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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 비평

광풍회(光風會)와 변시지

Byun Shi-Ji and the Kōfūkai
Byun Shi-Ji and the Kōfūkai

1. 광풍회란 무엇인가

1912년, 도쿄에서 결성된 서양화 단체다.

근대 일본 서양화의 문을 연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의 문하가 주축이었다.
밝은 자연광을 담는 외광파(外光派)의 화풍을 이었다.
격렬한 강령은 없었다. 온건한 사실주의, 절충적인 아카데미즘.
그 온건함이 오래 살아남는 힘이 되었다.

같은 해 6월, 우에노에서 제1회 광풍회전이 열렸다.
이후 매년 공모전이 이어졌고, 2014년에 제100회를 맞았다.

젊은 화가에게는 등용문이었고, 중견에게는 발표의 장이었다.
회원 다수가 문전(文展)·제전(帝展)·일전(日展)의 수상자나 심사위원이 되었다.


2. 조선인 화가들의 무대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다.
그러나 광풍회전에는 조선 출신 화가들이 꾸준히 출품했다.

김환기, 김인승, 김종하, 김형근, 김원. 이인성도 여기에 출품해 특선을 받았다.

식민지 조선의 최고 등용문이 조선미술전람회였다면,
일본 본토의 광풍회 공모전은 그보다 더 넓은 무대였다.
여기서 입상한다는 것은 일본 중앙 화단의 인정을 뜻했다.

근대 동아시아 미술은 국경 안에서만 흐르지 않았다.
사람과 그림이 바다를 건넜다.
그 왕래 속에 변시지가 있었다.


3. 1948년, 스물셋

연도회차결과
1947제33회입선
1948제34회최고상 · 최연소 수상

1948년, 그는 네 점을 출품했다.
그 가운데 〈베레모를 쓴 여인〉과 〈만돌린을 가진 여자〉가 있었다.

스물셋이었다.
광풍회전 역사에서 가장 어린 최고상 수상자로 기록되었다.

이듬해 그는 시세이도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4. 그 경험이 남긴 것

광풍회의 화면은 특정한 규범을 가지고 있었다.
부드러운 빛, 안정된 구도, 정확한 인체.
변시지는 그 규범을 완벽히 소화했다.
소화했기 때문에 상을 받았다.

이때 익힌 데생과 색채 운용은 평생 남았다.
훗날 제주의 바다를 몇 개의 선으로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 선이 어디서 끊겨야 하는지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

식민지에서 온 청년이 제국의 중앙 화단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그 사실이 그에게 준 것은 명예가 아니라 확신이었다.

자신의 감각을 믿어도 된다는 확신.
훗날 아무도 걷지 않은 길로 들어설 때, 그 확신이 발밑이 되었다.

그리고 균열

일본에서 아무리 인정받아도 그는 조선인이었다.
성공의 한복판에서 생긴 이 균열이 결국 그를 비행기에 태웠다.

1957년, 서울대학교의 초빙을 받아 귀국한다.
서른둘이었다. 일본에 남으라는 만류가 있었다.


5. 이후

서울에서 그는 인물화를 놓았다.
창덕궁 비원을 매일 드나들며 나무와 정자를 그렸다.
붓이 가늘어졌고, 관찰이 미시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1975년, 서울을 떠나 제주로 간다.
쉰 살이었다.

이 년쯤의 시행착오 끝에, 화면에 마른 풀잎색이 앉았다.
그 위에 먹빛 선이 얹혔다.

돌담, 초가, 조랑말, 까마귀, 수평선.
사실적 묘사가 아니라 몇 개의 형태로 환원된 것들.
바람에 흔들리는 대지는 짧고 빠른 붓질이 되고,
배 한 척은 몇 번의 굴곡으로 남았다.

그는 모두 것을 버리고 또 버렸다.


자료에 관하여

  • - 광풍회 연혁: 도쿄스테이션갤러리 「광풍회 100년」전 자료, 코토뱅크
  • - 변시지 수상 기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울아트가이드
  • - 제33·34회 광풍회 도록 실물 대조는 진행 중이다. 출품작 목록과 점수가 확정되면 본문을 갱신한다.

확인되지 않은 당대 평문의 직접인용은 본문에서 제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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