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변시지 풍토일력 365 · 100주년 기념판

풍토일력 365

열두 달, 열두 낱말. 하루에 한 문장씩 화가의 풍토를 읽습니다.

365문장
12낱말

1월 · 바람

31일
  1. 1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풀을 눕히고, 나무를 기울이며 지나간다.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오래 남는다. 제주의 들판은 오래전부터 이것을 알고 있었다.

  2. 2

    바람이 먼저 와 있었고, 우리는 뒤늦게 그것을 읽는다.

    기척은 형상보다 먼저 온다. 바람은 말이 없지만 지나간 자리에 늘 무언가를 남겨 놓는다.

  3. 3

    흔들리는 것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소나무는 바람에 기울어지지만 뿌리는 그대로이다. 흔들림은 버팀의 다른 이름일 때가 있다.

  4. 4

    바람은 방향을 가리지 않는다.

    제주의 바람은 동쪽에서 왔다가 남쪽으로 돌아간다. 그 변화 속에서도 들판은 자리를 지킨다.

  5. 5

    보이지 않는 힘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변시지의 캔버스에 바람은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바람을 말하고 있다.

  6. 6

    풀잎이 눕는 방향이 바람의 서명이다.

    바람은 스스로를 그리지 않는다. 풀과 나무와 사람을 빌려 자신을 씁니다.

  7. 7

    바람 앞에서는 곧은 것이 먼저 부러진다.

    유연한 것이 오래 산다. 빳빳함보다 흔들림이 더 깊은 생존의 방식이기도 한다.

  8. 8

    기침 같은 바람이 지나간다.

    짧고 강하게. 그리고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간 자리의 풀은 한참을 떨고 있다.

  9. 9

    바람은 소리를 빌립니다.

    대나무 사이를, 처마 끝을, 빈 병 입구를. 바람은 언제나 빌린 소리로 말한다.

  10. 10

    멈추지 않는 것이 있다.

    해가 지고 밤이 와도 제주의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그 지속이 풍토가 된다.

  11. 11

    바람 속에서도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들이 있다.

    돌담, 소나무, 그리고 홀로 서 있는 사내. 변시지는 그것들을 그렸는다.

  12. 12

    흔들리는 선이 바람을 기억한다.

    황토빛은 태양과 바람과 시간이 한 자리에 만나 남긴 색. 말 없이도 살아온 흔적을 전한다.

  13. 13

    바람은 가장 가난한 화가이다.

    도구도 없이, 물감도 없이 들판 전체를 움직인다. 그리고 그림을 남기지 않는다.

  14. 14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고요가 온다.

    폭풍 뒤의 정적은 폭풍 이전의 것과 다르다. 무언가를 통과한 고요이다.

  15. 15

    이 계절에 바람은 낮게 붑니다.

    겨울바람은 무릎 아래로 온다. 풀뿌리 근처에서 제일 차갑고 제일 오래 머뭅니다.

  16. 16

    바람은 기다리지 않는다.

    준비가 되어 있든 아니든, 바람은 온다. 그래서 늘 준비할 수 없는 것을 가르친다.

  17. 17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에 대하여.

    바람, 시간, 그리움, 고독. 변시지가 평생 그린 것들은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다.

  18. 18

    바람은 늘 먼저 온다.

    비보다 먼저, 추위보다 먼저, 봄보다 먼저. 바람이 먼저 와서 세상을 예고한다.

  19. 19

    바람이 강할수록 뿌리가 깊어진다.

    제주의 나무들은 육지보다 낮게 자랍니다. 하지만 뿌리는 더 깊다.

  20. 20

    한 줄기 바람이 이 하루를 열었다.

    커튼이 흔들리고, 창문이 덜컹거렸는다. 바람이 오늘을 시작했다.

  21. 21

    바람은 냄새를 운반한다.

    바다 냄새, 풀 냄새, 흙 냄새. 제주의 바람은 섬 전체의 기억을 실어 나릅니다.

  22. 22

    흔들리는 것들이 서로를 본다.

    바람이 불면 풀도 나무도 함께 흔들립니다. 같은 바람 속에서 모든 것이 서로를 압니다.

  23. 23

    바람 앞에 서면 할 말이 줄어듭니다.

    설명이 필요 없어진다. 바람이 이미 모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24. 24

    바람은 멀리서 와서 멀리로 간다.

    제주를 지나는 바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25. 25

    바람이 없는 날은 섬이 낯섭니다.

    제주에서 바람이 없는 날은 오히려 이상한 날이다. 바람이 있어야 섬다운 섬이다.

  26. 26

    바람은 언제나 그 다음을 준비한다.

    한 바람이 지나가는 동안 다음 바람이 오고 있다. 바람은 쉬지 않는다.

  27. 27

    우리는 바람을 막으려 했지만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돌담도, 바람막이도 결국 함께 사는 법을 배웠는다. 막는 것보다 견디는 것이 더 오래 간다.

  28. 28

    바람의 온도가 계절을 알려준다.

    피부로 먼저 압니다. 봄바람인지, 겨울바람인지. 달력보다 바람이 더 정직하다.

  29. 29

    이 달이 끝나도 바람은 남는다.

    1월이 지나도 바람의 기억은 몸에 남아 있다. 풍토는 그렇게 몸에 쌓인다.

  30. 30

    바람 속에 서 있었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한다.

    오늘 하루 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하루가 된다.

  31. 31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으니까.

    변시지가 떠난 뒤에도 서귀포의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예술도 그렇다.

2월 · 고독

28일
  1. 1

    고독은 혼자가 되는 일이 아니다. 끝내 자기 곁에 남는 일에 가깝다.

    누구에게도 다 말할 수 없는 마음, 오래 침묵한 시간, 설명되지 않아도 한 사람의 중심이 되는 안쪽의 자리.

  2. 2

    고독을 슬픔으로만 보지 않으려 한다.

    깊이로 읽으려 한다. 바람을 오래 맞은 존재가 끝내 자기 안에 남기는 가장 낮고 단단한 자리.

  3. 3

    혼자 있는 시간이 자기를 만드는 시간이다.

    사람들 속에서는 자기를 잊기 쉽다. 고독 속에서만 자기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4. 4

    고독은 안쪽의 자리이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자리가 없으면 사람은 오래 서 있기 어렵다.

  5. 5

    서귀포에서 혼자 보낸 40년.

    그것은 결핍이 아니었다. 선택이었다. 고독을 재료 삼아 만든 예술이었다.

  6. 6

    파도와 대화할 수 있었던 것은 혼자였기 때문이다.

    타인의 목소리들이 사라질 때 비로소 자연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7. 7

    고독은 매일 먹어야 할 밥이었다.

    변시지는 고독을 피하지 않았다. 꼭꼭 씹어 삼켜 붓을 들 힘으로 만들었다.

  8. 8

    아무도 없는 작업실에서 캔버스가 말을 겁니다.

    사람이 없어야 비로소 사물이 말한다. 고독이 열어 주는 대화의 방식이다.

  9. 9

    고독은 벌이 아니라 조건이다.

    창조는 본질적으로 혼자의 일이다. 누구도 대신 만들어 줄 수 없다.

  10. 10

    조용해지면 자기가 조금 더 보이다.

    소음이 줄어들면 자신의 윤곽이 드러난다. 고독은 자기를 선명하게 하는 시간이다.

  11. 11

    고독은 감옥이 아니라 우주였다.

    변시지에게 서귀포의 적막은 가두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넓어지는 공간이었다.

  12. 12

    두려움도 있었지만 별 하나가 보였다.

    내면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갔을 때, 어둠 속에서 하나의 빛이 보이다.

  13. 13

    혼자 걷는 길이 가장 오래 기억된다.

    함께 간 길은 대화가 기억된다. 혼자 간 길은 발아래 풀이, 바람이, 침묵이 기억된다.

  14. 14

    고독은 자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조건이다.

    관광객의 눈이 아니라 거주자의 몸으로 건너간 풍토. 변시지는 제주를 통과했다.

  15. 15

    외로움과 고독은 다르다.

    외로움은 타인을 원하는 마음이다. 고독은 자기와 함께 있기를 선택한 상태이다.

  16. 16

    고독 속에서 1300점이 태어났다.

    변시지는 혼자였기에 1300점을 그릴 수 있었다. 고독의 생산성은 이렇게 증명된다.

  17. 17

    사람이 없어야 제주가 들립니다.

    바람 소리, 파도 소리, 까마귀 소리. 고독이 섬의 목소리를 열어 줍니다.

  18. 18

    고독은 연료이다.

    예술가는 고독을 피하는 자가 아니다. 그것을 땔감 삼아 영혼을 태우는 자들이다.

  19. 19

    혼자이기에 가족이 더 그리웠고, 그리움이 그림이 되었다.

    부재가 존재를 만들기도 한다. 멀리 있는 사람이 캔버스 위에 나타나기도 한다.

  20. 20

    자기 곁에 남는 것이 자기를 만듭니다.

    오래 혼자였던 사람은 자기 자신과 가장 가까워진다. 그것이 고독의 선물이다.

  21. 21

    고독도 씹으면 단맛이 난다.

    처음에는 쓰지만, 오래 있으면 익숙해지고, 더 오래 있으면 없으면 섭섭한다.

  22. 22

    고독이 없었다면 바다를 그릴 수 없었을 것이다.

    바다의 고요를 알려면 먼저 자기 안의 고요를 알아야 한다.

  23. 23

    더 이상 외롭지 않은 날, 고독이 비로소 보이다.

    고독에 익숙해진 날, 그것이 실은 선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24. 24

    고독은 가장 조용한 형식의 자유이다.

    누구의 것도 아닌 시간. 누구의 눈도 없는 공간. 그 안에서 사람은 가장 자기답다.

  25. 25

    이 달이 끝나도 고독은 안쪽에 남는다.

    2월이 지나도 고독의 자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그 사람의 일부가 된다.

  26. 26

    고독을 땔감 삼아 영혼을 태우는 자들이다.

    예술가는 고독을 피하지 않는다. 그것을 연료 삼아 더 깊이 들어간다.

  27. 27

    자기 곁에 끝내 남는 일. 고독은 그 일에 가장 가까운 이름이다.

    혼자인 날에도 자기와 함께 있었다. 그 동행이 오늘을 이루었다.

  28. 28

    고독은 외로움이 익어 깊이가 된 것이다.

    처음에는 외로움이었다가, 시간이 지나면 깊이가 된다. 변시지의 40년이 그 증거이다.

3월 · 선

31일
  1. 1

    선은 윤곽이 아니다. 형태보다 먼저 오는 마음의 방향이다.

    한 번 지나간 존재의 흔적이며, 그 안에 바람과 숨과 망설임이 함께 남아 있다.

  2. 2

    곧은 선보다 떨리는 선이 더 오래 살아 있다.

    떨림 안에 바람과 숨이 있다. 완벽한 선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3. 3

    선 하나 긋는 일에 목숨을 겁니다.

    변시지는 그렇게 말했다. 선은 결심이며, 그 결심이 형태보다 먼저이다.

  4. 4

    한 번 그어진 선은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선은 정직하다. 후회도, 수정도 없는 가장 솔직한 형식이다.

  5. 5

    선은 말하지 않지만 남는다.

    설명 없이도 전해지는 것이 있다. 선이 그런 것이다.

  6. 6

    망설임도 선이 된다.

    붓이 한 번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인 자국. 그 망설임이 화면에 남아 말을 겁니다.

  7. 7

    선은 관계이다.

    이쪽과 저쪽 사이. 여기와 저기 사이. 선은 언제나 두 개 사이에서 생겨난다.

  8. 8

    검은 선 하나가 화면 전체의 침묵을 붙듭니다.

    적은 것이 많은 것을 담는다. 선 하나가 캔버스 전체의 무게 중심이 된다.

  9. 9

    선은 존재의 흔적이다.

    지나간 자리에 선이 남는다. 사람도, 바람도, 시간도 선을 남긴다.

  10. 10

    갈필로 그어진 선에는 숨이 남아 있다.

    기름기를 뺀 붓으로 그은 선. 그 거칠음 속에 화가의 호흡이 그대로 담겨 있다.

  11. 11

    잘 그린 선보다 책임진 선을 원했다.

    아름다움보다 진실함이 먼저이다. 변시지의 선은 그런 선이었다.

  12. 12

    선이 멈추는 자리에 여백이 시작된다.

    끝이 있어야 공간이 생긴다. 선의 멈춤이 여백을 만들고, 여백이 선을 살립니다.

  13. 13

    곡선은 바람을 기억한다.

    곧게 자라지 못한 나무는 바람의 역사를 몸에 새기고 있다.

  14. 14

    선을 긋는다는 것은 이 세계에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무언가를 한다는 것, 만든다는 것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이 선 하나이다.

  15. 15

    선은 적지만 가볍지 않는다.

    짧은 선 하나가 오랜 시간을 담을 수 있다. 무게는 길이가 아니라 깊이에서 온다.

  16. 16

    3월의 선은 봄을 향해 기웁니다.

    겨울을 통과한 선들이 봄 쪽으로 천천히 방향을 바꿉니다. 선도 계절을 압니다.

  17. 17

    붓을 드는 것이 이미 하나의 결심이다.

    그리겠다는 결심, 이 세계를 피하지 않겠다는 결심. 선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선이 있다.

  18. 18

    흔들리는 선이 실패가 아니다.

    선택의 흔적이다. 그 선이 화면의 진실을 보증한다.

  19. 19

    선은 소유가 아니라 만남이다.

    형식은 이론에서 오지 않는다. 매 순간의 선택이 쌓이고 쌓여 비로소 형태를 얻는다.

  20. 20

    선이 끝나는 자리에서 그림이 시작된다.

    선이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 말하지 않은 부분이 보는 이의 것이 된다.

  21. 21

    한 줄의 결심이 하루를 만듭니다.

    오늘 하루도 작은 선 하나처럼 그어 나간다. 어디로 갈지 몰라도, 긋는 것이 먼저이다.

  22. 22

    선은 날씨를 담는다.

    바람 부는 날의 선과 고요한 날의 선은 다르다. 선은 그날의 기상을 기억한다.

  23. 23

    선을 보면 화가가 보이다.

    기술이 아니라 태도가 드러난다. 선 속에 그 사람의 삶이 스며 있다.

  24. 24

    서예적 선과 회화적 선이 만나는 자리.

    그 선들은 동양의 붓글씨와 서양의 회화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두 세계 사이에서 자기 언어를 만들어낸 자리이다.

  25. 25

    선 하나로 하늘과 땅을 나눕니다.

    수평선. 그 한 줄이 세계를 두 개로 가릅니다. 가장 단순하면서 가장 근원적인 선.

  26. 26

    이 달의 선들이 쌓여 봄을 만들겠다.

    하루에 선 하나씩. 3월의 31개 선이 모이면 봄 한 철이 된다.

  27. 27

    선은 짧지만 오래 간다.

    수십 년 뒤에도 캔버스 위에서 선이 살아 있는 이유이다. 책임진 선은 시간을 이긴다.

  28. 28

    무엇을 그릴 것인가보다 어떻게 남길 것인가를 묻는 시간.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태도의 문제이다. 선은 그 태도의 첫 번째 대답이다.

  29. 29

    선이 떨리는 것은 살아 있다는 뜻이다.

    완벽하게 곧은 선은 기계가 그립니다. 사람의 선은 떨립니다. 그 떨림이 생명이다.

  30. 30

    선 하나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그림도, 글도, 건축도. 하나의 선이 세계를 열기 시작한다.

  31. 31

    이 달의 마지막 선을 조용히 긋는다.

    3월이 끝난다. 한 달 동안 그어온 선들이 모여 하나의 계절이 된다.

4월 · 풀

30일
  1. 1

    풀은 낮다. 그러나 낮다는 것이 약하다는 뜻은 아니다.

    오래 견딘다는 뜻에 더 가깝다. 제주의 들판에서 풀은 늘 바람을 먼저 알았다.

  2. 2

    밟혀도 다시 올라오는 것이 풀이다.

    풀의 버팀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멈추지도 않는다.

  3. 3

    마른 풀잎색 안에 시간이 담겨 있다.

    바래고 마른 것들이 실은 가장 오래 버텨온 것들이다.

  4. 4

    풀은 땅을 떠나지 않는다.

    아무리 바람이 세도 풀은 땅에 붙어 있다. 그 붙어 있음이 풀의 철학이다.

  5. 5

    화려한 꽃보다 먼저 들판이 깨어난다.

    봄은 꽃이 아니라 풀에서 먼저 온다. 낮은 것이 먼저 움직인다.

  6. 6

    풀 한 포기에도 우주가 있다.

    작은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큰 것이 보이다. 풀 한 포기의 뿌리에 깊이가 있다.

  7. 7

    세상은 큰 것보다 작은 것들로 더 오래 유지된다.

    풀이 사라지면 들판이 사라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세계를 받치고 있다.

  8. 8

    풀은 모양을 바꾸며 계절을 산다.

    봄에는 연두, 여름에는 짙은 초록, 가을에는 갈색, 겨울에는 흰색. 풀은 순응한다.

  9. 9

    낮게 사는 것에 지혜가 있다.

    바람이 세게 불수록 낮은 것이 더 오래 남는다. 겸손함이 생존의 방식이기도 한다.

  10. 10

    풀은 말이 없지만 계절을 알린다.

    봄을 가장 먼저 알아채는 것이 풀이다. 소리 없이 일어나 세상에 계절을 알린다.

  11. 11

    제주의 들판은 풀로 덮여 있다.

    바람이 세도, 돌이 많아도, 풀은 들판 전체를 자기 것으로 삼는다.

  12. 12

    풀잎 위의 이슬이 하루를 시작한다.

    아무도 보지 않는 새벽에도 풀은 이슬을 받는다. 쉬지 않고 자기 일을 한다.

  13. 13

    마른 풀잎색은 변시지의 황토빛과 닮아 있다.

    가장 화려하지 않은 색이 가장 오래 남는다. 바랜 것들의 아름다움이 있다.

  14. 14

    풀은 겨울을 지내고 봄에 돌아온다.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오는 것들이 있다.

  15. 15

    낮은 생명이 들판을 지킨다.

    풀이 없으면 흙이 쓸려간다. 보이지 않는 작은 것들이 큰 것을 붙들고 있다.

  16. 16

    풀을 보면 마음이 낮아진다.

    자꾸 높아지려 할 때 풀을 본다. 낮음이 더 오래 간다는 것을 풀이 보여 줍니다.

  17. 17

    4월 들판에 풀이 돌아왔다.

    겨울이 가고 풀이 깨어난다.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식으로.

  18. 18

    풀잎 하나가 바람을 가장 먼저 압니다.

    바람이 오면 풀잎이 먼저 반응한다. 작은 것이 가장 예민한다.

  19. 19

    풀의 초록이 눈을 쉬게 한다.

    봄의 초록은 눈의 피로를 풀어 줍니다. 자연이 주는 가장 오래된 치유이다.

  20. 20

    밟혀도 다시 일어난다. 그것이 풀의 방식이다.

    쓰러지지 않는 것이 강한 것이 아니다. 다시 일어서는 것이 강한 것이다.

  21. 21

    풀 향기가 봄을 만들어 냅니다.

    봄의 냄새는 꽃이 아니라 풀에서 온다. 흙과 섞인 풀 향기가 계절을 시작한다.

  22. 22

    작은 것들이 들판을 채웁니다.

    바다가 모든 경계를 허무는 자리. 그 자리에서만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

  23. 23

    풀은 자기 자리에서 자랍니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 발이 닿은 이 땅에서 자랍니다.

  24. 24

    오래 견딘 것이 결국 들판을 덮는다.

    겨울을 이겨 낸 뿌리들이 봄에 들판 전체를 초록으로 물들이다.

  25. 25

    풀잎색은 가장 정직한 색이다.

    있는 그대로의 색. 과장도 축소도 없는 색. 마른 풀의 색이 그렇다.

  26. 26

    낮게 자라는 것들의 고요한 품위.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들판의 기초가 된다. 조용한 것들의 품위가 있다.

  27. 27

    풀이 사라지면 들판이 사막이 된다.

    작은 것의 부재가 큰 변화를 만듭니다. 풀 한 포기의 무게를 압니다.

  28. 28

    봄 들판에 서면 자신도 풀 한 포기 같다.

    넓은 들판 위에 서면 사람도 하나의 작은 존재가 된다. 그것이 아름답다.

  29. 29

    풀은 해마다 새로 태어나지만 자리는 바뀌지 않는다.

    같은 곳에서, 같은 방식으로. 변화 속의 항상성이 풀을 풀답게 한다.

  30. 30

    이 달의 마지막 날, 들판은 온통 초록이다.

    4월이 풀을 키웠는다. 다음 달에는 조랑말이 이 들판 위를 걸을 것이다.

5월 · 조랑말

31일
  1. 1

    조랑말은 크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작은 몸으로 들판의 넓이와 바람의 높이를 오래 품는다.

    말은 말을 하지 않지만, 오래 함께 걷는 존재가 남기는 침묵은 사람의 말보다 더 깊을 때가 있다.

  2. 2

    느림, 인내, 곁, 숨, 그리고 함께 있다는 것의 조용한 품위.

    조랑말이 보여 주는 것들이다. 빠르고 화려한 것 말고도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3. 3

    조랑말은 풍경의 장식이 아니라 들판의 낮은 중심이다.

    그 곁에서 사람의 고독도 조금 덜 차갑게 느껴진다.

  4. 4

    말과 함께 걷다 보면 느림이 친구가 된다.

    빠르게 가야 할 이유를 잊는다. 말의 걸음이 다른 시간을 열어 줍니다.

  5. 5

    조랑말의 눈에는 판단이 없다.

    사람을 볼 때 조용히 받아들이다. 그 눈 앞에서 사람도 조금 더 솔직해진다.

  6. 6

    말은 바람을 먼저 압니다.

    귀를 세우고 몸을 돌립니다. 사람보다 먼저 기척을 감지한다.

  7. 7

    조랑말은 제주가 만든 몸이다.

    바람 많고 땅이 척박한 곳에서 작고 단단하게 자랐는다. 환경이 몸을 만듭니다.

  8. 8

    함께 걷는다는 것의 무게.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존재가 있다는 것. 말은 그 감각을 조용히 가르쳐 줍니다.

  9. 9

    조랑말의 걸음에 서두름이 없다.

    들판을 거닐 때 조랑말은 급하지 않는다. 그 느림이 오히려 품위이다.

  10. 10

    말의 숨소리가 들판을 채웁니다.

    조용한 곳에서 말의 호흡을 들을 수 있다. 그 소리가 들판을 살아 있게 한다.

  11. 11

    변시지의 캔버스 위 조랑말은 고독하지 않는다.

    바람 속에 있어도, 혼자여도, 조랑말은 들판과 함께 있다.

  12. 12

    느린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오래 가는 것이 빠른 것보다 좋을 때가 있다. 조랑말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13. 13

    말은 말이 없어도 위로가 된다.

    곁에 있는 존재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다. 말이 필요 없는 위로가 있다.

  14. 14

    조랑말의 갈기가 바람에 흩어진다.

    들판과 바람과 말이 하나가 되는 순간. 변시지는 그 순간을 캔버스에 담았다.

  15. 15

    5월의 들판에서 조랑말이 풀을 뜯는다.

    긴 겨울과 봄을 지나 풀이 무성해졌다. 말도 그것을 압니다.

  16. 16

    동행의 시간이 깊이를 만듭니다.

    함께 오래 걸어온 것들이 있다. 그것들이 삶의 두께가 된다.

  17. 17

    조랑말은 험한 땅에서도 발을 찾는다.

    돌이 많아도, 비탈이 가파라도 말은 자기 길을 찾는다. 그것이 적응의 기술이다.

  18. 18

    작은 몸에 큰 것이 담겨 있다.

    크기가 전부가 아니다. 조랑말 안에 제주의 긴 역사와 바람이 담겨 있다.

  19. 19

    말의 시선이 멀리 수평선을 향한다.

    조랑말은 들판 너머를 본다. 그 시선이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모른다.

  20. 20

    함께 있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을 때가 있다.

    오래 곁에 있어 준 존재. 말없이 함께한 시간. 그것이 가장 깊은 동행이다.

  21. 21

    조랑말의 발굽 소리가 길을 만듭니다.

    말이 오래 걷는 곳에 길이 생긴다. 반복이 흔적을 만들고 흔적이 길이 된다.

  22. 22

    바람 속에서도 말은 자기 속도를 지킨다.

    주변이 빠르게 변해도 말은 자기 걸음으로 걷는다. 그것이 말의 품위이다.

  23. 23

    조랑말의 등이 따뜻한다.

    생명의 온기. 살아 있는 것이 가진 따뜻함이 손 아래 전해진다.

  24. 24

    들판에 말이 있으면 들판이 살아난다.

    풍경 속의 생명. 조랑말 한 마리가 들판 전체를 깨웁니다.

  25. 25

    조랑말의 눈물은 보이지 않는다.

    말이 아프거나 슬퍼도 우리는 잘 모른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

  26. 26

    느린 동행이 삶을 깊게 한다.

    빠르게 많은 것을 보는 것보다, 천천히 하나를 함께 보는 것이 더 오래 남는다.

  27. 27

    조랑말이 가는 곳에 이야기가 생긴다.

    말이 지나간 길에는 기억이 쌓인다. 이야기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28. 28

    말없이 함께 있다는 것의 아름다움.

    오래된 관계는 말이 없어도 된다. 침묵이 언어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한다.

  29. 29

    제주 조랑말은 섬의 영혼이다.

    작고 단단하고 느리고 오래 가는. 그것이 섬의 성격과 닮아 있다.

  30. 30

    5월이 가고 조랑말은 들판에 남는다.

    달이 바뀌어도 말은 그 자리에 있다. 계절이 지나도 들판은 계속된다.

  31. 31

    느림이 곧 깊이이다.

    서두르지 않는 것이 느린 게 아니다. 더 많이 보고 더 깊이 담는 방식이다.

6월 · 바다

30일
  1. 1

    바다는 끝처럼 보이지만 실은 멀어짐의 형식이다.

    수평선은 닿지 않는 것들의 가장 조용한 약속이다. 제주의 바다는 늘 열려 있으면서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2. 2

    수평선은 만남의 선처럼 보이지만 끝내 닿지 않는다.

    그 닿지 않음이 오히려 오래 바라보게 만듭니다. 불가능이 아름다움이 되는 자리이다.

  3. 3

    바다 앞에 오래 서 있으면 마음도 수평을 배웁니다.

    흔들리다가도 바다를 보면 마음이 넓어진다. 바다가 가르치는 것이 있다.

  4. 4

    바다는 풍경이기 전에 사람 안쪽의 자리를 넓히는 존재이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것. 바다는 그렇게 다가온다.

  5. 5

    제주의 바다는 아름답기 전에 두렵다.

    언어는 시대와 함께 늙는다. 그러나 침묵은 어느 시대에도 지금이다.

  6. 6

    수평선은 어디서나 같은 높이에 있다.

    가까이 가도 멀리 있어도 수평선은 언제나 눈높이에 있다. 그 항상성이 위로가 된다.

  7. 7

    바다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이 오고 가도 바다는 그 자리에 있다. 바다의 지속이 삶을 안심시킨다.

  8. 8

    파도는 쉬지 않는다.

    밤에도, 아무도 없을 때도 파도는 온다. 쉬지 않는 것들이 세계를 유지한다.

  9. 9

    바다 냄새가 멀리서도 온다.

    아직 바다가 보이지 않아도 냄새로 먼저 압니다. 감각이 눈보다 앞서는 순간이 있다.

  10. 10

    6월의 바다는 가장 푸릅니다.

    여름이 시작되는 바다. 빛이 가장 강하고 색이 가장 깊은 계절이다.

  11. 11

    바다는 경계를 지우는 곳이다.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경계가 사라진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자리이다.

  12. 12

    파도 소리가 침묵을 채웁니다.

    조용한 것 같지만 파도가 있다. 바다의 침묵은 소리로 가득한 침묵이다.

  13. 13

    바다를 오래 보면 자기가 작아진다.

    그 작아짐이 불편하지 않는다. 오히려 홀가분한다. 바다 앞의 겸손이다.

  14. 14

    변시지의 바다는 황토빛이다.

    파란 바다가 아니다. 그가 본 바다, 느낀 바다, 살아온 바다의 색이다.

  15. 15

    파도가 돌아온다. 밀려났다고 사라진 것이 아니다.

    물러섰다가 다시 오는 것. 파도가 가르치는 용기의 방식이다.

  16. 16

    바다 앞에서 생각이 멈춥니다.

    너무 크고 넓어서 생각이 따라가지 못한다. 멈춤이 오히려 쉬는 시간이 된다.

  17. 17

    갈매기가 수평선을 가로지릅니다.

    선 하나가 화면을 가릅니다. 새 한 마리가 넓은 하늘에 점 하나를 찍는다.

  18. 18

    깊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바다의 깊이는 수면만 봐서는 알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깊다.

  19. 19

    바다는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한다.

    여름 바다와 겨울 바다는 같은 바다이지만 다른 바다이다. 바다도 살아 있다.

  20. 20

    수평선을 보면 먼 곳이 생각난다.

    누군가가, 어딘가가, 무언가가 떠오릅니다. 바다는 그리움을 부르는 곳이다.

  21. 21

    바다 위의 빛이 움직인다.

    물결 위에서 빛이 흩어지고 모이다. 그 움직임을 오래 보게 된다.

  22. 22

    섬에서 바다를 보는 것과 육지에서 보는 것은 다르다.

    사방이 바다인 곳에서 보는 바다는 다르다. 둘러싸인 바다는 더 가깝다.

  23. 23

    바다 앞에서 작아지는 것이 자유롭다.

    거대함 앞에서 자신을 내려놓는 것. 그것이 바다가 주는 선물이다.

  24. 24

    파도가 달라도 바다는 하나이다.

    각각의 파도는 다르지만 모두 같은 바다에서 온다. 다양함 속의 하나.

  25. 25

    바다는 멀어짐을 가르친다.

    떠나보내는 것, 흘러가게 두는 것. 바다 앞에서 놓아 버리는 법을 배웁니다.

  26. 26

    제주 바다의 색은 그날의 하늘과 바람이 결정한다.

    같은 바다도 날마다 색이 다르다. 바다는 날씨를 담는 거울이다.

  27. 27

    바다 앞에 서면 용감해지기도 한다.

    거대한 것 앞에서 오히려 작은 걱정이 작아진다. 바다의 위로 방식이다.

  28. 28

    건너감, 멀어짐, 깊이, 그리고 오래 바라보게 되는 마음.

    바다가 주는 것들이다. 눈으로 받는 것들이 이렇게 많다.

  29. 29

    이 달의 마지막 파도가 해변에 닿는다.

    6월이 끝난다. 바다는 계속될 것이다. 다음 달도, 그 다음 달도.

  30. 30

    바다는 여전히 거기 있다.

    우리가 보지 않을 때도, 자고 있을 때도. 바다는 그 자리에서 파도를 치고 있다.

7월 · 태풍

31일
  1. 1

    태풍은 두렵다. 그러나 감추어져 있던 것들을 드러내는 시간이기도 한다.

    크게 흔들리는 날에야 비로소 무엇이 남고 무엇이 무너지는지가 보이기 때문이다.

  2. 2

    태풍은 부수는 힘이면서 남을 것을 가려내는 바람이다.

    거센 날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버틴 것들의 표정을 다시 보게 된다.

  3. 3

    견딤, 드러남, 상처를 지나도 끝내 남는 형상.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살아남은 것들이 있다. 그것들이 진짜였던 것들이다.

  4. 4

    7월의 제주에 태풍이 온다.

    예고가 있어도 준비가 다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하늘이 맑다.

  5. 5

    강한 것이 먼저 쓰러지기도 한다.

    뻣뻣한 것이 바람에 먼저 부러진다. 유연한 것이 태풍을 견딥니다.

  6. 6

    태풍 속에서 뿌리가 시험받는다.

    내면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갔을 때, 어둠 끝에서 별이 보였다.

  7. 7

    폭풍이 지나간 자리가 가장 조용한다.

    소란 뒤의 고요. 태풍이 지나간 새벽의 공기는 다르다.

  8. 8

    변시지의 폭풍은 마음속 저항이었다.

    독재의 시대에 화가가 선택한 저항의 방식. 캔버스 위의 폭풍이었다.

  9. 9

    흔들린 뒤에도 제자리로 돌아오려는 힘.

    생의 복원력. 태풍이 지나도 다시 일어서는 것들이 있다.

  10. 10

    태풍 전의 고요가 더 무겁다.

    오기 전의 긴장. 예감이 때로는 실제보다 더 두렵다.

  11. 11

    폭풍 속 선은 난무(亂舞)한다.

    통제를 잃은 선. 그러나 그 선들이 모여 가장 강렬한 화면이 된다.

  12. 12

    태풍도 지나간다.

    아무리 강한 것도 영원하지 않는다. 지나가는 것들이 있다.

  13. 13

    버티는 것들의 표정이 태풍 뒤에 드러난다.

    폭풍이 지나면 살아남은 것들이 더 선명하게 보이다.

  14. 14

    빗줄기가 굵어진다.

    태풍이 가까워지면 빗줄기가 세진다. 가까워지는 것들은 먼저 소리로 압니다.

  15. 15

    폭풍 안에서도 그림을 그립니다.

    변시지는 태풍이 와도 캔버스 앞에 섰는다. 그것이 예술가의 일상이었다.

  16. 16

    태풍의 눈은 고요한다.

    가장 강한 폭풍의 중심에 고요가 있다. 역설적인 평화가 있다.

  17. 17

    상처를 지나도 남는 것들이 진짜이다.

    태풍이 할퀴고 간 자리에서도 살아남은 것들이 있다. 그것들이 진짜였다.

  18. 18

    흔들린 적 없는 것은 아름답지 않는다.

    폭풍을 맞은 나무가 더 강한다. 시련이 형태를 만들기도 한다.

  19. 19

    태풍이 지나면 하늘이 가장 맑다.

    격렬한 것 뒤에 오는 청명함. 태풍의 선물이 있다.

  20. 20

    폭풍 속 사내는 허리를 굽힌다.

    맞서는 게 아니다. 바람과 함께 형태를 바꾸며 버틴다.

  21. 21

    제주의 7월은 태풍의 계절이다.

    해마다 오는 것. 예고된 것. 그러나 매번 다른 강도로 온다.

  22. 22

    격렬한 날이 있어야 조용한 날이 빛난다.

    태풍 없는 제주는 제주가 아니다. 강한 것이 있어야 부드러운 것도 살아난다.

  23. 23

    뿌리의 무게가 폭풍을 견딥니다.

    땅속 깊이 뻗은 뿌리가 태풍 위의 나무를 붙들고 있다.

  24. 24

    태풍이 오기 전 바다가 이상한다.

    색이 변하고, 파도의 방향이 달라진다. 바다가 먼저 태풍을 압니다.

  25. 25

    난무(亂舞)가 끝나면 침묵이 온다.

    가장 격렬한 운동 다음에 오는 완전한 정지. 그 대비가 폭풍의 드라마이다.

  26. 26

    태풍 속에서 무엇이 먼저 떨어지는지 본다.

    약한 것이 먼저 떨어진다. 태풍은 솔직한 심판이다.

  27. 27

    폭풍을 통과한 것이 더 아름답다.

    바람에 깎이고 비에 씻긴 것들이 더 선명한 형태를 갖는다.

  28. 28

    태풍이 지나간 들판에 풀이 다시 섭니다.

    눕혔던 것들이 다시 일어난다. 생명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29. 29

    이 달의 태풍이 지나갔다.

    7월이 끝난다. 폭풍을 통과했다. 다음 달에는 빛의 시간이 온다.

  30. 30

    흔들리고 난 뒤에야 자기가 어디 서 있는지 압니다.

    태풍이 지나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견뎌 왔는지를 본다.

  31. 31

    태풍도 제주의 풍토이다.

    바람만이 아니다. 태풍도, 폭우도 제주를 제주답게 만드는 것들이다.

8월 · 빛

31일
  1. 1

    빛은 환하게 비추는 것만이 아니다. 오래 머문 빛은 사물을 바래게 하며 시간의 색으로 남는다.

    제주의 햇빛은 밝기보다 기후에 가깝다. 마른 풀잎색의 침전이 더 오래 남는다.

  2. 2

    표면의 기억, 바랜 색, 견딘 시간.

    빛이 오래 머문 자리에 남는 것들이다. 시간의 흔적이 색이 된다.

  3. 3

    강한 햇빛 끝에 남은 색은 더 조용하고 더 멀리 간다.

    화려한 것은 빨리 사라진다. 오래 바랜 것이 더 깊다.

  4. 4

    빛은 사물을 화려하게 하기보다 덜어 내고 깊게 만듭니다.

    오래된 것들이 아름다운 이유이다. 빛이 시간과 함께 사물을 깎아 냅니다.

  5. 5

    8월의 빛이 가장 강한다.

    한 해 중 가장 환한 달. 그러나 그 빛이 가장 빨리 바래게도 한다.

  6. 6

    황토빛은 시간이 만든 색이다.

    변시지의 황토빛은 선택이 아니었다. 빛과 시간이 함께 만들어 낸 색이었다.

  7. 7

    빛이 있어야 그림자도 있다.

    빛만으로는 형태가 보이지 않는다. 그림자가 있어야 윤곽이 드러난다.

  8. 8

    여름 아침의 빛과 저녁의 빛은 같은 빛이 아니다.

    방향이 다르고 색이 다르다. 빛도 하루를 산다.

  9. 9

    빛이 풀잎색을 만듭니다.

    같은 풀이라도 빛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색은 빛의 산물이다.

  10. 10

    오래된 것들이 더 아름다운 이유가 있다.

    빛이 오래 머물러 표면을 닦았기 때문이다. 시간의 빛이 사물에 깊이를 줍니다.

  11. 11

    빛은 공평하다.

    모든 것에 고르게 닿는다. 귀천 없이, 선악 없이 빛은 내립니다.

  12. 12

    바랜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시간이 지워 낸 색. 그 바램 속에 오래 버텨 온 흔적이 있다.

  13. 13

    변시지의 서귀포는 빛의 도시이다.

    가난이 예술을 위협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조건이었다.

  14. 14

    빛 속에서 사물의 진짜 색이 보이다.

    인공조명이 아닌 자연광에서만 보이는 색이 있다. 빛이 진실을 드러냅니다.

  15. 15

    절제된 밝음이 더 오래 눈에 남는다.

    눈부신 것은 금방 잊힌다. 조용한 빛이 더 오래 기억된다.

  16. 16

    태양의 원형이 변시지의 화면에 있다.

    추상적인 원. 그러나 그것이 빛의 근원이며 하루의 시작이다.

  17. 17

    빛이 가장 강한 정오에 그림자가 가장 짧다.

    높은 것은 그림자를 짧게 한다. 빛의 정점에서 어둠도 줄어듭니다.

  18. 18

    빛을 받는 것과 빛을 담는 것은 다르다.

    빛을 받는 것은 순간이다. 빛을 담는 것은 시간이 걸립니다.

  19. 19

    빛이 바다를 움직이게 한다.

    물결 위에서 빛이 춤을 춥니다. 빛과 물이 만나는 자리의 아름다움.

  20. 20

    마른 풀잎색 안에 여름 빛이 침전되어 있다.

    한여름의 강한 빛이 풀잎을 말리고 그 빛을 색 속에 가두어 놓는다.

  21. 21

    빛이 그림자를 만들고, 그림자가 공간을 만듭니다.

    빛만으로는 공간이 없다. 어둠이 있어야 깊이가 생긴다.

  22. 22

    오래된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

    낡은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특별하다. 시간과 함께 걸러진 빛이다.

  23. 23

    빛이 하루를 시작하고 빛이 하루를 닫는다.

    아침 빛과 저녁 빛. 빛이 하루의 괄호를 만듭니다.

  24. 24

    침전된 빛이 황토가 된다.

    오래 머문 빛이 색으로 남는다. 변시지의 황토빛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25. 25

    빛은 항상 어딘가에서 온다.

    태양에서, 달에서, 별에서. 빛에는 출처가 있다. 그 출처를 생각한다.

  26. 26

    가장 따뜻한 색이 황토빛이다.

    빛이 오래 머문 자리의 색. 따뜻하지만 화려하지 않은, 조용히 따뜻한 색이다.

  27. 27

    빛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

    빛을 찾아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고, 사람이 모이다.

  28. 28

    여름 빛의 끝에 가을이 온다.

    8월의 빛이 가장 강하지만, 그 끝에서 빛이 조금씩 기웁니다. 가을의 예고.

  29. 29

    빛이 사라져도 빛의 기억이 남는다.

    해가 지고 나서도 하늘은 한동안 밝다. 빛이 남기고 간 색.

  30. 30

    이 달의 빛을 기억한다.

    8월의 가장 강한 빛. 그 빛이 바랜 색이 이 해의 황토빛이 된다.

  31. 31

    빛은 말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드러냅니다.

    숨겨진 것도, 닫힌 것도 빛 앞에서는 드러난다. 빛이 가장 정직한 이유이다.

9월 · 돌담

30일
  1. 1

    돌담은 높지 않는다. 바람 많은 곳에서 오래 남기 위해서는 낮음이 더 깊은 지혜가 된다.

    돌과 돌 사이의 틈, 천천히 변형되며 버티는 구조, 말없이 날씨를 저장하는 표면.

  2. 2

    낮게 버티는 것, 틈을 남겨 두는 것, 오래 견디는 것의 아름다움.

    돌담은 막기보다 함께 살기 위해 세워진 벽이다. 그 낮은 구조 안에 제주의 침묵이 산다.

  3. 3

    돌담은 쌓는 것이 아니라 짓는 것이다.

    돌 하나하나를 골라 맞춥니다. 그 정성이 돌담을 오래가게 한다.

  4. 4

    틈이 있어야 바람이 지나간다.

    완전히 막으면 바람이 밀어버립니다. 틈이 돌담을 살립니다. 틈의 지혜이다.

  5. 5

    돌담 위에 이끼가 산다.

    시간이 쌓이면 돌담에도 생명이 붙는다. 오래된 것들이 가진 풍경이다.

  6. 6

    낮은 것이 오래 간다.

    높게 쌓은 담은 바람에 무너진다. 낮게 쌓은 것이 몇 백 년을 산다.

  7. 7

    제주 돌담의 색은 현무암의 색이다.

    검고 거친다. 그러나 그 거칠음이 제주의 진짜 색이다.

  8. 8

    돌담은 말없이 날씨를 기억한다.

    비가 오면 젖고, 서리가 오면 하얗게 된다. 돌담은 날씨의 일기장이다.

  9. 9

    경계이지만 막지 않는다.

    돌담은 여기와 저기를 나누지만, 누구나 볼 수 있다. 투명한 경계이다.

  10. 10

    9월에 돌담이 제일 아름답다.

    여름 빛이 가시고 가을 빛이 시작될 때, 돌담의 색이 가장 선명해진다.

  11. 11

    돌담을 쌓는 손이 그 마을을 만들었다.

    세대에 걸쳐 돌을 쌓아온 손들. 돌담은 그 손들의 흔적이다.

  12. 12

    돌담 너머로 바다가 보이다.

    낮은 담 위로 수평선이 걸립니다. 돌담이 그림의 테두리가 된다.

  13. 13

    돌은 돌끼리 맞다.

    모양이 다른 돌들이 서로 맞물려 하나가 된다. 다름이 힘이 된다.

  14. 14

    돌담을 따라 걸으면 마을이 보이다.

    돌담 길을 따라가면 마을의 역사가 펼쳐진다. 돌담이 이야기를 이어 줍니다.

  15. 15

    낮은 구조 안에 큰 지혜가 있다.

    눈에 띄지 않는 높이. 그러나 수백 년을 버텨온 구조. 낮음의 지혜이다.

  16. 16

    돌담이 바람을 나눕니다.

    이 쪽은 바람이 세고 저 쪽은 조용한다. 돌담 하나가 두 개의 날씨를 만듭니다.

  17. 17

    변시지의 돌담에는 침묵이 쌓여 있다.

    캔버스 위의 돌담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제주의 긴 침묵이 담겨 있다.

  18. 18

    무너진 돌담도 다시 쌓는다.

    태풍이 무너뜨려도 다시 쌓는다. 그 반복이 마을을 유지한다.

  19. 19

    돌담은 혼자 세우는 것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쌓았다. 돌담 안에 공동체의 기억이 있다.

  20. 20

    틈 사이로 바람이 노래한다.

    돌담의 틈을 바람이 지나갈 때 소리가 난다. 돌담이 악기가 된다.

  21. 21

    돌 하나하나가 자기 자리를 압니다.

    제자리에 있는 돌이 담을 만듭니다. 자리를 찾는 것이 시작이다.

  22. 22

    오래된 돌담일수록 이야기가 많다.

    쌓이고 무너지고 다시 쌓인 돌담. 그 반복의 역사가 돌담에 남아 있다.

  23. 23

    돌담 너머에도 삶이 있다.

    돌담으로 나뉜 공간이지만, 삶은 이어진다. 경계가 삶을 막지 못한다.

  24. 24

    가을 햇빛 아래 돌담이 빛난다.

    9월의 빛이 돌담 위에 앉는다. 검은 돌이 황금빛을 품는다.

  25. 25

    쌓고 무너지고 다시 쌓는 삶.

    돌담의 방식이 사람의 방식이기도 한다. 무너진 것을 다시 쌓는 것, 그것이 삶이다.

  26. 26

    돌담 위의 까마귀.

    검은 돌 위에 검은 새. 서로 닮은 것들이 자리를 나눠 씁니다.

  27. 27

    작은 돌들이 모여 긴 담을 만듭니다.

    작은 것들의 힘. 하나하나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모이면 집을 지킨다.

  28. 28

    돌담이 있는 마을에는 시간이 쌓인다.

    오래된 돌담 마을에 가면 다른 시간이 흐릅니다. 돌이 시간을 담는다.

  29. 29

    이 달의 마지막 날, 돌담에 기대어 본다.

    9월이 끝난다. 돌담처럼 낮게, 견고하게 한 달을 보냈는다.

  30. 30

    낮고 단단하게. 그것이 오래 가는 방식이다.

    돌담이 가르치는 것이다. 화려하지 않아도, 눈에 띄지 않아도 오래 가는 방식.

10월 · 까마귀

31일
  1. 1

    까마귀는 작다. 그러나 그 검은 점 하나가 넓은 들판의 적막을 붙들기도 한다.

    돌담 위의 까마귀, 먼 들판의 검은 형상. 황갈색 속에 놓인 가장 적지만 가장 또렷한 존재.

  2. 2

    까마귀는 불길함의 기호가 아니라 남아 있는 적막이 몸을 얻은 형상이다.

    작은 것이 전체를 바꾸는 힘. 적은 것이 깊은 침묵을 만드는 힘. 까마귀가 보여 줍니다.

  3. 3

    검은 점 하나가 화면 전체의 긴장을 깨웁니다.

    까마귀 한 마리가 앉으면 화면이 달라진다. 작은 것의 힘이다.

  4. 4

    10월의 들판에 까마귀가 내려앉는다.

    추수 뒤의 들판. 바람이 식어가는 계절. 까마귀가 그 적막 속에 자리를 잡는다.

  5. 5

    변시지는 까마귀가 되었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걸으며 강의했다. 변시지의 사내는 걸으며 존재한다. 걷기는 철학이다.

  6. 6

    검은 것들이 세상을 선명하게 한다.

    까마귀의 검은색이 황토빛 들판을 더 황토빛으로 만듭니다. 대비가 색을 살립니다.

  7. 7

    까마귀의 울음소리는 적막을 채웁니다.

    소리가 없는 것 같은 들판에 까마귀 소리가 난다. 그 소리가 오히려 침묵을 깊게 한다.

  8. 8

    외다리 까마귀도 섭니다.

    없는 것이 있어도 산다. 결핍 속에서도 존재한다. 까마귀가 그것을 보여 줍니다.

  9. 9

    까마귀는 홀로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들판 한가운데 혼자 앉아도 까마귀는 당당한다.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이다.

  10. 10

    검은 형상이 먼 배경에 놓일 때.

    황토빛 들판 위의 까마귀. 그 간단한 구도가 강렬한 화면이 된다.

  11. 11

    까마귀는 겨울을 미리 압니다.

    철새보다 먼저 계절의 변화를 감지한다. 까마귀가 더 날아다니면 겨울이 온다.

  12. 12

    집중의 형상이 까마귀이다.

    작고 검은 한 점. 그것이 화면 전체의 시선을 모은다.

  13. 13

    까마귀의 날개 소리가 조용히 난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 그 소리가 있어야 까마귀가 날고 있음을 압니다.

  14. 14

    돌담 위에 앉은 까마귀.

    검은 돌 위에 검은 새. 닮은 것들이 서로를 알아본다.

  15. 15

    까마귀는 오래 제주에 있었다.

    제주의 토착 새이다. 바람이 있는 곳에서 까마귀도 산다.

  16. 16

    까마귀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모른다.

    무엇을 보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것들의 깊이가 있다.

  17. 17

    한 마리가 있으면 더 올 것을 압니다.

    까마귀는 혼자 오지 않는다. 한 마리가 신호를 보내고 무리가 따라온다.

  18. 18

    까마귀 소리에 하루가 시작된다.

    이른 아침 까마귀 소리가 난다. 그 소리가 하루의 첫 번째 언어이다.

  19. 19

    가장 검은 것이 가장 또렷한다.

    빛이 없는 색이 빛 속에서 가장 선명한다. 까마귀가 그 역설을 보여 줍니다.

  20. 20

    까마귀가 날면 하늘이 달라 보이다.

    까마귀가 하늘을 나는 순간 하늘에 살이 생긴다. 점이 공간을 만듭니다.

  21. 21

    까마귀의 적막이 화면에 스밉니다.

    그 작은 검은 형상 하나가 캔버스 전체의 침묵을 책임진다. 작은 것이 전체를 붙드는 방식이다.

  22. 22

    검은 것들은 모두 서로를 압니다.

    밤, 먹, 까마귀, 검은 선. 이것들이 변시지의 화면에서 만난다.

  23. 23

    오늘도 까마귀가 들판을 순찰한다.

    매일 오고, 매일 난다. 까마귀의 반복이 들판의 리듬이 된다.

  24. 24

    까마귀가 앉은 자리에 이야기가 생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어딘가에 오래 머물면 그 자리에 이야기가 쌓인다.

  25. 25

    적막과 까마귀는 친구이다.

    고요한 곳에 까마귀가 있고, 까마귀가 있으면 고요해진다.

  26. 26

    까마귀의 검은색이 모든 것을 더 밝게 한다.

    가장 어두운 것 옆에 있어야 밝음이 밝아진다. 까마귀의 역할이다.

  27. 27

    작은 것이 큰 것을 담는다.

    점 하나에 우주가 있다. 까마귀 한 마리에 들판 전체의 침묵이 담겨 있다.

  28. 28

    10월이 끝나면 까마귀만 남는다.

    철새들이 떠나고 나면 까마귀가 겨울을 지킨다. 남는 것들이 있다.

  29. 29

    까마귀를 보면 집중하게 된다.

    그 검은 형상 앞에서 시선이 모이다. 까마귀가 집중을 가르친다.

  30. 30

    이 달의 마지막 까마귀가 날아간다.

    10월이 끝난다. 검은 점 하나가 하늘을 건너 사라진다.

  31. 31

    까마귀는 여기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날아가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기억한다.

11월 · 여백

30일
  1. 1

    여백은 비어 있는 곳이 아니다. 끝내 더 그리지 않기로 남겨 둔 자리이다.

    무엇을 채울 것인가보다 어디에서 멈출 것인가를 묻는 시간. 침묵이 설명보다 더 멀리 가는 자리.

  2. 2

    여백은 공허가 아니라 가능성이다.

    그 안에서 바람도 지나가고, 침묵도 머물고, 형상도 더 오래 살아남는다.

  3. 3

    그리지 않은 것이 그린 것을 지탱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받쳐 줍니다. 여백의 힘이다.

  4. 4

    넓은 빈 공간이 형상을 더 또렷하게 한다.

    까마귀 한 마리가 여백 위에 있을 때 더 선명해진다. 배경이 주인공을 만듭니다.

  5. 5

    11월의 들판이 비어간다.

    곡식이 걷히고 풀이 눕는다. 들판이 스스로 여백을 만들어 간다.

  6. 6

    덜어 낸 자리에 침묵이 산다.

    채움보다 비움이 어렵다. 비워진 자리에서 더 많은 것이 보이다.

  7. 7

    여백은 관객에게 자리를 줍니다.

    다 채워진 그림에는 들어갈 곳이 없다. 여백이 보는 이를 초대한다.

  8. 8

    여백이 없으면 형상도 없다.

    배경이 있어야 주인공이 있다. 비어 있음이 있어야 채워진 것이 보이다.

  9. 9

    침묵이 설명보다 더 멀리 간다.

    말이 닿지 못하는 곳에 침묵이 닿는다. 여백이 하는 일이 그것이다.

  10. 10

    오래된 그림의 여백에 시간이 쌓여 있다.

    그 여백에는 40년의 제주가 담겨 있다. 보이지 않는 시간이 빈 공간을 채웁니다.

  11. 11

    남겨 둔 것이 남겨진 것보다 큽니다.

    그리지 않기로 한 결정이 그린 것보다 더 큰 결정이었다.

  12. 12

    여백은 멈춤이 아니라 다름의 시작이다.

    선이 멈추는 자리에서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 여백은 끝이 아니다.

  13. 13

    하늘도 하나의 여백이다.

    구름이 없는 하늘. 그 빈 곳이 가장 넓은 여백이다. 하늘이 모든 것을 담는다.

  14. 14

    절제가 여백을 만듭니다.

    더 그리고 싶은 충동을 참는 것. 그 절제가 여백이 된다.

  15. 15

    변시지의 황토빛 배경이 여백이다.

    책이 아니라 자연에서 배웠는다. 소나무에서, 파도에서, 까마귀의 침묵에서.

  16. 16

    비어 있어야 바람도 지난다.

    막힌 공간에는 바람이 못 온다. 여백이 있어야 흐름이 생긴다.

  17. 17

    침묵도 언어이다.

    말하지 않음이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할 때가 있다.

  18. 18

    여백이 기억 속에 더 오래 남는다.

    형상은 잊혀도 그 주변의 넓은 공간이 남는다. 여백의 지속력이다.

  19. 19

    더하지 않는 용기.

    더하고 싶을 때 더하지 않는 것. 그것이 예술가에게 가장 어려운 결정이다.

  20. 20

    여백이 있는 삶이 아름답다.

    빈 시간, 빈 공간, 빈 마음. 여백이 있어야 삶이 숨을 쉽니다.

  21. 21

    그리지 않은 것이 가장 솔직한다.

    과장하지 않고, 꾸미지 않고. 남겨 둔 것이 솔직함이다.

  22. 22

    여백이 있어야 소나무가 소나무이다.

    배경이 없으면 형상도 없다. 여백이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

  23. 23

    11월의 하늘이 넓다.

    단풍이 지고 나면 하늘이 더 보이다. 비워진 것들이 하늘을 드러냅니다.

  24. 24

    여백 속에서 형상이 숨 쉽니다.

    꽉 찬 공간에서는 숨을 쉴 수 없다. 여백이 형상에게 호흡을 줍니다.

  25. 25

    멈추는 것도 능력이다.

    계속할 줄 아는 것만큼 멈출 줄 아는 것도 중요한다. 여백이 그것이다.

  26. 26

    여백은 쉬는 자리이다.

    보는 눈도 쉬어야 한다. 여백이 눈에게 쉬는 공간을 줍니다.

  27. 27

    비워진 들판이 내년을 준비한다.

    비어 있음이 다음의 준비이다. 여백은 끝이 아니라 시작의 조건이다.

  28. 28

    남겨 두는 것의 아름다움.

    다 가지지 않는 것, 다 말하지 않는 것, 다 채우지 않는 것. 여백의 미학이다.

  29. 29

    이 달의 마지막 날, 여백 안에 섭니다.

    11월이 끝난다.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백 안에 한 달이 담겨 있다.

  30. 30

    여백이 있는 곳에 다음이 온다.

    채워져 있으면 더 올 수 없다. 비어 있어야 새로운 것이 찾아온다.

12월 · 유배와 축복

31일
  1. 1

    삶은 때로 유배처럼 느껴진다. 낯선 자리, 오래 견뎌야 하는 계절.

    그러나 어떤 사람은 바로 그 유배의 시간 속에서 자기의 선을 찾고 끝내 축복으로 남긴다.

  2. 2

    축복은 화려하게 오지 않는다. 오래 견딘 끝에 낮고 조용하게 남는다.

    그리고 그 남음이 한 사람의 삶을 끝내 빛나게 한다.

  3. 3

    고독을 지나 얻은 깊이가 있다.

    혼자였던 시간이 깊이가 된다. 외로움이 익어 지혜가 된다.

  4. 4

    멀리 돌아와서야 비로소 자기 자리에 닿는다.

    가장 먼 곳을 돌아온 사람이 자기 자리를 압니다. 귀향은 발견이다.

  5. 5

    상처를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빛이 있다.

    태풍도, 폭풍도 이 빛을 끄지 못했다. 그 빛이 예술이 되었다.

  6. 6

    12월의 제주가 가장 황토빛이다.

    나무가 앙상하고 들판이 비어 있을 때, 제주의 진짜 색이 드러난다.

  7. 7

    유배는 형벌이었지만 동시에 선물이었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에서 세한도를 그렸는다. 유배가 예술을 낳기도 한다.

  8. 8

    변시지에게 서귀포는 유배이자 고향이었다.

    스스로 선택한 유배. 그 고독이 1300점의 예술을 낳았다.

  9. 9

    겨울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

    비어 있음의 아름다움. 앙상함의 아름다움. 겨울이 가르치는 미학이다.

  10. 10

    고독이 만든 예술이 가장 오래 남는다.

    수많은 이들과 함께 만든 것보다, 혼자 오래 버틴 것이 더 깊다.

  11. 11

    한 해가 끝나간다.

    이 해에 있었던 일들이 정리된다. 무엇이 남았는지, 무엇을 남길 것인지.

  12. 12

    끝에서 새로운 시작이 보이다.

    12월 끝에 1월이 기다립니다.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다.

  13. 13

    겨울 바람이 다시 세진다.

    1월의 바람으로 돌아간다. 순환이 완성된다. 바람은 처음과 끝을 잇는다.

  14. 14

    유배지에서 찾은 자기.

    올라가는 것만이 예술이 아니다. 내려오는 것, 비우는 것, 그것도 예술이다.

  15. 15

    점 하나에 한 해가 담겨 있다.

    365개의 날이 하나의 점으로 모이다. 한 해가 한 점이 된다.

  16. 16

    겨울 들판에 홀로 선 사내.

    겨울 들판에 한 사내가 섭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도 서 있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유배와 축복의 차이이다.

  17. 17

    이 해에 버텨온 것들에 감사한다.

    무너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여기 있다. 그것이 작은 축복이다.

  18. 18

    풍토가 한 사람을 만들었다.

    제주의 바람, 고독, 바다, 태풍, 까마귀가 변시지를 만들었다.

  19. 19

    축복은 조용한다.

    떠들썩하게 오지 않는다. 오래 견딘 끝에 조용히, 낮게 찾아온다.

  20. 20

    남는 것이 결국 빛난다.

    사라진 것들이 많다. 그러나 남은 것들이 있다. 그 남음이 빛난다.

  21. 21

    이 일력을 함께 넘겼는다.

    365일을 함께 왔다. 바람도, 고독도, 선도, 풀도, 조랑말도 함께였다.

  22. 22

    한 해의 마지막 선을 긋는다.

    조용히, 떨리지 않게. 이 해의 마지막 붓질이다.

  23. 23

    겨울 제주의 적막이 깊다.

    사람이 줄고, 새도 줄고, 들판도 비어 있다. 그 적막이 섬의 본색이다.

  24. 24

    유배를 축복으로 바꾼 사람들이 있다.

    추사도, 변시지도, 그리고 자기 삶의 고독을 예술로 만든 모든 이들도.

  25. 25

    이 해에 그린 것들이 남는다.

    기억, 경험, 배움, 사랑. 한 해 동안 캔버스 위에 그어온 선들이 남는다.

  26. 26

    다음 해에도 바람은 불 것이다.

    1월이 오면 바람이 다시 시작된다. 순환이 계속된다.

  27. 27

    고독이 끝내 깊이가 되었다.

    처음에는 외로움이었다가, 시간이 지나 깊이가 된다. 변시지의 40년이 그 증거이다.

  28. 28

    이 달력을 덮으면 다시 1월이 기다립니다.

    끝과 시작이 이어진다. 바람의 일력은 끝나지 않는다.

  29. 29

    한 해의 점 하나를 찍는다.

    이 해가 하나의 붓질이었다. 그 끝에 점 하나를 찍는다.

  30. 30

    오래 견딘 끝에 낮고 조용하게 남는다. 그리고 그 남음이 한 사람의 삶을 끝내 빛나게 한다.

    이것이 12월의 결론이다. 유배가 끝내 축복이 된다. 오래 견딘 자만이 이 문장을 압니다.

  31. 31

    삶과 죽음은 결국 점 하나를 향해 가는 긴 붓질이다.

    365일이 하나의 붓질이었다. 그 끝에 점 하나. 그리고 다시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