「잊혀진 세월」로 부르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는 계속 그렸고, 계속 나갔다.

일본에서 회원 자격을 잃지 않았다.
1971년까지 도쿄 도미술관에 출품했고,
서울의 비원을 일본에서 전시했다.


13. 비원

1960년대의 그가 그린 것은 비원(祕苑)이었다.

창덕궁 뒤의 정원. 오래 닫혀 있던 곳.

붓이 가늘어졌다. 관찰이 미시적으로 변했다.
기와 한 장, 나뭇잎 하나까지 그렸다.

세밀해질수록 화면은 조용해졌다.

애련정, 어수문, 노목, 반도지, 부용정.
사람이 없는 정원.

십 년 넘게 그것만 그렸다.

1971년, 그 비원을 도쿄에 가지고 갔다.
일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8점, 대부분이 비원이었다.


14. 1974년 — 하나의 선언

제주로 가기 한 해 전,
그는 오리엔탈 미술협회를 만들고 대표가 되었다.

미아리 「화가의 집」에서. 12월 22일.

강령은 이러했다.

서양화로서 우리나라 고유의 동양적 화풍을 살리려는 화가들의 모임


서양화의 재료로, 동양의 화풍을.

일본에서 서양화의 문법을 완전히 익힌 사람이,
서울에서 십칠 년을 흔들린 끝에 도달한 자리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제주로 간다.


15. 그리고 1975년

쉰 살에, 그는 서울을 떠났다.

그해에도 제61회 광풍회전에 출품했다.
작품명은 〈서귀포 풍경〉이었다.


1958년의 〈지게꾼〉이 다시 걸어 나온다.

굽은 등. 짐을 진 몸. 바람 앞에 선 사람.

십칠 년 전 서울에서 그렸던 그 자세가,
섬의 바람 속에서 다시 서 있다.


말하지 않은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색이 되고 선이 되었을 뿐이다.


본문의 사실 기술은 실물 문서와 당대 보도에 근거한다.
근거가 없는 추정은 사실로 적지 않았다.

[주1] 귀국 일자와 경로

화백 본인의 구술이다. 채록연구자 이인범이 귀국 날짜를 묻자 그는 「57년 11월 15일」이라 답했고, 어떻게 왔는지 묻자 「노스웨스트. 동경에서 서울까지」라 했다. 김포에 내렸다고 덧붙였다.

사십칠 년 뒤에도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 2005년도 한국 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 변시지, 제2차, 「귀국」


[주2] 「무감사」에 관하여

광풍회에서 그는 회원(會員)이자 심사위원(審査委員)이었다. 회원은 애초에 심사를 받지 않으므로, 광풍회 출품은 「會員出品」이라 부른다.

일전은 공모전이다. 비회원은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그 심사를 면제받는 자격이 「무감사」이며, 전후에는 「의촉출품」이라 불렸다.

1958년 화신 회고전 팜플렛은 이 둘을 한 문장에 함께 적었다 — 「日本美術展에 依囑出品(戰前의 無監査資格)한 以後로부터」. 전쟁 전에 「무감사」라 부르던 것을 전후에 「의촉출품」이라 불렀다는, 화가 본인의 주석이다.

60점 목록도 이 둘을 정확히 구별한다 — 「光風會 會員出品」「日展 依囑出品」.

[주3] 서울대학교 재직 기간

1957년 11월 15일 귀국과 함께 부임하여 1958년 6월 초까지, 여섯 달 반이다.
화집 연보가 「6개월 만에 사표」라 기록한 것과 부합한다.

다만 임용·사임을 증명하는 문서는 남아 있지 않다. 본 아카이브는 이를 2차 자료로 표기한다.


근거 자료

  • - 마포고등학교 신분증명서 (1958. 9. 1) · 광풍회 회원증명서 (1957. 11. 2) — 아틀리에 소장
  • - 데라우치 만지로 「邊君을 보내는 말」 (1957) — 아틀리에 소장
  • - 「宇城 邊時志 油畵回顧展」 팜플렛 (1958) — 60점 전 목록
  • - 조선일보 1958. 5. 24 / 경향신문 1958. 6. 5 (조병화) / 제주신보 1958. 5. 31 / 《코리아 리퍼블릭》 (1958)
  • - 일본 개인전 팜플렛 (1971) — 略歷 및 작품목록
  • - 『우성 변시지 연보』 pp.169–173
  • - 『2005년도 한국 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 변시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한국예술연구소

구술 변시지 · 채록연구 이인범 · 전 307쪽. 제4차(2004. 12. 28) 「폭풍의 형상화」

인용에 관하여 — 구술채록 인용은 발췌이며, 구어의 호흡을 살려 옮겼다.
저작권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있으며, 본 아카이브는 연구·비평 목적의 인용에 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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