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 THE BYUN SHI-JI ATLAS
EN
차례로

서장 — 풍토가 형식을 낳을 때

1. 언덕

언덕 위에 노인이 서 있다.
말 한 마리가 곁에 있다.
바다는 멀고, 바람은 가깝다.

화면은 마른 풀잎색이다.
그 색 위로 검은 선 몇 개가 지나간다.
수평선 가까이 조각배가 떠 있다.

노인이 어디를 보는지는 알 수 없다.
고개가 조금 숙어 있다.
지팡이는 땅을 짚었다.

말은 고삐가 없다.
묶여 있지 않은데 떠나지 않는다.
사람과 짐승이 같은 바람을 맞고 서 있다.

까마귀 한 마리가 낮게 지나간다.
울음은 들리지 않는다.

화면에는 그려지지 않은 것이 더 많다.
구름이 없다.
집도 없고 길도 없다.

없는 것들이 화면을 넓게 만든다.

이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대개 같은 것을 묻는다.
저 색은 무엇인가.
왜 이렇게 비어 있는가.

나는 다른 것을 물으려 한다.

왜 이 그림은 여기에서만 나왔는가.

2. 물음

세상의 그림을 오래 보다 보면 한 가지가 걸린다.

어떤 그림은 어디에서 그려도 상관이 없다.
어떤 그림은 그 땅이 아니면 나오지 않는다.

기법의 문제가 아니다.
재능의 문제도 아니다.

터너의 빛은 잉글랜드의 습기에서 나왔다.
그 빛은 윤곽을 지운다.
공기에 물기가 많으면 멀리 있는 것의 경계가 풀린다.

레비탄의 지평선은 러시아의 넓이에서 나왔다.
땅이 끝없이 이어지는 곳에서는 하늘과 땅의 비율이 달라진다.
사람은 작아지고 선은 길어진다.

오키프의 뼈와 하늘은 뉴멕시코의 건조에서 나왔다.
습기가 없으면 색이 흐려지지 않는다.
윤곽도 칼처럼 남는다.

키퍼의 화면은 무겁다.
전쟁이 지나간 땅의 흙과 재가 그대로 올라와 있다.

셋슈의 여백은 비어 있지 않다.
안개가 많은 땅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도 실재한다.

팔대산인의 새는 종이 위에 거의 없다.
먹 몇 점으로 앉아 있다.
망국의 유민이 그린 여백이다.

타마요의 붉음은 어둡고 깊다.
멕시코의 흙과 볕이 그 안에 있다.

에밀리 카의 숲은 위로 솟는다.
비가 많은 해안의 침엽수림이 그렇게 자란다.

이것을 지역색이라 부르면 설명은 거기서 끝난다.
그러나 끝나지 않는다.

지역색은 소재의 문제다.
그 땅의 사물을 그렸다는 뜻이다.
야자수를 그리면 남국이고, 자작나무를 그리면 북국이다.

소재는 옮길 수 있다.
파리의 화실에서도 야자수를 그릴 수 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소재가 아니다.
형식이다.

붓이 화면에 닿는 각도.
선을 어디에서 끊는가.
무엇을 비워 두는가.
지평선을 어디에 놓는가.

이런 것들은 옮기기 어렵다.
그 땅에서 오래 산 사람의 몸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몸은 배워서 바뀌지 않는다.
견뎌서 바뀐다.

3. 풍토라는 말

풍토(風土, fūdo)는 일본의 철학자 와쓰지 데쓰로가 1935년에 낸 책의 제목이다.

그는 이 말을 기후나 지리로 쓰지 않았다.

기후는 밖에 있다.
온도와 습도로 잴 수 있다.
풍토는 그렇게 재지 못한다.

풍토는 사람이 자기를 발견하는 자리다.

추위 속에서 사람은 추위를 아는 자기를 발견한다.
바람 속에서 사람은 바람을 견디는 자기를 발견한다.

춥다고 느끼는 순간, 추위는 이미 밖에 있지 않다.
그 사람 안에 들어와 있다.

와쓰지는 세계를 세 갈래로 나누어 보았다.
비가 많고 습한 몬순.
마르고 뜨거운 사막.
온화하고 규칙적인 목장.

몬순의 사람은 견딘다.
자연이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니, 맞서기보다 받아들인다.

사막의 사람은 맞선다.
목장의 사람은 자연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는다.

이 구분을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다.
너무 단순하고, 시대의 한계도 있다.

다만 하나는 남는다.

땅이 사람의 태도를 만든다는 생각.
그리고 그 태도가 형태로 나온다는 생각.

하이데거는 다른 자리에서 비슷한 데에 닿았다.

그는 짓는 일과 사는 일을 나누지 않았다.
사람은 살기 위해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짓는 방식으로 산다고 했다.

다리를 하나 놓으면 강의 양쪽이 처음으로 이쪽과 저쪽이 된다.
없던 관계가 생긴다.
짓는 일이 사는 일을 바꾼다.

들뢰즈는 또 다른 말을 썼다.
영토화.

새는 노래로 제 자리를 표시한다.
그 노래가 있어서 그 자리가 영토가 된다.
예술도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세 사람의 말은 서로 다르다.
철학의 계보가 다르고 시대도 다르다.

그러나 한 방향을 가리킨다.

사람은 땅 위에 사는 것이 아니다.
땅과 함께 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밝혀 둔다.

일본 철학자의 개념으로 한국 화가를 읽는 일에는 조심할 것이 있다.
개념이 그림을 덮어서는 안 된다.

이 책은 풍토를 틀로 쓰지 않는다.
말로 쓴다.

그림이 먼저 있었다.
그것을 부를 말이 필요했을 뿐이다.
마땅한 말이 없어서 빌렸다.

빌린 말이니 언제든 내려놓을 수 있다.
그림은 남는다.

한국어에서 풍토는 흔히 분위기라는 뜻으로 쓰인다.
학문의 풍토가 어떻다고 할 때의 그 말이다.

이 책에서 쓰는 풍토는 그 말이 아니다.
사람이 자기를 발견하는 자리로서의 풍토다.

그래서 이 말을 지역주의로도, 지역색으로도 옮기지 않는다.
옮기는 순간 뜻이 좁아진다.

지역주의는 중심에 대한 변방의 주장이다.
풍토는 주장이 아니다.
조건이다.

4. 배경이 아니다

풍경화라는 말에는 함정이 있다.

배경이 먼저 있고 그 앞에 사람이 서 있다는 생각.
무대가 있고 그 위에서 연기가 벌어진다는 생각.

풍토는 무대가 아니다.

바람이 센 곳에서는 나무가 눕는다.
눕는 것이 나무의 형태다.
바람은 나무의 배경이 아니라 나무의 형식이다.

제주의 나무는 한쪽으로 자란다.
바람이 오는 쪽 가지가 자라지 못한다.
나무는 제 몸으로 바람의 방향을 기록한다.

집도 그렇다.
제주의 초가는 낮다.
지붕을 새끼줄로 묶어 눌러 놓았다.

돌담은 구멍이 많다.
빈틈으로 바람을 지나가게 한다.
막지 않고 통과시킨다.

견딤에는 두 방식이 있다.
버티는 것과 흘려보내는 것.
섬은 두 번째를 배웠다.

사람도 같다.
바람이 센 곳에서 오래 산 사람은 걸음이 다르다.
어깨가 다르고 고개의 각도가 다르다.

그림도 같다.

변시지의 화면에서 인물은 자주 휘어 있다.
등이 굽고 고개가 숙어 있다.

그것을 자세라고만 읽으면 절반이다.

그 휘어짐은 바람의 모양이다.
바람은 그려져 있지 않다.
사람의 몸이 바람의 자리를 대신한다.

배경이 형식으로 들어온 것이다.

휘어진 몸은 그의 그림에서 오래된 것이다.

1945년의 누드 습작에 이미 있다.
2013년의 마지막 그림에도 있다.
예순여덟 해 동안 같은 곡선이 이어졌다.

다만 뜻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노동의 몸이었다.
짐을 진 몸, 일하는 몸이 휘어 있었다.
도쿄 시절의 습작과 〈Femme〉이 그렇다.

서울에서는 지게꾼과 나무 패는 사람이 그 자리를 이었다.

제주에서는 마부와 해녀와 농사꾼이 되었다.

그리고 노인이 나타난다.

노인의 몸은 짐을 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휘어 있다.

견딤의 몸이다.

말년으로 갈수록 고개가 더 숙어진다.
그 숙임은 피로가 아니다.
예(禮)에 가깝다.

이것은 해석이다.
화백이 그렇게 말한 기록은 없다.

다만 그림이 예순여덟 해 동안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5. 풍토는 어디까지인가

여기서 범위를 정해야 한다.

풍토를 기후로만 보면 좁다.

비와 바람과 볕.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림이 있다.

폐허 위에서 자란 아이가 있다.

무너진 것이 정상인 세계에서 자라면 온전한 것을 나중에 배운다.

그 아이에게 폐허는 배경이 아니다.
처음 본 세계다.

바람은 자연이 만들고 폐허는 사람이 만든다.

그런데 아이에게는 구분이 없다.
둘 다 그냥 거기 있었다.

그러니 전쟁도 풍토가 된다.

한 세대가 그 위에서 나고 자라면 그렇게 된다.

하나를 더한다.

여러 문화가 지나간 자리도 풍토가 된다.

한 도시 안에 여러 시대의 건물이 있는 곳이 있다.
사람의 형상을 만들지 않는 장식과 성당의 조각이 나란히 있는 곳이 있다.

그런 땅에서 자란 사람의 몸에는 문법이 하나 이상 들어 있다.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냥 알게 된다.

그러면 이런 물음이 온다.

병도 풍토인가.
가족의 죽음도 풍토인가.

여기서 멈춰야 한다.

모든 것이 풍토가 되면 풍토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니 선을 긋는다.

풍토는 여럿이 함께 겪는 것이다.

바람은 섬사람 모두가 맞는다.
전쟁은 한 세대가 함께 지난다.

여럿이 같은 것을 겪으면 그 안에서 공통의 형식이 나온다.

한 사람이 겪은 것은 다르다.

어머니를 잃은 일은 그 집안의 일이다.
한 나라 사람 모두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풍토가 아니다.

전기(傳記)다.

풍토와 전기는 다르다.

이 구분이 이 책을 지킨다.

구분이 없으면 명제가 커지고, 커진 명제는 아무 데도 닿지 않는다.

이 넓힘은 제주를 읽을 때도 필요하다.

바람만으로는 다 읽히지 않는다.

섬에는 바람이 있었고 그리고 다른 것도 있었다.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여럿이 함께 겪은 일이다.

그러니 그것도 풍토다.

6. 왜 '낳다'인가

이 책의 제목에서 동사는 '낳다'이다.
'만들다'로 바꾸지 않는다.

만드는 일은 손이 한다.
낳는 일은 몸이 한다.

만드는 사람은 무엇을 만들지 미리 안다.
설계가 있고 도구가 있다.
완성되면 만든 사람과 만들어진 것이 분리된다.

낳는 사람은 모른다.
무엇이 나올지 알지 못한다.
낳은 뒤에도 온전히 떨어지지 않는다.

풍토가 형식을 만든다고 하면, 땅이 설계도를 쥐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지 않다.

땅은 설계하지 않는다.
다만 오래 견디게 한다.
견딘 몸에서 형태가 나온다.

낳는 일에는 시간이 든다.
아프기도 하다.
그리고 낳은 것은 낳은 사람을 닮되, 그 사람은 아니다.

여기에 하나가 더 있다.

만든 것은 다시 만들 수 있다.
낳은 것은 다시 낳지 못한다.

같은 풍토에서도 같은 그림은 두 번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은 풍토를 원인이라 부르지 않는다.
조건이라 부른다.

원인은 결과를 정한다.
조건은 가능하게 할 뿐이다.

'낳다'는 그 사이에 있는 말이다.
없는 데서 나오지 않았고, 정해진 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변시지는 제주를 그린 것이 아니다.
제주에서 오래 견딘 몸이 그린 것을, 우리가 제주라고 부르는 것이다.

7. 다섯 개의 문

이 책은 다섯 개의 문을 지난다.

색.

그 땅의 빛이 팔레트를 정한다.
습기가 많은 곳의 색과 마른 곳의 색은 다르다.

북쪽의 색은 낮고 회색으로 기운다.
남쪽의 색은 높고 원색으로 간다.

색은 취향이 아니다.
눈이 오래 본 것의 결과다.

색에는 시간이 들어 있다.
한 번 본 색은 아직 색이 아니다.
여러 해 같은 빛을 본 뒤에 남는 것이 색이다.

선.

그 땅의 바람과 지형이 붓의 속도를 정한다.

급한 선이 나오는 땅이 있다.
느린 선이 나오는 땅이 있다.

선은 손의 흔적이면서 시간의 흔적이다.
얼마나 오래 망설였는지가 선에 남는다.

여백.

무엇을 비워 두는가는 무엇을 그리는가보다 그 땅을 잘 말한다.

빈 곳은 없는 곳이 아니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의 자리다.
혹은 이미 떠난 것의 자리다.

여백이 넓은 그림은 대개 기다림이 긴 땅에서 나온다.

문법.

사물을 놓는 순서와 관계.

어디에 지평선을 두는가.
사람을 화면의 어디에 세우는가.
무엇을 크게 하고 무엇을 작게 하는가.

이것은 규칙이 아니라 습관이다.
그리고 습관은 땅에서 온다.

물질성.

무엇으로 그리는가.

흙과 재와 납.
짚과 돌과 얼음.

손에 잡히는 것들이 화면에 남긴 것.
재료는 그 땅에서 구한 것일 때가 많다.

무엇으로 그렸는지를 보면 어디에서 그렸는지가 보인다.
때로는 재료가 그림보다 오래 남는다.

이 다섯 문을 지나며 열여섯 사람의 화가를 부른다.

추사, 팔대산인, 셋슈, 반 고흐, 고갱, 피카소, 키퍼, 터너, 레비탄, 오키프, 타마요, 에밀리 카, 프레드 윌리엄스, 골즈워디, 카푸어, 뭉크.

누가 어느 문 앞에 서는지는 각 부의 첫머리에서 밝힌다.

그리고 종장에서 변시지에게 닿는다.

8. 반대 증인 셋

명제는 반증을 견뎌야 산다.

풍토가 형식을 낳는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보아야 한다.
이 책은 세 사람을 반대 증인으로 부른다.

추사.

그는 제주에서 여러 해를 유배로 보냈다.
그 세월에 글씨가 완성되었다.

그런데 그 글씨에 제주의 풍경은 없다.
바다도 바람도 들어오지 않는다.

몸은 섬에 있었고 눈은 옛 글자에 있었다.

풍토가 그를 단련했으나 그 형식을 낳지는 않았다.
정신이 풍토를 지나쳐 간 자리다.

뭉크.

그의 하늘은 붉다.

그러나 그 붉음은 노르웨이의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다.
안에서 밖으로 나갔다.

풍토가 형식을 낳은 것이 아니라 내면이 풍토를 물들였다.
방향이 반대다.

고갱.

그는 타히티로 갔다.
그 땅의 색과 몸을 그렸다.

그러나 끝내 그 땅에 속하지 않았다.
바라보는 사람의 자리에 남았다.

그의 화면에서 타히티는 견딘 곳이 아니라 찾아간 곳이다.
소속 없이 현존한 화가다.

세 사람은 이 책의 명제를 흔든다.
흔들어야 한다.

풍토가 모든 것을 낳지는 않는다.

정신이 풍토를 넘어설 때가 있다.
내면이 풍토를 덮을 때가 있다.
발이 땅에 닿지 않은 채 그릴 때가 있다.

다만 어떤 그림은 풍토 없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 차이를 보는 것이 이 책의 일이다.

9. 나란히 놓는다

이 책은 순위를 매기지 않는다.

변시지를 세계의 화가들과 견주어 높이려는 책이 아니다.
같은 높이에 놓고 나란히 보려는 책이다.

터너가 앞이고 변시지가 뒤인 것이 아니다.
키퍼가 크고 변시지가 작은 것이 아니다.

각자 자기 땅에서 자기 형식을 낳았다.
그 일들을 한자리에 모아 보는 것이 다르게 읽는 방법이다.

비교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저울에 올리는 비교다.
어느 쪽이 무거운지를 묻는다.

다른 하나는 나란히 놓는 비교다.
둘 사이에 무엇이 오가는지를 본다.

이 책은 뒤쪽을 택한다.

나란히 놓으면 두 사람이 다 잘 보인다.
저울에 올리면 둘 다 흐려진다.

무게를 다투는 동안 그림은 뒤로 물러난다.

한국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색화는 진정한 성취다.
그 자리는 그 자리대로 온전하다.
반복과 절제로 도달한 곳이 있다.

변시지는 그 성취의 경쟁자가 아니다.
또 하나의 뿌리다.

뿌리는 서로 다투지 않는다.
각자 제 방향으로 내려간다.
땅속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같은 나무를 세운다.

10. 풍토는 운명이 아니다

풍토를 말할 때 조심해야 할 곳이 있다.

땅이 사람을 정한다는 말은 쉽게 다른 말로 바뀐다.
어떤 민족은 이렇고 어떤 민족은 저렇다는 말.

와쓰지의 책에도 그런 대목이 있다.
1930년대의 글이었고 시대의 한계가 있었다.

이 책은 그 길로 가지 않는다.

풍토는 집단의 성격이 아니다.
한 사람의 몸에 남은 자리다.

제주에서 산 화가가 모두 같은 그림을 그리지는 않는다.
같은 바람을 맞고도 다른 선이 나온다.

풍토는 답을 주지 않는다.
물음을 준다.

운명이라면 예술이 필요하지 않다.
정해진 것을 확인하는 일에 평생을 걸 사람은 없다.

변시지는 제주에 갔다.
간 것만으로 그림이 바뀌지는 않았다.
색은 나중에 왔다.

찾았다는 것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풍토는 조건이고, 형식은 선택이다.
조건 없이 선택은 없고, 선택 없이 형식은 없다.

이 책은 그 두 자리를 함께 본다.

11. 1975년, 서울에서 제주로

변시지는 1926년 서귀포 서홍동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에 오사카로 갔다.

일본에서 자랐고 일본에서 그림을 배웠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오사카미술학교에 다녔다.
데라우치 만지로에게 배웠다.

전쟁 중이었다.
그가 청년기를 어떻게 보냈는지는 구술에 남아 있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구술사, 2004–2005, 27–30쪽)

1947년 〈Femme〉으로 일전(日展)에 입선했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이었다.

이듬해 제34회 광풍회전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스물두 살이었다.

1949년에는 시세이도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일본에서 그는 이미 화가였다.
그대로 있었다면 다른 삶이 있었을 것이다.

1957년 11월 15일에 돌아왔다.

서울에서 살았다.
마포고등학교와 서라벌예술대학에서 가르쳤다.
1964년부터 비원을 오래 그렸다.

비원의 그림은 단정하다.
고궁의 나무와 담과 물이 차분한 색으로 놓여 있다.

담장 안의 풍경이다.
바람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그는 이 연작을 십 년 넘게 이어갔다.

가르치고 그렸다.
서울에서의 삶은 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담장 안이었다.

그리고 1975년, 서울을 떠나 제주로 갔다.
제주대학교에 부임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둔다.

일본에서 곧장 제주로 간 것이 아니다.
오사카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다시 제주로 갔다.

두 번의 이동이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동이 그의 형식을 바꾸었다.

마흔아홉이었다.
다섯 살에 떠난 섬으로 마흔네 해 만에 돌아온 것이다.

돌아온 그를 섬이 반긴 것은 아니다.
바람이 있었고 볕이 셌고 겨울이 길었다.

서울에서 쓰던 색은 섬에서 맞지 않았다.
습기가 다르고 볕이 다르고 바람이 달랐다.

그런데 색이 바뀌었다.

그는 훗날 구술에서 그 색을 어떻게 찾았는지 말했다.
(같은 기록, 293–294쪽)

그 색을 우리는 마른 풀잎색이라 부른다.

황토색이 아니다.
노란색도 아니다.
바람에 오래 마른 풀의 색이다.

여름의 초록이 아니라 겨울을 지난 풀의 색이다.
죽은 색이 아니라 견딘 색이다.

같은 구술에서 그는 폭풍에 대해서도 말했다.
폭풍은 날씨가 아니라 저항이라고 했다.
(같은 기록, 171쪽)

그림 속의 바람은 그러니까 기상이 아니다.
견딤의 이름이다.

그는 자신을 풍운아(風雲兒)라 불렀다.
아호는 우성(宇城)이었다.

1991년에 제주대학교에서 정년을 맞았다.
2013년 6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2016년에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남긴 그림은 W001부터 W110까지 정리되어 있다.

12. 남는 것

다시 그 언덕으로 돌아간다.

노인은 여전히 서 있다.
말은 곁에 있다.
수평선 가까이 조각배가 떠 있다.

배는 떠나는 중인지 돌아오는 중인지 알 수 없다.
그림은 말하지 않는다.

제주에는 이어도라는 섬의 이야기가 있다.
바다 어딘가에 있다는 섬이다.
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화백은 이어도에 관한 글을 손으로 남겼다.
(같은 기록, 23–26쪽)

섬은 오래전 많은 사람을 잃은 적이 있다.
그 일을 4·3이라 부른다.
그는 구술에서 그 시절을 말했다.
(같은 기록, 241–243쪽)

떠나는 배는 전설에 닿아 있고, 동시에 그 애도에 닿아 있다.

노인의 고개는 숙어 있다.
슬퍼서가 아니다.
돌아오지 않은 이들에게 갖추는 예(禮)다.

이것도 해석이다.
다만 그림 앞에 오래 서 있으면 그렇게 읽힌다.

이 책은 그 자세를 세계의 여러 언덕 위에서 다시 찾아보려 한다.

잉글랜드의 습한 빛 아래에서.
러시아의 긴 지평선 위에서.
뉴멕시코의 마른 하늘 아래에서.

땅은 다르고 색도 다르다.
그러나 오래 견딘 몸이 형태를 낳는다는 점은 같다.

이 책은 답을 내려놓지 않는다.
다만 열여섯 개의 언덕을 지난다.

언덕마다 한 사람이 서 있다.
그가 무엇을 견뎠는지 보고,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왔는지 본다.

그리고 마지막 언덕에서 이 노인을 다시 만난다.

그는 제주를 설명하지 않았다.
오래 바라보았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선 하나를 그었다.

그 선이 어떻게 나왔는지를 보는 일.

이 책은 거기서 시작한다.

제1부

들어가며

첫 번째 문이다.

색은 가장 먼저 온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제목을 읽기 전에 색을 본다.
무엇을 그렸는지 알기 전에 이미 색이 눈에 들어와 있다.

그런데 색은 가장 늦게 이해된다.

형태는 말로 옮길 수 있다.
언덕이 있고 사람이 서 있다고 하면 대충 전해진다.

색은 옮겨지지 않는다.

붉다고 말해도 어떤 붉음인지 전해지지 않는다.
어두운 붉음이라고 덧붙여도 마찬가지다.

색에는 이름이 부족하다.

우리가 가진 색 이름은 몇십 개다.
눈이 구별하는 색은 그보다 훨씬 많다.

그래서 화가들은 색에 다른 이름을 붙인다.
그 땅의 것에서 가져온다.

흙색.
하늘색.
풀색.

이름이 사물에서 온다는 것은 색이 사물에서 왔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물은 그 땅에 있다.

이 문 앞에 세 사람이 선다.

타마요의 색은 흙에서 올라왔다.
오키프의 색은 마른 공기에서 왔다.
뭉크의 색은 안에서 나왔다.

앞의 둘은 땅에서 왔고 마지막 하나는 땅에서 오지 않았다.

그래서 뭉크가 이 부의 반대 증인이다.

명제를 세우기 전에 반증을 하나 옆에 두는 것이다.
색이 반드시 땅에서 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떤 색은 땅 없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 차이를 이 부에서 본다.

제1장 — 타마요, 흙에서 올라온 붉음

하나

붉다.

그런데 원색이 아니다.

빨강이라고 부르기에는 흐리고, 갈색이라고 부르기에는 붉다.
그 사이에 있다.

무엇을 섞었는지 알 수 없다.
회색이 섞인 것 같기도 하고 흙이 섞인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색에는 이름이 없다.

화면 가운데에 사람이 하나 있다.
서 있는지 앉아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몸의 윤곽이 단순하다.
어깨와 머리와 팔.

세부가 없다.
눈이 있을 자리에 점이 하나씩 있다.

배경은 색만 있다.
방인지 밖인지 알 수 없다.

깊이가 없다.
멀고 가까움이 색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앞에 있는 것과 뒤에 있는 것이 같은 평면에 놓여 있다.

그런데 답답하지 않다.

색이 두껍기 때문이다.
얇게 칠한 색은 종이처럼 느껴지지만, 두껍게 올린 색은 벽처럼 느껴진다.

벽에는 깊이가 없어도 무게가 있다.

가까이 가면 표면이 거칠다.
매끄럽게 갈지 않았다.

붓 자리와 긁힌 자리가 남아 있다.

멀리서 보면 색 하나로 보이던 자리가 여러 색으로 갈린다.

붉음 아래에 다른 색이 있다.
그 색이 사이사이로 올라온다.

색을 섞어 만든 것이 아니라 색을 겹쳐 만든 것이다.

루피노 타마요는 1899년에 멕시코 남부에서 태어났다.

오악사카였다.

원주민 계통의 집안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었고 친척 손에 자랐다.

멕시코시티로 옮겨 갔다.

집에서 과일을 팔았다.
그는 시장에서 일했다.

과일이 쌓인 곳에서 소년기를 보낸 것이다.

훗날 그의 화면에 과일이 자주 나온다.
수박과 참외 같은 것들.

그 색을 그는 손으로 먼저 알았다.
그림으로 배운 색이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보아야 한다.

시장의 색은 정돈되어 있지 않다.

익은 것과 덜 익은 것이 섞여 있다.
상한 자리도 있다.

깨끗한 원색은 시장에 없다.

그가 익힌 색은 그런 색이었다.

그가 젊었을 때 멕시코 미술에는 큰 흐름이 있었다.

벽화였다.

리베라와 오로스코와 시케이로스.
세 사람이 큰 벽에 역사와 민중을 그렸다.

혁명 뒤의 나라에서 그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글을 못 읽는 사람도 벽화는 볼 수 있었다.

진정한 성취였다.

그런데 타마요는 그 길로 가지 않았다.

그는 벽에도 그렸지만 벽화운동의 방식과는 달랐다.
이야기를 앞세우지 않았다.

색과 형태를 앞세웠다.

이 선택으로 그는 오래 외로웠다.

멕시코 안에서 그는 주류가 아니었다.
비판도 받았다.

여기서 조심할 것이 있다.

벽화 3인이 낮고 타마요가 높은 것이 아니다.
반대도 아니다.

두 길이 있었다.

한쪽은 그림으로 말하려 했고 다른 쪽은 그림으로 보게 하려 했다.

말하는 그림은 번역된다.
보게 하는 그림은 번역되지 않는다.

번역되지 않는 쪽을 택하면 멀리 가기 어렵다.
그러나 남는 것이 다르다.

그는 뉴욕으로 갔고 나중에 파리에서 오래 살았다.

멕시코를 떠나 있는 동안에도 색은 바뀌지 않았다.

파리의 빛으로 그리지 않았다.
오악사카의 빛으로 계속 그렸다.

몸은 떠났고 눈은 떠나지 않았다.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타마요의 색은 멕시코의 색이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아는 멕시코의 색이 아니다.

멕시코라고 하면 강한 원색을 떠올린다.
붉은 벽과 노란 벽, 선명한 직물.

관광 사진의 색이다.

타마요의 색은 그렇지 않다.
탁하다.

왜 그런가.

오악사카의 땅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곳은 마르고 붉다.
흙에 철이 많으면 붉어진다.

그 흙으로 구운 도자기가 있다.
검은 것도 있고 붉은 것도 있다.

가마에서 나온 색은 원색이 될 수 없다.
불이 색을 바꾸기 때문이다.

직물의 색도 그렇다.

식물과 벌레에서 뽑은 물감은 화학 물감처럼 선명하지 않다.
빨아 쓰면 조금씩 빠진다.

빠진 색이 그 땅의 색이다.

여기서 이 부의 물음에 첫 대답이 나온다.

색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 땅의 사물에서 온다.
그리고 사물의 색은 시간을 지나온 색이다.

새 물감의 색이 아니라 쓰인 물감의 색이다.

이렇게 보면 세 가지가 따라온다.

첫째, 탁함은 부족이 아니다.

색을 흐리게 하는 것은 실패로 보이기 쉽다.
더 선명하게 못 한 결과처럼 보인다.

그러나 흙이 섞인 색은 흙이 섞인 만큼 정확하다.

그 땅에 순수한 색이 없으면 순수한 색이 거짓이 된다.

둘째, 색이 평면을 만든다.

깊이는 대개 색으로 만든다.
먼 것은 흐리게 하고 가까운 것은 진하게 한다.

공기에 습기가 있으면 실제로 그렇게 보인다.

마른 땅에서는 그렇지 않다.
먼 것도 선명하다.

그러면 색으로 거리를 만들 수 없다.

화면이 평면이 된다.

타마요의 화면에 깊이가 없는 것은 서양 근대 회화의 평면화 때문만이 아니다.
그가 본 땅이 그랬기 때문이기도 하다.

셋째, 색이 두께를 요구한다.

깊이를 못 만들면 무게로 대신한다.

얇은 색은 평면에서 가벼워진다.
두꺼운 색은 평면에서도 무겁다.

그래서 그는 색을 쌓았다.

훗날 그는 요철이 있는 판화 기법을 만드는 일에도 참여했다.
평평한 종이에 두께를 만드는 방법이었다.

평면에서 무게를 얻으려는 일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두 사람의 색을 나란히 놓으면 닮은 것이 먼저 보인다.

둘 다 원색을 쓰지 않았다.
둘 다 흙이 섞인 색을 썼다.

타마요의 붉음에 이름이 없듯 마른 풀잎색에도 마땅한 이름이 없다.

황토색이 아니다.
노란색도 아니다.

바람에 오래 마른 풀의 색이다.

이름을 새로 지어야 하는 색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은 같은 자리에 있다.

이름 없는 색은 그 땅에서만 만들어진다.
이름이 있는 색은 어디서나 살 수 있다.

닮은 것이 하나 더 있다.

두 사람 다 당대의 큰 흐름 옆에 서 있었다.

타마요의 시대에 멕시코에는 벽화가 있었다.
변시지의 시대에 한국에는 다른 길들이 있었다.

단색화가 그중 하나다.

반복과 절제로 도달한 진정한 성취다.
그 자리는 그 자리대로 온전하다.

변시지는 그 성취의 경쟁자가 아니었다.
다른 방향으로 간 사람이었다.

두 사람 다 주류의 반대편에 선 것이 아니다.
주류가 가지 않은 쪽으로 간 것이다.

반대와 다름은 다르다.

이제 차이를 보자.

방향이 반대다.

타마요는 떠나서 그 색을 지켰다.
파리에서도 오악사카의 색으로 그렸다.

변시지는 돌아와서 그 색을 찾았다.
서울에서는 없던 색이 제주에서 나왔다.

한쪽은 가지고 나갔고 다른 쪽은 가서 얻었다.

이 차이는 생애의 모양에서 나온다.

타마요는 그 땅에서 태어나 그 땅에서 자랐다.
색이 이미 몸에 있었다.

변시지는 다섯 살에 섬을 떠났다.
색이 몸에 없었다.

그는 오사카에서 배웠고 서울에서 그렸다.
비원을 십 년 넘게 그렸다.

그 시기의 색은 단정하고 차분하다.

마흔아홉에 제주로 갔다.
그리고 색이 바뀌었다.

그는 훗날 구술에서 그 색을 어떻게 찾았는지 말했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구술사, 2004–2005, 293–294쪽)

찾았다는 말이 중요하다.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다.
찾은 것이다.

또 하나의 차이가 있다.

타마요의 화면에는 과일이 있다.
익은 것, 자른 것, 씨가 보이는 것.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변시지의 화면에는 먹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마른 풀과 돌과 바다.
그리고 노인.

수박을 자르면 붉은 속이 나온다.
마른 풀을 갈라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한쪽의 땅은 준다.
다른 쪽의 땅은 견디게 한다.

같은 흙빛인데 뜻이 다르다.

오악사카의 붉음은 익은 색이다.
제주의 마른 풀잎색은 지나간 색이다.

익은 색에는 다음이 있다.
지나간 색에는 다음이 없다.

그래서 타마요의 화면은 무겁지만 어둡지 않고, 변시지의 화면은 가볍지만 어둡다.

다섯

시장에서 과일은 팔리거나 상한다.

팔리면 없어지고 상하면 색이 변한다.
어느 쪽이든 그 색으로 오래 있지 않는다.

타마요는 그 짧은 색을 오래 남는 것으로 옮겼다.

섬에서 풀은 마르고 흩어진다.
겨울이 지나면 자리도 남지 않는다.

변시지는 그 짧은 색을 오래 남는 것으로 옮겼다.

두 사람이 한 일이 같다.

없어지는 색을 없어지지 않게 하는 일.

붉음이 아직 화면에 있다.
이름은 아직 없다.

제2장 — 오키프, 마른 공기의 윤곽

하나

뼈 하나가 화면을 다 채운다.

골반뼈다.
소의 것이다.

가운데에 구멍이 있다.
뼈에 원래 있는 구멍이다.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인다.
파랗다.

아주 파랗다.
탁한 데가 없다.

뼈는 흰색이다.
그런데 흰색만은 아니다.

푸른 기가 도는 자리가 있고 누런 기가 도는 자리가 있다.
빛이 닿는 각도에 따라 다르다.

배경이 없다.

땅도 없고 지평선도 없다.
뼈와 하늘뿐이다.

크다.

실제 뼈보다 훨씬 크다.
사람 상반신만 하다.

크기의 기준이 없으니 얼마나 큰지 알 수 없다.
뼈가 산처럼 보이기도 한다.

윤곽이 선명하다.

흐린 자리가 없다.
뼈와 하늘이 만나는 선이 칼처럼 서 있다.

앞 장에서 본 화면과 반대다.

타마요의 표면은 거칠었다.
이 표면은 매끄럽다.

붓 자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색이 면으로 고르게 놓여 있다.

가까이 가도 표면이 달라지지 않는다.
멀리서 본 것과 가까이서 본 것이 같다.

숨긴 것이 없는 화면이다.

조지아 오키프는 1887년에 미국 위스콘신에서 태어났다.

농장이었다.

시카고와 뉴욕에서 그림을 배웠다.
한동안 학교에서 가르쳤다.

텍사스에서 가르친 때가 있었다.

평원이었다.
아무것도 가리지 않는 땅이었다.

그때 넓은 땅을 처음 알았다.

뉴욕으로 돌아와 이름을 얻었다.

꽃을 크게 그렸다.

작은 꽃을 화면 가득 채웠다.
사람들이 꽃을 지나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크게 만들면 보게 된다.

도시의 건물도 그렸다.

성공한 화가였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이 있다.

크게 그리는 방법을 그녀는 도시에서 익혔다.
사막에 가기 전이었다.

그런데 사막에서 그 방법이 땅과 맞았다.

배경을 지우고 하나를 크게 놓는 방식.
그것이 바로 그 땅이 보이는 방식이었다.

방법이 먼저 있었고 땅이 그것을 옳게 만들었다.

풍토는 형식을 낳기도 하고, 이미 있던 형식을 제자리에 놓아 주기도 한다.

1929년에 처음 뉴멕시코에 갔다.
마흔한 살이었다.

그리고 매년 여름마다 갔다.

1940년에 사막의 목장에 집을 얻었다.
몇 해 뒤 근처에 또 하나를 얻었다.

1949년에 완전히 옮겼다.
예순두 살이었다.

늦은 이주다.

이미 이름이 있었고 이미 방식이 있었다.
바꿀 이유가 없는 나이였다.

그런데 바꾸었다.

창밖에 산이 하나 보였다.
평평한 정수리를 가진 산이다.

그 산을 오래 그렸다.

여러 번 그렸고 여러 계절에 그렸다.

사막에서 뼈를 주워 왔다.

소의 두개골, 골반뼈, 척추뼈.
모아서 집에 두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죽음의 상징으로 읽었다.
사막과 뼈와 해골.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뼈를 남은 것으로 보았다.
살이 없어진 뒤에도 형태가 있는 것.

살은 썩고 뼈는 남는다.

그 남음이 그의 관심이었다.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건조가 윤곽을 낳는다.

공기에 물기가 있으면 멀리 있는 것이 흐려진다.
경계가 풀리고 색이 옅어진다.

그림에서 이것을 이용한다.
먼 것은 흐리게, 가까운 것은 진하게.

그러면 평면에 깊이가 생긴다.

사막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공기가 맑으면 먼 산도 선명하다.
십 리 밖의 바위도 윤곽이 보인다.

그러면 흐림으로 거리를 만들 수 없다.

여기서 앞 장과 같은 지점에 이른다.

타마요의 화면에도 깊이가 없었다.
오키프의 화면에도 깊이가 없다.

두 땅이 다 마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다음이 다르다.

타마요는 평면에서 무게를 얻었다.
색을 쌓아 벽처럼 만들었다.

오키프는 평면에서 윤곽을 얻었다.
색을 면으로 나누어 경계를 세웠다.

같은 조건에서 두 답이 나온 것이다.

여기서 네 가지가 따라온다.

첫째, 색이 면으로 나뉜다.

윤곽이 분명하면 색도 구역을 갖는다.

이쪽은 흰색이고 저쪽은 파란색이다.
섞이는 자리가 좁다.

색이 서로 스미지 않는다.

습한 곳의 색은 스민다.
마른 곳의 색은 서로 부딪친다.

둘째, 그림자를 그릴 이유가 줄어든다.

부드러운 그림자는 공기가 만든다.
빛이 물기에 부딪쳐 흩어지면 그림자의 경계가 풀린다.

맑은 공기에서는 그림자의 경계가 칼처럼 선다.

경계가 선명한 그림자는 형태에 가깝다.
그러면 그림자를 따로 그리는 대신 형태를 하나 더 그리게 된다.

그녀의 화면에 부드러운 음영이 적은 것은 솜씨의 문제가 아니다.
본 것이 그랬기 때문이다.

셋째, 크기의 기준이 사라진다.

배경이 없으면 무엇과 비교할 수 없다.

뼈가 손바닥만 한지 집만 한지 알 수 없다.

사막은 실제로 그렇다.

기준이 될 것이 없다.
나무도 없고 집도 없고 사람도 없다.

먼 바위가 큰 것인지 가까운 돌이 작은 것인지 헷갈린다.

마른 땅은 크기의 기준을 지운다.

그래서 그녀는 뼈를 산만큼 크게 그릴 수 있었다.
땅이 먼저 그것을 허락했다.

넷째, 하늘이 물체가 된다.

습한 곳의 하늘은 공기다.
멀고 옅고 경계가 없다.

마른 곳의 하늘은 면이다.
색이 고르고 끝이 분명하다.

뼈의 구멍에 들어온 파랑은 공기처럼 보이지 않는다.
푸른 종이를 붙인 것처럼 보인다.

하늘이 배경이 아니라 형태가 된 것이다.

그러면 하늘과 뼈가 같은 자격으로 놓인다.
어느 쪽이 앞이고 어느 쪽이 뒤인지 정해지지 않는다.

마른 땅은 위아래를 지운다.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먼저 닮은 것을 본다.

두 사람 다 늦게 그 땅에 갔다.

오키프는 마흔한 살에 처음 갔고 예순두 살에 옮겼다.
변시지는 마흔아홉에 갔다.

둘 다 이미 화가였다.
배울 나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땅에서 형식이 바뀌었다.

늦게 가는 일에는 다른 힘이 있다.

젊어서 간 사람은 그 땅을 배운다.
늦게 간 사람은 그 땅에 놀란다.

놀람이 형식을 바꾼다.

닮은 것이 하나 더 있다.

둘 다 마른 것을 그렸다.

오키프는 뼈를 그렸다.
변시지는 마른 풀을 그렸다.

그런데 마름의 종류가 다르다.

뼈의 마름은 살이 없어진 마름이다.
남는 마름이다.

풀의 마름은 계절이 지난 마름이다.
흩어지는 마름이다.

뼈는 백 년을 남는다.
마른 풀은 한 겨울을 못 넘긴다.

그래서 오키프의 화면에는 견고한 것이 있고, 변시지의 화면에는 사라질 것이 있다.

이제 차이를 보자.

가장 큰 차이는 공기다.

두 땅이 다 마르다.
그런데 공기의 투명도가 반대다.

사막은 마르고 맑다.
바람이 없으면 먼지가 가라앉는다.

제주는 마르지 않다.
바다가 옆에 있으니 습하다.
그런데 바람이 세서 마르게 한다.

젖은 공기와 마르는 바람이 함께 있는 것이다.

바람은 먼지와 물기를 들어 올린다.
그러면 공기가 흐려진다.

같은 마름인데 하나는 맑고 하나는 흐리다.

그래서 여백의 밝기가 다르다.

오키프의 빈 화면은 밝다.
파란 하늘이 그대로 있다.

변시지의 빈 화면은 낮다.
색이 가라앉아 있다.

건조한 곳의 여백은 밝고, 바람 부는 곳의 여백은 흐리다.

윤곽도 다르다.

오키프의 윤곽은 매끄럽다.
한 번에 그은 선처럼 보인다.

변시지의 선은 떨린다.
곧게 가다가 흔들린다.

맑은 공기의 윤곽과 바람 속의 윤곽이 그렇게 다르다.

가장 큰 차이가 하나 더 있다.

오키프는 사람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뼈와 산과 꽃과 하늘.
사람이 없다.

변시지는 거의 언제나 사람을 그렸다.

노인 하나가 서 있다.

마른 땅에 사람이 없으면 뼈가 주인공이 된다.
사람이 있으면 노인이 주인공이 된다.

그런데 둘은 닮아 있다.

뼈는 남은 몸이다.
노인은 남은 사람이다.

둘 다 남은 것이다.

한쪽은 사람이 없어진 뒤에 남은 것을 그렸고, 다른 쪽은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을 그렸다.

무엇을 오래 그렸는지도 다르다.

오키프는 산을 오래 그렸다.
창밖의 그 산을 여러 번 그렸다.

변시지는 수평선을 오래 그렸다.

산은 있는 것이다.
가서 만질 수 있다.

수평선은 없는 것이다.
가까이 가면 사라진다.

물체를 오래 본 사람과 경계를 오래 본 사람.

그 차이가 화면에 남았다.

다섯

뼈의 구멍으로 하늘이 보인다.

구멍은 뼈가 아닌 자리다.
없는 자리다.

그 없는 자리로 무엇이 보인다.

섬의 화면에서는 여백으로 바람이 보인다.

바람은 그려져 있지 않다.
그리지 않은 자리에서 보인다.

두 사람 다 없는 것을 통해 보게 했다.

하늘은 아직 파랗다.
구멍은 아직 비어 있다.

제3장 — 뭉크, 안에서 나온 붉음

하나

하늘이 붉다.

노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붉다.
피에 가깝다.

붉음이 띠처럼 누워 있다.
가로로 길게 몇 겹이다.

그 사이에 노란 띠가 섞여 있다.

아래쪽은 파랗고 검다.
물이다. 만이다.

앞에 다리가 있다.
난간이 비스듬히 뻗어 화면 밖으로 나간다.

그 선이 급하다.
곧게 가지 않고 화면을 가른다.

다리 위에 사람이 있다.

얼굴이 사람 얼굴이 아니다.
뼈만 남은 것 같기도 하고 벗겨진 것 같기도 하다.

두 손을 뺨에 대고 있다.

입이 벌어져 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멀리 두 사람이 서 있다.
검은 형체다. 등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이쪽을 보지 않는다.

화면의 모든 선이 흐른다.

하늘의 띠도 흐르고 물의 선도 흐르고 사람의 몸도 흐른다.
다리의 난간만 곧다.

곧은 것 하나와 흐르는 것 전부가 부딪친다.

색을 보자.

붉음이 얇다.
앞의 두 장과 다르다.

타마요는 색을 쌓았고 오키프는 색을 면으로 놓았다.
여기서는 색이 흘러 있다.

칠한 것이 아니라 문지른 것처럼 보인다.

에드바르 뭉크는 1863년에 노르웨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였다.
믿음이 엄한 집이었다.

다섯 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결핵이었다.

열세 살에 누나가 세상을 떠났다.
같은 병이었다.

집 안에 병이 오래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병을 보았다.
누워 있는 사람과 앉아서 지켜보는 사람.

그림을 시작한 뒤에도 그 방을 여러 번 그렸다.

침대와 창과 앉아 있는 사람.

같은 장면을 평생 다시 그렸다.

그는 여러 나라를 오래 다녔다.

파리와 베를린에서 지냈다.
그곳에서 새 그림을 보았고 논쟁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한동안 몸과 마음이 무너졌다.
요양을 받았다.

그 뒤 노르웨이로 돌아와 오래 살았다.

오슬로 근처에 집이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가 놀랍다.

그는 그림을 밖에 내놓았다.

마당에 세워 두고 비를 맞혔다.
눈도 맞혔다.

일부러 그랬다.

그는 그것을 거친 처방이라 불렀다.

캔버스가 상하고 물감이 벗겨졌다.
그래도 계속했다.

그림이 날씨를 견디고 나면 무언가 달라진다고 여겼다.

이 이야기를 이 책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풍토가 그림에 직접 닿은 사례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비가 화면에 떨어졌다.

그런데 무엇이 달라졌는가.

표면이 달라졌다.
물감이 상하고 결이 생겼다.

색은 달라지지 않았다.

풍토가 그의 표면을 만졌지만 그의 색을 만들지는 않았다.

이것이 이 장의 핵심이다.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뭉크의 색은 땅에서 오지 않았다.

노르웨이의 겨울은 길다.
해가 낮고 낮이 짧다.

그 땅의 빛은 회색과 청색으로 기운다.

그런데 그의 화면은 붉다.

붉음이 그 땅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노을은 어디에나 있다.

여기서 알아 둘 것이 있다.

「절규」의 붉은 하늘을 두고 한 가설이 있다.

1883년에 인도네시아에서 큰 화산이 터졌다.
그 재가 대기를 돌아 여러 해 동안 세계의 노을을 붉게 만들었다.

그때 유럽의 하늘이 실제로 이상하게 붉었다는 기록이 있다.

뭉크가 그 하늘을 보았을 수 있다는 가설이다.

흥미로운 이야기다.
그리고 이 책의 명제에는 오히려 유리한 이야기다.

풍토가 색을 낳았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가설은 가설이다.
확정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같은 하늘을 본 사람이 수십만 명이었다.
그 하늘을 그린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게 그린 사람은 그뿐이다.

그가 남긴 글에서 그는 그 하늘을 날씨로 말하지 않았다.

길을 걷다가 멈춰 섰고, 하늘이 붉어졌고, 자연을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고 썼다.

날씨의 기록이 아니다.
몸의 기록이다.

그러니까 붉음은 밖에서 왔더라도 안에서 다시 만들어졌다.

방향이 반대인 것이다.

앞의 두 화가는 땅에서 색을 받았다.

타마요는 흙의 붉음을 받았다.
오키프는 마른 공기의 파랑을 받았다.

뭉크는 색을 안에서 밀어냈다.

여기서 두 가지가 따라온다.

첫째, 색이 형태를 따라가지 않는다.

오키프의 색은 형태에 붙어 있었다.
뼈는 흰색이고 하늘은 파란색이다.

뭉크의 색은 형태를 떠난다.

하늘이 붉을 이유가 화면 안에 없다.
설명이 없다.

색이 사물의 속성이 아니라 상태의 이름이 된다.

둘째, 색이 소리를 낸다.

「절규」에서 소리는 그려질 수 없다.
그런데 화면이 시끄럽다.

붉음이 소리를 대신한다.

색이 감각의 자리를 옮긴 것이다.
눈으로 듣게 만들었다.

이것은 큰 발명이다.

그리고 이것은 풍토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다.

여기서 서장의 구분을 다시 가져와야 한다.

풍토는 여럿이 함께 겪는 것이다.

바람은 섬사람 모두가 맞는다.
전쟁은 한 세대가 함께 지난다.

그래서 그 안에서 공통의 형식이 나온다.

뭉크의 상실은 한 집안의 것이었다.

어머니와 누나를 잃은 것은 그와 그 형제들의 일이다.
노르웨이 사람 모두의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풍토가 아니다.
전기(傳記)다.

풍토와 전기는 다르다.

이 구분이 이 책을 지킨다.

뭉크가 반대 증인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색은 전기에서 나왔다.
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결함이 아니다.

색이 안에서 나오는 길도 있다는 증언이다.
그 길로 그는 아주 멀리 갔다.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두 사람 다 상실을 그렸다.

그런데 상실의 크기가 다르다.

뭉크의 상실은 한 집의 것이다.
어머니와 누나.

변시지의 화면에 있는 상실은 섬의 것이다.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
섬은 오래전 많은 사람을 잃었다.

그 일을 4·3이라 부른다.

화백은 구술에서 그 시절을 말했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구술사, 2004–2005, 241–243쪽)

노인의 숙인 고개는 돌아오지 않은 이들에게 갖추는 예(禮)다.

이것은 해석이다.
다만 그림 앞에 오래 서 있으면 그렇게 읽힌다.

한쪽은 개인의 상실이고 다른 쪽은 공동의 상실이다.

그래서 형식이 다르다.

개인의 상실은 밖으로 나간다.
소리를 지른다.

공동의 상실은 안으로 들어간다.
말을 줄인다.

여럿이 같은 것을 잃으면 설명할 필요가 없다.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는 것이 예가 된다.

색도 그렇다.

뭉크의 붉음은 소리를 낸다.
변시지의 마른 풀잎색은 소리를 낮춘다.

한쪽은 색으로 외쳤고 다른 쪽은 색으로 침묵했다.

인물의 자세도 반대다.

「절규」의 사람은 정면을 본다.
우리를 본다.

변시지의 노인은 고개를 숙인다.
우리를 보지 않는다.

그런데 두 인물 다 얼굴이 없다.

뭉크의 인물은 얼굴이 있으나 사람의 얼굴이 아니다.
변시지의 노인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한쪽은 지워서 없앴고 다른 쪽은 가려서 없앴다.

둘 다 특정한 누구가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두 화면 다 우리를 대신한다.

이제 위계를 두지 않고 말해야 한다.

뭉크의 방향이 틀린 것이 아니다.

색이 안에서 나온 그림은 그 나름의 진실을 가진다.
그 진실은 땅과 무관하게 사람에게 닿는다.

「절규」가 세계에서 읽히는 이유가 그것이다.
어느 땅의 이야기도 아니기 때문에 어느 땅에서도 읽힌다.

변시지의 그림은 반대다.

한 섬의 이야기다.
그래서 그 섬을 알아야 더 깊이 읽힌다.

두 가지가 다 있어야 회화가 온전하다.

땅에서 나온 색과 안에서 나온 색.

이 책은 앞쪽을 따라가지만 뒤쪽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가 남는다.

뭉크는 그림을 밖에 내놓아 비바람을 맞혔다.
변시지는 그림을 안에서 그렸다.

그러나 화면 안으로 바람을 들였다.

한쪽은 그림을 풍토에 내놓았고 다른 쪽은 풍토를 그림에 들였다.

방향이 반대다.

그리고 둘 다 풍토와 만났다.

만나는 방식이 여럿이라는 것이 이 책의 발견이다.

다섯

붉음이 아직 하늘에 있다.

만은 어둡고 다리는 비었다.
멀리 두 사람은 여전히 등을 보이고 있다.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먼 섬의 화면에서는 노인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거기서도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한쪽은 지르고 다른 쪽은 참는다.

둘 다 우리에게는 조용하다.

색은 어디에서 오는가.

땅에서 오기도 하고 안에서 오기도 한다.

첫 번째 문은 이렇게 닫힌다.
답을 하나로 만들지 않고 닫는다.

제2부

들어가며

두 번째 문이다.

색이 면이라면 선은 시간이다.

색에는 시작과 끝이 없다.
칠해진 자리가 있을 뿐이다.

선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어디에서 붓을 댔고 어디에서 뗐는지가 남는다.
어느 자리에서 힘을 주었고 어느 자리에서 빨라졌는지도 남는다.

한 획을 긋는 데 몇 초가 걸렸는지 알 수 있다.

색은 고칠 수 있다.
덧칠하면 아래 색이 덮인다.

선은 고치면 두 개가 된다.

지운 자리가 보이고, 다시 그은 자리가 보인다.
망설임이 숨지 못한다.

그래서 선은 정직하다.

이 부의 물음은 이것이다.

붓의 속도는 무엇이 정하는가.

손이 정한다고 답하면 절반이다.

손은 붓을 쥔다.
그런데 붓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가 속도를 정한다.

젖은 종이에서는 오래 머물 수 없다.
마른 종이에서는 오래 머물 수 있다.

돌에 새기는 속도와 종이에 긋는 속도는 다르다.

재료가 속도를 정하고, 재료는 그 땅에서 온다.

이 문 앞에 세 사람이 선다.

그런데 순서가 앞의 부와 다르다.

앞의 부에서는 반대 증인이 맨 뒤에 왔다.
명제를 세운 다음 흔들었다.

이 부에서는 반대 증인이 맨 앞에 온다.

추사다.

선에서 가장 멀리 간 사람이 동시에 이 명제의 반증이기 때문이다.

가장 강한 예가 가장 강한 반례인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먼저 말하는 편이 정직하다.

그다음에 셋슈가 온다.
젖은 종이의 속도다.

마지막으로 에밀리 카가 온다.
위로 솟는 붓이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관계를 대륙과 맺었다.

추사는 대륙의 글씨를 보고 대륙에 남았다.
셋슈는 대륙의 산수를 보고 자기 땅으로 돌아왔다.
에밀리 카는 유럽에서 배우고 자기 땅의 숲으로 들어갔다.

같은 일을 하고 다른 데로 갔다.

제4장 — 추사, 풍토 없는 정신

하나

가로로 긴 종이다.

오른쪽에 집이 하나 있다.

지붕이 낮다.
벽에 둥근 창이 하나 뚫려 있다.

사람은 없다.

집 왼쪽에 나무가 있다.
소나무와 잣나무다.

네 그루쯤이다.

늙은 나무다.
한쪽 가지는 마르고 한쪽만 살아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비어 있다.

종이의 절반 넘게 아무것도 없다.

땅이 없다.
집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알 수 없다.

하늘도 없다.
위쪽 경계가 그냥 종이다.

먹은 아주 아껴 썼다.
진한 먹이 거의 없다.

가느다란 선 몇 개로 집을 세웠다.

붓이 마른 상태로 지나간 자리가 있다.
갈필이다.

종이의 결이 보인다.

이 그림은 제주에서 그려졌다.

1844년, 대정에서다.
그가 유배 중일 때다.

그런데 이 화면에 제주가 없다.

바다가 없다.
바람이 없다.

돌담도 없고 초가도 없다.
말도 없고 까마귀도 없다.

여기서 이 장이 시작된다.

김정희는 1786년에 태어났다.

호가 여럿이다.
추사와 완당이 널리 쓰인다.

스물넷 무렵에 연경에 갔다.
아버지의 사행을 따라간 것이다.

그곳에서 청나라의 학자들을 만났다.

옹방강과 완원.
당대의 큰 학자들이었다.

젊은 조선의 선비가 그들과 만나고 인정을 받았다.

이 만남이 그의 평생을 정했다.

그가 그곳에서 본 것은 그림이 아니었다.
글씨였고, 더 정확히는 옛 글자였다.

금석학이라 부른다.

비석과 청동기에 새겨진 글자를 모으고 견주어 읽는 학문이다.

돌에 새긴 글자는 붓으로 쓴 글자와 다르다.

칼로 파야 하니 획이 굵고 모가 난다.
세월에 깎여 끝이 부스러진다.

그 부스러진 자리가 힘이 된다.

추사는 그 힘을 붓으로 옮기려 했다.

조선에 돌아와 오래 공부했다.

북한산의 비석을 찾아가 글자를 읽고 고증했다.
누가 언제 세운 것인지를 밝혔다.

책상 앞의 학문이 아니었다.
산에 올라가 돌을 만지는 학문이었다.

글씨를 아주 많이 썼다.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천 자루를 닳게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그가 한 말이라고들 한다.

확인할 수 없는 말이다.
다만 그만큼 썼다는 것은 남은 글씨가 증명한다.

1840년에 제주로 유배되었다.

대정에 가시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 두는 형이었다.

여덟 해가 넘게 있었다.
1848년에 풀렸다.

풀린 뒤에도 편안하지 않았다.
몇 해 뒤 북청으로 다시 유배되었다.

1856년에 세상을 떠났다.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추사는 제주에서 글씨를 완성했다.

그런데 그 글씨에 제주가 없다.

이 문장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앞쪽은 사실에 가깝다.

여덟 해의 고립이 그를 붓 앞에 앉혀 두었다.
할 일이 없었고 만날 사람이 적었다.

쓰는 것 말고 할 것이 없었다.

그러니 유배가 그를 단련한 것은 맞다.

뒤쪽도 사실이다.

「세한도」에 제주의 사물이 하나도 없다.
그의 글씨에도 없다.

획의 굵고 얇음이 급하게 바뀐다.
꺾이는 자리가 모가 난다.

그것은 돌의 속도다.
칼이 돌을 파는 속도다.

바람의 속도가 아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유배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제주는 조건이 아니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어떤 땅이 아니라 아무 땅도 아닌 것이었다.

고립이 필요했고, 고립은 어디서든 가능하다.

북청에서도 그는 썼다.
과천에서도 썼다.

땅이 바뀌어도 글씨는 같은 방향으로 갔다.

여기서 세 가지가 따라온다.

첫째, 선이 매체를 건너간다.

돌의 속도를 종이로 옮기는 일은 번역이다.

칼과 붓은 다른 도구다.
돌과 종이는 다른 바탕이다.

그런데 그는 앞의 힘을 뒤의 재료로 다시 만들었다.

이때 선은 그 땅에서 오지 않는다.
다른 시대의 다른 재료에서 온다.

시간을 건너온 선이다.

둘째, 여백이 장소가 아니다.

「세한도」의 여백은 넓다.
화면의 절반이 넘는다.

그런데 그 여백은 제주의 여백이 아니다.

바다가 아니고 들이 아니다.
종이다.

문인화의 여백은 사물이 없는 자리이지 무엇이 있는 자리가 아니다.

이 구분은 3부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지금은 이것만 적어 둔다.

같은 넓이의 빈 자리가 어떤 화면에서는 장소이고 어떤 화면에서는 종이다.

셋째, 풍토의 부재가 조건이 될 수 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 책은 풍토가 형식을 낳는다고 말한다.

추사는 그 반대의 경우다.
풍토를 차단한 자리에서 형식이 나왔다.

가시울타리 안에서 그는 섬을 보지 않았다.
책과 종이와 옛 글자를 보았다.

밖이 막히면 안이 깊어진다.

이것도 하나의 길이다.

그리고 이 길은 이 책의 명제를 부수지 않는다.
명제의 범위를 알려 준다.

풍토는 형식을 낳는다.
다만 모든 형식이 풍토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이 대면은 특별하다.

같은 섬이기 때문이다.

앞의 부에서 우리는 먼 땅들을 견주었다.
멕시코와 제주, 뉴멕시코와 제주.

여기서는 같은 땅이다.

추사는 제주에서 여덟 해를 보냈다.
변시지는 제주에서 서른여덟 해를 보냈다.

같은 바람을 맞았고 같은 바다를 보았다.

그런데 결과가 정반대다.

한쪽 화면에는 섬이 없고 다른 쪽 화면에는 섬밖에 없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첫째, 간 이유가 다르다.

추사는 보내진 것이다.
변시지는 간 것이다.

보내진 사람에게 그 땅은 벌이다.
벌은 견디는 것이지 보는 것이 아니다.

견디는 사람은 눈을 감는다.
빨리 지나가기를 바란다.

간 사람에게 그 땅은 목적이다.
목적은 오래 본다.

둘째, 돌아갈 곳이 있었는지가 다르다.

추사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었다.
서울이 있고 학문의 자리가 있었다.

그는 제주를 통과하는 중이었다.

변시지에게 제주는 돌아온 곳이었다.
다섯 살에 떠났고 마흔아홉에 돌아왔다.

더 갈 곳이 없었다.

통과하는 사람과 도착한 사람은 같은 땅을 다르게 본다.

여기서 유배라는 말을 다시 보아야 한다.

이 책의 뿌리 문장은 이렇다.

삶은 유배요, 예술은 축복이다.

추사의 유배는 제도가 내린 것이다.
문서가 있고 기간이 있고 사면이 있다.

변시지의 유배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삶이 원래 그렇다는 인식이다.
사면이 없다.

제도의 유배는 끝난다.
삶의 유배는 끝나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 것을 견디려면 그 자리를 보아야 한다.

그래서 한 사람은 섬을 보지 않았고 다른 사람은 섬을 보았다.

선도 다르다.

추사의 선은 멈춘다.

한 획이 끝나면 완결된다.
다음 획이 그것을 건드리지 않는다.

획과 획 사이에 빈 자리가 있고 그 자리가 정확하다.

변시지의 선은 떨린다.

곧게 가다가 흔들린다.
끝이 흐려지기도 한다.

돌을 파는 선과 바람 속에서 긋는 선이 그렇게 다르다.

여백도 다르다.

두 화면 다 여백이 넓다.
그 점은 닮았다.

그러나 「세한도」의 빈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다.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변시지의 빈 자리에는 바람이 있다.
그려지지 않았지만 있다.

한쪽의 여백은 비었고 다른 쪽의 여백은 차 있다.

이제 위계를 두지 않고 말해야 한다.

추사가 섬을 보지 않은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는 다른 것을 보았고 그 다른 것에서 최고에 이르렀다.
그의 글씨는 지금도 넘어서기 어렵다.

정신이 땅을 넘어설 수 있다는 증언이다.

그리고 이 증언이 있어야 이 책이 겸손해진다.

풍토가 모든 것을 낳는다고 말하면 사람은 땅의 결과물이 된다.
그러면 예술은 필요하지 않다.

추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같은 섬에서 한 사람은 섬을 그리고 한 사람은 섬을 그리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옳았다.

다섯

가시울타리 안에 사람이 앉아 있다.

밖에는 바다가 있고 바람이 있다.
그는 그것을 그리지 않는다.

종이를 펴고 먹을 간다.
붓이 마른 채로 지나간다.

집 하나와 나무 몇 그루가 생긴다.

나머지는 비워 둔다.

그 비운 자리에 섬은 들어오지 않는다.

여덟 해가 지나고 그는 섬을 떠났다.
떠난 뒤에 그 그림만 남았다.

백몇십 년이 지나 같은 섬에 한 사람이 돌아왔다.

그는 바다를 그렸다.
바람을 그렸다.

같은 땅에서 두 사람이 각각 다른 것을 보았다.

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5장 — 셋슈, 젖은 종이의 속도

하나

세로로 긴 종이다.

먹뿐이다.
색이 없다.

화면 가운데를 선 하나가 위아래로 가른다.

굵고 검다.
아주 빠르게 그은 선이다.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바위의 모서리인지 절벽의 균열인지 분명하지 않다.
둘 다일 수도 있다.

급하게 그은 선은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그 선을 중심으로 형태들이 붙어 있다.

바위 같은 것, 나무 같은 것.
지붕 같은 것도 있다.

아래쪽에 작은 인물이 있다.

아주 작다.
손톱만 하다.

걸어가는 중이다.

위쪽은 비어 있다.

안개다.
혹은 종이다.

구별되지 않는다.

먹의 농담을 보자.

진한 먹과 옅은 먹이 붙어 있다.
그 사이가 번져 있다.

번진 자리가 실수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형태가 생겼다.

붓이 지나간 속도가 다 다르다.

어떤 자리는 빠르고 어떤 자리는 멈췄다.
멈춘 자리에 먹이 고였다.

고인 자리가 무게가 된다.

앞 장의 화면과 비교해 보자.

「세한도」의 붓은 말라 있었다.
종이의 결이 보였다.

여기서는 붓이 젖어 있다.
종이가 먹을 먹는다.

한쪽은 종이 위에 있고 다른 쪽은 종이 안으로 들어간다.

셋슈는 1420년에 일본 서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절에 들어갔다.
승려가 되었다.

교토로 갔다.
그곳의 큰 절에서 지냈다.

당시 화승에게 그림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확실한 기록은 적다.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다.

젊은 시절 그는 이름이 크지 않았다.

교토는 그림의 중심이었다.
중심에서 그는 여러 사람 중 하나였다.

1467년에 그는 명나라로 갔다.
사절단에 끼어 간 것이다.

마흔일곱 무렵이다.

이 해를 기억해 두자.

같은 해에 교토에서 큰 난이 일어났다.
십 년 넘게 이어진 내전이다.

교토가 불탔다.
절과 집과 그림이 함께 탔다.

그가 배를 타고 떠난 해에 그의 도시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에서 그는 이 년쯤 있었다.

배울 스승을 찾으려 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찾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산과 강을 보았다.

책에서 본 산수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를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돌아왔을 때 교토는 여전히 전장이었다.

그는 교토로 돌아가지 않았다.
서쪽 지방에 머물렀다.

야마구치 근처에 화실을 두었다.

중심을 떠난 것이다.

거기서 그의 그림이 나왔다.

일흔 넘은 나이까지 그렸다.

만년에 「파묵산수도」를 그려 제자에게 주었다.
스스로 글을 붙여 그림 위에 썼다.

또 만년에 실제 장소를 그렸다.

바다에 길게 뻗은 모래 언덕이 있는 곳이다.
소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가서 보고 그렸다.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일본은 습하다.

서장에서 우리는 와쓰지의 분류를 보았다.
몬순, 사막, 목장.

일본은 몬순이다.

비가 많고 공기에 물기가 있다.

이 조건이 종이에 직접 작용한다.

종이가 습기를 먹으면 먹이 번진다.

붓을 대고 있으면 먹이 계속 퍼진다.
멈추면 뭉친다.

그러니 빠르게 지나가야 한다.

여기서 하나의 방법이 나온다.

번짐을 막으려 하지 않고 이용하는 방법이다.

먹을 던지듯 놓는다.
번지도록 둔다.

번진 모양이 형태가 된다.

파묵이라 부른다.
먹을 깨뜨린다는 뜻이다.

이것은 통제의 포기가 아니다.
통제의 이전이다.

붓이 하던 일을 종이가 나누어 한다.

와쓰지가 몬순의 사람에 대해 한 말을 떠올려 보자.

자연이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니 맞서기보다 받아들인다고 했다.

파묵이 바로 그 태도다.

종이가 하는 일을 막지 않는다.

여기서 세 가지가 따라온다.

첫째, 속도가 형태를 정한다.

느리게 그은 선은 무엇인지 알려 준다.
바위면 바위처럼 생기고 나무면 나무처럼 생긴다.

빠르게 그은 선은 알려 주지 않는다.

굵기만 남고 정체는 남지 않는다.

그러면 보는 사람이 채운다.

화면 가운데의 그 선이 무엇인지 우리는 정하지 못한다.
정하지 못한 채로 본다.

빠른 선은 뜻을 열어 둔다.

둘째, 여백이 물질이 된다.

앞 장에서 「세한도」의 여백은 종이였다.
아무것도 없는 자리였다.

셋슈의 여백은 다르다.

안개다.

습한 땅에서 안개는 매일의 일이다.
아침에 산이 없어지고 낮에 다시 생긴다.

그러니 흰 자리가 빈 자리가 아니다.
무엇이 있는 자리다.

두꺼운 흰 것이 있다.

이 대목에서 밝혀 둘 것이 있다.

셋슈는 3부 여백에 놓아도 되는 화가다.
그의 여백은 그만큼 중요하다.

이 책은 그를 선 부에 두었다.

그의 여백이 붓의 속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빠르게 지나간 붓이 남긴 자리가 안개가 되었다.
여백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속도가 여백을 만들었다.

원인 쪽에 놓은 것이다.

셋째, 실경을 그려도 지도가 되지 않는다.

그는 실제 장소를 그렸다.

가서 보고 그렸으니 사실에 가까워야 한다.

그런데 그 화면은 지도가 아니다.

높은 데서 내려다본 것 같기도 하고 옆에서 본 것 같기도 하다.
시점이 하나가 아니다.

왜 그런가.

안개가 잦은 땅에서는 한 번에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

지금 이만큼 보이고 조금 뒤에 저만큼 보인다.

여러 번 본 것을 합쳐야 한 장소가 된다.

그러니 그의 실경은 여러 시간을 겹친 것이다.

습한 땅의 실경은 원래 그렇게 생긴다.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이 대면에서는 조건이 닮았다.

두 땅이 다 몬순이다.

일본에 비가 많고 제주에 비가 많다.
둘 다 바다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검은 선을 썼다.

셋슈는 먹으로 그었고 변시지는 검은 물감으로 그었다.

재료는 다르지만 검다는 것은 같다.

그런데 선의 성질이 반대다.

셋슈의 선은 번진다.
변시지의 선은 마른다.

같은 습한 땅에서 왜 반대가 되는가.

바람 때문이다.

일본의 습기는 고여 있다.
분지가 많고 산이 막아 준다.

고인 습기는 번지게 한다.

제주의 습기는 고이지 않는다.
바람에 실려 지나간다.

지나가는 습기는 마르게 한다.

바다 옆이라 습한데 바람이 세서 마른다.

이 모순이 제주의 조건이다.

젖으면서 마르는 땅이다.

그래서 변시지의 화면은 젖어 있지 않다.
습한 땅의 그림인데 마른 그림이다.

마른 풀잎색이 그 결과다.

풀은 비를 맞고 자랐다.
그리고 바람에 말랐다.

젖었던 것이 마른 색이다.

처음부터 마른 사막의 색과 다르다.

앞의 부에서 본 오키프의 마름과 여기서 갈린다.

한쪽은 마른 채로 있던 것이고 다른 쪽은 젖었다가 마른 것이다.

두 번째 닮음이 있다.

두 사람 다 밖에서 배워 안으로 돌아왔다.

셋슈는 중국에 가서 산수를 보고 돌아왔다.
변시지는 일본에서 그림을 배우고 돌아왔다.

앞 장의 추사는 밖에서 배워 밖에 남았다.

세 사람이 삼각을 이룬다.

밖에서 배운 것을 어떻게 하는가.

추사는 그것을 지켰다.
셋슈와 변시지는 그것을 자기 땅에 부었다.

지킨 사람의 형식은 시간을 건너가고, 부은 사람의 형식은 장소에 뿌리내린다.

세 번째 닮음이 있다.

두 사람 다 중심을 떠났다.

셋슈는 교토로 돌아가지 않고 서쪽에 남았다.
전쟁이 이유였다.

변시지는 서울을 떠나 제주로 갔다.

중심에서는 남과 견주게 된다.
변방에서는 땅과 마주하게 된다.

견주기를 멈추면 보이는 것이 있다.

이제 차이를 보자.

인물의 크기가 다르다.

셋슈의 화면에서 사람은 아주 작다.
산이 크고 사람이 작다.

사람은 풍경 안에 있다.

변시지의 화면에서 사람은 크다.
화면의 중심에 있다.

풍경이 물러나고 사람이 남는다.

이 차이가 무엇을 뜻하는가.

산수화의 사람은 그 풍경에 속해 있다.
자연의 일부다.

변시지의 노인은 풍경에 속해 있지 않다.
풍경을 견디고 있다.

속한 사람과 견디는 사람은 자세가 다르다.

속한 사람은 걷는다.
견디는 사람은 서 있다.

셋슈의 인물은 지나가는 중이고 변시지의 노인은 머무는 중이다.

그리고 하나가 더 있다.

셋슈는 승려였다.

그의 그림에는 세상을 조금 떨어져 보는 자리가 있다.
슬픔이 오래 머물지 않는다.

변시지는 승려가 아니었다.

그의 화면에는 애도가 남아 있다.

같은 몬순의 땅에서 한쪽은 놓아 보냈고 다른 쪽은 붙들었다.

다섯

종이가 젖어 있다.

붓을 대면 먹이 번진다.
그러니 오래 대고 있을 수 없다.

한 번 지나가고 그다음을 기다린다.

기다리는 동안 종이가 일한다.

먼 섬의 화면에서는 바람이 지나간다.
그것도 기다려야 하는 일이다.

지나간 뒤에 자리가 남는다.

두 사람 다 자기가 다 하지 않았다.

젖은 것에게 맡기고 마른 것에게 맡겼다.

번짐이 아직 퍼지고 있다.

제6장 — 에밀리 카, 위로 솟는 붓

하나

세로로 긴 화면이다.

숲이다.

나무가 곧게 서 있다.
아주 높다.

화면 위쪽까지 올라가고 거기서 끊긴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나무의 굵기가 아래위로 거의 같다.
아래가 굵고 위가 가느다란 나무가 아니다.

기둥 같다.

색은 초록이다.
그런데 밝은 초록이 아니다.

푸른 기가 도는 초록, 검은 기가 도는 초록.
젖은 초록이다.

아래쪽은 어둡다.
거의 검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위쪽은 밝다.
나무 사이로 하늘이 조각으로 보인다.

그 조각들이 이어져 있지 않다.
따로따로다.

붓질을 보자.

위아래로 훑었다.
좌우로 그은 자리가 거의 없다.

한 번 훑고 다음을 훑었다.
같은 방향이 반복된다.

물감이 얇다.

앞의 두 장과 다르다.
쌓은 물감이 아니다.

흘러내린 자리도 있다.
묽게 만들어 썼기 때문이다.

빠르게 마르는 물감이다.

하늘도 흐른다.

나무의 리듬이 하늘로 이어진다.
하늘이 소용돌이친다.

배경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에밀리 카는 1871년에 캐나다 서해안에서 태어났다.

브리티시컬럼비아의 빅토리아다.
섬에 있는 도시다.

영국에서 온 집안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었다.
언니들 손에 자랐다.

그림을 배우러 멀리 갔다.

먼저 샌프란시스코에 갔고 그다음 런던에 갔다.
몇 해 있었다.

나중에는 파리에도 갔다.

그곳에서 새로운 그림을 보았다.
색을 세게 쓰는 법을 배웠다.

돌아왔다.

그리고 배를 타고 북쪽 해안을 다녔다.

원주민 마을이 있는 곳이었다.

마을 앞에 나무 기둥들이 서 있었다.
사람과 짐승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것을 그렸다.

여러 해에 걸쳐 여러 마을을 다녔다.

그 기둥들이 사라진다고 여겼다.
그래서 기록하려 했다.

여기서 조심할 자리가 있다.

그 기둥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의 것이었고, 그들에게는 그림보다 무거운 뜻이 있었다.

그가 기록하려 한 마음을 나쁘게 볼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풍토였는지는 다른 문제다.

이 자리는 지금도 논의 중이다.

이 책은 판정하지 않는다.
다만 기록해 둔다.

같은 땅에 살면서 남의 형식을 그리는 일이 있다.

그다음에 그는 오래 그림을 놓았다.

십오 년 가까이다.

하숙집을 운영했다.
방을 치우고 세를 받고 개를 길렀다.

그림이 팔리지 않았고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쉰이 넘도록 그렇게 지냈다.

1927년에 동부의 화가들을 만났다.

그들은 캐나다의 땅을 그리려는 사람들이었다.
그중 한 사람이 그의 그림을 보고 알아주었다.

그때 그는 쉰여섯이었다.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은 십몇 년 동안 그의 대표작이 다 나왔다.

숲으로 들어갔다.

작은 캐러밴을 끌고 가서 며칠씩 지냈다.
개와 원숭이와 함께였다.

거기서 그렸다.

유화를 휘발유로 묽게 만들어 종이에 그렸다.

물감이 비쌌고 종이는 쌌다.
그리고 묽은 물감은 빨리 마른다.

야외에서 그리기에 맞았다.

만년에는 글도 썼다.
그 글로 상을 받았다.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비가 많은 숲에서는 선이 위로 간다.

브리티시컬럼비아 해안은 비가 많다.
온대우림이다.

그 숲의 나무는 아주 높고 곧다.

왜 그런가.

빛이 위에만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빽빽하면 아래로 빛이 오지 않는다.
그러니 위로 가야 한다.

옆으로 뻗을 여유가 없다.

곧게 올라가는 것이 그 숲의 형태다.

서장에서 우리는 제주의 나무를 보았다.
바람 때문에 한쪽으로 눕는 나무다.

여기서는 반대다.
빛 때문에 곧게 서는 나무다.

바람이 누이고 빛이 세운다.

그러면 화면의 방향이 정해진다.

수직이다.

그리고 붓질도 수직이 된다.

여기서 세 가지가 따라온다.

첫째, 재료가 속도를 정한다.

이 부의 물음이 여기서 가장 직접적으로 대답된다.

그는 유화를 휘발유로 묽게 했다.

묽은 물감은 빨리 마른다.
빨리 마르면 오래 다룰 수 없다.

그러니 한 번에 그어야 한다.

그리고 묽은 물감은 붓이 잘 나간다.
저항이 적다.

빠르게 훑을 수 있다.

두꺼운 물감은 붓을 붙잡는다.
묽은 물감은 붓을 밀어 준다.

뒤에 볼 키퍼의 붓은 무겁고 그의 붓은 가볍다.

재료가 속도를 정하고, 속도가 형태를 정했다.

그가 이 재료를 고른 것은 처음에는 돈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재료가 그 숲과 맞았다.

가난이 우연히 옳았던 것이다.

둘째, 방향이 리듬을 만든다.

같은 방향으로 여러 번 그으면 리듬이 생긴다.

한 번은 획이고 열 번은 리듬이다.

그의 화면에서 나무는 하나씩 세어지지 않는다.
여러 그루가 한 흐름으로 묶인다.

숲은 원래 그렇게 보인다.

나무 하나하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한꺼번에 온다.

셋째, 배경이 형태를 따라간다.

하늘이 소용돌이친다.

나무의 위쪽 움직임이 하늘로 넘어간다.

이것은 관찰이 아니라 확장이다.

숲에서 하늘은 조각으로만 보인다.
나뭇가지 사이의 틈으로 본다.

그러면 하늘이 넓은 배경이 아니라 여러 개의 형태가 된다.

앞의 부에서 오키프의 하늘은 면이 되었다.
여기서 하늘은 조각이 된다.

마른 땅에서 하늘은 한 장이고, 숲에서 하늘은 여러 조각이다.

땅이 하늘의 모양을 정한다.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먼저 닮은 것을 본다.

두 사람 다 늦게 다시 시작했다.

에밀리 카는 쉰여섯에 다시 붓을 들었다.
변시지는 마흔아홉에 섬으로 갔다.

둘 다 그전에 이미 화가였다.
둘 다 그전의 그림과 그 뒤의 그림이 다르다.

그리고 둘 다 대표작이 늦게 나왔다.

늦게 나온 그림에는 조급함이 없다.

남은 시간이 짧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두르지 않는다.
서둘러 봐야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이미 알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닮음이 있다.

둘 다 혼자 다녔다.

에밀리 카는 캐러밴을 끌고 숲으로 들어갔다.
변시지는 섬을 걸었다.

혼자 오래 있으면 사람의 말이 줄어든다.
그러면 사물의 말이 들린다.

세 번째 닮음이 있다.

둘 다 사라진 공동체에 닿았다.

에밀리 카는 원주민 마을의 기둥을 그렸다.
변시지의 화면에는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섬은 오래전 많은 사람을 잃었다.
그 일을 4·3이라 부른다.

화백은 구술에서 그 시절을 말했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구술사, 2004–2005, 241–243쪽)

그런데 두 사람의 자리가 다르다.

에밀리 카는 밖에서 보았다.
남의 상실을 기록했다.

변시지는 안에 있었다.
자기 공동체의 상실을 애도했다.

기록과 애도는 다르다.

기록은 남기려 한다.
애도는 갖추려 한다.

기록은 정확해야 하고 애도는 조용해야 한다.

앞의 부에서 우리는 풍토와 전기를 갈랐다.
여럿이 함께 겪은 것과 한 사람이 겪은 것.

여기서는 다른 선이 필요하다.

여럿이 겪었으나 내가 그 여럿에 속하지 않은 경우.

그럴 때 그린 그림은 무엇인가.

정직하게 말하면, 이 책은 답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두 그림이 다르게 생겼다는 것은 볼 수 있다.

기둥을 그린 화면에는 기둥이 정면으로 서 있다.
잘 보이게 그렸다.

노인을 그린 화면에서 노인은 등을 보이거나 고개를 숙인다.
잘 보이지 않게 그렸다.

보여주는 그림과 가리는 그림.

이제 차이를 보자.

가장 큰 차이는 방향이다.

에밀리 카의 선은 위로 간다.
변시지의 선은 옆으로 눕는다.

숲의 선과 들의 선이다.

나무가 높이 자라는 땅에서는 수직이 주인이 된다.
나무가 못 자라는 땅에서는 수평이 주인이 된다.

제주에서 나무는 바람에 눕는다.

그래서 화면에서 가장 긴 선은 수평선이다.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그 한 줄.

수직이 주인인 화면은 사람을 올려다보게 한다.
수평이 주인인 화면은 사람을 멀리 보게 한다.

올려다보면 위에 무엇이 있다는 뜻이다.
멀리 보면 저쪽에 무엇이 있다는 뜻이다.

숲은 하늘을 가리키고 섬은 수평선을 가리킨다.

하늘은 닿을 수 없고 수평선도 닿을 수 없다.

두 그림 다 닿을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가리키는 방향만 다르다.

하늘도 다르다.

에밀리 카의 하늘은 소용돌이친다.
움직인다.

변시지의 하늘은 비어 있다.
움직이지 않는다.

숲에서는 나무가 흔들리니 하늘도 흔들려 보인다.
빈 들에서는 흔들릴 것이 없으니 하늘이 가만히 있다.

바람이 더 센 쪽의 하늘이 더 조용한 것이다.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렇다.

바람이 세면 흔들릴 것들이 이미 다 누워 있다.

다섯

숲에서 위를 본다.

나무가 올라가고 하늘이 조각으로 보인다.
조각들이 움직인다.

목이 아프다.

먼 섬에서는 앞을 본다.

수평선이 있고 그 위에 아무것도 없다.
조각배 하나가 떠 있다.

목이 아프지 않다.

한쪽은 올려다보고 다른 쪽은 마주 본다.

두 사람 다 오래 서 있었다.

붓은 한쪽에서 위로 갔고 다른 쪽에서 옆으로 갔다.

땅이 방향을 정했다.

제3부

여백

들어가며

세 번째 문이다.

여백은 그리지 않은 자리다.

그런데 그리지 않은 것과 비워 둔 것은 다르다.

그리지 못한 자리는 미완이다.
비워 둔 자리는 형식이다.

어떻게 구별하는가.

나머지를 본다.

그린 부분이 정확하면 비운 것이다.
그린 부분이 흐리면 못 그린 것이다.

여백은 그 옆의 것이 증명한다.

이 부의 물음은 이것이다.

빈 곳은 무엇의 자리인가.

빈 곳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물음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빈 곳은 대개 무엇이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의 자리이거나 이미 떠난 것의 자리다.
혹은 있는데 보이지 않는 것의 자리다.

이 부에는 네 사람이 선다.

다른 부보다 하나 많다.

여백은 종류가 많기 때문이다.

색은 한 가지 방식으로 온다.
눈에 들어온다.

여백은 여러 방식으로 생긴다.

비워 둔 여백.
팔대산인이다.
붓을 대지 않아서 생긴 자리다.

채워진 여백.
프레드 윌리엄스다.
땅으로 다 채웠는데 비어 보이는 자리다.

지워진 여백.
터너다.
그렸다가 녹아 없어진 자리다.

만들어진 여백.
카푸어다.
설계해서 만든 자리다.

앞의 셋은 조건에서 나왔다.
종이와 땅과 공기가 그렇게 만들었다.

마지막 하나는 조건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카푸어가 이 부의 반대 증인이다.

여백은 풍토 없이도 만들 수 있다.

그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야 앞의 셋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해진다.

제7장 — 팔대산인, 먹 몇 점과 종이의 나머지

하나

종이가 세로로 길다.

가운데 아래쪽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다.

먹 몇 번으로 그렸다.
몸통 한 획, 지느러미 두어 획.

비늘은 없다.

눈이 있다.

동그란 테두리 안에 점이 하나 있다.
그 점이 가운데 있지 않다.

위로 치우쳐 있다.

그래서 흘겨보는 것처럼 보인다.

물고기가 사람을 보고 있다.

물이 없다.

물결도 없고 수초도 없다.
바닥도 없다.

물고기가 종이 위에 그냥 있다.

떠 있는 것도 아니고 누운 것도 아니다.

나머지는 전부 비어 있다.

위쪽 열 중 아홉이 비었다.
아래쪽도 비었다.

한쪽 위에 글씨가 조금 있다.
서명이다.

그 서명의 글자가 이상하다.

읽으면 이름인데 모양은 다른 것처럼 보인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하다.

먹의 농담이 아주 적다.

진한 먹 몇 자리와 옅은 먹 몇 자리.
중간이 거의 없다.

번짐도 적다.

젖은 붓이 아니다.
적당히 마른 붓이다.

앞 부에서 본 셋슈의 화면과 다르다.

셋슈는 번지게 두었다.
여기서는 번지지 않게 했다.

같은 먹인데 다르게 쓴 것이다.

팔대산인은 1626년에 중국에서 태어났다.

명나라 왕실의 후손이었다.

먼 방계였지만 왕족이었다.
집에 그림과 글씨가 있었다.

어려서 시를 지었고 글씨를 썼다.

1644년에 명나라가 무너졌다.

그는 열여덟이나 열아홉이었다.

한 왕조가 없어지는 것을 그 나이에 본 것이다.

그는 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이십 년 넘게 절에 있었다.

여러 이름을 썼다.
호가 아주 많다.

팔대산인이라는 호는 늦게 쓴 것이다.

쓰기 전에 다른 이름들이 여럿 있었다.
이름을 계속 바꾸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기록이다.

한동안 그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문 앞에 벙어리라는 글자를 붙였다고 한다.
웃거나 울기만 했다고도 한다.

미친 사람처럼 지낸 시기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뒤에 쓰인 것이 많다.
어디까지 사실인지 알기 어렵다.

다만 하나는 분명하다.

그는 새 나라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가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는 것과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은 같은 일이다.

만년에 그림을 많이 그렸다.

새와 물고기와 연꽃과 돌.

크게 그리지 않았다.
많이 그리지 않았다.

한 화면에 하나씩 놓았다.

1705년에 세상을 떠났다.

여든 무렵이었다.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그의 여백은 비워 둔 것이면서 비워진 것이다.

두 가지가 겹쳐 있다.

비워 둔 것은 방법이다.

문인화에는 여백의 전통이 있다.
다 그리지 않는 것이 격이라 여겼다.

그는 그 전통 안에 있었다.

비워진 것은 사정이다.

물고기에게 물이 없다.

이것을 기법으로만 볼 수 없다.

물이 없는 물고기는 살 곳이 없는 물고기다.
새가 앉을 가지가 없으면 갈 곳이 없는 새다.

그는 나라가 없는 사람이었다.

살던 왕조가 없어졌고 그 자리에 다른 나라가 섰다.
그는 그 나라의 사람이 되지 않았다.

속할 곳이 없는 사람의 형식이 이 여백이다.

배경을 그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배경이 없어진 것이다.

여기서 세 가지가 따라온다.

첫째, 하나가 남으면 그 하나가 커진다.

화면에 물고기 하나만 있다.

크기는 작다.
그런데 무겁다.

옆에 아무것도 없으니 견줄 것이 없다.
견줄 것이 없으면 그것이 전부가 된다.

여백은 남은 하나를 크게 만든다.

이것은 1부에서 본 오키프의 경우와 닮았다.

배경이 없으면 크기의 기준이 사라진다.

그런데 방향이 다르다.

오키프는 뼈를 산만큼 크게 그렸다.
크게 그려서 크게 만들었다.

팔대산인은 작게 그렸다.
작게 그리고 나머지를 비워 크게 만들었다.

한쪽은 채워서 키우고 다른 쪽은 비워서 키운다.

둘째, 여백이 시간을 만든다.

빈 종이 위에 물고기 하나가 있으면 눈이 오래 머문다.

볼 것이 적으니 빨리 볼 것 같지만 반대다.

볼 것이 많으면 눈이 옮겨 다닌다.
볼 것이 하나면 눈이 그 자리에 있는다.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여백은 그림을 느리게 만든다.

느린 그림 앞에서 보는 사람의 마음이 움직인다.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오래 기억되는 것과 같다.

셋째, 서명이 형태가 된다.

그의 서명은 읽히기도 하고 보이기도 한다.

글자인데 그림처럼 생겼다.

이름을 쓰면서 이름을 감춘 것이다.

여백이 넓은 화면에서 서명은 눈에 잘 띈다.
숨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서명 자체를 화면의 일부로 만들었다.

빈 자리에 놓인 글씨는 그림이 된다.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먼저 닮은 것을 본다.

두 사람 다 여백이 아주 넓다.

두 사람 다 하나만 남긴다.

물고기 하나.
노인 하나.

옆에 아무것도 두지 않는다.

그리고 두 사람 다 그 하나를 작게 그린다.

화면을 채우지 않는다.

두 번째 닮음이 있다.

두 사람 다 말할 수 없는 시대를 지났다.

팔대산인은 왕조가 바뀐 뒤에 살았다.
전 왕조의 후손이 무엇을 말할 수 있었겠는가.

변시지는 다른 종류의 시대를 지났다.

그는 폭풍을 그렸다.

그리고 훗날 구술에서 폭풍은 날씨가 아니라 저항이라고 말했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구술사, 2004–2005, 171쪽)

말로 하지 않고 그림으로 한 것이다.

말로 하면 위험한 시절에는 그림이 말을 대신한다.

두 사람이 같은 방법을 썼다.

세 번째 닮음이 있다.

두 사람 다 자기를 부르는 이름을 따로 지었다.

팔대산인은 호를 여럿 지었고 계속 바꿨다.

변시지는 자신을 풍운아라 불렀다.
아호는 우성이었다.

이름을 지어 붙이는 일은 자기를 다시 놓는 일이다.

이제 차이를 보자.

여백의 성질이 반대다.

팔대산인의 여백에는 아무것도 없다.

물이 없다.
그것이 요점이다.

없는 것의 여백이다.

변시지의 여백에는 바람이 있다.

그려져 있지 않지만 있다.

있는 것의 여백이다.

한쪽의 빈 자리는 상실을 가리키고 다른 쪽의 빈 자리는 힘을 가리킨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팔대산인이 잃은 것은 제도였다.
왕조와 신분과 자리.

제도는 없어지면 그 자리가 빈다.

변시지가 마주한 것은 자연이었다.
바람과 바다.

자연은 없어지지 않는다.
보이지 않을 뿐이다.

제도의 부재와 자연의 비가시는 다르다.

앞의 부에서 우리는 추사를 보았다.

추사도 유배였고 팔대산인도 왕조를 잃었다.
둘 다 상실이 있었다.

그런데 추사의 여백에는 그 상실이 없다.
종이일 뿐이다.

팔대산인의 여백에는 상실이 있다.

같은 문인화의 여백인데 하나는 형식이고 하나는 사정이다.

이 구별이 이 부의 핵심이다.

인물의 태도도 다르다.

팔대산인의 새와 물고기는 흘겨본다.

눈동자가 치우쳐 있다.
사람을 마주 보지 않으면서 보고 있다.

노려보는 저항이다.

변시지의 노인은 고개를 숙인다.

우리를 보지 않는다.
땅을 본다.

숙이는 저항이다.

두 자세 다 저항이다.

하나는 눈으로 하고 하나는 목으로 한다.

노려보는 쪽이 더 강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숙이는 것은 오래 할 수 있다.
노려보는 것은 오래 못 한다.

견딤의 길이가 다르다.

다섯

종이 위에 물고기가 있다.

물은 없다.
있어야 할 것이 없다.

물고기는 흘겨본다.

먼 섬의 화면에는 노인이 있다.

바람은 없다.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노인은 고개를 숙인다.

둘 다 나머지가 비어 있다.

그 비어 있음의 뜻이 다르다.

없어서 빈 것과 보이지 않아서 빈 것.

두 화면은 서로를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나란히 놓으면 여백에 종류가 있다는 것이 보인다.

먹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제8장 — 프레드 윌리엄스, 채워진 여백

하나

가로로 아주 넓은 화면이다.

세로가 짧다.

색은 황갈색이다.
회색이 섞인 마른 색이다.

화면 전체가 거의 한 색이다.

그 위에 점들이 있다.

작은 점, 짧은 획.
검은 것과 어두운 초록.

나무다.

그런데 나무처럼 생기지 않았다.
줄기와 가지가 없다.

점 하나가 나무 하나다.

점들이 고르게 흩어져 있다.

몰린 자리도 있고 드문 자리도 있다.
그러나 규칙이 없다.

지평선을 찾아보자.

없다.

화면 위쪽 끝에 아주 얇은 띠가 있다.
그것이 하늘일 수 있다.

없을 때도 있다.

하늘이 없으면 위아래가 사라진다.

이 화면은 앞에서 본 풍경인가 위에서 본 지면인가.

정할 수 없다.

둘 다일 수도 있다.

가까이 가면 표면이 얇다.

물감이 두껍지 않다.
문지른 자리가 많다.

점만 조금 두껍다.

점은 붓을 눌러 놓았다.

멀리서 보면 점들이 리듬으로 보인다.
가까이 보면 점 하나하나가 서로 다르다.

같은 점이 없다.

프레드 윌리엄스는 1927년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났다.

멜버른이었다.

그곳에서 그림을 배웠다.

1952년에 런던으로 갔다.

사 년쯤 있었다.

미술관에서 유럽의 그림을 보았다.
풍경화의 오랜 전통을 보았다.

그리고 돌아왔다.

돌아와서 문제에 부딪쳤다.

유럽에서 배운 방법으로 호주의 땅을 그릴 수 없었다.

유럽의 풍경에는 초점이 있다.

교회의 탑이 있거나 큰 나무가 있거나 길이 있다.
눈이 갈 곳이 있다.

그리고 소실점이 있다.

길이 멀어지면서 좁아진다.
그것으로 깊이를 만든다.

호주의 부시에는 그런 것이 없다.

큰 나무가 없고 길이 없고 탑이 없다.

어디를 봐도 비슷하다.

앞을 봐도 그렇고 뒤를 봐도 그렇다.

초점이 없는 땅이다.

그는 이것을 결핍으로 보지 않았다.

특징으로 보았다.

그래서 초점 없는 화면을 그리기로 했다.

멜버른 근처의 낮은 산을 여러 해 그렸다.

같은 곳을 여러 번 갔다.

나중에는 서쪽의 광산 지대로 갔다.

붉은 땅이었다.
철이 많은 흙이다.

그곳을 그린 화면은 색이 다르다.
더 붉고 더 뜨겁다.

1982년에 세상을 떠났다.

오래 살지 못했다.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호주의 빈 땅에서 여백은 하늘이 아니라 땅이다.

이것이 이 장의 특별한 자리다.

앞 장의 팔대산인은 종이를 비웠다.
붓을 대지 않았다.

윌리엄스는 비우지 않았다.

화면을 다 칠했다.
황갈색으로 끝까지 칠했다.

그런데 비어 보인다.

채워졌는데 비어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같은 것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넓이는 비어 보인다.

바다가 그렇고 사막이 그렇다.
물이 가득한데 비어 보이고 모래가 가득한데 비어 보인다.

여백은 없음이 아니라 같음이다.

이 발견이 이 부에 필요하다.

여백을 만드는 방법이 두 가지인 것이다.

지우는 방법과 되풀이하는 방법.

여기서 세 가지가 따라온다.

첫째, 초점 없음이 형식이 된다.

초점이 있는 화면에서 눈은 목적지가 있다.

먼저 초점을 보고 그다음에 주변을 본다.

초점이 없는 화면에서 눈은 헤맨다.

어디를 먼저 볼지 정해지지 않는다.

그러면 보는 순서가 사람마다 달라진다.

화면이 한 가지로 읽히지 않는다.

그 땅에서 길을 잃는 것과 같은 일이 화면 안에서 일어난다.

둘째, 점이 리듬이 된다.

점 하나는 나무 하나다.

그런데 점 백 개는 나무 백 그루가 아니다.

리듬이다.

멀리서 보면 점들이 음악처럼 배열된다.

가까이 보면 다시 나무가 된다.

두 거리에서 다른 것이 보인다.

이것은 앞 부의 셋슈와 닮았다.

셋슈의 급한 선도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다른 것이 된다.

셋째, 지평선을 없애면 화면이 지면이 된다.

지평선이 있으면 우리는 서서 보게 된다.

땅이 아래에 있고 하늘이 위에 있다.
그 사이에 우리가 서 있다.

지평선을 없애면 그 관계가 사라진다.

땅이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 있는 것처럼 된다.

내려다보는 눈이 된다.

호주 내륙은 실제로 비행기에서 보는 일이 많다.

넓은 땅은 걸어서 다 볼 수 없다.

그러니 위에서 보는 눈이 그 땅의 눈이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여야 한다.

호주의 내륙은 오래된 땅이다.

산이 깎여 낮아졌고 흙이 얇다.
새로 솟은 것이 없다.

높낮이가 없는 땅은 오래된 땅이다.

오래된 땅에서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미 다 일어났다.

그래서 그 화면에 극적인 것이 없다.

극적인 것이 없는 것이 그 땅의 성격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리려면 극적이지 않게 그려야 한다.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먼저 닮은 것을 본다.

두 땅이 다 비어 있다.

호주의 부시에 큰 나무가 없다.
제주의 들에도 큰 나무가 드물다.

두 화면 다 마른 색이다.

황갈색과 마른 풀잎색.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색이라는 점도 같다.

두 번째 닮음이 있다.

두 사람 다 밖에서 배워 돌아왔다.

윌리엄스는 런던에서 사 년을 보내고 돌아왔다.
변시지는 오사카에서 자라고 서울을 거쳐 돌아왔다.

두 사람 다 돌아온 뒤에 문제에 부딪쳤다.

배운 방법이 그 땅에 맞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 다 방법을 바꾸었다.

앞 부에서 우리는 셋슈도 그랬다는 것을 보았다.

밖에서 배워 안으로 돌아오는 궤적이 이 책에 여러 번 나온다.

이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 땅에서만 자란 사람은 그 땅의 이상함을 모른다.
밖을 본 사람이 돌아와야 이상함이 보인다.

이제 차이를 보자.

가장 큰 차이는 지평선이다.

윌리엄스는 지평선을 없앴다.

변시지는 지평선을 남겼다.

남긴 것이 아니라 주인으로 만들었다.

그의 화면에서 가장 긴 선은 대개 수평선이다.

왜 반대가 되었는가.

바다 때문이다.

대륙의 빈 땅에는 끝이 없다.

걸어가도 같은 것이 계속 나온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다.

끝이 없으면 지평선은 임의의 자리다.
지워도 된다.

섬의 빈 땅에는 끝이 있다.

걸어가면 바다가 나온다.
반드시 나온다.

끝이 있으면 그 끝이 화면의 주인이 된다.

지울 수 없다.

그래서 대륙의 화가는 지평선을 지우고 섬의 화가는 지평선을 세운다.

두 번째 차이가 있다.

윌리엄스의 화면에는 사람이 없다.

점이 나무이고 나무가 여럿이다.

변시지의 화면에는 사람이 있다.

노인이 하나다.

작다는 점은 같다.

두 화면 다 인물 혹은 사물이 작다.

그런데 여럿의 작음과 하나의 작음은 다르다.

여럿이 작으면 그것은 무리다.
하나가 작으면 그것은 외로움이다.

점 백 개는 서로를 견딘다.
노인 하나는 혼자 견딘다.

세 번째 차이가 있다.

윌리엄스의 눈은 위에 있다.

내려다본다.

변시지의 눈은 옆에 있다.

마주 본다.

내려다보는 눈에는 사람이 잘 안 보인다.
너무 작아진다.

마주 보는 눈에는 사람이 보인다.

높이를 어디에 두느냐가 무엇을 볼지를 정한다.

다섯

넓은 화면 앞에 서 있다.

황갈색이 끝까지 이어진다.
점들이 흩어져 있다.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오래 본다.

먼 섬의 화면에는 수평선이 있다.

어디를 봐야 할지 알겠다.
그 선을 본다.

그리고 그 위의 작은 배를 본다.

한쪽은 갈 곳을 주지 않고 다른 쪽은 갈 곳을 준다.

두 화면 다 비어 있다.

하나는 끝이 없어서 비고 하나는 끝이 있어서 빈다.

제9장 — 터너, 지워진 여백

하나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다.

화면 가운데가 밝다.
노란 빛이다.

그 빛에서 바깥으로 소용돌이가 퍼진다.

어두운 회색과 갈색이 돌아간다.
붓이 원을 그리며 지나갔다.

아래쪽에 검은 것이 있다.

배일 것이다.

돛대 같은 선이 하나 비스듬히 서 있다.
연기 같은 것이 옆으로 눕는다.

그런데 확실하지 않다.

배의 윤곽이 어디에서 끝나고 물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 모르겠다.

경계가 없다.

물과 공기와 배가 한 덩어리로 섞여 있다.

가까이 가 보자.

물감이 얇다.

문지른 자리가 많다.
붓이 아니라 손이나 천으로 문지른 것 같다.

긁어낸 자리도 있다.
아래 색이 드러나 있다.

칠하기만 한 화면이 아니다.
칠하고 지운 화면이다.

밝은 자리는 물감을 걷어내서 밝다.
흰색을 올린 것이 아니다.

빼서 밝게 만든 것이다.

앞 장들과 다르다.

팔대산인은 붓을 대지 않아 비웠다.
윌리엄스는 같은 것으로 채워 비웠다.

여기서는 그렸다가 없앴다.

지워서 비운 것이다.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는 1775년에 런던에서 태어났다.

이발사의 아들이었다.

집이 넉넉하지 않았다.

어려서 그림에 재주가 있었다.
아버지가 가게에 아들의 그림을 걸어 두고 팔았다고 한다.

열네 살에 왕립미술원에 들어갔다.

아주 빨랐다.

젊어서 이미 인정을 받았다.

처음에는 수채로 시작했다.
건물과 풍경을 정확하게 그렸다.

여행을 많이 했다.

영국을 걸어 다녔고 알프스를 넘었고 이탈리아에 여러 번 갔다.
베네치아를 오래 그렸다.

물이 있는 곳을 좋아했다.

바다와 강과 호수.

나이가 들면서 그림이 바뀌었다.

형태가 점점 줄었다.

젊을 때는 배를 배처럼 그렸다.
나중에는 배가 어디 있는지 찾아야 했다.

빛이 많아지고 사물이 적어졌다.

당대에도 논쟁이 있었다.

너무 흐리다고, 완성이 안 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계속 그 방향으로 갔다.

한번은 눈보라 속의 증기선을 그렸다.

그 그림에 대해 그가 배의 돛대에 몸을 묶고 폭풍을 보았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그 화면을 보면 밖에서 본 폭풍이 아니라 안에서 본 폭풍처럼 보인다.

말년에 그는 기차도 그렸다.

비 오는 날 다리 위를 달리는 기차다.

새로 생긴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1851년에 세상을 떠났다.

작품 대부분을 국가에 남겼다.

남긴 것이 아주 많았다.

유화와 수채와 스케치가 수만 점이었다.

그중 많은 것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그것을 버리지 않았다.

완성과 미완의 경계가 그에게는 흐렸던 것이다.

경계를 흐리게 하는 사람은 자기 작업의 경계도 흐리게 둔다.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잉글랜드의 습기는 형태를 녹인다.

1부에서 우리는 오키프를 보았다.

마른 공기에서 윤곽이 칼처럼 섰다.
먼 것도 선명했다.

여기는 정반대다.

공기에 물기가 많으면 빛이 그 물기에 부딪쳐 흩어진다.

그러면 멀리 있는 것의 경계가 풀린다.
색도 옅어진다.

섬나라의 공기가 그렇다.

바다에 둘러싸여 있으니 습기가 마르지 않는다.

안개와 비와 흐린 날이 많다.

그 땅에서 오래 본 사람의 눈에는 윤곽이 원래 흐린 것이다.

그는 그 흐림을 결점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밀었다.

실제보다 더 흐리게 그렸다.

여기에 이 장의 핵심이 있다.

풍토가 준 것을 그는 과장했다.

풍토가 형식을 낳는다는 말은 화가가 받아 적는다는 뜻이 아니다.

받아서 밀고 나가는 것이다.

땅이 조금 흐리게 보여 주면 화가가 아주 흐리게 만든다.

조건은 방향을 정하고 화가는 거리를 정한다.

여기서 세 가지가 따라온다.

첫째, 여백이 밝다.

팔대산인의 여백은 흰 종이다.
그런데 조용하다.

윌리엄스의 여백은 황갈색이다.
조용하다.

터너의 여백은 빛이다.

밝고 시끄럽다.

빈 자리가 가장 강한 자리가 된다.

보통 여백은 물러난다.
여기서는 여백이 앞으로 나온다.

둘째, 여백이 움직인다.

소용돌이 때문이다.

붓이 원을 그리며 지나갔으니 눈도 돌아간다.

가만히 있는 여백과 도는 여백은 다른 것이다.

가만히 있는 여백은 기다림이다.
도는 여백은 사건이다.

셋째, 여백에 중심이 있다.

이것이 가장 특별하다.

앞의 두 여백에는 중심이 없었다.

종이는 어디나 같고 황갈색 땅도 어디나 같다.

터너의 여백에는 중심이 있다.

빛이 가장 밝은 한 자리가 있고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이 퍼진다.

그러니 이 여백은 비어 있으면서 무엇이다.

빛이 그 자리에 있다.

빈 곳이 가장 실한 곳이 된 것이다.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먼저 닮은 것을 본다.

두 사람 다 바다를 오래 보았다.

터너는 섬나라에서 살았다.
변시지는 섬에서 살았다.

둘 다 물에 둘러싸인 곳이다.

두 사람 다 습한 땅의 화가다.

그리고 두 사람 다 보이지 않는 것을 여백으로 만들었다.

터너의 여백은 빛이다.
변시지의 여백은 바람이다.

빛도 보이지 않고 바람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빛을 보는 것이 아니라 빛이 닿은 것을 본다.
바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흔든 것을 본다.

두 사람 다 그것을 그리지 않고 있게 했다.

이제 차이를 보자.

가장 큰 차이는 바다까지의 거리다.

터너의 바다는 화면을 삼킨다.

물이 가까이 있다.
아주 가까이 있다.

우리가 물속에 있는 것 같다.

변시지의 바다는 멀리 있다.

수평선 근처에 있다.
화면의 위쪽에 얇게 있다.

왜 이렇게 다른가.

서 있는 자리가 다르다.

터너는 배 위에서 보았다.
혹은 물가에 아주 가까이 서서 보았다.

변시지는 언덕에서 보았다.

바다 안에서 본 바다와 바다를 바라보는 바다는 다른 것이다.

그러면 여백의 성질도 달라진다.

터너의 여백은 나를 둘러싼다.

앞뒤와 위아래가 다 그것이다.
빠져나갈 데가 없다.

변시지의 여백은 내 앞에 있다.

저쪽에 있다.
나는 여기에 서 있다.

둘러싸인 여백은 무섭다.
앞에 있는 여백은 외롭다.

무서움과 외로움은 다른 감정이다.

무서움은 지금의 일이고 외로움은 오래된 일이다.

그래서 터너의 화면은 순간처럼 보이고 변시지의 화면은 오랜 시간처럼 보인다.

두 번째 차이가 있다.

배가 다르다.

터너는 증기선을 그렸다.

연기를 내고 물을 가르며 나아간다.
움직이는 배다.

변시지는 조각배를 그렸다.

돛도 잘 보이지 않는다.
떠 있는 배다.

터너의 배는 폭풍과 싸운다.

변시지의 배는 싸우지 않는다.

떠나는 중인지 돌아오는 중인지도 알 수 없다.

서장에서 우리는 제주의 돌담을 보았다.

막지 않고 통과시키는 담이다.

터너의 배는 막는 쪽이고 변시지의 배는 통과시키는 쪽이다.

세 번째 차이가 있다.

터너의 화면에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다.

빛이 사람을 먹어 버린다.

변시지의 화면에는 사람이 있다.

바람이 세도 사람은 남는다.

지워지는 사람과 남는 사람.

한쪽에서 자연은 사람을 삼키고 다른 쪽에서 자연은 사람을 견디게 한다.

여기에 우열은 없다.

삼켜지는 것을 그리는 일도 진실이고 견디는 것을 그리는 일도 진실이다.

다섯

빛이 가운데에 있다.

주위가 돌아간다.
배는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

물러나 보아도 마찬가지다.

먼 섬의 화면에는 언덕이 있다.

바다는 저쪽에 있고 노인은 이쪽에 있다.
조각배가 수평선 가까이 떠 있다.

물러나 보면 더 잘 보인다.

한쪽은 물러나도 흐리고 다른 쪽은 물러나면 분명해진다.

가까이 가면 어떤가.

터너의 화면은 가까이 가면 물감이 보인다.
문지른 자리와 긁어낸 자리.

변시지의 화면은 가까이 가면 선이 보인다.
떨린 자리와 끊긴 자리.

한쪽에서는 지운 흔적이 남고 다른 쪽에서는 그은 흔적이 남는다.

두 화면 다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렸다.

하나는 지워서 그렸고 하나는 남겨서 그렸다.

제10장 — 카푸어, 만들어진 비움

하나

벽에 원이 하나 있다.

붉다.

아주 붉다.
지금까지 본 어떤 붉음보다 붉다.

타마요의 붉음에는 흙이 섞여 있었다.
뭉크의 붉음은 흘러 있었다.

이 붉음은 섞이지 않았다.

순수하다.

가까이 가면 표면이 가루다.

칠한 것이 아니라 뿌린 것이다.
안료 가루가 그대로 얹혀 있다.

만지면 묻을 것이다.

원의 가운데가 이상하다.

더 어둡다.

깊이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림자인지 구멍인지 알 수 없다.

한 걸음 옆으로 가 본다.

옆에서 보아도 같다.
그림자라면 각도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달라지지 않는다.

구멍이다.

벽을 파고 그 안을 어둡게 만든 것이다.

깊이를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다른 방에는 바닥에 검은 원이 있다.

카펫처럼 보인다.
납작해 보인다.

실제로는 바닥을 파낸 구멍이다.

납작해 보이도록 만든 구멍이다.

이런 작업을 사람들은 종종 그림자로 착각한다.

착각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져 있다.

여기서 이 장이 시작된다.

이 비움은 정확하다.

애니시 카푸어는 1954년에 인도에서 태어났다.

뭄바이였다.

아버지는 인도 사람이고 어머니는 이라크에서 온 유대인 집안이었다.

1973년에 런던으로 갔다.

스무 살 무렵이다.

그곳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그곳에 남았다.

지금도 런던에서 일한다.

초기에 그는 안료 가루로 작업했다.

작은 형태들을 만들고 그 위에 색 가루를 뿌렸다.
바닥에도 뿌렸다.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

아주 진한 색이었다.

인도에는 색 가루를 쓰는 오랜 습속이 있다.

의례에 쓰고 이마에 찍고 뿌린다.

그의 색이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다음에 그는 비움으로 갔다.

돌을 깎아 구멍을 냈다.
벽을 파고 바닥을 팠다.

안쪽을 아주 어둡게 만들어 깊이를 지웠다.

거울도 썼다.

오목한 거울, 볼록한 거울.

거대한 거울 조각을 도시의 광장에 세운 것도 있다.

사람들이 그 앞에서 자기를 본다.

한동안 그는 아주 검은 재료를 두고 이야기의 중심에 섰다.

빛을 거의 다 먹는 검은 물질이었다.
그가 미술 분야에서 그것을 쓸 권리를 독점했다.

다른 작가들이 문제를 제기했다.

색을 한 사람이 독점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이 논쟁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이 책은 판정하지 않는다.

다만 기록해 둔다.

그의 작업에서 색과 비움은 만들어지는 것이고, 만들어지는 것은 소유될 수 있다.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그의 비움은 설계된 것이다.

앞의 세 사람을 돌아보자.

팔대산인의 여백은 종이였다.
붓을 대지 않으면 생기는 자리다.

윌리엄스의 여백은 땅이었다.
같은 것이 넓게 이어지면 생기는 자리다.

터너의 여백은 공기였다.
습기가 형태를 녹이면 생기는 자리다.

세 여백 다 조건에서 나왔다.

화가가 무엇을 하기 전에 이미 그 땅에 있던 것이다.

카푸어의 비움은 그렇지 않다.

계산되었다.

각도를 재고 깊이를 정하고 반사율을 맞춘다.

정확히 그만큼 어두워야 깊이가 사라진다.
조금 밝으면 구멍으로 보이고 조금 어두우면 얼룩으로 보인다.

그 사이의 좁은 자리를 찾아 맞춘다.

이것은 공학에 가깝다.

그리고 어느 땅의 비움도 아니다.

런던의 비움이 아니고 뭄바이의 비움도 아니다.

어디에 놓아도 같다.

이것이 이 부의 반증이다.

여백은 풍토 없이도 만들 수 있다.

여기서 두 가지가 따라온다.

첫째, 재료와 형식이 갈라진다.

그의 안료는 인도의 것에 닿아 있다.

그런데 그는 인도에 살지 않는다.

재료는 한 땅에서 오고 형식은 다른 데서 온다.

이 분리가 그의 자리다.

뒤에 볼 고갱과 닮았지만 다르다.

고갱은 남의 땅에 가서 그 땅을 그린다.

카푸어는 자기 땅의 재료를 가지고 남의 땅에서 산다.

방향이 반대다.

둘째, 비움이 지각의 문제가 된다.

풍토의 여백은 어디인지를 말한다.

이 여백은 종이다.
이 여백은 안개다.
이 여백은 바람이다.

카푸어의 비움은 그런 것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림자인가 구멍인가.
평면인가 깊이인가.

눈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지각의 문제다.

그러니 그의 작업은 이 책의 틀 바깥에 있다.

바깥에 있는 것을 안으로 끌어들이지 않는 편이 정직하다.

다만 하나는 말할 수 있다.

뿌리 없음도 조건이 된다.

앞 부에서 추사를 보았다.

풍토를 차단한 자리에서 형식이 나왔다.

카푸어의 경우는 다른 종류다.

두 땅에 걸쳐 있고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조건이다.

그리고 그 조건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비움이 나왔다.

조건이 없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그런 것이다.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이 대면은 앞의 것들과 성격이 다르다.

닮은 것을 찾기 어렵다.

한 사람은 조각을 만들고 다른 사람은 그림을 그렸다.
한 사람은 정밀하고 다른 사람은 손으로 그었다.

그러니 차이부터 보자.

만들어진 비움과 남겨진 여백이다.

카푸어의 비움은 완벽하다.

빈틈이 없다.
계산이 맞아 있다.

변시지의 여백은 어설프다.

붓이 지나간 자리가 남아 있고 색이 고르지 않다.

완벽한 비움 앞에서 사람은 무엇을 보는가.

자기를 본다.

거울이면 얼굴이 보이고 구멍이면 자기 눈이 틀렸다는 것을 안다.

어느 쪽이든 자기에게 돌아온다.

어설픈 여백 앞에서 사람은 무엇을 보는가.

바람을 본다.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저쪽을 본다.

한쪽은 안으로 돌리고 다른 쪽은 밖으로 보낸다.

두 번째 차이가 있다.

카푸어의 작업은 어디에 놓아도 된다.

런던에 놓아도 되고 시카고에 놓아도 되고 서울에 놓아도 된다.

장소가 작품에 들어가 있지 않다.

그래서 어디서나 읽힌다.

변시지의 화면은 제주를 데리고 다닌다.

서울에 걸려도 제주고 도쿄에 걸려도 제주다.

장소가 작품 안에 들어가 있다.

그래서 그 장소를 알면 더 읽힌다.

여기서 1부의 뭉크를 다시 떠올려도 좋다.

「절규」는 어느 땅의 이야기도 아니어서 어느 땅에서나 읽혔다.

같은 구조다.

장소 없는 예술은 넓게 가고 장소 있는 예술은 깊게 간다.

넓게 가는 것과 깊게 가는 것 중 무엇이 나은지는 물을 필요가 없다.

둘 다 있어야 한다.

세 번째 차이가 있다.

카푸어의 비움은 사람을 안에 들이지 않는다.

들여다볼 수는 있다.
들어갈 수는 없다.

들어가면 그것은 이미 비움이 아니다.

변시지의 여백에는 사람이 이미 들어가 있다.

노인이 그 안에 서 있다.

바람이 부는 그 자리에 사람이 있다.

빈 곳에 사람이 없는 화면과 빈 곳에 사람이 있는 화면.

이 차이가 이 부에서 가장 큰 차이다.

여백에 사람이 없으면 여백이 주인이 된다.
여백에 사람이 있으면 사람이 주인이 된다.

카푸어의 비움은 그 자체로 작품이다.

변시지의 여백은 노인을 서 있게 하기 위한 자리다.

목적이 다르다.

다섯

붉은 원 가운데가 어둡다.

깊이를 알 수 없다.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 정확하게 있다.

먼 섬의 화면에는 빈 들이 있다.

들여다보면 바람이 있다.
그리고 노인이 서 있다.

아무것도 없지 않다.

두 비움은 서로 다른 것이다.

만든 비움과 남긴 여백.

빈 곳은 무엇의 자리인가.

이 부에서 네 가지 답이 나왔다.

없어진 것의 자리.
같은 것이 되풀이된 자리.
지워진 것의 자리.
만들어진 자리.

세 번째 문은 이렇게 닫힌다.

빈 곳에도 종류가 있다.

제4부

문법

들어가며

네 번째 문이다.

이 문이 가장 어렵다.

앞의 셋은 눈에 보였다.

색은 보인다.
선도 보인다.
여백도 비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법은 보이지 않는다.

문법은 사물이 아니라 관계다.

무엇을 어디에 놓는가.
무엇을 크게 하고 무엇을 작게 하는가.
어느 것을 앞에 두고 어느 것을 뒤에 두는가.

이런 것들은 화면에 있으면서 보이지 않는다.

말의 문법과 같다.

우리는 말을 하면서 문법을 생각하지 않는다.

어순을 따로 정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나온다.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익힌 것이다.

그래서 문법은 가장 깊이 있는 자리다.

색은 바꿀 수 있다.
물감을 바꾸면 된다.

선도 바꿀 수 있다.
붓을 바꾸면 된다.

문법은 바꾸기 어렵다.

몸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부의 물음은 이것이다.

무엇을 어디에 놓는가.

그리고 그 놓는 방식이 어디에서 왔는가.

이 문 앞에 세 사람이 선다.

피카소는 문법을 부수고 다시 짰다.

레비탄은 지평선의 높이 하나로 뜻을 정했다.

고갱은 배치가 정확했으나 소속이 없었다.

그래서 고갱이 이 부의 반대 증인이다.

문법이 그 땅에서 나오지 않은 경우다.

앞의 부들에서 반대 증인은 명제의 한 자리를 흔들었다.

뭉크는 색이 안에서 나온다고 했다.
추사는 풍토를 차단해도 형식이 나온다고 했다.
카푸어는 여백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고갱은 다른 것을 말한다.

그 땅에 살아도 그 땅의 문법이 나오지 않을 수 있다.

가장 아픈 반증이다.

제11장 — 피카소, 부수고 다시 놓다

하나

얼굴 하나다.

여자의 얼굴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두 눈이 같은 쪽에 있다.

정면에서 본 눈처럼 둘 다 동그란데, 얼굴은 옆을 보고 있다.

코는 옆에서 본 모양이다.
콧날이 선으로 그려져 있다.

입은 정면이다.

한 얼굴 안에 두 방향이 있다.

앞에서 본 것과 옆에서 본 것이 같은 자리에 있다.

색은 면으로 나뉘어 있다.

한쪽 뺨이 노랗고 다른 쪽이 회색이다.
경계가 분명하다.

그림자로 나뉜 것이 아니다.
그냥 나뉘어 있다.

굵은 검은 선이 면들을 가른다.

윤곽선이다.

실제 얼굴에는 윤곽선이 없다.
여기에는 있다.

깊이가 없다.

코가 앞으로 나오지 않는다.
같은 평면에 있다.

배경은 한 색이다.

방인지 밖인지 알 수 없다.

가까이 가면 물감이 고르게 칠해져 있다.

두껍지 않다.
문지른 자리도 없다.

빠르게 칠했지만 정확하다.

앞 부에서 본 터너의 화면과 정반대다.

터너는 경계를 지웠다.
여기서는 경계를 그렸다.

파블로 피카소는 1881년에 스페인 남부에서 태어났다.

말라가다.

지중해에 붙어 있는 도시다.

아버지가 그림을 가르치는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렸다.
아주 잘 그렸다.

열 몇 살에 이미 어른처럼 그렸다.

바르셀로나로 갔고 마드리드에도 있었다.

1900년 무렵 파리로 갔다.

가난했다.

파란색으로 그린 시기가 있다.
마르고 굶은 사람들을 그렸다.

그다음에 분홍이 섞인 시기가 있다.

1907년에 큰 화면 하나를 그렸다.

여자 다섯이 있는 그림이다.

얼굴 몇 개가 가면처럼 생겼다.

그 무렵 그는 아프리카와 이베리아의 조각을 보았다.

박물관에서 보았고 화실에 두기도 했다.

그 조각들은 사람을 닮게 만들지 않았다.
사람을 다르게 만들었다.

눈이 크고 코가 곧고 얼굴이 납작하다.

그것이 서툰 것이 아니라 다른 문법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 뒤 몇 해 동안 그는 형태를 조각냈다.

사물을 여러 면으로 쪼개고 다시 놓았다.

한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본 것을 한 화면에 겹쳤다.

이것을 뒤에 사람들이 큐비즘이라 불렀다.

그는 오래 살았다.

아흔이 넘게 살았고 죽을 때까지 그렸다.

방식을 여러 번 바꿨다.

고전적으로 그린 시기가 있고 다시 부순 시기가 있다.

1937년에 큰 회색 화면을 그렸다.

스페인의 한 마을이 폭격당한 일을 그린 것이다.

소와 말과 사람이 뒤엉켜 있고 위에 램프가 있다.

색이 없다.
회색과 검정과 흰색뿐이다.

만년에는 남프랑스에서 살았다.

도자기를 만들고 판화를 찍었다.

1973년에 세상을 떠났다.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이 장은 조심해서 써야 한다.

피카소를 풍토로 설명하려 하면 무리가 생긴다.

그는 파리에서 그림을 만들었다.
스페인이 아니라 파리다.

그리고 그의 방식은 세계로 퍼졌다.

어느 한 땅에 묶이지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 묻는 편이 정확하다.

그가 문법을 부술 수 있었던 조건은 무엇이었는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빛이다.

지중해의 빛은 세다.

빛이 세면 그림자가 진해진다.

그러면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딱 갈린다.
중간이 얇아진다.

정오의 강한 빛 아래에서 사람의 얼굴은 입체로 보이지 않는다.
면으로 잘려 보인다.

북쪽의 흐린 빛에서는 다르다.

빛이 부드러우니 밝음에서 어두움으로 천천히 넘어간다.
그것이 입체가 된다.

북쪽 회화가 명암과 입체에 강한 이유가 여기 있다.

앞 부의 터너는 그 흐린 빛에서 형태를 녹였다.

남쪽에서는 형태가 녹지 않는다.
잘린다.

잘린 면을 다시 배열하는 일은 남쪽의 눈에 자연스럽다.

둘째는 겹침이다.

이것이 더 중요하다.

스페인 남부는 여러 문화가 지나간 땅이다.

로마가 있었고 이슬람이 오래 있었고 유대인이 살았다.
바다 건너 아프리카가 가깝다.

한 도시 안에 여러 시대의 건물이 있다.

이슬람의 장식은 사람의 형상을 만들지 않았다.
기하 무늬로 갔다.

그 옆에 성당의 조각이 있다.

같은 자리에 두 가지 문법이 있는 것이다.

그런 땅에서 자란 사람은 문법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것을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냥 알게 된다.

문법이 하나뿐이라고 믿는 사람은 그것을 부수지 못한다.
부술 것이 있다는 생각을 못 한다.

여러 개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 부순다.

여기서 세 가지가 따라온다.

첫째, 강한 빛이 평면을 낳는다.

앞의 부들에서 우리는 이 논지를 여러 번 만났다.

타마요의 화면에 깊이가 없었다.
오키프의 화면에도 없었다.

두 땅 다 마르고 빛이 셌다.

피카소도 그 계열에 있다.

지중해와 멕시코와 뉴멕시코가 한 줄에 놓인다.

강한 빛의 회화는 평면으로 간다.

둘째, 겹친 문화가 복수의 문법을 낳는다.

서장에서 우리는 풍토의 범위를 정했다.

전쟁도 풍토가 되고, 여러 문화가 지나간 자리도 풍토가 된다고 했다.

이 장이 두 번째 경우다.

그 자리에서 자란 사람의 몸에는 하나 이상의 문법이 들어 있다.

셋째, 부수는 일에는 문법이 필요하다.

그는 아주 잘 그릴 수 있었다.

열 몇 살에 이미 정확하게 그렸다.

그 정확함이 있어야 부술 수 있다.

문법을 모르는 사람이 어긋나게 쓰면 그것은 실수다.
문법을 아는 사람이 어긋나게 쓰면 그것은 형식이다.

같은 화면이 실수도 되고 형식도 된다.

무엇이 그것을 가르는가.

옆의 것이 정확한지가 가른다.

3부의 첫머리에서 우리는 같은 말을 했다.

여백은 그 옆의 것이 증명한다.

부순 문법도 그 옆의 것이 증명한다.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이 대면은 대립이 선명하다.

피카소는 문법을 부수었다.
변시지는 문법을 지켰다.

변시지의 화면 문법은 아주 단순하다.

수평선 하나가 화면을 위아래로 나눈다.
아래가 땅이고 위가 하늘이다.

사람은 대개 아래쪽에 서 있다.

멀리 있는 것은 작고 가까운 것은 크다.

깨진 데가 없다.

부순 것이 아니라 줄인 것이다.

여기에 이 대면의 핵심이 있다.

부수는 것과 줄이는 것은 둘 다 단순해지는 길이다.

그런데 결과가 반대다.

부수면 낯설어진다.

두 눈이 한쪽에 있는 얼굴은 낯설다.
처음 보는 것이 된다.

줄이면 익숙해진다.

수평선과 사람 하나만 있는 화면은 익숙하다.
누구나 아는 배치다.

낯설게 만들면 다시 보게 되고 익숙하게 만들면 오래 보게 된다.

다시 보는 것과 오래 보는 것은 다른 일이다.

왜 한 사람은 부수고 다른 사람은 줄였는가.

땅이 달랐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땅에는 문법이 여럿 겹쳐 있었다.

겹친 자리에서는 부술 수 있다.
부술 것이 여러 개 있으니 어느 하나에 매이지 않는다.

변시지가 돌아온 섬에는 문법이 하나 있었다.

바람이 하나이고 바다가 하나이고 수평선이 하나다.

여럿이 없는 땅에서는 부술 수 없다.

부수면 남는 것이 없다.

그러니 줄이는 쪽으로 간다.

하나뿐인 것을 더 정확하게 놓는 쪽으로 간다.

두 번째 차이가 있다.

피카소는 방식을 여러 번 바꿨다.

파란 시기와 큐비즘과 고전적인 시기와 만년의 도자기.

한 사람의 작업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 다르다.

변시지는 한 방식을 오래 지켰다.

제주에 간 뒤 서른여덟 해 동안 같은 방향으로 갔다.

바꾸는 사람과 지키는 사람이다.

여기에 우열은 없다.

바꾸는 사람은 넓어지고 지키는 사람은 깊어진다.

넓어지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고 깊어지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세 번째로 볼 것이 있다.

두 사람 다 폭력을 그렸다.

피카소는 폭격당한 마을을 그렸다.

날짜가 있는 사건이다.
어느 해 어느 달의 일이다.

변시지는 폭풍을 그렸다.

그리고 훗날 구술에서 폭풍은 날씨가 아니라 저항이라고 말했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구술사, 2004–2005, 171쪽)

날짜가 없다.

사건이 아니라 상태다.

사건을 그리면 그 사건을 아는 사람이 읽는다.
상태를 그리면 그 상태를 겪는 사람이 읽는다.

사건은 끝나고 상태는 이어진다.

그래서 한쪽 화면은 증언이 되고 다른 쪽 화면은 견딤이 된다.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증언이 없으면 잊히고 견딤이 없으면 살 수 없다.

다섯

얼굴에 두 방향이 있다.

앞에서 본 것과 옆에서 본 것이 함께 있다.

한 사람을 한 번에 다 보려 한 것이다.

먼 섬의 화면에는 노인이 등을 보이고 있다.

한 방향뿐이다.

앞은 보이지 않는다.

한쪽은 다 보려 했고 다른 쪽은 덜 보여 주었다.

다 보면 알게 되고 덜 보면 남는다.

두 화면 다 사람을 그렸다.

놓는 방식이 달랐다.

제12장 — 레비탄, 지평선의 높이

하나

가로로 넓은 화면이다.

아래쪽에 길이 있다.

넓은 흙길이다.
바퀴 자리가 두 줄로 나 있다.

그 옆으로 좁은 길이 또 하나 붙어 있다.

사람이 걸어서 만든 길이다.

길은 화면 왼쪽 아래에서 시작해 오른쪽 위로 멀어진다.

멀어지면서 좁아진다.

그리고 지평선에서 사라진다.

지평선이 낮다.

화면의 아래 삼분의 일쯤에 있다.

그 위는 다 하늘이다.

하늘이 화면의 대부분이다.

구름이 있다.

무겁다.
회색과 흰색이 섞여 있다.

비가 올 것 같기도 하고 방금 그친 것 같기도 하다.

들판은 마르고 누렇다.

풀이 낮다.

멀리 아주 작게 무엇이 있다.

교회의 지붕 같기도 하고 나무 같기도 하다.

사람이 없다.

길이 있는데 걷는 사람이 없다.

이 화면에서 가장 이상한 것이 그것이다.

길은 사람이 걸어서 생긴다.

걷지 않으면 길이 없어진다.

그러니 이 길에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 없을 뿐이다.

이사크 레비탄은 1860년에 태어났다.

지금의 리투아니아 땅이다.

당시 러시아 제국의 서쪽이었다.

유대인 집안이었다.

가난했다.

모스크바로 옮겨 갔다.

열 몇 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그다음에 아버지도 떠났다.

혼자 남았다.

회화학교에 다녔다.

수업료를 낼 수 없어 면제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먹을 것과 잘 곳이 없던 때가 있었다.

학교 안에서 몰래 잔 적도 있다고 전해진다.

그림에는 재주가 있었다.

풍경을 그렸다.

러시아의 들과 강과 숲을 그렸다.

작가 체호프와 친구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작업을 알았다.

1892년에 그는 모스크바에서 쫓겨났다.

유대인을 도시에서 내보내는 조치가 있었다.

이름이 알려진 화가였는데도 그랬다.

시골에 머물다 나중에 돌아왔다.

그 무렵에 그는 한 길을 그렸다.

시베리아로 가는 길이었다.

유배되는 사람들이 걸어서 간 길이다.

그 그림에 사람을 그리지 않았다.

길만 그렸다.

1900년에 세상을 떠났다.

마흔이었다.

심장이 좋지 않았다.

짧게 살았고 많이 그렸다.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넓고 평평한 땅에서는 지평선의 높이가 문법이 된다.

러시아의 많은 곳은 평평하다.

산이 없다.

시야를 막는 것이 없다.

그러면 화면에서 정할 것이 하나로 줄어든다.

지평선을 어디에 둘 것인가.

이것 하나가 그림의 뜻을 정한다.

지평선을 높이면 땅이 넓어진다.

땅의 일이 중심이 된다.
걷고 일하고 사는 일이다.

지평선을 낮추면 하늘이 넓어진다.

하늘의 일이 중심이 된다.
날씨와 시간과 지나감이다.

그는 대개 낮췄다.

하늘을 크게 두었다.

여기서 8장의 윌리엄스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윌리엄스도 넓은 땅의 화가였다.

그런데 그는 지평선을 없앴다.

같은 넓은 땅에서 한 사람은 지평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은 지웠다.

왜 다른가.

하늘이 다르기 때문이다.

호주 내륙의 하늘은 대개 밝고 한결같다.

구름이 적고 색이 변하지 않는다.

말이 없는 하늘이다.

말이 없으면 그릴 것이 없다.

그러니 지운다.

러시아의 하늘은 변한다.

구름이 두껍게 몰려오고 계절이 크게 바뀐다.

겨울이 길고 봄이 갑자기 온다.

하늘에서 일이 일어난다.

일이 일어나는 곳은 크게 그린다.

하늘이 말을 하는 땅과 하늘이 말이 없는 땅.

같은 넓이가 다른 문법을 낳는다.

여기서 세 가지가 따라온다.

첫째, 지평선의 높이가 뜻이 된다.

이것은 아주 작은 결정이다.

선 하나를 위로 올릴지 아래로 내릴지의 문제다.

그런데 그 결정이 그림의 전부를 정한다.

문법이 그런 것이다.

작고 눈에 안 보이는데 전체를 정한다.

둘째, 길이 시간이 된다.

길은 공간이면서 시간이다.

저 끝까지 가려면 며칠이 걸린다.

그러니 길을 그리면 며칠을 그린 것이 된다.

그리고 그 길이 유배의 길이면 시간의 뜻이 달라진다.

돌아오지 못하는 시간이 된다.

셋째, 사람 없이 사람을 말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가장 강한 방법이다.

길에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보인다.

없는 것으로 있는 것을 말한 것이다.

3부에서 우리는 여백을 보았다.

여기서는 여백이 아니라 부재다.

빈 자리가 아니라 없는 사람이다.

그리려면 그릴 수 있었다.

그리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리면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고, 그리지 않으면 걸어간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된다.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먼저 닮은 것을 본다.

두 사람 다 한 줄의 선을 화면의 주인으로 삼았다.

레비탄은 지평선이고 변시지는 수평선이다.

두 화면 다 그 선 하나가 위아래를 나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그 선을 낮게 두는 일이 많다.

하늘을 크게 둔다.

두 번째 닮음이 있다.

두 사람 다 유배를 다루었다.

레비탄은 유배자들이 걸어간 길을 그렸다.

그리고 그 자신이 도시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

남의 유배를 그리면서 자기 자리를 그린 것일 수 있다.

변시지의 뿌리 문장은 이렇다.

삶은 유배요, 예술은 축복이다.

제도의 유배가 아니라 삶의 조건으로서의 유배다.

두 사람 다 쫓겨난 자리에서 그렸다.

세 번째 닮음이 있다.

두 사람 다 마른 색을 썼다.

러시아의 마른 들과 제주의 마른 풀.

누런 기가 도는 낮은 색이다.

이제 차이를 보자.

가장 큰 차이는 그 선의 성질이다.

레비탄의 지평선은 땅의 끝이다.

땅이 계속 이어지다가 눈에 안 보이는 자리다.

그 자리까지 걸어갈 수 있다.

걸어가면 그 자리에 또 다른 지평선이 있다.

변시지의 수평선은 바다의 끝이다.

걸어갈 수 없다.

배를 타야 하고, 배를 타도 그 선에 닿지 않는다.

대륙의 끝과 섬의 끝이 이렇게 다르다.

대륙의 지평선은 약속이다.

저쪽에 무엇이 있고 갈 수 있다.

가는 데 며칠이 걸리더라도 갈 수 있다.

섬의 수평선은 벽이다.

저쪽에 무엇이 있는데 갈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가 겹친다.

제주에는 이어도 이야기가 있다.

바다 어딘가에 있다는 섬이다.

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화백은 그 섬에 관한 글을 손으로 남겼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구술사, 2004–2005, 23–26쪽)

그러니 그 수평선은 벽이면서 약속이다.

갈 수 없는데 저쪽에 무엇이 있다고 믿는다.

이 겹침이 섬의 조건이다.

대륙의 유배는 걸어가는 것이고 섬의 유배는 머무는 것이다.

두 번째 차이가 있다.

레비탄은 사람을 지웠다.

길만 남기고 사람을 뺐다.

변시지는 사람을 세웠다.

빈 들에 노인 하나를 두었다.

방법이 반대다.

한쪽은 없애서 말하고 다른 쪽은 남겨서 말한다.

없애면 모두의 이야기가 되고 남기면 한 사람의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결과가 비슷해진다.

레비탄의 빈 길에서 우리는 걸어간 사람들을 본다.

변시지의 노인에게서 우리는 남은 사람들을 본다.

한 사람을 그렸는데 여럿이 보인다.

얼굴이 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 차이가 있다.

두 사람이 가진 시간의 길이가 달랐다.

레비탄은 마흔에 세상을 떠났다.

변시지는 여든일곱까지 살았다.

제주에서만 서른여덟 해를 그렸다.

짧은 시간에 이룬 것과 긴 시간에 이룬 것은 성질이 다르다.

짧으면 밀도가 생기고 길면 층이 생긴다.

레비탄의 화면은 한 번에 온다.
변시지의 화면은 여러 번 와야 온다.

여기에 우열은 없다.

주어진 시간이 달랐다.

다섯

길이 멀어지다가 사라진다.

걷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걸어간 사람들이 보인다.

먼 섬의 화면에는 수평선이 있다.

그 위에 조각배가 하나 떠 있다.

타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한쪽에는 길이 있고 사람이 없다.
다른 쪽에는 배가 있고 사람이 없다.

두 화면 다 떠난 사람의 자리다.

한 줄의 선이 그것을 정했다.

제13장 — 고갱, 소속 없는 배치

하나

여자 둘이 앉아 있다.

땅에 앉아 있다.

몸이 크다.
팔과 다리가 굵다.

옷은 붉거나 흰 천이다.

배경을 보자.

납작하다.

나무가 있는데 나무처럼 서 있지 않다.
무늬처럼 놓여 있다.

땅이 분홍이다.

실제 땅은 분홍이 아니다.

풀은 붉은 기가 돈다.

깊이가 없다.

앞의 인물과 뒤의 나무가 같은 평면에 있다.

굵은 윤곽선이 형태를 둘러싸고 있다.

색면과 색면 사이에 검거나 파란 선이 있다.

앞 장의 피카소 화면과 닮았다.

윤곽선과 평면.

그런데 다른 점이 있다.

피카소는 형태를 쪼갰다.

여기서는 쪼개지 않았다.

형태가 온전하다.
그냥 납작하다.

인물의 자세를 보자.

한 사람이 정면을 본다.

우리를 본다.

눈이 크고 표정이 없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

다른 한 사람은 옆을 본다.

두 사람 다 가만히 있다.

움직이지 않는다.

시간이 멈춘 것 같다.

폴 고갱은 1848년에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 몇 해를 페루에서 보냈다.

어머니 쪽 친척이 있었다.

프랑스로 돌아와 자랐다.

젊어서 배를 탔다.

상선과 해군에 있었다.

그다음에 파리에서 증권 일을 했다.

돈을 벌었고 결혼했고 아이가 여럿이었다.

취미로 그림을 사고 그렸다.

서른 몇 살에 그 일을 그만두었다.

그림만 하기로 했다.

경제가 나빠져 일자리가 흔들린 것도 이유였다.

가족과 멀어졌다.

브르타뉴로 갔다.

프랑스 서쪽의 시골이다.

퐁타방이라는 마을에 화가들이 모여 있었다.

거기서 그의 방식이 만들어졌다.

이것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납작한 색면, 굵은 윤곽선, 실제와 다른 색.

이 문법이 브르타뉴에서 나왔다.

타히티에 가기 전이다.

한동안 아를에서 고흐와 함께 지냈다.

두 달쯤이었다.

잘 끝나지 않았다.

1891년에 타히티로 갔다.

마흔셋이었다.

두 해쯤 있다가 프랑스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잘 되지 않았다.

1895년에 다시 떠났다.

이번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더 먼 섬으로 옮겼다.

1903년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그는 그 땅에 있었다.

그런데 그 땅이 그의 문법을 낳지 않았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

이 책은 풍토가 형식을 낳는다고 말한다.

고갱은 십 년 넘게 남태평양에 살았다.

그곳에서 죽었다.

머문 시간으로 보면 충분하다.

그런데 그의 문법은 그곳에서 나오지 않았다.

브르타뉴에서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납작한 색면과 굵은 윤곽선.

그것을 가지고 갔다.

타히티는 그 문법에 새 소재를 주었다.

문법을 준 것이 아니다.

이 구별이 이 장의 핵심이다.

소재와 문법은 갈라진다.

야자수를 그리면 소재가 남국이다.

그런데 야자수를 어떻게 놓는가는 다른 문제다.

서장에서 우리는 지역색과 형식을 갈랐다.

지역색은 소재의 문제라고 했다.

고갱은 그 구별이 필요한 이유를 보여 준다.

그는 소재를 바꿨고 문법을 바꾸지 않았다.

왜 바꾸지 않았는가.

견디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장의 두 번째 논지다.

그는 그 땅을 찾아갔다.

찾아가는 사람에게는 선택이 있다.

가고 싶어 갔고, 돌아오고 싶어 돌아왔고, 다시 가고 싶어 다시 갔다.

두 번 왔다 갔다 했다.

견딤에는 선택이 없다.

바람이 부는 곳에 사는 사람은 바람을 고르지 않는다.

고를 수 없는 것이 몸을 바꾼다.

고를 수 있는 것은 몸을 바꾸지 않는다.

여기서 조심할 자리가 있다.

그가 그린 타히티는 실제 타히티가 아니었다.

그가 간 때 그곳은 이미 오래 식민지였다.

교회가 있었고 관청이 있었고 병이 퍼져 있었다.

그가 찾던 손대지 않은 낙원은 없었다.

그는 없는 것을 그렸다.

혹은 있었으면 하는 것을 그렸다.

그러니 그의 화면은 그 땅의 그림이 아니라 그가 바라던 것의 그림이다.

이것은 이 책이 판정할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논의가 계속되는 자리다.

다만 구조는 적어 둘 수 있다.

바라본 것과 겪은 것은 다르다.

바라본 땅은 아름답게 나오고 겪은 땅은 마르게 나온다.

여기서 세 가지가 따라온다.

첫째, 소재와 문법은 분리된다.

소재는 옮길 수 있다.
문법은 옮기기 어렵다.

그런데 반대도 성립한다.

문법을 가지고 가서 새 소재에 씌울 수 있다.

그러면 그 땅의 그림처럼 보이지만 그 땅의 그림이 아니다.

둘째, 체류는 견딤이 아니다.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선택의 유무가 견딤을 정한다.

십 년을 살아도 언제든 떠날 수 있으면 견딘 것이 아니다.

셋째, 소속 없이도 위대한 형식이 나온다.

이것을 분명히 말해야 한다.

그의 문법은 진정한 성취다.

납작한 색면과 굵은 윤곽선은 이후 회화를 바꿨다.

앞 장의 피카소도 그것을 보았다.

그가 없었으면 다음 세대의 그림이 달랐을 것이다.

풍토 없이도 큰 형식이 나온다.

2부의 추사가 같은 자리에 있었다.

다만 방식이 다르다.

추사는 풍토를 차단해서 갔다.
고갱은 풍토를 옮겨 다니면서 갔다.

한쪽은 안으로 닫고 다른 쪽은 밖으로 열었다.

두 길 다 이 책의 명제 바깥에서 성립한다.

바깥이 있다는 것을 아는 편이 정직하다.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이 대면이 이 책에서 가장 날카롭다.

두 사람 다 섬으로 갔다.

두 사람 다 중년에 갔다.

고갱은 마흔셋에 타히티로 갔다.
변시지는 마흔아홉에 제주로 갔다.

두 사람 다 그전에 다른 곳에서 화가였다.

그런데 결과가 정반대다.

첫째, 남의 섬과 자기 섬이다.

고갱은 남의 섬에 갔다.

그곳에 그의 조상이 없다.
그곳 말을 다 알지 못했다.

변시지는 자기 섬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에 떠났다가 마흔네 해 만에 돌아왔다.

돌아온 것이지 간 것이 아니다.

둘째, 찾으러 간 것과 받아들이러 간 것이다.

고갱은 낙원을 찾으러 갔다.

없는 것을 찾으러 간 것이다.

찾는 사람은 실망한다.

찾던 것이 없으면 다시 떠난다.

그래서 그는 더 먼 섬으로 옮겼다.

변시지는 찾으러 간 것이 아니다.

돌아갈 곳이 거기였다.

받아들이는 사람은 실망하지 않는다.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기대가 없으면 있는 것이 보인다.

셋째, 색이 반대다.

고갱의 타히티는 밝다.

분홍과 붉음과 초록이 세다.

변시지의 제주는 낮다.

마른 풀잎색이다.

같은 섬인데 왜 이렇게 다른가.

하나는 바라던 섬이고 하나는 사는 섬이다.

바라던 섬은 색이 화려하다.

가 보지 못한 곳은 언제나 화려하다.

사는 섬은 색이 낮다.

매일 보는 것은 화려할 수 없다.

이것이 이 장의 가장 중요한 대비다.

넷째, 인물의 방향이 반대다.

고갱의 인물은 우리를 본다.

정면으로 앉아 눈을 크게 뜨고 있다.

보여지기 위해 놓인 자리다.

누가 보는가.

그 그림을 살 파리의 사람들이다.

변시지의 노인은 등을 보인다.

혹은 고개를 숙인다.

보여지지 않는다.

보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은 자리다.

보여주는 인물과 등 돌린 인물.

그 차이가 두 화가의 자리를 말한다.

한 사람은 그 섬에서 그림을 보내야 했다.

다른 사람은 보낼 곳이 없었다.

다섯째, 끝이 다르다.

고갱은 돌아가려 했다가 돌아가지 못했다.

먼 섬에서 세상을 떠났다.

변시지는 돌아왔고 남았다.

같은 섬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쪽은 못 돌아간 것이고 다른 쪽은 돌아온 것이다.

이제 위계를 두지 않고 말해야 한다.

고갱이 그 땅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그의 잘못만은 아니다.

속하는 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태어난 곳이 아니면 속하기 어렵다.

그리고 속하지 않은 자리에서도 그림은 나온다.

다만 다른 그림이 나온다.

바라본 그림이 나온다.

바라본 그림에도 진실이 있다.

찾지 못한 사람의 진실이다.

그것도 사람의 일이다.

다섯

여자 둘이 앉아 있다.

땅이 분홍이고 나무가 무늬처럼 서 있다.

한 사람이 우리를 본다.

그 눈은 무엇을 묻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림을 그린 사람은 그 섬에서 죽었다.

돌아가려 했으나 돌아가지 못했다.

먼 섬의 화면에는 노인이 등을 보이고 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은 그 섬에서 죽었다.

돌아와서 남았다.

두 사람 다 섬에서 끝났다.

한 사람은 못 돌아가서 남았고 다른 사람은 돌아와서 남았다.

무엇을 어디에 놓는가.

놓는 손이 그 땅에 속해 있는지가 문법을 정한다.

네 번째 문은 이렇게 닫힌다.

제5부

물질성

들어가며

다섯 번째 문이다.

앞의 네 문은 눈으로 지나왔다.
색을 보고 선을 보고 여백을 보고 배치를 보았다.

이 문은 손으로 지난다.

무엇으로 그렸는가.
그 물음이다.

물감은 색이면서 물질이다.

색으로 보면 화면 위에 얇게 얹혀 있다.
물질로 보면 화면 위에 쌓여 있다.

쌓인 것에는 두께가 있다.
두께에는 그림자가 생긴다.

그림이 스스로 빛을 받기 시작한다.

재료는 대개 그 땅에서 구한다.
멀리서 사 오는 물감도 있지만, 화가가 손에 익힌 것은 가까이 있던 것이다.

흙과 재.
짚과 돌.
납과 얼음.

이 문 앞에 세 사람이 선다.

키퍼는 땅을 화면으로 옮겼다.
골즈워디는 화면을 땅에 두었다.
반 고흐는 물감 자체를 물질로 만들었다.

세 방향이 갈린다.
그리고 세 방향이 모두 풍토에 닿아 있다.

이 부에는 반대 증인이 없다.

앞의 네 부에는 명제를 흔드는 사람이 하나씩 있었다.
색에는 뭉크가 있었고 선에는 추사가 있었다.
여백에는 카푸어가 있었고 문법에는 고갱이 있었다.

여기에는 없다.

물질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흙은 흙이고 납은 납이다.
어디에서 왔는지 숨기지 못한다.

제14장 — 키퍼, 재가 된 땅

하나

큰 화면이다.

사람보다 높고 팔을 벌린 것보다 넓다.
가까이 서면 화면이 아니라 벽처럼 느껴진다.

한 걸음 물러나야 전체가 보인다.
그런데 물러나면 표면이 안 보인다.

이 그림은 두 거리를 요구한다.
멀리서 보는 거리와 가까이서 보는 거리.

먼저 멀리서 본다.

밭이 보인다.
고랑이 화면 아래에서 위로 좁아지며 멀어진다.

그런데 자란 것이 없다.
고랑만 있고 작물이 없다.

하늘은 없다.
화면 위쪽까지 흙이 올라와 있다.

멀리 보이는 것은 지평선이 아니라 흙의 끝이다.

이제 가까이 간다.

표면에 짚이 붙어 있다.
마른 짚이다.
색이 빠지고 부스러질 듯하다.

그림에 붙은 짚이 아니라 그림이 된 짚이다.

그 아래에 재가 깔려 있다.
회색이지만 회색만은 아니다.
탄 것의 색이다.

물감이 두껍다.
갈라진 곳이 있다.
마르면서 스스로 금이 갔다.

금은 화가가 그린 것이 아니다.
재료가 만든 것이다.

측면에서 보면 표면이 울퉁불퉁하다.
전시장의 조명이 그 위에 작은 그림자를 만든다.

그림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지금 이 자리의 빛이 만든 것이다.

조명을 옮기면 그림자도 옮겨진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매번 조금씩 다르다.

그림이 시간을 견딘 흔적을 이미 갖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견디고 있다.

안젤름 키퍼는 1945년에 태어났다.

전쟁이 끝난 해다.
독일 남서부의 작은 도시였다.

그가 처음 본 세계는 폐허였다.
무너진 건물, 치운 돌더미, 빈 자리.

아이는 그것을 폐허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저 세계라고 부른다.

무너진 것이 정상인 세계에서 자란 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온전한 것을 나중에 배운다.

여기서 한 가지를 생각해 두어야 한다.

풍토를 자연 조건으로만 보면 키퍼는 설명되지 않는다.
독일의 기후나 지형은 그의 화면과 별로 관계가 없다.

그의 땅은 역사가 지나간 땅이다.

풍토에는 두 겹이 있다.
자연이 만든 겹과 사람이 만든 겹.

바람은 자연이 만든다.
폐허는 사람이 만든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구분이 없다.
둘 다 그냥 거기 있었던 것이다.

전쟁도 풍토가 된다.
한 세대가 그 위에서 나고 자라면 그렇게 된다.

서장에서 넓힌 명제가 여기서 가장 분명해진다.

그 땅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도 풍토다.

제주를 읽을 때도 이 넓힘이 필요하다.
바람만으로는 다 읽히지 않는다.

키퍼는 처음에 법을 공부했다.
그다음에 그림으로 옮겼다.

젊은 시절에 그는 사진 작업을 했다.
여러 장소에서 지난 시대의 인사를 하는 자신을 찍었다.

1969년이었다.

많은 사람이 불편해했다.
지금도 그 작업은 논쟁거리다.

그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는 여러 갈래로 읽힌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독일 미술이 오래 피해 온 자리로 걸어 들어갔다.

그 시절 독일에서 신화와 역사는 다루기 어려운 재료였다.
누가 그것을 어떻게 썼는지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퍼는 피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쉬운 길이 아니었다.
칭찬만 받지도 않았다.

앞선 세대에 요제프 보이스가 있었다.
보이스는 펠트와 기름을 썼다.
물감이 아닌 것으로 작업하는 길을 먼저 냈다.

키퍼는 그 길에서 더 갔다.

보이스가 재료를 골랐다면 키퍼는 재료로 땅을 옮겼다.

그는 시를 오래 읽었다.

파울 첼란의 시에서 두 여자의 이름을 가져왔다.
마르가레테와 줄라미트.

한쪽은 금빛 머리카락이고 다른 쪽은 재빛 머리카락이다.

첼란은 독일어로 썼다.
그 언어로 쓰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언어로 쓰는 일이 쉽지도 않았다.

키퍼는 금빛 자리에 짚을 붙였다.
재빛 자리에는 재를 놓았다.

비유를 물질로 바꾼 것이다.

시에서 읽은 것을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만들었다.

이것이 그의 방법이다.
말로 된 것을 물질로 되돌린다.

훗날 그는 프랑스로 작업장을 옮겼다.
넓은 땅에 건물과 통로를 짓고 그 안에 작품을 두었다.

그림을 걸 곳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림이 살 곳을 만들었다.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키퍼는 땅을 그리지 않았다.
땅을 옮겼다.

흙을 화면에 발랐다.
짚을 붙였다.
납을 녹여 얹었다.
재를 뿌렸다.

재현이 아니라 이동이다.

풍경화는 땅을 보고 그린다.
땅은 화면 밖에 있고, 화면 안에는 그 모습만 있다.

키퍼의 화면에는 모습이 아니라 것이 있다.
흙의 모습이 아니라 흙이 있다.

이렇게 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네 가지가 달라진다.

첫째, 시간이 화면 안으로 들어온다.

물감은 마르면 멈춘다.
흙과 짚은 마른 뒤에도 계속 변한다.

색이 빠지고 부스러지고 떨어진다.

그림이 늙는다.
사람처럼 늙는다.

보통 그림에서 시간은 그려지는 것이다.
저녁이거나 겨울이거나 노년이다.

키퍼의 화면에서 시간은 그려지지 않는다.
일어난다.

둘째, 무게가 생긴다.

큰 화면은 옮기기 어렵다.
납이 얹힌 화면은 더 어렵다.

그림이 장소를 갖게 된다.
쉽게 움직일 수 없으니 그 자리에 머문다.

가벼운 그림은 세계를 돌아다닌다.
무거운 그림은 사람을 오게 한다.

방향이 반대다.

셋째, 재료가 뜻을 품는다.

납은 무겁고 독이 있다.
연금술에서 납은 금이 되기 전의 물질이다.
아직 되지 않은 것, 기다리는 것.

재는 무엇이 있었다는 증거다.
탄 것이 없으면 재도 없다.
재는 부재의 물질적 형태다.

짚은 곡식의 나머지다.
알곡을 거둔 뒤에 남는 것.
쓸모를 다한 뒤에 남은 몸.

이 재료들을 골랐다는 것 자체가 문장이다.

넷째, 그림이 만지고 싶어진다.

미술관은 만지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표면이 손을 부른다.

보는 그림과 만지고 싶은 그림은 다른 종류다.

만지고 싶어지는 순간 그림은 사물이 된다.
사물이 되면 우리와 같은 자리에 놓인다.

그림을 올려다보는 대신 그림과 나란히 서게 된다.

그러니까 키퍼에게 물질성은 기법이 아니다.
말하는 방식이다.

독일의 땅은 무엇을 태웠고 무엇을 묻었는가.
그 물음을 그림이 재료로 되묻는다.

말로 물으면 논쟁이 된다.
재료로 물으면 남는다.

논쟁은 끝나고 재는 남는다.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키퍼의 화면과 크기가 다르다.
대개 사람 키보다 작다.
품에 안을 수 있는 것도 많다.

두께도 다르다.
키퍼의 화면은 두껍고 변시지의 화면은 얇다.

그런데 두 사람은 같은 것을 다룬다.
견딤이다.

키퍼는 견딘 땅을 화면으로 옮겼다.
변시지는 견디는 몸을 화면에 세웠다.

키퍼가 독일의 폐허를 그렸다면, 변시지는 제주의 바람을 그렸다.

방향이 반대다.

키퍼는 쌓는다.
흙과 재와 납을 올린다.
화면이 무거워진다.

변시지는 덜어낸다.
구름을 지우고 길을 지우고 집을 지운다.
화면이 가벼워진다.

무거워진 화면과 가벼워진 화면이 같은 것을 말한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땅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독일의 폐허는 쌓인 것이다.
무너진 것들이 층으로 남았다.
파면 나온다.

제주의 바람은 쌓이지 않는다.
지나간다.
지나가면서 깎는다.

쌓인 땅에서는 쌓는 형식이 나오고, 깎이는 땅에서는 덜어내는 형식이 나온다.

같은 물음에 두 답이 있다.

한 가지를 더 보아야 한다.

키퍼의 재료는 그가 가져온 것이다.
짚을 구해 와서 붙였다.

변시지의 재료는 그가 가져온 것이 아니다.
그는 유화 물감과 캔버스를 썼다.
서양에서 온 재료다.

일본에서 배운 방식이기도 하다.
오사카에서 익힌 손이 제주에서도 그대로 움직였다.

대신 그는 색을 바꾸었다.

물감은 사 온 것이지만 마른 풀잎색은 사 온 것이 아니다.
그 색은 섬에서 왔다.

재료를 바꾸지 않고 색을 바꾸었다.
물질을 옮기지 않고 물질의 이름을 옮겼다.

여기에 조건의 차이가 있다.

키퍼는 자기 땅에서 자랐다.
쓸 재료가 발밑에 있었다.

변시지는 다섯 살에 섬을 떠났다.
돌아왔을 때 그는 마흔아홉이었다.

손은 이미 다른 곳에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니 그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재료가 아니라 색이었다.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었다.

두 방식 사이에 우열은 없다.
가진 조건이 달랐을 뿐이다.

키퍼에게는 폐허가 있었고, 변시지에게는 바람이 있었다.

또 하나가 있다.

키퍼의 화면에는 사람이 잘 나오지 않는다.
땅과 건물과 이름이 나온다.

변시지의 화면에는 사람이 있다.
거의 언제나 있다.

노인 한 사람이 서 있다.

폐허를 그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없어진 것을 보여주는 방법.
남은 사람을 보여주는 방법.

키퍼는 앞쪽을 택했고 변시지는 뒤쪽을 택했다.

다섯

키퍼의 화면에서 짚은 언젠가 떨어질 것이다.

미술관은 그것을 막으려 애쓴다.
온도를 맞추고 습도를 맞추고 손대지 못하게 한다.

그래도 떨어질 것이다.

키퍼는 그것을 알고 재료를 골랐다.

변시지의 화면에서 마른 풀잎색은 떨어지지 않는다.
물감이니 남는다.

그러나 그 색이 가리키는 풀은 이미 없다.
그해 겨울에 마른 풀은 그해에 흩어졌다.

한쪽은 사라질 재료로 남는 것을 말했다.
다른 쪽은 남는 재료로 사라진 것을 말했다.

두 사람 다 없어지는 것을 오래 보았다.

큰 화면 앞에서 물러나 본다.

짚이 붙어 있다.
재가 깔려 있다.

밭에는 아직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다.

제15장 — 골즈워디, 그 자리에서 구한 것

하나

사진 한 장이다.

그림이 아니다.
사진밖에 없다.

가운데에 돌이 쌓여 있다.
알 모양이다.
아래가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진다.

접착제는 없다.
돌이 서로를 눌러 서 있다.

주위는 갯벌이다.
물이 빠진 자리다.

돌의 색과 갯벌의 색이 거의 같다.
같은 곳에서 나왔으니 같다.

사진 아래에 날짜가 적혀 있다.
장소도 적혀 있다.

이 두 줄이 중요하다.
작품의 제목이 사실상 날짜와 장소다.

그리고 이 돌은 지금 없다.

물이 들어와 무너뜨렸다.
그날 오후에 그렇게 되었다.

다른 사진도 있다.

땅바닥에 사람 모양이 남아 있다.
누운 자리다.

주위는 젖어 있고 그 자리만 말라 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 그가 누웠다.
그리고 비가 그치기 전에 일어났다.

젖지 않은 자리가 사람 형태로 남았다.

이것도 지금은 없다.
곧 말랐고, 마르면서 사라졌다.

또 다른 사진이 있다.

얼음 조각이 아침 햇빛에 붙어 있다.
고드름을 이어 붙여 곡선을 만들었다.

접착제 대신 물을 썼다.
얼려 붙인 것이다.

해가 올라오면 녹는다.
그래서 해가 뜨기 전에 만들었다.

작품의 수명이 몇 시간이다.

앤디 골즈워디는 1956년에 잉글랜드에서 태어났다.

요크셔 근처에서 자랐다.
소년 시절에 농장에서 일했다.

돌을 옮기고 울타리를 고치고 건초를 쌓았다.

그는 훗날 그 일이 자기 작업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반복되는 노동, 몸으로 익힌 순서, 계절에 맞춘 일감.

농사는 자연을 이기려는 일이 아니다.
자연의 순서에 맞추는 일이다.

씨는 정해진 때에 뿌린다.
그때를 놓치면 다음 해를 기다린다.

이 감각이 그의 작업에 남아 있다.

그가 자란 곳에는 돌담이 많다.
잉글랜드 북부와 스코틀랜드의 들판을 가르는 담이다.

접착제를 쓰지 않고 쌓는다.
돌의 모양을 보고 놓을 자리를 찾는다.

수백 년 된 담이 아직 서 있다.
무너진 곳은 그때그때 고쳐 쌓는다.

이 기술을 만든 사람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
그 땅에서 오래 반복된 방법만 남았다.

골즈워디는 이 전통 안에 있다.
새로 발명한 것이 아니라 이어받은 것이다.

담을 쌓는 사람은 예술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밭을 가르려고 쌓는다.

그런데 그 담이 그 땅의 형식이다.

돌이 많은 땅에서는 돌담이 나온다.
나무가 많은 땅에서는 나무 울타리가 나온다.

풍토가 형식을 낳는 가장 오래된 예가 담이다.

그림보다 담이 먼저였다.

미술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남부의 작은 마을로 갔다.

1980년대 중반이었다.
그때부터 그곳에 산다.

한 곳에 오래 머무는 작가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의 방식에 필요한 조건이다.

같은 땅을 여러 해 보아야 무엇이 언제 있는지를 안다.

어느 나무의 잎이 먼저 붉어지는지.
어느 개울이 언제 얼는지.
어느 돌담이 어느 계절에 무너지는지.

이것은 자료로 알 수 없다.
살아야 안다.

그는 대개 손으로 작업한다.
도구를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돌을 쌓을 때 균형이 무너지면 처음부터 다시 한다.
여러 번 무너진 뒤에 서는 경우도 있다.

무너지는 것도 작업의 일부다.

그의 작업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곧 사라지는 것이다.
얼음과 잎과 젖은 자리.

다른 하나는 오래 남는 것이다.
돌로 쌓은 담과 케언.

사라지는 것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남는 것도 계속 만든다.

사라짐만이 그의 주제는 아니다.
시간이 그의 주제다.

몇 시간의 시간과 몇백 년의 시간을 함께 다룬다.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골즈워디는 재료를 옮기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구한다.
그 자리에서 만든다.
그 자리에 둔다.

앞 장의 키퍼는 땅을 화면으로 옮겼다.
골즈워디는 화면을 땅에 두었다.

반대 방향이다.

이렇게 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다섯 가지가 달라진다.

첫째, 작품이 장소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 갯벌의 돌은 그 갯벌에서만 그 작품이다.
같은 돌을 미술관에 가져와 똑같이 쌓아도 다른 것이 된다.

빛이 다르고 물이 없고 냄새가 없다.

풍토가 작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배경이 아니라 재료다.

이 책의 명제가 여기서 가장 문자 그대로 성립한다.
풍토가 형식을 낳는다는 말이 비유가 아니게 된다.

둘째, 사라짐이 형식이 된다.

보통 작가는 작품이 오래 남기를 바란다.
재료를 고르는 기준에 내구성이 들어간다.

골즈워디는 그 기준을 뺀다.

얼음으로 만들면 녹는다.
잎으로 만들면 흩어진다.

녹고 흩어지는 것을 알고 만든다.

그러면 작품은 물건이 아니라 사건이 된다.
있었던 일이 된다.

셋째, 노동이 보인다.

돌 하나를 놓고 다음 돌을 얹는 일에는 시간이 든다.
그 시간이 결과에 남는다.

기계로 하면 빠르고 정확하다.
손으로 하면 느리고 조금씩 어긋난다.

어긋난 자리가 사람의 흔적이다.

넷째, 실패가 기록된다.

무너진 것도 사진으로 남는다.
그는 무너짐을 감추지 않는다.

완성만 보여주면 작품은 결과가 된다.
무너짐까지 보여주면 작품은 과정이 된다.

다섯째, 관객이 늦게 온다.

작품이 만들어질 때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개 혼자 만든다.

우리가 보는 것은 언제나 이미 지난 것이다.

회화는 그렇지 않다.
그림은 우리를 기다린다.

백 년 뒤에 가도 그 자리에 걸려 있다.

골즈워디의 작업은 기다리지 않는다.
먼저 사라지고, 우리는 나중에 도착한다.

늦게 도착하는 일에는 애도가 섞인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이 남는다.

작품은 사라지고 사진이 남는다.
그러면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사진을 작품으로 볼 것인가, 증언으로 볼 것인가.

이 물음에는 정답이 없다.
그는 사진 없이는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고, 사진만으로는 그 자리에 있던 것이 되지 않는다.

남는 것과 사라진 것 사이에 사진이 걸려 있다.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골즈워디가 자연 속에서 작품을 만들었다면, 변시지는 자연의 힘을 화면 안으로 불러들였다.

방향이 다르다.

골즈워디는 나가서 만든다.
변시지는 들여와서 그린다.

골즈워디의 작업은 그 땅을 떠날 수 없다.
변시지의 그림은 그 땅을 떠나 서울에도 걸리고 도쿄에도 걸린다.

그런데 떠나서도 섬을 데리고 간다.

이것이 회화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장소를 옮기면서 장소를 보존한다.

두 사람의 공통점을 보자.

둘 다 한 곳에 오래 머물렀다.

골즈워디는 스코틀랜드의 한 마을에 사십 년 가까이 산다.
변시지는 제주에서 서른여덟 해를 살았다.

1975년에 갔고 2013년에 세상을 떠났다.

오래 머물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형식이 있다.
두 사람이 그것을 증명한다.

머무름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한곳에서 나서 그곳에 남는 머무름.
떠났다가 돌아와 남는 머무름.

골즈워디는 앞쪽에 가깝다.
잉글랜드에서 태어나 스코틀랜드로 갔으니 완전히 앞쪽은 아니다.
그러나 같은 문화권 안의 이동이었다.

변시지는 뒤쪽이다.
다섯 살에 떠나 마흔아홉에 돌아왔다.

돌아온 사람의 눈은 다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본다.

골즈워디는 어느 나무의 잎이 먼저 붉어지는지 안다.
변시지는 그것을 몰랐을 것이다.

대신 그는 바람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곳에서 자란 사람은 바람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아는 것과 놀라는 것은 다르다.

골즈워디의 작업에는 아는 것이 쌓여 있다.
변시지의 화면에는 놀란 것이 남아 있다.

둘 다 오래 머물러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오래 머문 뒤에 남은 것이 다르다.

그리고 바람이 있다.

골즈워디는 바람에 기댄 적이 있다.
몸을 기울여 바람에 몸을 맡기는 작업을 했다.

바람이 그를 밀고 그가 버틴다.
그 사이의 어느 각도에서 몸이 멈춘다.

변시지의 노인이 바로 그 각도에 서 있다.

한쪽은 자기 몸으로 그 각도를 만들었다.
다른 쪽은 그 각도를 그렸다.

젖지 않은 자리도 그렇다.

골즈워디가 누웠다 일어난 자리에 사람 형태가 남았다.
사람은 없고 형태만 있다.

변시지의 화면에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얼굴이 없을 때가 많다.

멀리 있어서 없거나, 숙여서 안 보인다.

두 경우 다 특정한 누구가 아니다.
사람이 있었다는 것만 남는다.

차이도 분명하다.

골즈워디의 작업에는 슬픔이 없다.
사라지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변시지의 화면에는 슬픔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애도가 있다.

노인의 숙인 고개는 돌아오지 않은 이들에게 갖추는 예(禮)다.

이것은 해석이다.
다만 그림 앞에 오래 서 있으면 그렇게 읽힌다.

섬에는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그 일을 4·3이라 부른다.

화백은 구술에서 그 시절을 말했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구술사, 2004–2005, 241–243쪽)

골즈워디의 땅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사라짐은 자연의 사라짐이다.

변시지의 사라짐은 사람의 사라짐이다.

같은 물질성의 문 앞에 서 있어도, 무엇이 사라졌는지가 다르면 형식이 달라진다.

다섯

물이 들어온다.

돌이 하나 움직이고, 그다음에 여러 개가 움직인다.
쌓인 것이 흩어진다.

그는 물러서서 본다.
막지 않는다.

제주의 돌담도 물러서는 방식으로 서 있다.
빈틈으로 바람을 지나가게 한다.

막지 않고 통과시킨다.

두 사람은 서로를 모른다.
같은 것을 배운 적도 없다.

그런데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견딤은 버티는 것이 아니다.
지나가게 하는 것이다.

돌은 흩어졌고 갯벌은 그대로다.
다음 물이 빠지면 다시 쌓을 수 있다.

쌓을 수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을 쌓는다는 것은 다르다.

같은 것은 두 번 오지 않는다.

제16장 — 반 고흐, 물감의 두께

하나

「까마귀 나는 밀밭」이다.

1890년 7월,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그렸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이다.

작은 화면이다.
앞의 두 장에서 본 것과 크기가 다르다.
팔을 벌리지 않아도 다 보인다.

다만 옆으로 길다.
높이의 두 배가 넘는다.

그래서 눈이 좌우로 움직인다.
위아래로는 갈 곳이 없다.

이 비례가 이미 하나의 문장이다.
넓게 펼쳐진 것을 보게 하고, 올려다보지는 못하게 한다.

밀밭이다.
익은 밀이 화면의 아래쪽 절반을 채운다.

길이 밭 사이로 들어가다 끊긴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하늘은 어둡다.
파란색인데 무겁다.

검은 점들이 흩어져 있다.
새다. 까마귀다.

날고 있는지 떨어지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이제 옆에서 본다.

화면이 평평하지 않다.
물감이 산처럼 올라와 있다.

붓이 지나간 자리마다 두둑이 생겼다.
그 두둑에 지금 이 방의 빛이 걸린다.

작은 그림자가 생긴다.

그림자는 그려진 것이 아니다.
표면이 만든 것이다.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면 그림이 조금 달라진다.
빛을 받는 면이 바뀌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정지해 있지 않다.

밀의 노란색을 보자.
한 겹이 아니다.

아래에 다른 색이 있고 그 위에 노란색이 올라갔다.
아래 색이 사이사이로 보인다.

물감을 섞어 색을 만든 것이 아니라 색을 쌓아 색을 만들었다.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목사의 아들이었다.
여러 일을 했고 여러 곳에서 실패했다.

그림을 시작한 것은 스물일곱 무렵이다.
세상을 떠난 것은 서른일곱이다.

화가로 산 시간이 십 년이다.

이 십 년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앞쪽은 북쪽에서 보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

흐린 하늘, 낮은 빛, 젖은 땅.

그 시기의 화면은 어둡다.
갈색과 검은색과 흙색이 많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이 그 시기의 것이다.
등불 하나가 어두운 방을 겨우 밝힌다.

색이 어두운 것은 취향이 아니었다.
그가 본 빛이 그랬다.

북쪽의 광부와 농부는 어두운 곳에서 일한다.
그 어두움을 밝게 그리면 거짓이 된다.

뒤쪽은 남쪽에서 보냈다.

파리를 지나 남프랑스로 갔다.
아를이었다.

1888년이다.

빛이 달랐다.
북쪽에서 본 적 없는 빛이었다.

색이 올라갔다.
노란색과 파란색이 화면을 채웠다.

여기까지는 잘 알려진 이야기다.
북쪽의 어두움에서 남쪽의 밝음으로.

그런데 이 장은 다른 것을 보려 한다.

색만 바뀐 것이 아니다.
물감의 두께가 바뀌었다.

남쪽에서 그의 물감이 두꺼워졌다.

왜 그런가.

빛이 너무 세면 색만으로는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색은 표면에 얹히는 것이다.
빛이 세면 색이 날아간다.

그때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색이 아니라 표면이다.

두꺼운 물감은 스스로 요철을 만든다.
요철은 실제 빛을 받는다.

그리면 빛의 그림이 되고, 쌓으면 빛을 받는 물건이 된다.

그는 두 번째를 택했다.

아를에는 바람이 있다.
미스트랄이라고 부른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마르고 센 바람이다.
며칠씩 이어진다.

그는 밖에서 그렸다.
바람이 이젤을 넘어뜨렸다.

편지에 그 이야기가 남아 있다.
땅에 못을 박아 이젤을 고정했다고 썼다.

바람 속에서 그린 그림은 바람의 흔적을 갖는다.

붓질이 급해진다.
망설일 시간이 없다.

한 번에 긋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그래서 그의 선은 짧고 반복된다.
같은 방향으로 여러 번 긋는다.

이것은 성격이 아니라 조건이다.

바람 속에서 오래 붓을 대고 있을 수는 없다.

물감을 많이 썼다.
돈이 부족했다.

동생에게 물감을 보내 달라고 여러 번 썼다.

두껍게 그리는 일은 비싼 일이다.
그는 그 값을 치르면서 두껍게 그렸다.

그리고 두꺼운 물감은 잘 마르지 않는다.

마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화면을 쌓아 둘 수 없다.
운반도 어렵다.

물질이 삶의 조건을 바꾼다.

여기에 이 장의 논지가 있다.

반 고흐는 색의 화가로 읽혀 왔다.
아를의 노란색이 그의 이름과 함께 온다.

그런데 색은 절반이다.

나머지 절반은 두께다.

이 책이 그를 색 부가 아니라 물질성 부에 놓은 이유다.

키퍼는 땅을 화면으로 옮겼다.
골즈워디는 화면을 땅에 두었다.

반 고흐는 아무것도 옮기지 않았다.
그는 물감으로만 그렸다.

그런데 그 물감을 물질로 만들었다.

흙을 붙이지 않고 물감을 흙처럼 썼다.
잎을 붙이지 않고 물감을 잎처럼 세웠다.

같은 재료로 다른 일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네 가지가 달라진다.

첫째, 그림이 두 번 빛을 받는다.

한 번은 그려진 빛이다.
화면 안에 그린 해와 등불.

또 한 번은 실제 빛이다.
지금 이 방의 조명이 요철에 걸린다.

두 빛이 겹친다.

둘째, 시간이 표면에 남는다.

두꺼운 붓질은 지울 수 없다.
얇은 물감은 덧칠하면 사라지지만 두꺼운 물감은 흔적이 남는다.

그러니 한 번 그은 것이 끝까지 보인다.

망설임이 없는 화면은 망설일 수 없는 화면이다.

셋째, 그림이 사물이 된다.

평평한 화면은 창문에 가깝다.
그 너머를 본다.

울퉁불퉁한 화면은 벽에 가깝다.
표면에서 멈춘다.

멈추면 그림이 물건으로 보인다.

넷째, 풍토가 표면으로 나타난다.

남쪽의 센 빛과 센 바람.
그 두 가지가 두께를 요구했다.

빛은 표면을 요구했고 바람은 속도를 요구했다.

두꺼운 물감과 빠른 붓질.
그의 형식이 여기서 나왔다.

이것은 성격의 결과가 아니다.
조건의 결과다.

그를 뜨거운 기질의 화가로만 읽으면 이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기질은 어디서나 같다.
형식은 땅마다 다르다.

북쪽에서 그는 어둡고 얇게 그렸다.
남쪽에서 그는 밝고 두껍게 그렸다.

같은 사람이었다.
땅이 달랐다.

변시지의 화면 앞에 서 보자.

두 사람 다 바람 속에서 그렸다.

반 고흐는 미스트랄 속에서 이젤을 못으로 박았다.
변시지는 제주의 바람 속에서 그렸다.

그런데 대응이 다르다.

반 고흐는 바람에 맞섰다.
이젤을 고정하고 그렸다.
바람은 방해였다.

변시지는 바람을 들였다.
화면 안으로 불러들였다.
바람은 주제였다.

한쪽은 바람을 견디며 그렸고, 다른 쪽은 바람을 그렸다.

두께도 반대다.

반 고흐는 쌓았다.
물감을 올려 표면을 만들었다.

변시지는 말렸다.
색을 얇게 두어 마른 느낌을 남겼다.

마른 풀잎색은 두꺼울 수 없다.
마른 것은 얇다.

물감을 두껍게 올리면 촉촉해 보인다.
얇게 두면 말라 보인다.

그러니 얇음은 부족이 아니라 선택이다.

한쪽은 물질을 쌓아 빛을 받았다.
다른 쪽은 물질을 줄여 마름을 얻었다.

두 방식 다 물질성이다.
쌓는 것만 물질성이 아니다.

까마귀를 보자.

「까마귀 나는 밀밭」의 까마귀는 어두운 하늘에 있다.
검은 점으로 흩어져 있다.

변시지의 화면에도 까마귀가 있다.
낮게 지나간다.

둘 다 검은 점이다.
둘 다 소리가 없다.

그러나 자리가 다르다.

반 고흐의 까마귀는 위에서 다가온다.
하늘 쪽에서 사람 쪽으로 온다.

변시지의 까마귀는 낮게 있다.
사람의 눈높이 근처를 지난다.

여기서 조심할 것이 있다.

변시지의 화면에서 수평선 근처의 작은 검은 형태는 새가 아니다.
조각배다.

멀리 있는 것은 배이고, 가까이 낮게 지나는 것이 까마귀다.

이 구분을 놓치면 그림이 달라진다.
배는 떠남과 돌아옴이고, 까마귀는 곁에 있는 것이다.

시간의 길이도 다르다.

반 고흐는 십 년을 그렸다.
남쪽에서 보낸 시간은 두 해 남짓이다.

두 해 안에 형식이 완성되었다.

변시지는 예순여덟 해를 그렸다.
1945년의 습작에서 2013년의 마지막 그림까지.

제주에서만 서른여덟 해다.

한쪽은 짧게 태웠고 다른 쪽은 오래 견뎠다.

여기에 우열은 없다.
속도가 달랐을 뿐이다.

빠르게 낳는 풍토가 있고 느리게 낳는 풍토가 있다.

남프랑스의 볕은 즉시 온다.
받는 순간 안다.

제주의 바람은 즉시 오지 않는다.
여러 해 맞아야 안다.

볕은 강도로 오고 바람은 반복으로 온다.

그래서 하나는 두 해에 형식을 냈고, 다른 하나는 수십 해에 냈다.

마지막으로 하나가 남는다.

반 고흐는 남프랑스에서 이방인이었다.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그곳 사람이 되지도 못했다.

변시지도 돌아온 자리에서 이방인이었다.
태어난 섬이었지만 마흔네 해를 떠나 있었다.

두 사람 다 자기 땅이 아닌 곳에서 자기 형식을 낳았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떠났다가 닿은 땅에서만 그 땅이 보인다.
처음부터 있던 사람에게는 바람이 그냥 날씨다.

돌아온 사람에게 바람은 사건이 된다.

다섯

작은 화면이다.

물감이 두껍다.
밀은 익었고 하늘은 무겁다.

까마귀가 흩어져 있다.

빛을 옮기면 표면의 그림자가 옮겨진다.
그림이 조금 달라진다.

그러니 이 그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먼 곳의 다른 화면에서는 노인이 서 있다.
그쪽 화면은 얇고 말라 있다.

한쪽은 물감을 쌓아 빛을 받았다.
다른 쪽은 색을 말려 바람을 받았다.

둘 다 화면 밖의 것을 화면 안으로 들였다.

그것이 이 문의 물음이었다.

무엇으로 그리는가.

답은 하나가 아니었다.

종장 — 제주화, 바람이 언어가 될 때

1. 다시 언덕

언덕 위에 노인이 서 있다.

말 한 마리가 곁에 있다.
바다는 멀고, 바람은 가깝다.

화면은 마른 풀잎색이다.
수평선 가까이 조각배가 떠 있다.

까마귀 한 마리가 낮게 지나간다.

서장에서 우리는 이 언덕에 섰다.

그리고 열여섯 개의 언덕을 지나왔다.

멕시코의 마른 볕과 뉴멕시코의 맑은 공기.
노르웨이의 붉은 하늘.
제주의 가시울타리 안과 일본의 젖은 종이.
캐나다 서해안의 솟는 숲.
명말의 빈 종이와 호주의 넓은 흙.
잉글랜드의 물기와 런던의 만들어진 구멍.
지중해의 겹친 문법과 러시아의 낮은 지평선.
타히티의 분홍 땅.
독일의 재와 스코틀랜드의 돌과 프로방스의 두꺼운 물감.

이제 다시 여기다.

그림은 그대로다.

노인도 그대로고 말도 그대로다.
조각배도 그 자리에 있다.

그런데 다르게 보인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그림이 달라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열여섯 곳을 지나왔다.

비교는 대상을 바꾸지 않는다.
보는 사람을 바꾼다.

그것이 이 책이 한 일이다.

2. 지나온 것

열여섯 사람 가운데 넷은 반대 증인이었다.

그들의 증언을 다시 들어야 한다.

뭉크는 색이 안에서 나온다고 했다.

노르웨이의 겨울은 어둡고 그의 하늘은 붉었다.
땅이 준 색이 아니었다.

추사는 풍토를 차단해도 형식이 나온다고 했다.

여덟 해를 이 섬에서 보내고도 이 섬을 그리지 않았다.
그의 눈은 옛 글자에 있었다.

카푸어는 여백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계산하고 파고 칠하면 어느 땅의 것도 아닌 비움이 생긴다.

고갱은 가장 아픈 말을 했다.

그 땅에 살아도 그 땅의 문법이 나오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십 년을 살고도 가지고 간 문법으로 그렸다.

네 증언을 다 듣고 나면 명제가 작아진다.

풍토가 형식을 낳는다는 말이 모든 그림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래도 남는 것이 있다.

어떤 그림은 풍토 없이 설명되지 않는다.

설명하려 하면 빈 데가 생긴다.
왜 이 색인지, 왜 이 선인지, 왜 이만큼 비었는지를 말할 수 없다.

변시지가 그 경우다.

이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증명은 하나로 좁히는 일이고, 그림은 하나로 좁혀지지 않는다.

다만 보일 수 있다.

다섯 문을 다시 지나면서 보이려 한다.

3. 색 — 젖었다가 마른 것

1부에서 우리는 색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물었다.

타마요의 붉음에는 흙이 섞여 있었다.
오악사카의 마른 땅이 그 색을 주었다.

오키프의 색은 마른 공기에서 왔다.
습기가 없으니 색이 흐려지지 않았다.

마른 풀잎색은 그 둘과 다르다.

오키프의 마름은 처음부터 마른 것이다.

사막의 뼈는 젖은 적이 없다.
살이 없어진 뒤로 계속 말라 있었다.

마른 풀잎색은 젖었다가 마른 것이다.

제주는 습하다.
바다에 둘러싸여 있으니 그렇다.

그런데 바람이 세다.

바람이 세면 마른다.

젖으면서 마르는 땅이다.

이 모순이 그 색의 조건이다.

풀은 비를 맞고 자랐다.
여름에는 초록이었다.

그리고 바람에 말랐다.

그러니 그 색에는 두 시간이 들어 있다.

자란 시간과 마른 시간.

여름의 초록이 아니라 겨울을 지난 풀의 색이다.

죽은 색이 아니라 견딘 색이다.

이 색을 그는 찾았다.

훗날 구술에서 그 색을 어떻게 찾았는지 말했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구술사, 2004–2005, 293–294쪽)

찾았다는 말을 오래 보아야 한다.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다.

다섯 살에 섬을 떠났으니 몸에 없었다.
오사카에서 자랐고 서울에서 그렸다.

비원을 십 년 넘게 그렸다.
그때의 색은 단정하고 차분하다.

마흔아홉에 돌아와서 찾았다.

그래서 이 색은 유산이 아니다.
발견이다.

타마요는 그 색을 가지고 태어났다.
변시지는 그 색을 찾아냈다.

찾아낸 색에는 찾은 사람의 시간이 들어간다.

이름이 없다는 점도 보아야 한다.

황토색이 아니다.
노란색도 아니다.

기존의 이름으로 부를 수 없어서 새로 지어야 했다.

이름 없는 색은 그 땅에서만 만들어진다.

이름이 있는 색은 어디서나 살 수 있다.

4. 선 — 옆으로 눕는 것

2부에서 우리는 붓의 속도가 무엇이 정하는지를 물었다.

추사의 선은 돌에서 왔다.
칼이 돌을 파는 속도였다.

셋슈의 선은 젖은 종이에서 왔다.
번지기 전에 지나가야 했다.

에밀리 카의 선은 위로 갔다.
숲의 나무가 위로 자라기 때문이다.

변시지의 선은 옆으로 눕는다.

바람이 센 곳에서 나무는 눕는다.

바람이 오는 쪽 가지가 자라지 못한다.
나무는 제 몸으로 바람의 방향을 기록한다.

사람도 그렇다.

어깨가 기울고 고개가 숙는다.

그의 화면에서 인물은 자주 휘어 있다.

이 휘어짐이 언제부터 있었는가.

1945년의 누드 습작에 이미 있다.
2013년의 마지막 그림에도 있다.

예순여덟 해다.

한 곡선이 예순여덟 해를 이어졌다.

다만 뜻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노동의 몸이었다.

도쿄 시절의 습작과 〈Femme〉이 그렇다.
짐을 진 몸, 일하는 몸이 휘어 있었다.

서울에서는 지게꾼과 나무 패는 사람이 그 자리를 이었다.

제주에서는 마부와 해녀와 농사꾼이 되었다.

세 시기의 노동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노인이 나타난다.

노인의 몸은 짐을 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휘어 있다.

견딤의 몸이다.

일하는 몸이 견디는 몸으로 바뀐 것이다.

말년으로 갈수록 고개가 더 숙어진다.

그 숙임은 피로가 아니다.

예(禮)에 가깝다.

이것은 해석이다.

화백이 그렇게 말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하나는 사실이다.

형식이 예순여덟 해 동안 한 방향으로 갔다.

한 방향으로 오래 가면 그것은 습관이 아니라 문장이 된다.

5. 여백 — 두 겹으로 빈 것

3부에서 우리는 네 종류의 여백을 보았다.

팔대산인의 여백에는 물이 없었다.
없어서 빈 자리다.

윌리엄스의 여백은 같은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되풀이되어 빈 자리다.

터너의 여백은 지워져 있었다.
습기가 형태를 녹인 자리다.

카푸어의 비움은 만들어져 있었다.
설계된 자리다.

변시지의 여백은 어디에 속하는가.

보이지 않아서 빈 자리다.

바람이 있다.
그려져 있지 않지만 있다.

팔대산인의 여백은 없음의 여백이고 이 여백은 비가시의 여백이다.

제도가 없어진 자리와 자연이 보이지 않는 자리는 다르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가 더 있다.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의 자리다.

섬은 오래전 많은 사람을 잃었다.
그 일을 4·3이라 부른다.

화백은 구술에서 그 시절을 말했다.
(같은 기록, 241–243쪽)

그리고 제주에는 이어도 이야기가 있다.

바다 어딘가에 있다는 섬이다.
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그 섬에 관한 글을 손으로 남겼다.
(같은 기록, 23–26쪽)

그러니 그의 여백은 두 겹이다.

자연이 보이지 않아서 빈 것.
그리고 사람이 없어서 빈 것.

이 두 겹이 겹쳐 있다.

그래서 그 빈 자리가 밝지 않다.

터너의 여백은 밝았다.
빛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여백은 낮다.

없는 사람이 있는 여백은 밝을 수 없다.

노인의 숙인 고개는 그 여백을 향한 예다.

이것도 해석이다.

다만 그림 앞에 오래 서 있으면 그렇게 읽힌다.

6. 문법 — 하나와 하나

4부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디에 놓는가를 물었다.

피카소는 문법을 부수었다.
여러 문법이 겹친 땅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레비탄은 지평선의 높이 하나로 뜻을 정했다.
평평한 땅에서 정할 것이 그것뿐이었다.

고갱은 배치가 정확했으나 소속이 없었다.

변시지는 줄였다.

그의 문법은 세 요소뿐이다.

수평선 하나.
사람 하나.
그리고 나머지 여백.

때로 말이 더해지고 까마귀가 더해지고 조각배가 더해진다.

그 이상은 거의 없다.

왜 줄였는가.

부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겹친 땅에서는 부술 수 있다.
여러 개가 있으니 어느 하나에 매이지 않는다.

돌아온 섬에는 하나가 있었다.

바람이 하나이고 바다가 하나이고 수평선이 하나다.

하나뿐인 것은 부술 수 없다.
부수면 남는 것이 없다.

그러니 더 정확하게 놓는 쪽으로 간다.

줄이면 각 요소의 자리가 결정적이 된다.

셋만 있으면 하나를 조금 옮겨도 화면이 다 달라진다.

수평선의 높이가 뜻을 정한다.

높이면 바다가 넓어지고 낮추면 하늘이 넓어진다.

사람을 어디에 세우는가도 뜻을 정한다.

그의 노인은 대개 화면의 아래쪽에 있다.

그리고 가운데에서 조금 비켜서 있다.

정중앙에 두면 기념비가 된다.
비켜 두면 사람이 된다.

그리고 등을 보인다.

이것이 마지막 결정이다.

고갱의 인물은 우리를 본다.

정면으로 앉아 눈을 크게 뜨고 있다.
보여지기 위해 놓인 자리다.

그러면 우리는 관객이 된다.

변시지의 노인은 등을 보인다.

우리를 보지 않는다.
우리와 같은 방향을 본다.

그러면 우리는 관객이 아니게 된다.

그 사람 옆에 서게 된다.

같은 바람을 맞는 자리에 놓인다.

이것이 이 문법의 목적이다.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게 하는 것.

7. 물질성 — 얇게 두는 것

5부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그리는가를 물었다.

키퍼는 땅을 화면으로 옮겼다.
흙과 재와 납과 짚을 올렸다.

골즈워디는 화면을 땅에 두었다.
그 자리에서 구해 그 자리에 만들었다.

반 고흐는 물감 자체를 물질로 만들었다.
두께로 빛을 받았다.

변시지는 얇게 두었다.

세 사람은 더했고 그는 더하지 않았다.

이것을 부족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

마른 것은 얇다.

물감을 두껍게 올리면 촉촉해 보인다.
두께에는 습기의 느낌이 있다.

마른 풀잎색을 두껍게 칠하면 마른 풀잎색이 아니게 된다.

그러니 얇음은 색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다.

재료가 색을 배반하지 않게 한 것이다.

여기에 조건이 하나 더 있다.

그의 재료는 그 땅의 것이 아니다.

유화 물감과 캔버스를 썼다.
서양에서 온 재료다.

오사카에서 익힌 손이 제주에서도 그대로 움직였다.

키퍼는 발밑의 흙을 썼다.
골즈워디는 그 자리의 돌을 썼다.

변시지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

다섯 살에 떠났고 마흔네 해 뒤에 돌아왔다.
손은 이미 다른 곳에서 만들어져 있었다.

재료를 바꿀 수 없었다.

그래서 색을 바꾸었다.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었다.

이것도 견딤이다.

가진 것으로 하는 일에는 이름이 잘 붙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대개 사람이 하는 일이다.

8. 제주화라는 이름

이제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제주화라 부른다.

제주를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면 지역색이 된다.

서장에서 우리는 그것을 갈랐다.

지역색은 소재의 문제다.
그 땅의 사물을 그렸다는 뜻이다.

제주화는 소재의 이름이 아니다.
형식의 이름이다.

무엇이 그것을 성립시키는가.

다섯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한다.

젖었다가 마른 색.
옆으로 눕는 선.
두 겹으로 빈 여백.
하나와 하나의 문법.
마름을 지키는 얇은 표면.

이 다섯이 따로 있으면 특징이다.
함께 있으면 형식이다.

그리고 다섯이 다 같은 조건에서 나왔다.

바람이다.

바람이 풀을 말리고 나무를 눕히고 습기를 실어 가고 사람의 어깨를 기울인다.

하나의 조건이 다섯 자리에 나타나면 그것은 양식이 된다.

여기서 정직해야 한다.

한 사람이 만든 것을 양식이라 부를 수 있는가.

부를 수 있다.

다만 계보가 아직 짧다.

양식은 이어져야 양식이 된다.

한 사람에게서 끝나면 그것은 개인의 방식이다.
뒤에 오는 사람이 이어받으면 양식이 된다.

그 일은 이 책의 몫이 아니다.

이 책은 이름을 놓아 두는 데까지만 한다.

이름이 있으면 찾을 수 있다.
찾을 수 있으면 이어받을 수 있다.

9. 유배와 축복

이 책의 뿌리 문장은 이것이다.

삶은 유배요, 예술은 축복이다.

이 책을 지나오며 유배가 여러 번 나왔다.

추사의 유배는 제도가 내린 것이었다.
문서가 있고 기간이 있고 사면이 있었다.

팔대산인은 왕조를 잃었다.
속할 곳이 없어졌다.

레비탄은 도시에서 쫓겨났다.
이름이 있는 화가였는데도 그랬다.

고갱은 스스로 떠났다.
떠나고 돌아오고 다시 떠났다.

카푸어는 두 땅에 걸쳐 있다.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다.

변시지의 유배는 이것들과 다르다.

돌아온 자리에서의 유배다.

태어난 섬으로 돌아왔는데 이방인이었다.

마흔네 해를 떠나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말이 다르고 익힌 것이 다르고 아는 사람이 적었다.

그런데 더 갈 곳이 없었다.

돌아온 곳이 마지막 자리였다.

그래서 그의 유배에는 사면이 없다.

제도의 유배는 끝난다.
쫓겨난 사람은 돌아올 수 있다.
떠난 사람은 다시 떠날 수 있다.

돌아온 자리에서의 유배는 끝나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 것은 견디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가 남긴 말은 유배로 끝나지 않는다.

예술은 축복이다.

축복은 환희가 아니다.

기쁨이 넘치는 상태가 아니다.

견딤 뒤에 오는 빛이다.

그 빛이 무슨 색인가.

마른 풀잎색이다.

마른 풀은 죽은 것이 아니다.
겨울을 지난 것이다.

지나고 남은 것에 색이 있다.

그 색이 축복이다.

이 책의 명제와 이 문장이 여기서 만난다.

풍토는 형식을 낳는다.

그리고 그 형식이 견딤을 축복으로 바꾼다.

바람은 사람을 괴롭힌다.
그것이 유배다.

바람이 남긴 자리에서 색이 나온다.
그것이 축복이다.

같은 바람이 두 가지를 한다.

10. 바람이 언어가 될 때

바람은 말이 아니다.

소리를 내지만 뜻이 없다.

같은 소리가 되풀이될 뿐이다.

그런데 오래 맞으면 뜻이 생긴다.

사람의 몸이 그 뜻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나무가 한쪽으로 눕는다.
돌담에 구멍이 생긴다.
초가의 지붕을 새끼줄로 눌러 놓는다.
사람의 어깨가 기운다.

이것들은 바람이 쓴 글이다.

쓴 것은 읽을 수 있다.

읽을 수 있으면 언어다.

변시지가 한 일은 바람을 그린 것이 아니다.

바람은 그려지지 않는다.

그가 한 일은 바람이 남긴 것을 읽고 그것을 다시 쓴 것이다.

그래서 그의 화면은 번역이다.

바람의 말을 사람의 눈으로 옮긴 번역.

번역에는 원문이 있다.

그의 그림의 원문은 그 섬이다.

원문을 모르고도 번역은 읽힌다.
그러나 원문을 알면 다르게 읽힌다.

이 책이 하려 한 일이 그것이다.

원문 쪽으로 한 걸음 가는 일.

다시 언덕이다.

노인이 서 있다.
말이 곁에 있다.
조각배가 수평선 가까이 떠 있다.

까마귀가 낮게 지나간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 읽힌다.

그는 제주를 설명하지 않았다.
오래 바라보았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선 하나를 그었다.

그 선을 우리는 이제 읽을 수 있다.

읽고 나면 다시 조용해진다.

언덕에 노인이 서 있다.

바람이 지나간다.

부록 — 풍토 모더니즘의 지도

회화 밖에서

들어가며

이 책은 열여섯 사람을 지나왔다.

각자 자기 땅에서 자기 형식을 낳았다.

그런데 한 가지를 묻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는가.

터너가 영국의 습기를 그린다고 생각하며 그렸을 리 없다.
레비탄이 러시아의 지평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었을 리 없다.

풍토는 대개 모르는 사이에 들어온다.

그런데 아는 채로 들어간 사람들이 있다.

땅을 자기 과제로 삼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적어 두는 것이 이 부록이다.

그리고 하나를 더 적는다.

이 일에는 그늘이 있다.

그 그늘을 먼저 말하지 않으면 나중에 그 자리에서 무너진다.

하나 — 세 층위

풍토와 형식의 관계는 한 가지가 아니다.

세 층위로 나뉜다.

첫째, 배어든 경우.

본인은 의식하지 않는다.

그 땅에서 나고 자랐고 그 빛만 보았다.
다른 빛을 모르니 비교할 것이 없다.

터너와 레비탄과 셋슈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의 대부분이 이 층위다.

둘째, 과제로 삼은 경우.

한 사람이 땅을 고른다.

그리고 오래 파고든다.

선언하지는 않는다.
그저 계속한다.

이 층위는 자각이 있으나 강령이 없다.

셋째, 강령이 된 경우.

여럿이 모여 선언한다.

우리는 이 땅의 미술을 세운다고 말한다.
글을 쓰고 운동을 만든다.

가장 힘이 세고 가장 위험하다.

이 부록은 둘째와 셋째를 본다.

둘 — 건축에는 이미 이름이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를 인정해야 한다.

회화가 하려는 일을 건축이 먼저 했다.

이름도 먼저 얻었다.

1981년에 두 사람이 한 용어를 처음 썼다.
알렉산더 초니스와 릴리안 르페브르다.

「격자와 길」이라는 글에서였다.

두 해 뒤 케네스 프램튼이 같은 말을 조금 다른 뜻으로 다시 썼다.
1983년의 글이다.

비판적 지역주의라고 부른다.

프램튼의 글은 한 물음으로 시작한다.

폴 리쾨르에게서 가져온 물음이다.

어떻게 현대적이 되면서 동시에 근원으로 돌아갈 것인가.

이 물음이 이 책의 물음과 같다.

그다음 논지는 이렇다.

세계 어디에나 같은 건물이 서고 있다.
유리와 철로 만든 상자들이다.

그것이 국제양식이다.

그 균질함에 저항해야 한다.

그런데 옛 지붕을 흉내 내는 쪽으로 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향수이지 저항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저항하는가.

빛으로, 지형으로, 바람으로, 손에 닿는 감촉으로 저항한다.

프램튼은 이 대목에서 하이데거를 인용했다.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이다.
1954년의 글이다.

거기서 한 문장을 가져왔다.

경계는 무엇이 멈추는 자리가 아니라 무엇이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하는 자리다.

이 책이 서장에서 지나간 자리와 같다.

그리고 3부에서 우리가 여백을 두고 한 말과도 같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회화에서 물으려는 것을 건축은 사십 년 전에 물었다.

이 사실은 이 책에 불리하지 않다.

오히려 발판이 된다.

새 개념을 세우면 증명할 것이 많다.
이미 있는 계보 옆에 서면 위치가 바로 잡힌다.

여기에 속하는 이름들을 적어 둔다.

알바르 알토, 핀란드.
요른 웃손, 덴마크.
루이스 바라간, 멕시코.
제프리 바와, 스리랑카.
리파트 차디르지, 이라크.
스베레 펜, 노르웨이.
발크리슈나 도시와 찰스 코레아, 인도.
페터 춤토어, 스위스.

한 사람만 더 본다.

글렌 머컷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집을 지었다.

그는 그 땅을 가볍게 딛는다고 말했다.

땅을 깎지 않고 그 위에 얹었다.
바람이 지나가게 두었다.

제주의 돌담과 같은 생각이다.

막지 않고 지나가게 한다.

두 곳에서 같은 답이 나왔다.

셋 — 과제로 삼은 사람들

둘째 층위다.

이 자리가 이 책과 가장 가깝다.

아므리타 셰르길

1913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인도 사람이고 어머니는 헝가리 사람이었다.

파리에서 그림을 배웠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에콜 데 보자르에 있었다.

그리고 1934년 말에 인도로 돌아갔다.

돌아간 뒤 그림이 바뀌었다.

파리에서 쓰던 색이 인도에서 맞지 않았다.

그는 마을을 다녔다.

1937년에 아잔타의 벽화를 보았다.

색이 낮아지고 형태가 단순해졌다.

스물여덟에 죽었다.

짧은 생애였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이 있다.

배우러 나갔다가 돌아와 색이 바뀌었다.

이 곡선이 낯설지 않다.

셋슈가 그랬고 변시지가 그랬다.

다만 셰르길은 더 일찍 갔고 더 일찍 떠났다.

요하네스 캬르발

아이슬란드 사람이다.

그는 용암을 그렸다.

그 땅에는 나무가 적다.
대신 굳은 용암과 이끼가 있다.

아무도 그리지 않던 것이다.

그는 평생 그것을 그렸다.

땅이 준 것 중에 가장 볼품없는 것을 골라 평생의 대상으로 삼았다.

프레드 윌리엄스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이다.

그는 그 대륙이 평평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유럽의 풍경화에는 지평선과 앞과 뒤가 있다.
그 대륙에는 없다.

그래서 그는 지평선을 위로 밀어 올리거나 아예 없앴다.

나무 한 그루씩을 점처럼 흩어 놓았다.

그림이 지도처럼 보인다.

그 땅이 실제로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넷 — 강령이 된 경우

셋째 층위다.

여기서부터 힘이 세지고 그늘도 짙어진다.

캐나다, 일곱 사람의 모임

1920년 무렵이다.

일곱 사람이 모였다.

그들은 캐나다 미술이 유럽을 흉내 내고 있다고 여겼다.

북쪽으로 갔다.

호수와 바위와 침엽수를 그렸다.

강한 색과 굵은 선을 썼다.

그리고 이것이 캐나다의 미술이라고 말했다.

성공했다.

지금도 캐나다에서 그 그림들은 국민적이다.

에밀리 카를 알아본 것도 그들 중 한 사람이다.

남미, 뒤집힌 지도

호아킨 토레스-가르시아는 우루과이 사람이다.

유럽에서 오래 지내다 돌아왔다.

1934년에 그는 지도를 하나 그렸다.

남미를 거꾸로 놓은 지도다.

남쪽이 위로 갔다.

그는 말했다.

우리의 북쪽은 남쪽이라고.

작은 그림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이 강령이 되었다.

일본, 무명의 손

야나기 무네요시가 있었다.

그는 이름 없는 장인들이 만든 물건을 모았다.

밥그릇과 옷과 소반 같은 것들이다.

민예라고 불렀다.

그 물건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이름을 남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역의 흙과 지역의 손이 만든 것들이다.

이 생각에는 힘이 있다.

그런데 뒤에 볼 그늘도 여기서 나온다.

오스트레일리아, 사막의 회화

1971년에 한 학교에서 시작되었다.

파푸냐라는 곳이다.

제프리 바던이라는 교사가 있었다.

그가 아이들에게 벽화를 그려 보라고 했다.

그것을 본 마을의 어른들이 붓을 들었다.

원주민 화가들이 물감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전에는 모래와 몸에 그렸다.

화면은 점으로 채워졌다.

위에서 내려다본 것 같기도 하고 지도 같기도 하다.

서양 사람들은 그것을 추상이라고 불렀다.

틀렸다.

그것은 추상이 아니다.

땅의 구조다.

물길과 야영지와 이야기가 지나간 길이 그대로 화면이 되었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닮아 보이는데 출처가 다른 경우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와 화면이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하나는 화가의 몸짓에서 나왔고 다른 하나는 땅에서 나왔다.

이 책이 단색화와 변시지를 놓고 말한 것과 같은 구조다.

닮은 화면이 같은 뿌리를 뜻하지 않는다.

이집트, 흙으로 지은 집

하산 파티가 있었다.

그는 콘크리트 대신 흙벽돌로 지었다.

그 땅에 있던 재료다.

값이 싸고 더위를 막아 준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집을 지으려 했다.

성공한 부분도 있고 실패한 부분도 있다.

다만 물음은 분명했다.

이 땅의 재료로 이 땅의 집을 지을 수 있는가.

다섯 — 그늘

이제 어려운 자리다.

풍토를 강령으로 삼으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자리가 있다.

땅을 말하면 소속을 말하게 된다.

소속을 말하면 누가 속하고 누가 속하지 않는지를 말하게 된다.

그러면 배제가 따라온다.

세 가지를 적는다.

하나.

일곱 사람이 그린 북쪽에는 사람이 없다.

빈 땅이다.

그런데 그 땅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

비어 있다고 그린 것이 문제가 되었다.

지금도 논의 중이다.

둘.

민예의 눈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눈이 식민지의 물건을 볼 때 어떤 자리에 서 있었는지는 다른 문제다.

보는 사람과 보이는 사람 사이에 힘의 차이가 있었다.

이것도 논의 중이다.

셋.

가장 나쁜 경우가 있다.

피와 흙이라는 말이 있었다.

땅과 핏줄을 하나로 묶은 말이다.

그 말이 어디로 갔는지 우리는 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야 한다.

풍토는 사람을 묶는 데 쓰일 수 있다.

그때 풍토는 조건이 아니라 소유가 된다.

조건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소유는 주인을 정한다.

이 책은 풍토를 조건으로 쓴다.

소유로 쓰지 않는다.

이 구분을 놓치면 이 책은 위험해진다.

여섯 — 선언하지 않은 사람의 자리

여기서 변시지를 다시 본다.

그는 어느 층위에 있는가.

첫째는 아니다.

그는 다섯 살에 섬을 떠났다.
색이 몸에 없었다.

마흔아홉에 돌아가기로 정했다.

그것은 선택이었다.

셋째도 아니다.

그는 모임을 만들지 않았다.
글로 강령을 쓰지 않았다.

우리의 미술을 세우자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러니 둘째다.

혼자 정하고 오래 계속한 사람이다.

삼십팔 년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가 드러난다.

선언하지 않은 것이 그를 지켰다.

선언하면 대표하게 된다.

대표하면 대표되지 않는 사람이 생긴다.

그는 누구를 대표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러니 누구를 지운 적도 없다.

그의 화면에 있는 것은 한 노인이다.

제주 사람 전체가 아니다.

한 사람이다.

싸우지 않는 미학은 소극성이 아니었다.

그것이 그를 그늘에서 벗어나게 했다.

맺음

지도를 그려 보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이 물음은 한 사람의 물음이 아니었다.

핀란드에서, 인도에서, 우루과이에서, 아이슬란드에서, 이집트에서.

같은 물음이 각각 일어났다.

이 땅의 것으로 이 시대의 것을 만들 수 있는가.

답은 저마다 달랐다.

건물이 된 곳도 있고 그릇이 된 곳도 있고 그림이 된 곳도 있다.

강령이 된 곳도 있고 조용히 넘어간 곳도 있다.

변시지는 조용한 쪽이다.

그는 아무것도 세우지 않았다.

다만 섬으로 갔고 오래 있었다.

그리고 색을 하나 찾았다.

지도 위에 점을 하나 찍는다면
그 점은 소리를 내지 않을 것이다.

풍토는 형식을 낳는다
세계 회화의 다시 읽기

byunshiji.org